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한국 작품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난타다. 또 난타하면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것이 송승환이다.
그런 타악 퍼포먼스 난타가 8월7일 막을 내렸다. 뮤지컬 본거지인 오프브로드웨이에 국내 공연 사상 처음으로 전용극장을 마련하고 장기 공연에 들어간 지 1년 6개월만의 일이다.
‘막을 올리자마자 곧 내리겠지’라던 당초 예상을 보란 듯이 깨뜨렸다. 난타의 마지막 커튼 콜의 흥분과 아쉬움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 난타를 제작한 PMC프로덕션의 송승환(48) 대표를 만났다. 세월이 약이라고, 얼마간의 시간이 차분한 결산을 가능케 만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였다.
“난타는 경제적으로 보면 적자입니다. 1년 반 동안 30만 달러 손해를 봤습니다. 초기 투자비용은 100만 달러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확신합니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1년 6개월이나 공연했다는 것 자체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성공입니다. 홍보나 광고 효과가 생각 이상입니다. 결코 밑진 것이 아닙니다.”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이 리뷰 기사를 실었고, NBC ABC 등 영향력 있는 방송들도 공연을 소개했다. 한국에 온 미국인들이 난타 포스터를 금방 알아보거나, 끝임 없는 미국 언론사들의 취재 요청도 이를 뒷받침한다.
난타는 ‘쿠킹(Cookin)’이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3월 400석 규모의 미네타 레인 극장에서 시작했다. 그 동안 회당 평균 280명, 총 15만 여명이 난타를 관람했다.
초반에는 현지 관객이 많아 매주 5만달러씩 흑자를 봤다. 브로드웨이에서 장기 공연을 하려면 외국 관광객을 잡아야 한다.
뉴요커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광객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을 선택한다. 관객 중 관광객 비중이 10~15%로 낮은 것이 부담이 됐다. “일종의 마케팅 비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각·청각·후각 자극하는 비언어 작품
난타의 성공 요인에 대해 물었더니, ‘말이 없기 때문’이라고 즉답했다. 난타는 4명의 배우가 등장해 실제로 불고기를 굽는 등 요리를 하는 시각 청각 뿐 아니라 후각까지도 자극하는 작품이다. “두드린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 연극에도 있습니다.
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듬은 사물놀이를 차용했고, 배우들은 세계 공통인 요리사 옷을 입었습니다. 독특함과 보편성이 잘 어울린 것입니다.”
우리 식 리듬에 누구나 관심을 갖는 요리를 접목시킨 넌버벌(비언어) 퍼포먼스가 뉴요커 등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이다.
난타는 송 대표의 아이디어다. 연극이 밤낮 국내에만 머물러 있고, 비싼 돈을 주고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데, 해외로 진출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했다.
첫번째 장벽은 언어였다. 언어가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사물놀이를 떠올렸고, 사물놀이가 두드리는 것이어서 주방을 생각했다.
또 연극은 생활을 소재로 해야 한다는 점도 가세했다. 그러다 보니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사물놀이 리듬을 이용해 보여주는 연극’으로 생각이 모아졌다. 난타는 그렇게 탄생했다.
“난타는 공동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컨셉만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연습과정에서 배우와 스탭 등 모든 관계자들의 의견을 모았습니다.
해외 진출을 위해 외국인 연출자 3명을 초빙해 수정하고 보완했습니다. 1997년 10월 호암아트홀에서 첫 막을 올렸죠.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일회성이 안되게 계속 업 그레이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난타의 뉴욕 성공에는 국내의 탄탄한 기반이 밑받침이 됐다. 2000년 7월 서울 중구 정동에 국내 최초로 난타 전용관을 개설했다.
처음에는 무리라며 주위에서 말렸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대 성공이었다. 지난 5년간 총 4,300 여회를 공연해 110만명 가까이가 관람했다.
매출액은 290억원에 이른다. 특징적인 것은 관객 중 외국인이 80% 정도를 차지하며, 그 중에서도 일본인이 절반 가량이다.
마케팅의 중점을 관광객에게 둔 것이 적중했다. 국내 관객만으로 상설 공연장을 매일 채운다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객석 점유율이 100%에 가깝다.
또 때밀이 서비스나 쇼핑, 음식과 술이 위주였던 관광 코스를 탈피해 관광 대상을 다양화하는 한편 한국 무대예술의 참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의욕도 있었다.
일본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직접 일본 여행사를 찾기도 했고, 2000년부터 5년 동안 매년 도쿄 오사카 나고야 센다이 후쿠오카 등 일본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했다. 이제 난타는 일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됐다.
문화적 다양성 체득한 뉴욕생활
송 대표는 한창 잘 나가던 20대 말인 1985년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뉴욕으로 향했다. “미국 영화나 뮤지컬을 듣고 보고 하면서 갈수록 심해지는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습니다.
또 8살 때부터 연극을 시작해 너무 지쳐 쉬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당시 그에게 브로드웨이는 너무 높고, 접근하기 힘든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보다 못한 연극도 있구나’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우리 연극도 잘 만들면 얼마든지 진출할 가능성이 있겠구나 하는 것도 동시에 느꼈다.
그런 연극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뉴욕 생활에서 배운 가장 큰 것은 문화의 다양성입니다. 국내에서 했던 연극만이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performance’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는데, 국내에서는 이를 실험예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모든 창작행위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인데, 잘못된 것이었죠.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난타는 그러한 경험의 바탕 위에서 만들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송 대표는 귀국 후 첫 극단을 조직하면서 명칭을 ‘환 퍼포먼스’라고 했다. 스폰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난타는 브로드웨이에서 완전 철수한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다시 도전할 계획이다. “현재 라스베이거스의 몇 개 호텔과 협상 중입니다.
전망은 밝습니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보다는 공연 성향의 도시입니다. 도박장은 비어도 밤 공연장은 항상 가득찹니다.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공연을 즐기는 것 입니다. 난타가 미국에서 패밀리 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크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송 대표는 난타 이후 UFO라는 작품으로 브로드웨이를 겨냥하고 있다. 춤과 무술 등이 주도하는 비언어 연극이다.
난타의 세계 진출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할 예정이다. 재작년에 국내에서 선을 보였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아 많이 수정했다.
송 대표를 말하면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문화산업 최고 경영자(CEO)로서의 그다. 연극의 산업화와 수출화에 누구보다도 본격 나서고 있다. 교포 위문공연이나 정부 홍보 차원의 공연, 초청 공연 등을 제외하고 수익을 목표로 한 해외 진출 공연은 난타가 처음이다.
“사명감에서 한 것만은 아닙니다. 철저한 상업행위입니다. 연극은 돈이 들어가는 예술입니다. 그러나 국내 시장만으로는 투자자본의 회수가 안됩니다.
수지를 맞추려면 시장을 키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해외 진출은 당연한 수순으로 봐야 합니다. 난타 전용극장의 성공도 따지고 보면 해외로 눈을 돌린 결과로 얻은 것입니다.”
공연계 해외시장 개척, 가능성 무궁무진
문화 산업 수출에 대한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그 동안 우리 연극계는 시야가 너무 좁았습니다. 현재 대기업들은 해외 시장 개척으로 대기업이 됐습니다.
공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세계지도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정말 조그맣구나’라고 느낍니다.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극장이 있습니다.
작품이 부족하지 극장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언어 장벽이 있는 미국 시장에서는 비언어 작품으로, 자막에 익숙한 동남아와 중국, 일본 등에서는 뮤지컬로 승부를 걸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을 겨냥한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다.
아이디어와 맨 파워만으로도 가능한 문화산업은, 바로 그 점 때문에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화적 재질이 있습니다.
한류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식의 변화와 체계적 지원입니다. 예전에는 연극을 한다면 ‘딴따라’라며 집안에서 말렸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끼를 살리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서울대를 비롯해 연대와 고대 등에 연극영화과가 생겨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적 인식이 변합니다.”
정부 지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예산을 많이 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정된 예산, 있는 돈을 우선 효율적으로 써야 합니다. 수 많은 지방 문화극장을 봅시다.
대리석으로 잘 지었지만,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 보니 예식장이나 예비군 훈련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질이 낮거나, 홍보성이 짙은 작품에 대한 지원도 물론 없어져야 합니다.”
그는 스테이지 쿼터제를 주장한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등 괜찮은 무대는 브로드웨이 작품들이 장기간 독점하고 있다.
창작 작품은 선보일 공간이 없다. 창작물은 검증이 안돼 흥행 위험이 커 자연히 대관을 꺼리게 된다. 그래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 상황이면 무대예술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 되어 예술에 있어서의 빈익빈 부익부 상태는 갈수록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인다. ‘문화는 전 국민이 누릴 권리다’라는 명제는 사문화하고 만다는 것이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초대형 외국 뮤지컬 수입에 대한 비판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 작품은 로열티가 비싸 최소한 8개월을 공연해야 로열티를 지급할 수 있다.
그럴수록 국내 작품이 설 자리는 좁아진? 하지만 그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한국 영화를 10년 전과 비교해 보십시오. 지금 상황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뮤지컬이나 연극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는 한국 영화의 성공 요인을 할리우드 영화에서 느낄 수 없는 한국적 정서를 잘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경찰의 비리를 다룬 ‘투 캅스’를 예로 들었다. 결국 이야기는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관건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으로 모아진다.
영화 <조선발명공작소> 기획·준비중
그가 공동 대표로 있는 PMC의 P는 퍼포먼스(Performance), M은 뮤지컬(Musical), C는 영화(Cinema)를 말한다. 이 중에서 영화가 상대적으로 부진하다.
“2002년 처음 제작한 ‘굳세어라 금순아’가 실패한 후 조심스러워졌습니다”는 그는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을 소재로 한 코미디 ‘ 조선발명공작소’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연기를 천직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제작 일도 놓을 수가 없다. 평생 무대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브로드웨이 난타 공연 소감을 물었다. 뿌듯함과 아쉬움이 각각 절반 씩이라고 했다. 1년 6개월이나 했다는 것이 뿌듯하고, 좀더 오래갔으면 하는 것이 아쉬움이라는 것이다
이상호 편집위원 s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