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 11. 12. 10:17
■경주이씨 판전공파 파조(派祖)의 벼슬에 대한 고찰(考察)
판전공(判典公)의 휘(諱)는 강으로 중시조(中始祖), 소판공(蘇判公)으로 부터 14세손(世孫)이요. 열헌공(悅軒公)의 둘째 아우이니 성암(誠庵), 동암(東庵), 송암(松岩)공의 숙부(叔父)로, 이암(怡菴), 익재(益齋), 국당(菊堂), 부정(副正), 상서(尙書)공 등의 종조부(從祖父)가 되신다.
공(公)의 형수인 김해 김씨는 성암공, 동암공, 송암공, 삼형제 등을 공부시켜 과거에 급제시킨 현모(賢母)로서 당시 고려는 물론 오늘날 우리 후손들 까지 모르는이 없을만큼 유명한 위인 할머니로서. 당시 익재공의 아버지 동암과, 국당공의 아버지 송암, 두형제분을 임금이 직접 치르는 친시(親試)에서 함께 급제 함으로서, 천장 급제라는 대 호평(大好評)을 받으며 금으로 만든 황패를 받았던 일들은 물론 당사자 들의 재주도 있어야 했겠지만 글을 가르친 스승이 주목 받지 않을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 스승이 다름아닌, 판전공의 형수이며 판전공 또한 형수분의 가르침을 받아, 정순 판전객시사(正順 判典客寺事)라는 벼슬에 올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판전공에 대한 기록이 족보(族譜)에는 미흡하여 많은 종인들이 궁금함을 금치못하나 고려의 관직, 문관(文官)의 품계(品階)에 의하면 정순대부(正順大夫)는 정3품(正三品)의 당상관(堂上官)으로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재위(在位) 34년이 되는 1308년에 여러 관제(官制)를 고치면서 새로이 제정(制定)되었던 사실(事實)을 알수있다.
당시의 품계를 살펴보면
정일품(正一品) 삼중대광(三重大匡)
종일품(從一品) 중대광(重大匡)
정이품(正二品) 광정대부(匡靖大夫)
종이품(從二品) 통헌대부(通憲大夫)
정삼품(正三品) 정순대부(正順大夫) 봉순대부(奉順大夫)
종삼품(從三品) 중정대부(中正大夫) 중현대부(中顯大夫)
정사품(正四品) 봉상대부(奉常大夫)
종사품(從四品) 봉선대부(奉善大夫) 순으로 기록되 있고 전객시(典客寺)라는 관사(官司)는 외국 사신의 영접 또는 종실(宗室)과 재상(宰相)의 중요 행사를 주관한 오늘날 의전실(儀典室)과 같은 곳으로 공(公)께서 정삼품의 판사(判事)이시니 지금의 의전실장(儀典室長) 직(職)에 계셨던 것이다.
아울러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위해 고려의 관작 변천 사항을 열거해 보면 고려 초기에는 예빈성(禮賓省)이라 했는데 그후 예빈시(禮賓寺)로 고쳤고 제25대 충렬왕(忠烈王: 1274-1308) 24년에 예빈시(禮賓寺)를 전객시(典客寺)라 했고 제31대 공민왕(恭民王, 1351-1374)때는 다시 예빈시(禮賓寺)라 했다가 재위 11년에 다시 전객시(典客寺)라 바꾸었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恭讓王) 2년에 예빈시(禮賓寺)라 개칭 하였으니 당시의 연대수를 살펴보면 판전공 께서는 고려 제23대 고종(高宗)때, 태어나셔서 24대 원종(元宗)대 부터 문하평리를 지내신 맏형 열헌공(悅軒公)과 금교 대장을 지낸 방열공(方烈公)과, 상서 좌승을 지낸 숙진공(淑眞公)과 함께 벼슬에 올라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이르러 동반(東班) 벼슬인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자리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첫째 고려 왕조에 전객시(典客寺)라는 관사(官司) 명칭을 그때 처음으로 고쳤으며 또한 공(公)의 연세가 상당히 많아셨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당시 밀직승지(密直承旨)로 계셨던 동암공(東庵公: 익재공의 아버지)은 공(公)의 큰집 둘째 조카되시는 분이며 충렬왕 13년(1287)에 동암공의 춘추[나이] 44세에 익재공이 태어 나셨으니 공은 익재공의 종조부가 되시고 동암공의 막내 삼촌이 되심으로 그시절 조혼(早婚)의 관례로 보아 동암공 보다 나이 13세 연상이 되리라 본다면 판전공 께서 충렬왕으로 부터 교지를 받으신 해가 충렬왕 24년(1298)인 공(公)의 나이 68세로 추정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공의 관직(官職)이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 기록된 원인을 살펴보면 고려 관직에 예를 들어 감사(監事), 판사(判事), 지사(知事), 동지사(同知事),등의 관직은 관사(官司), 위에 감(監), 판(判), 지(知), 동지(同知),자(字)를 두고 " 사(事) " 는 관사(官司)밑에 썼는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예)
판문하성사(判門下省事)-------문하성 판사
감춘추관사(監春秋舘事)-------춘추관 감사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전객시 판사
지추밀원사(知樞密事)---------추밀원 지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중추부 동지사,
이렇게 위의 (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무처와 직위를 한꺼번에 나타내어 사용했던 것이다.
그럼으로 공(公)은 정순공(正順公), 또는 판사공(判事公)이라 칭함이 옳을진데 원인은 알수 없으나 오래전부터 판전공(判典公)이라 표기하여 받들어 왔던 것이다.
다시 판전공 께서 어느시대 분이시고 어떠한 품계와 관직에 계셨는지를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위해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순대부 판전객시사(正順大夫 判典客寺事) 관직의 사용연데
[시대(時代)] 고려 충렬왕
[품계(品階)] 정순대부(正順大夫: 堂上官)
[관사(官司)] 전객시(典客寺: 지금의 의전실)
[직위(職位)] 판사(判事: 지금의 의전실장)
끝으로 공의 아드님이 신유(臣裕)이시니 고려 26대 충선왕 2년(1310)에 새로 제정한 종2품(從二品)인 봉정대부(奉靖大夫)에 올랐으며, 후(後)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셨으니 그때 의부(儀部)를 예의사(禮儀司)로 개칭, 분사(分司)하여 판서(判書)를 으뜸으로 하고 보조 기관으로 전향사(典享司), 전객시(典客寺)등이 있었으니 오늘날 외무부와 문교부 장관에 해당한다. <끝>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