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21)은 '아름다움만이 신의 세계를 표현할수 있다. 모든것은 예측할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철저하게 질서정연하고 예측이 가능한 세계를 말한다. 그는 그 아름다운 세계를 간단하게 표현할수 있는 공식과 이론을 밝혀내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당시까지 빛은 파장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는 빛 역시 작은 입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빛은 파장이자 입자이다'라는것을 밝혀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 이론으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탄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로 그의 인생에 악마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인슈타인의 이 이론은 곧 '양자역학'을 태동시키는 중추역할을 하였으나 이 양자역학은 그의 우주관과 부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의 손자격으로 탄생한 이 양자역학과 대항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을 바쳐 싸운다.
독일의 한 대학원생인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10~1976)는 입자의 속도와 위치는 부정확하여 예측할수 없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한다. 그것이 그 유명한 '불확실성의 논리(Uncertainty Principle)'이다. 그의 이 논리는 고전 과학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는다. 그러나 아이슈타인은 "신은 우리에게 숨기는것이 없다" "신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 라하며 더 열심히 찾으면 된다 라고 맞선다. 그는 불확실한 세계에 산다는것을 싫어했으며 양자이론을 혐오하였다. 양자이론과 우주의 기본법칙들이 서로 충돌해 버린것이다.
그러자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 보어(Niels Bohr 1885~1962))는 아인슈타인의 그 말에 대해 '신의 주사위에 간섭하지 마시오'라고 대항한다. 두 사람의 성격은 반대였다한다. 보어는 말도 어눌하고 어떨때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수도 없어 '불확실' 한데 비해 아인슈타인은 일반인이나 어린애들조차도 알아들을수 있게 '확실'하고 명료하게 자기표현을 하였다.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후 우쭐해진 그는 양자역학의 핵심인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모든 자연현상을 예측하고 만물을 아우르는 이론을 향해 나아갔다. 자꾸 연구하다보면 단순하고 '아름다운' 신의 답이 나올것이라고 믿으면서.
양자역학은 전통적 우주관을 철저히 붕괴시킨다. 사소한 입자 하나의 위치와 속도조차 정확하게 결정못하며 다만 확률로 실험결과를 예측할 뿐. 입자 하나의 미래도 예측 못하면서 무슨 수로 우주의 미래를 예측한단 말인가? 안그래도 1895년엔 뤤트겐의 광선이 발견되면서 그 후 사람들은 도대체 우리눈은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보는것이 있는것일까 하는 회의에 빠져 있었다. 특히 미술분야에서 큰 충격을 받아 그 때 나타난 피카소는 '나는 내가 보는것을 그리지 않는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것을 그린다'라며 그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펼친다.
양자역학의 문을 연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금속을 가열하는 실험을 통해 양자도약의 개념을 발견한다. 원자에 열(에너지)을 가하면 전자는 안쪽궤도에서 바깥궤도로 나오게 되는데 그 나오는 양상이 연속적 궤적으로 이동하는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바깥궤도에 갑자기 등장하는것으로 그 전자운동방식은 일반적 상식인 연속이 아닌 단절이었던 것이다. 이 양자도약의 현상은 고전파의 인과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수 없는 양자역학의 세계였다.
양자물리학은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그리고 막스 플랑크로 대표되는 구세대와 하이젠베르그, 파울리등으로 대표되는 소장파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두 그룹은 좀처럼 서로 가까이 가지 못했다. 금속가열 실험으로 양자역학의 세계를 똑똑히 확인한 막스 플랑크조차도 그 양자의 추상적인 세계를 고전물리학의 체계안에서 확실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를 평생 포기하지 않았다.
과학자들만큼 고집불통인 존재들이 또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전물리학에서 현대양자물리학으로 변신한 인물은 고작 닐스 보어와 막스 보른(Max Born) 두사람만 꼽을수 있을 뿐이다. 과학자들 뿐 아니라 인간이란 본래 '사고의 전환'이란 과정을 이겨내기가 그렇게도 힘든것인가 보다.
세계대전에 나치가 기승을 부릴 때 아인슈타인은 유태인이라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곳 프린스턴대학에서 그는 그의 최후이론인 '통일장이론'을 완성하려고 평생을 바친다.
그러나 그동안 현대물리학이 발전하여 컴퓨터도 만들어지고 양자이론은 일반인들에게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이제 양자이론을 빼 놓고는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초기에 미국으로 망명할 때 열열히 환영받던 아인슈타인은 이제 한물 간 고집장이 취급을 받으며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양자학을 못 받아들이고 그의 통일장이론을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화려한 초기 성공과 명성때문에 그의 말년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
그 후에 나온 '끈이론(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가 끊임없이 진동하는 매우 가느다란 끈이라는 이론)'이 그래도 그의 통일장이론에 가장 가까운것이었지만 그가 살아있었다면 안 받아들였을듯 하다. '끈이론'이란 그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양자학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 양자학도 그가 발견한 '빛'에서 기틀을 삼아 나왔으니 그의 일생은 참으로 모순투성인 셈이다. 그는 소통의 달인이었으나 한가지 그것은 일방통행이었을 뿐 다른 사람들의 충고는 듣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천재성과 과학의 업적을 존중한다. 그러나 마음을 닫은 혼자만의 천재와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의 이론과 말에 귀를 기울이는 보통사람과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나는 후자가 훨씬 발전성이 있는 인간상이라고 본다.
이 세계는 양자역학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왜 우리가 양자역학을 알아야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광자는 자유롭게 활동하다가도 감지기에게 자신의 경로를 들키면 파동성을 잃어버리고 입자처럼 행동한다. 입자나 인간들이나 참으로 같은 패턴들이다. 사람도 혼자 있을 때와 남들이 보고있을 때 행동하는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그런 행동은 인간만의 가식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본질인 것 같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은 일생을 양자전기역학의 연구에 바친 후 말한다. "이 신비로운 우주 속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길을 잃고 있어도 나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을 보면 그것은 이미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나 철학쪽에 가까운것 같다.
그래서 현대 양자물리학은 서양인보다는 동양인에게 쉽게 이해되는 것인가보다. 우주만물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양자이론은 동양의 일원론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며 선과 악, 천사와 마귀로 이분되는 서양 기독교의 흑백논리로는 몇천년이 지나도 우주의 본질인 이 양자의 세계를 이해할수 없을 것이다.
물체를 우리가 자꾸 쪼개 들어가보면 원자핵은 입자가 아닌 파동으로 비어있다는것을 20세기 들어 서양물리학자들이 발견하고 노벨상을 받고 난리다. 그러나 그 이론은 수천년전에 이미 부처님께서 색불이공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언급하신바 있다.
불교에서는 물체는 모두 변하고 무상한데 그 유전하는 대상에 집착하는것에 번뇌와 고통이 따르는것이니까 잡착을 놓고 걸림이 없어야한다는것이 주요이론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런 불교의 이론은 그 멋진 철학과는 달리 어쩐지 인간들의 삶을 염세적이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비 현실성이 있어보인다.
내가 보기에 입자들은 관찰하기전엔 자유롭게 놀다가도 사람이 관찰을 하면 불확실성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불규칙적으로 숨바꼭질하듯하는것이 마치 아이들이 순진하게 노는듯 아주 유쾌한 유머처럼 보인다. 그렇게 기본적인 입자들이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즐기고 있는것을 보면 신의 뜻이란 인간들도 한바탕 꿈의 축제처럼 이 세상을 자유롭게 놀다가라는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색즉시공이라는 공이란것도 부처님께서 공을 완전히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신게 아니라 공즉시색이라 그 공속에 무한한 어떤 존재와 가능성이 잠재돼있는것이라고 보신것이다. 아직 그 실체가 무엇인지 규명은 못했지만 그것을 현대물리학에선 일단 '암흑물질'이라고 이름붙여 놓았다. 부처님 당시엔 사람들이 양자물리학이라는 존재를 몰랐으니 그냥 '공'이라고만 하신듯 하다.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을 인간의 육안으로 볼수있는 거시적인 세계에서 서술한 이론일뿐 그 대상의 본질은 같을 것이다. 혹시 인간이 죽는다는것도 거시적인 육체가 양자역학적인 미시적 에테르체로 변한다는 차이뿐 아닐까.
첫댓글 현거선생님 너무 반갑습니다 ^^
집안 일 보고 들어와보니 글을 올려 주셨네요.
내일 자세히 읽고 답글 올리겠습니다 ^^
어려운 물리학 부분을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양자역학에 대해 생소한 분야입니다.
현거선생님 덕분에 양자역학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
불교의 공은 인간의 존재와 삶을 너무 염세적이고 공한 것으로 보아서
너무 극단적 시각이 아닌가 회의를 품어 봅니다.
아무리 공(무)한 존재라고 해도 인간은 분명히 실존하는 실체이기도 하기에 그렇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삶이 덧없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자체를 부정하는 시각에 저는 회의적입니다.
반면 모든 생명체를 귀중히 여기고 아와 타를 넘어 같이 공생공존하는 사상은
불교만이 가진 아주 훌륭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에서는 부처 대신 노자가 이를
가르치고 있지요. 중국도 불교를 이해못하다가 노자식 사상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삶 자체를 부정하고 회의하는 원시불교와 중국불교(노자식)는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