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과 뉴에이지운동
1.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 nism)이란 무엇인가?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정의는 마치 뉴에이지 운동에 관한 것과 같이 무
어라 한마디로 딱 설명하여 정의내리기 어렵다. 범위도 광범위할 뿐더러 이것의
특징 자체가 그 무엇이든 간에 그 어떤 규범이나 장르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
려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에 대해 무어라 어떤 분명한 정의를 내린다
면 이미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참 의미를 잃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주로 철학부분에서 출발된 것이지만,
단순히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대 예술 문학 건축 등을 비롯한 현대문화 전
반에서 서로가 비슷한 특징들을 가지고 대두되기 시작한 하나의 시대적 흐름이
라고 볼 수 있겠다. 데카르트의 철학사상을 기초로 한 근대 합리주의와 경험주
의의 출현과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형성된 서양의 근 현대문화 주체를 근본적으
로 다시 반성하고 전통적인 지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운동으로, 이것은
궁극적으로 근대화 산업화 과학기술화 등으로 대변되는 서구적인 삶의 양식을
탈피하여 이른바 분석보다는 총체적 체험, 인간중심주의보다는 자연중심주의,
획일과 동일보다 다양과 원용, 효율성과 업적보다는 삶의 연대성과 공존을 동양
적 지혜를 통해 다시 찾아보려는 몸부림이라 하겠다.
2 . 포 스 트 모 더 니 즘 을 통 해 보 는
뉴 에 이 지 운 동
뉴에이지 운동의 기본정신은 인간의 힘으로 이 땅위에 사랑과 평화와 번영
과 일치를 추구해 새로운 세대(New Age Generation)를 통해 새로운 시대(New
Age Period) 안에서 새로운 인간의 행복을 이루겠노라는 참으로 숭고한 정신이
다. 다만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인간 자신들이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예
수없이(Without Jesus)"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만이 생명과 진리
의 길(요 14:6)이라고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생각의 정신
인 것이다. 이는 영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육적인 혼의 힘으로 하려 하기 때문
이다(슥 4:6).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런 점에서 위와 같은 뉴에이지의 기본정신을 수용하
고 있어 우리의 경각심을 필요로 하게끔 한다.
첫째, 포스트 모더니즘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적 질서를 부정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고정관념
의 틀에서 탈피해야 한다. 우리가 그 어떤 사물을 대하게 될 때 그 사물에 대해
이미 갖고 있는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사물의 실체를 접하지 못한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전 한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젊음들을 사로잡았
던 히피족들의 사고방식과 흡사하다. 사실 히피족들의 생태는 과학적 합리주의
와 객관적 명증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는 현대문화 자체에 대한 근본으로부터의
부정이고 이것을 전복시키기 위한 정면 도전이었던 셈이다. 행위 예술과 같은
표현법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언뜻 생각하면 굉장히 민주적인 사
고와 생활 및 표현방식의 한 형태라서 그 안에 참자유가 내포될 수 있어 무척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존 창조질서
에 대한 도전이며 부정적 파괴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
을 지으실 때 하나님 나름대로의 그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하나님만이 창조주로
서 소유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본적 틀" 속에서 이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감히 그 모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행
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이건 누구건 간에 이미 쌓아 놓은 바벨탑을
허물고자 하나, 실상 그 이면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바벨탑을 자신들의 내면세계에 새롭게 쌓아 가고 있는 것
이다.
둘째, 포스트 모더니즘은 현대에 있어서의 두 가지 우상인 "인본주의"와
"과학에의 맹신"을 부정한다.
이 말은 얼핏 생각하면 일상의 삶 속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우리 그리스도
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기독교는 바로 위의 두 가
지 우상을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마저도 퇴치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위험한 함정은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가운데
그 어느 경전을 토대로 하여 이미 제도화되고 규범화된 어떤 형태로서의 종교도
부인한다는 것이다. 미신적이며 샤머니즘적인 종교를 부정하는 것까지는 좋을지
모르나, 문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마
저도 이미 경전화되어 있으므로 거부한다는 논리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아주
교묘한 사단의 고차원적 전략이며 뉴에이저들의 방법인 것이다.
셋째, 포스트 모더니즘은 삶의 표현방식에 있어(특히 문화적인 면) 그 모
든 다양성을 수용한다.
여기에는 상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학에서 그 성격을 규정하는 장
르의 경계를 무시하고 그 모든 규범화된 제약을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의
사를 표현하고, 연극에서 배우와 관객 또는 무대와 객석의 공간을 뛰어 넘어 그
자리에 함께 모인 사람 모두가 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를 통해 행위로서 표
출되어지는 역할 분담 속에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의
참여"가 그러한 양상인데, 이는 인간을 주체적 존재보다는 상대되어지는 상호관
계(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사물에 이르기까지) 속에서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아 하
나의 일치감을 맛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히 상대방과 연합
하고 일치하려는 시도에 따라 혼합주의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서로의 특성을
인정하고 서로가 하나가 되고자 일치하려는 의도는 좋으나 결국 이것은 진리의
변질을 가져오게 한다.
3 . 포 스 트 모 더 니 즘 에 대 한
기 독 교 인 의 자 세
첫째, 예전 한 때 우리가 서구지향적인 생각들에 대해 재평가를 하였듯
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거의 무조건적인 "반 서구" 비판의식에 대하여도 다
시 조심스럽게 재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뉴에이지 운동의 기본적인 흐름중
의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것으로서 반동적으로 "동양지향적"이 되고 있는데 그
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잘못이 없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동양인이
라는 입장을 떠나 객관적으로 냉정히 성찰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탈현대주
의=탈이성주의+탈서양주의"라는 공식이 성립될지 모르겠으나 동양화가 된다는
것이 그 어떤 사교와 같은 신비주의로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면 안되기 때문이
다. 이것은 마치 민속문화와 무속문화를 엄격히 구별할 수 있어야 되는 것과 마
찬가지이다.
둘째, "의"와 "불의", 그리고 "예"와 "아니오"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구
분이 있어야 한다. 현대처럼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모호한 시대가 없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말투를 들어보년 그 말미가 거의 "...같아요"라고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꿈이 많은 시절의 나이임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확신
이 없는 것이다. 세상은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변하고 있어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성공관도 수시로 자주 변하기 때문에 미래의 목표를 확고하게 세우기
가 겁나는 것이다. 유니섹스 모드는 이러한 심리현상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
로,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은 물론 심하면 스스로 남성이기를(여성이기를) 고집
하지도 않고 또한 거부하지도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이 각 인간에게 천성적으로
부여하신 고유한 성마저도 그 구별을 애써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연합과 일
치가 이루어지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없
이 그리스도 밖에서인가 하는 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에 기독교의 지성을 대표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젊은 기독지성인들이 교
계 일각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기독교세계관"에서의 "이원론"에 대한 비
판은 그 출발점부터가 문제가 있는 것이기에(기독교세계관의 주창자라고 할 수
있는 B.월시의 "그리스도인의 비전") 재삼 심사숙고하여 새로운 방향설정을 시
도해야 할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영과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미 세상에서 오래전부터 활동
하고 있는(요일 4:1-3)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
과 깨끗함을 지켜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서(고후 11:1-3)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우리 마음을 지킬 것은 생명의 근
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이다(잠 4:23).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될 때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우리 안에 침입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고후 11:3-4). 그러기 위
해 "영분별의 은사"를 무엇보다 사모할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빌 2:3,5)을 지녀야 할 것이다. 교만한 마음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시며, 반대로 사단은 그 마음을 이용하여 그 사람을 실족
하게 한다. 자신은 실제로 민중을 떠나 민중 밖에 있어 민중이 아니면서 민중
의 고통을 대변하는 양 민중연하지도 말 것이며,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의식
있는 지성인의 자리에 있는 양 의식인연( )하지도 말 것이다. 포스트 모
더니즘은 바로 이렇게 잘못된 의식의 지성인들이 추구할 수 있는 한 시대의 문
화병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신학
종 교 다 원 주 의 와
포 스 트 모 던 신 학
1 . 포 스 트 모 더 니 즘 의 특 징
여기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몇가지 대조하여 설명함으
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돕기로 한다. 이를 위해 맑스의 영향을 조금
받았던 아이하브 하센(Ihab Hassan)과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논
문과 중앙대 정정호 교수와 이소영 씨의 요약에 기초하여 설명해 보겠다.
1) 불확정성(Indeterminacy)
애매모호하고 불연속적이고 다원론이며 정통이 아닌 이단이고 필연적이 아
닌 임의성, 반역, 곡해, 절충, 무작위성, 해체, 변용 등 확실하다는 것에 대해
모두 거부하는 불확정성이 특징이다. 겔브레이스(Galbreith)라는 경제학자가
2차대전 이후의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 불렀고, 과학에 있어서도 덴마크의
하이젠베르그(Heisenberg)의 "불확실성의 원리"가 나옴으로 뉴튼의 물리학이나
유클리트의 기하학에 있어 확실하다는 사고방식들이 깨졌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있어서는 소위 말하는 인과법칙이 성립되지만
마이크로 피직스라는 원자, 전자 상태에 들어가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과법칙은 적용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생겼다. 과학철학에 있어서도
물리적 방법, 실증적 방법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 생기고 이제까지의 자
연과학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는 과학철학자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파이어아벤트(Feyerabend)는 과학의 방법론에 대해서 반대하고, 과학은 모두
무정부적인 사업이라고 하는 "과학의 다다이즘"을 주장했다.
문학에 있어서도 하롤드 블룸(Harold Bloom)같은 경우는 오독( )의 필
요성을 강조한다. 저자가 무엇을 썼는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자신있게
오독 즉 오해를 하라고 한다. 엘렌느 씨유(Helene Cioux)는 이제까지의 문학이
논리적이고 남성적이었는데 이제는 여성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뽈
드 망(Paul de Man)은 수사학이 문학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논리를 일단 중단시
키고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지시적인 탈선의 변덕스러운 가능성
을 인정하고자 한다. 즉 내가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짐승이라고 이해를
했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또한 평론과 문학의 구별을 없애고, 평론가는 작품
의 "무질서와 혼돈에 대한 감식가"라고 말한다.
철학자 롤란드 발테스(Roland Barthes)는 어떤 텍스트도 완성된 것이 아니
라고 하며 독자는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라고 했다. 이것은 독자가 읽어가면서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래 저자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현대사상의 "확실성"과 대조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의 인식
론의 바탕은 확실한 지식의 획득이다. 그것이 과학적인 철학이요, 과학적인 지
식이다. 그래서 수학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과학적 지식이 중요한
것이다. 미술, 음악 모두 기하학적 확실성을 추구한다.
2) 단편화(Fragmentation)
전체의 조화, 통합, 종합에 거부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졍 프랑소와 리요
타(Jean Fransois Lyotard)는 "총체화에 선전포고를 하자. 제시할 수 없는 것의
증인이 되자. 차이를 활성화하고 차이의 명예를 구해내자"고 했다. 직렬이 아니
라 병렬을 주장하며 귀족주의나 전제주의가 아니라 평등과 민주주의를 주장
한다.
3) 탈경전화(Decanonization)
규범, 정전, 경전 등에 반항한다. 엘리트주의, 남성중심, 서양중심적 사고
방식에 반대한다. 이땅 위에 규범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다른 것보다 이것
이 더 중요하므로 이것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는 어느 사회에서도 정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문화에서도 정통은 있
을 수 없고 과학에서도 신학에서도 표준적인 정경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데리다(Derrida), 푸꼬(Foucault) 등 철학자, 역사가들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체
계인 진리, 주체, 초월적 이성 등을 거부하고 신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작가
의 죽음을 선택했다. 오히려 국외자, 타자, 변두리 인간 즉 바보, 광인, 광대,
불구자, 이방인, 여성, 노동자 계급, 동성연애자, 소수민족 문학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이미 토인비(Toynbee)도 서로 다른 문화의 공존을, 레비 스트로스
(Levi-Strauss), 데리다(Derrida) 등은 서양문화우월주의(ethnocentricism)를
비판, 전혀 다른 과학의 존재 가능성을 역설했다.
4) 이종혼합(Hybridization)
주로 문학에 있어서 장르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고 다니는 것을 말한다. 가
령 문학에 있어서 소설을 쓸 때 소설 형태로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에서
시로 수필로 바꾸며 장르의 경계를 마음대로 섞어버리는 것이다. 학자들 가운데
롤란드 발테스(Roland Barthes)는 작가이며, 비평가, 언어학자, 철학자, 사회학
자다. 그리고 허구와 사실의 배합인 non-fiction, para-literature, threshold
literature 등이 유행했다. "사실적인 것이 안전하거나 명백하지 않고 오히려
불가사의할 정도로 기이하고 괴상하게 보이는 직업적이고 허구적인 경험이 결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거나 낯설은 것처럼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일상경험과
기이할 정도로 닮은 점을 지닌 경험지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구별도 없애버리려 한다. 이것은 데카르트
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사상에서 나타난
주체 전제주의에 대한 반항이다. 칸트도 마찬가지이다. 온 우주를 하나의 관점
에서 보려는(Archimedean Point적인) 사상을 거부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제
까지의 서양사상을 "신학적"이라 부른다. 즉 유일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조망
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것을 거부하는 다원주의로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레비 스트로스 등의 문화상대주의가 바로 그런 경향
이다.
5) 대중주의(Populism)
고급문화, 엘리트 문화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적인 경향
으로 주로 미술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앤디 워홀(Andy Warhall)의 깡통을 수십
개 쌓아놓은 그림이나 비누상자 등을 그린 그림이 대표적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며 예술활동의 장소도 미술관이나 극장이
아닌 지하철, 광장 등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항상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6) 행위, 참여(Performance, Participation) 강조
주어진 텍스트는 저자와 독자, 배우와 관객의 구별을 줄이고 같이 활동하 말
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행위이며, 그래서 시간, 죽음, 청중에 의하여 계속 변화
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술에서는 구조나 작품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며, 존재와
의미보다는 작용이 중요하다고 본다. 60년대부터 나온 행위예술이 그 전형이며
우리나라의 마당극은 그 한 예이다.
모든 인간의 예술활동 심지어 인간의 삶조차도 놀이요, 장난이라고 한다.
그래서 니이체는 신이 죽은 빈 공간을 메꾸는 것이 놀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철
학자 데리다(Derrida)는 글쓰기와 글읽기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말과 말이 표
현하려고 하는 대상의 차이를 부인했다.
7) 재현불가능성(Unrepresentable)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너무 끔찍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너무
무서워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한다. 저열해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리요타(Lyotard)는 칸트의 숭고미를 인용하
여 무형태성, 공허, 절대 등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재현될 수 없는 것들이라 주
장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이란 재현 자체 속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며, 좋은 형식들이 주는 위안을 거부하고 새로운 재현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