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발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던 일이 어제일 같은데 벌써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과 같이 나는 꿈이 아닌 현실인 남조선 서울에 왔던 것이다.
북한에서 한 때 잘 나갈 내가 반역자(북한식)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귀순한 여러 귀순자들의 말을 빌린다면 나도 한 때는 수령과 당에 대한 광신적인 충성분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출생한 나는 부모님의 5대 독자가문의 무남독녀로 성장하였다.
출신성분을 1순위로 보는 계급사회에서 아버님이 항일투쟁에 참가하였다는 큰 후광을 입고 나는 누구보다도 순탄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3살에 노동당에도 입당하게 되었다.
나의 사회생활은 은행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후로 상업관리소 상업지도원, 간부물자공급소 소장으로까지 내가 노력하고 충성한대로 잘 나가게 되었다.
결혼 후 남편도 고등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20여 년을 후대교육에 몸담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아들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족함이 없이 행복했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으면서 살아왔다.
아들도 공부를 잘하여 고등중학교를 마치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였기에 우리 부부의 기쁨은 자식 가진 부모들의 심정이 다를 바 없듯이 세상에 더 바랄 것 없는 것처럼 행복했다.
남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적 여유, 당의 신임 속에서 상류층의 생활에 감사하며 충성해 왔었다.
그러기에 나는 권력층들의 내부적인 서로의 갈등, 부패에 대해서는 상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간부들의 물자공급을 맡은 나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권력층의 내부적인 서로의 갈등, 부패에 대해서는 상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간부들의 물자공급을 맡은 나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80년대 중반 북한 내 물자공급 수준은 형편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대풍이 항상 간부들의 말끝에 올라 있는 공급소장인 나를 먼저 덮쳤다.
하루아침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잡혀가게 되었다.
내가 한국으로 귀순하게 된 단 한가지 이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7년간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와 그것도 부족하여 남편과 아들까지도 연좌책임을 지고 추방되어 산간오지 농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가다가 잡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세상으로 가서
아들만이라도 성공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품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게 되었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중국인들의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았으며 북한 요원들의 추격과 위험한 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탈북 후 중국에서의 몇 개월 동안 내 평생에 느껴보지 못했던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서러운가 하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체험했다.
한국 땅을 밟아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중국에서 하루하루 떠돌이로 피해가며 살 때에는 남의 손에서 밥 한끼 얻어 먹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한국에 가서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을 그 때에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영국정부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가 있었다.
한국 구민들은 우리 모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서울 도착 다음날 새벽에 숙소에서 창문 커텐을 열고 서울 거리를 내다보았다.
마침 아침 출근시간이라 도로에는 승용차가 줄을 서 있고 사람들의 지나가는 모습은 다양한 옷차림과 활기찬 걸음들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남조선보다 훨씬 다른 놀라운 현실이었다.
북한보다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경제가 발전하여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자가용을 굴릴 수 있게 잘 사는구나 하는 인상이 느껴졌다.
바라보이는 거리의 건물들에는 간판들이 너무나 많이 붙어 있었는데 어떤 건물에는 온통 간판만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영어로 되어 있거나 외래어로 되어 있어 읽을 수가 없었다.
첫날 새벽에 호기심 절반, 위구심 절반인 심정으로 내다 본 서울거리의 모습은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이며 자본주의 독재국가라고, 또 한국으로 간 귀순자들은 비밀을 다 뽑아내고 결국에는 다시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북한당국의 선전이 허황하고 거짓이라는 것을 실제 생활을 통해 절실히 느낄 수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불안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잠시일 뿐 한국은 우리 모자를 너무나 따뜻한 동포애로 맞아주었다.
가는 곳마다 북에서 고생하다 잘 왔다고, 이제는 마음놓고 잘 살아보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자회견, 방송출현, 여러 언론사와의 인터뷰 등 하루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완전히 그 환대에 도취되어 있었다.
어느 날 옷을 사기 위해 우리 모자는 명동 롯데백화점으로 갔다.
백화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입 속으로 야! ...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환성을 질렀다.
불빛 환한 수 백 개의 매장, 수 천가지 품목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옷을 고르는 것도 큰 고민이었다.
판매사원들이 친절하게 옷을 골라주고 여러 가지를 입어보라고 권했다.
입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사도 된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품질을 설명해 주었다.
영업사원들의 친절봉사를 받으면서 북에서의 내가 하던 일을 돌이켜 보았다.
물품이 항상 부족하게 공급받기 때문에 기호에 맞지 않아도 나에게 배정된 것은 무조건 사놓고 보는 북한주민들의 생활이 마음 아팠다.
남한은 하나라도 팔기 위해 손님이 찾아오면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은 북한과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TV나 신문, 잡지에서 상품광고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
이렇게 얼마동안 지내면서 내가 새롭게 결심한 것은 하루빨리 현실을 인정하고 맞추어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체제선전을 위하여 어느 특정인물에 대해서는 우대를 해주는 사회에서 살아왔기에 귀순자라는 신분으로 특혜를 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자기 능력과 노력으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고 모든 것을 무에서부터 새롭게 출발하리라 다짐했다.
아들을 꼭 성공시키겠다고 결심하고 어렵게 떠난 길이었고 남편한테도 저승에 가서라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용서를 구할 수 있게 살아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 사람들도 사귀게 되고 그들이 진심으로 조언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또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빌어들이는 돈도 좋지만 돈을 쓰는 방법도 배워야 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 속담에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는 말도 있듯이 동전 하나라도 저축하면 그것이 모여 훗날 목돈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저축을 했다.
남한 사람들이 비유하는 말로 돈이 효자라고 말하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알아서 능력껏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내가 열심히 일해야 되며 저축해야 만이 예상치 않았던 일이 터져도 대처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적은 돈이지만 은행 저축 상품을 잘 선택하기 위해 은행원의 상담도 자주 받아 보았다. 그런 것이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 시작하는 살림이라 필요한 것도 많고 또 북한에서 보지 못했던 좋은 물건들을 볼 때마다 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살았다.
아파트에서 생활하다 보면 쓸만한 가구류, 가전제품, 의류 등을 버리는 것이 많았다.
새것을 사놓으려면 우리 형편에 큰돈이 지출되어야 하기 때문에 쓸만한 것이 눈에 띄울 때마다 주어다 쓰게 되었다.
아파트 경비원도 그러는 것을 본 후로는 살림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나오면 우리 집에 가져가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장식장, 장롱을 비롯해 집에 들여놓은 가구, 가전제품을 수리하여 재활용으로 잘 쓰고 있다.
한 두벌 외출복 외에는 거의 사지 않고 입던 옷을 깨끗이 세탁하여 입어도 괜찮았다.
전기, 가스, 난방, 물 등 일상생활에서 쓰는 작은 것부터 절약하니 그것이 다 돈이고 저축이 된 셈이다.
나는 외국 초청강연을 많이 다니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미국의 여러 지역과 프랑스, 일본,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등지에서 외국인들이 근검절약하고 시간이 곧 돈이라는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우리보다는 부자 나라의 국민들인데 쓰던 물건 하나도 쉽게 버리지 않고 재활용하고 그것을 수치스러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문의 사랑으로 여기는 다른 모습을 보았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때로는 힘든 일도 많았다.
생소한 나라에 온 것처럼 느낌이 전혀 달랐고 이방인이나 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는 때도 있었다.
나는 남한 사회 실상을 알기 위해서 매일 신문, TV뉴스를 빠짐없이 보았다.
그리고 나의 능력과 지혜로 할 수 있는 일도 생각해 보았다.
자본주의사회는 겉으로 보기엔 생존경쟁이 너무 치열하기 때문에 제한된 조건과 주어진 자리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던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하는 일에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내 능력껏 성실하게 일한다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북한 실상을 알리는 강연도 다녔고 시간 나는 대로 여러 기관과 출판사들에서 요구하는 원고도 열심히 써 보내게 되었다.
얼마동안은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해왔다.
나에게는 느껴보지 못했던 새 삶을 시작하면서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부가 다 내 소유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고맙게도 아들도 학업에 열심이고 또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여 일하게 되었다.
아들이 봉고차를 구입하여 새벽에 농수산물 도매시장에 나가 물건을 구입하여 업체에 납품하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아침 7시 반경에 일이 끝나면 그 길로 학교에 공부하러 달려가곤 했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아들을 볼 때마다 처음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북한에서 엄마 때문에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농장으로 추방되어 농사일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느라 새벽부터 차를 몰고 시장바닥을 다녀야 하는 모습을 볼 때 부모로써 너무 안쓰러웠다.
우리 모자는 서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위로하였다.
그래도 한국으로 왔으니 새 삶을 시작하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지 만약 아직까지 북에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때문에 너무 감사하다고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가지고 살았다.
도와주는 고마운 분들도 많았지만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세상이다 보니 북한에서 왔으니 남한 사정을 잘 모를 것이라는 우리의 약점을 노리는 사람도 있었다.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소개해 주고는 그 대가로 납품대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눈을 뜨고도 크게 당할 뻔했던 일도 있었다.
항상 머리 속에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고심하면서 다니던 어느 날, 길가에서 길목이 좋아 장사가 잘 되는 가게 자리를 분양한다는 홍보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에게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자리를 샀다가 그 자리에서 되팔면 엄청난 이윤을 얻을 수 있으니 우리가 북에서 왔으니 도와주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요구해도 우리에게 준다고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다.
너무 그럴싸한 말에 의심도 하지 않고 오히려 고맙다고 하면서 4천만원이라는 큰돈을 주었다.
다음날 알고 보니 그것은 불법사기였다.
마을버스 요금 300원도 아까워 매일 걸어서 전철역까지 다니면서 모은 돈인데 그걸 몽땅 떼이게 되니 눈앞이 캄캄해지고 뭐가 뭔지 황당하기만 했다.
얼마 후 불행 중 다행으로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 돈을 다시 찾게 되었다.
나한테는 큰 충격이었다. 생사람의 눈을 빼앗을 세상이라는 비관을 하기도 했다.
큰일을 한 두 번 겪고 나니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멀리하려고 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이웃과 친구사이에 어울려야 하는데 일하는 것 외에는 마음의 문을 좀처럼 열지 못했다.
생활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중요한데 무조건 경계하는 것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닌 것 같았다.
내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 때였다. 한탕주의로 큰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너무 성급한 욕심이 엄청난 손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되었다.
상대방이 제기하는 조건이 좋으면 성급히 다가서지 말고 잘 따져보고 선택을 신중히 해야 한다.
1년 동안 모든 것을 다 이룰 것처럼 뛰어 다니니 몸이 견질 수 없었던 것 같다.
예전에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 그 동안 긴장 속에서 버텨 나갔지만 하나, 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복부수술, 폐결핵 등 성한 곳이 없이 몸이 망가져 갔다.
건강을 잃으면 천하를 앓는다는 말이 맞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얼마나 힘들게 찾은 자유세상인데 아들을 꼭 성공시켜 통일이 되면 찾아오겠다고 마음속을 용서를 빌면서 떠나왔는데 이렇게 세상이 끝난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외롭고 슬펐다.
그러나 남이나 북이나 한 민족은 정이 너무 많은 민족인 것 같다.
병원에서 투병중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고마운 분들이 하루에도 수 십 명씩 병원을 방문해 용기를 내어 꼭 회복되어야 한다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강원도에서 양봉을 하시는 분은 빨리 회복하라고 토종꿀을 보내주셨고 경기도 이천에서 농사짓는 분은 찹쌀을 보내주셨으며 안산의 어느 회사 사장님은 보약과 선물을 직접 가지고 방문해 주셨다.
여러 단체들과 군부대들에서도 꼭 살아야 한다면서 힘을 내라고, 쾌유를 기원한다면서 격려해 주셨다.
1년여의 투병 끝에 고마운 많은 분들의 온정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한국에 자기 이웃과 사회를 위해 베푸는 훌륭한 분들이 많기에 이 나라가 6.25전쟁이 끝난 후 잿더미 속에서도 이렇게 발전된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성실히 살려고 노력만 한다면 도와주는 분들도 그만큼 많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통일의 그날 사랑하는 아들을 앞세우고 당당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나를 지켜보는 많은 분들의 기대와 관심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살려고 한다.
나는 지금도 항상 처음에 한국에 도착할 때의 심정으로, 처음 한국생활을 시작하던 때의 심정으로 산다.
누구나 운명적으로, 또는 본의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새로운 생활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에게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탈북자들이 중국, 러시아 등 해외에서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뼈아프게 체험해야 했던 그때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해외에서 대한민국을 희망의 등대로 바라보면서 꿈결에도 바라 마지않던 한국 행을 이룬 것으로 모든 것을 성취한 것은 아니며 이 사회에서 당당한 국민으로 자립하고 성공하려면 언제나 처음 시작하던 때를 잊지 말고 그때의 각오와 심정으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산다면 반드시 성공의 여신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200년 여름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