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비즈니스 어학 과정
1. 설렘과 기대 그리고 걱정
96년 7월 7일, 일요일 오후 3시. 로스안젤리스행 대한항공 보잉 747기 비즈니스석, 상냥한 승무원과 넓고 안락한 의자가 눈치만 보며 살아오던 나를 한순간에 귀빈으로 만들어 놓았다. 꿈에도 그리던 해외연수를 떠나는 길이다.
내가 그토록 해외 연수를 바라는 이유는, 연수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토양과 인종과 문화가 다른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와 그 문화를 이끌어가는 삶의 모습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직장에 몸담은 동안은 시간의 족쇄와 경제적인 제약 때문에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직장에서 시행하는 해외 연수에 선발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자라는 학력과 따라잡지 못한 스팩 때문에 나에게 해외 연수라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해외연수에 선발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학력이다. 육, 칠십 년대 에는 승진을 포함해서 공직에서 요구하는 모든 자격 요건들이 고졸이던 것이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교육수준이 향상되면서부터는 해외연수에도 ‘4년제 대학졸업’이란 내가 통과할 수 없는 두꺼운 철문이 생겨났다.
두 번째 모자라는 조건은 영어실력이다. 그간에 영어공부를 영 팽개친 것은 아니지만 “소년이노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라 했던가, 작심 삼 개월만 수없이 계속하다 보니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을 두고 무지개만 좇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제약을 받는 것은 나이였다. 이번에 선발한 뉴리더(New leader)과정도 내 나이로 이미 자격요건을 벗어나 있었다. 단지 자격에 충족하는 것이 있다면 한국통신이 연수에서 요구하는 새로운 리더의 자격을 갖추겠다는 열의만 앞세워 무식하게 들이대 본 것이 행운을 가져왔다. 같이 떠나는 연수생들은 모두가 대졸 학력이었고, 엘리트 사원들인데다 영어 실력도 좋았다.
해외연수에 선발되고 대전연수원에서 전초 과정을 거치면서는 수업시간이나 잠잘 때 외에는 영어회화 테이프를 귀에 꽂고 생활했지만 어디 어학이란 것이 열의만 가지고 머릿속으로만 되는 것이던가. 오히려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영어공부 말고도 해외연수 컨설팅회사에서 실시하는 방문국의 문화와 관습도 익혔다. 화폐 단위에서부터, 운전요령, 일상에서 지켜야 할 예의와 팁 제도 등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생활 관습도 배웠고, 상황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간단한 자기소개서까지 익히는 등 사전 준비는 했다. 그러나 연수도중 엉뚱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같이 가는 팀원 중에 고문관처럼 보이지나 않을까, 마치고 올 때까지 건강은 괜찮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들이 지워지질 않았다. 이미 김포공항 출국장을 들어오면서부터 일행을 놓칠세라 허둥대며 들어온 터라 앞으로 닥칠 일들이 걱정스러운 것이다. 반면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설레기도 했다.
명실공히 해외 나들이는 이번이 두 번째다. 84년도 열흘간 NTT초청으로 일본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난생처음 탑승해 보는 국제선이라 손바닥만 한 유리창에 코를 박고 가물거리는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기도 했지만,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좌석과 마주한 TV 화면의 비행상황만 의미없이 보는 것이 전부였다. 고도 11000m, 속도 1000km, 외부온도-40만 지루하게 머물러 있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보다는 하늘이 어두워졌다가 밝았다 하는 것과 승무원이 날라다 주는 기내식으로 멈춰 버린 시간을 짐작하며 서울에서 출발한 지 12시간 이 지난 다음 날 오전 10에 LA 공항에 도착했다. 날짜변경선을 지나왔기 때문에 도착 날짜는 서울에서 출발하던 7월 7일 그대로였다.
공항 입국심사대와 세관을 통과할 때는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아예 실력이 없는 것인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미리 교육받은 대로 묻는 말이 뭐든지 간에 No를 앞세우고 입국장을 무사히 통과했다. 일행 중에 미숫가루를 가지고 간 것이 문제가 되어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다.
LA 공항에서 살롯(Charlotte)행 비행기를 갈아타기까지는 넓은 공항 여기저기를 헤매다 보니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서울에서 LA까지 올 때는 비즈니스(Business)석을 이용했기 때문에 불편을 느끼지 못했는데, 살롯행 아메리카항공 이코노미(Economy)석은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옆으로 의자가 다섯 개씩 좁게 붙어 있어서 덩치 큰 미국인들 틈에서 몸을 비틀지도 못한 채 다섯 시간을 참아야 한다.
살롯 공항에는 UNCC(University of North Carolina Charlotte)에서 관계자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중을 나온 사람은 Mrs Susan Lambert. Mrs Susan Friend. Mrs Ivanna Thrower 세 명이었다. 모두 여자들이다. 준비해 가지고 나온 봉고차로 학교에 도착하니 저녁 11시 30분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교육 기간 중 우리가 체험해야 할 홈스테이(Home stay)주인과 학교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간단한 만찬이 있었다. 만찬을 마치고 기숙사에 숙소를 배정받아 짐을 풀었을 때는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길고도 먼 설렘과 긴장 속의 하루였다.
2. UNCC 오리엔테이션
시차 적응할 시간도 없이 이튿날 부터 Orientation과 Class 편성을 위한 Testing이 시작되었다. Orientation 시간에는 학교생활의 안내와 교수진의 소개가 있었고, 연수기간 중에 배워야 할 교재를 나누어 주었다. 우리 연수생들은 각자가 자기소개를했다. 나는 미리 외워둔 소개서를 콩글리시로 때웠다. Class 편성을 위한 Test에서는 우리 팀을 두 개 Class로 나누었는데 나는 B class에 편성되었다. 아마 교수를 방법을 결정하기 위하여 우열반을 가리는 듯했다.
오후에는 캠퍼스 투어가 있었다. Meal house, Library, Bookstore, Health center 등 우리가 연수기간 중에 이용할 시설물들의 위치를 익히는 것과 그밖에 운전요령, 주차방법 등 캠퍼스 내에서 지켜야 할 행동을 배웠다. 저녁에는 부학장 초청 Welcome dinner party에 참가했다. 파티에는 부학장과 담당교수 네명 그리고 대학에 주재하고 있는 한국인 교수 두명이 함께 참석했다.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긴장 속에서 보낸 미국의 첫 하루였다.
기숙사에 돌아와 집에 전화를 걸었다. 학교 문방구에서 사온 선불 전화카드를 옆에 놓고 카드에 적힌 순서대로 버튼을 눌렀다. 눌러야 할 숫자가 무려 35개다. 하나씩 버튼을 눌러 가다 통화중 음이 들리면 처음부터 다시 눌러야 한다. 다시 누르다 숫자를 잘못 누르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통신서비스였다. 물론 고국 교환이 바로 나오는 서비스도 있긴 하지만 요금 정산 때문에 일반전화기 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다.
*MCI카드 경우:1-800-934-0060-29476-25331-011-82-53-943-4578
3. 길거리 인터뷰
도착 삼일째의 교과목은 미국인 인터뷰 였다. 시민을 대상으로 미국에 오기 전에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미국 사람들의 생활을 거리에 나가서 인터뷰를 해 오라고 했다. 아침부터 봉고차에 태워 Up town의 거리에 부려졌다. 아마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부터 지우라는 것 같았다.
우리가 배운 영어는 Down town은 시내이고 Up town은 변두리 지역으로 배웠다. 그런데 시내에 가면서 Up town 간다는 표현을 쓰고 있어서 교수에게 물어 보았더니 살롯은 시내가 변두리 지역보다 위치가 높기 때문에 Up town을 쓴다고 했다. 우리가 배운데로 시내라고 전부 Down town을 쓰는 것이 아닌가 보다.
길거리에서 막상 인터뷰를 하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가지고간 노트에 “How do you enjoy at weekend"등 간단한 문장을 10개 만들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놓고 물어 보기에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길거리 벤치에 만만하게 않아 있는 시민에게 다가 갔다. 한두가지 물어 보긴 했는데 무어라고 답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노트에 단답식의 문장을 만들어 그냥 보여주고 필답을 얻었다. 내가 만난사람 중에는 경계심을 보이며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오래된 고목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공원에 들렀다.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자세히 보니 관광지가 아니고 오래된 주거지역 이었다. 살롯에는 주거지역이 곧 공원화 된 곳이 많았다.
인터뷰는 오전에 마치고 오후에는 결과를 분석해서 발표하는 것이다. 인터뷰 해온 내용과는 상관없이 발표하기 좋도록 적당히 문장을 꾸며서 발표했다. 내용 보다는 Presentation skill에 교수의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학교 수업을 대충이라도 알아듣기 위해서는 다음날 배울 교과목에 미리 모르는 단어를 찾아서 해석을 달아 놓아야 한다. 다행인 것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동료를 위하여 반장인 정연우 사원이 강의 도중에 잠깐씩 통역을 했다. 여기다 상황이 현재 진행형 인지라 상대방의 표정과 눈치를 더하면 의외로 의사 소통이 되기도 했다.
저녁에는 자동차 경주 관람이 있었다. 경주장에는 로얄석에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고, 미국인 주민과, 일본 유학생 그리고 우리팀 두명이 한 테이블에 앉도록 배려 했다. 이때 만난 미국인은 얼굴이 잘 생긴 Chris Newsom 이었고 일본인은 대원공립(大垣共立)은행에 근무하는 Hiroyasu Kodera(小寺弘泰) 였는다. 두 사람은 그 후에도 파티가 있을 때마다 여러 번 만났다.
특히 Hiroyasu Kodera 는 같은 동양인이라 단어만 주워 섬겨도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 할수가 있어서 서로가 얼굴을 마주 칠때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귀국해서는 같이 찍은 사진을 편지와 함께 보냈는데 두 사람 다 답장이 오지 않아 더는 말끝을 이어가지 못했다.
4. 토플리스 빠(Topless Bar)
시내 전화사업 경쟁체제 도입에 관한 David Boraks의 특강이 있었다. 교재가 있는 과목은 다음날 진행될 교과의 단어를 하루 전에 사전을 찾아서 대충 해석을 달아 놓으면 이튿날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다. 교재가 없는 특강은 반장이 수시로 통역해 주는 것 외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눈만 껌뻑이다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는 미국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시내로 나갔다.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찾아간 곳이 토플리스 바(Topless bar)였다. 미국영화에서 흔히 보던 데로 국부만 가린 늘씬한 미모의 아가씨들이 봉에 매달려 춤을 추는 맥줏집이었다. 한 사람당 8달러를 주고 입장해서 버드와이즈맥주 한 병에 3.8달러를 주고 마셨다. 그 외에도 무대 사이드에 않으면 춤을 추는 아가씨에게 1달러의 팁을 줘야 한다. 넓은 홀에서 댄서를 불러다 자기 앞에 춤추게 하는 테이블 댄스(Table dance)는 5달러, 칸막이 처진 홀에 들어가서 혼자 춤을 감상하는 프라이빗댄스(Private dance)는 25달러이다.
테이블 댄스를 추는 아가씨들은 홀 여기저기에서 볼수 있는데 프라이빗 댄스는 칸막이 속에서 하기 때문에 보이지가 않았다. 그 속이 궁금하여 직접 시켜 보기로 하고 서빙하는 아가씨 에게 신청하였더니 칸막이 속으로 들어가 의자에 않아 기다리라고 했다. 조금 있으니 댄서가 들어와 몸을 비트는데 아무리 호기심이 있어도 엉덩이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그냥 보고 있어야 한단다. 안타까움만 있을 뿐인데도 그것이 좋아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미국인들의 표정을 보니 이것이 바로 문화의 차이라고 느껴졌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철저한 상업주의이다. 미국에서는 어디를 가나 돈 낸 만큼만 보여준다. 그리고 돈이 될만한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관광자원으로 만들어 돈 받고 보여준다.
에틀랜타에 있는 CNN 본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걸프전의 실시간 중계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회사 건물을 관광자원으로 만들었다. 1코스는 2층까지 15달러, 2코스는 4층까지 30달러, 3코스는 45달러에 방송국 전체를 보여준다. 철저한 미국의 상업주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가는 곳마다 이처럼 입장료에 계층을 두어서 어디까지를 봐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UNCC 에서도 한국통신은 비싼 교육비를 지급했기 때문에 기숙사의 환경에서부터 주말의 미국문화 체험까지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는 반면에 못사는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나, 돈을 적게 지불한 일본 연수생에게는 기숙사 시설 뿐아니라 학교 생활에서도 대우가 시원치 못했다.
5. 사격,승마(Shooting. Horseback riding)
주말에는 학교수업 대신에 미국인들이 즐기는 레저활동을 직접 체험하게 하여 미국 문화를 먼저 이해하게 함으로써 비즈니스 언어를 익히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총기 판매상에 들렀다. 권총을 비롯한 자동소총 등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견물생심이라 손바닥만 한 호신용 권총을 만질 때에는 가지고 싶은 충동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구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내에서도 총기구매 및 소지에 관한 법률은 주마다 다르지만, 노스케롤라이나 에서는 신원조회를 거쳐 전과기록이 없어야 하고 6개월 이상 거주해야 가능하단다. 점포에 부설로 설치해 놓은 사격장에서 권총과 자동소총으로 사격(Shooting)도 직접 해 보았다. 총기 소지가 자유롭다는 미국사회의 한 단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후에는 승마장(Horseback riding)으로 안내되었다. 승마장은 생태공원처럼 넓은 초지와 숲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경마용 말을 타고 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여기서도 돈 낸 만큼의 시간과 코스가 다양했다. 미국이 까마득하던 시절에는, 어쩌다 미국 갔다 온 친구를 만나면 백마(?)를 타 보았느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마침 내가 탄 말이 흰 말이어서 나는 실제로 백마(?)를 탄 사나이가 되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말이 맞았다. 초원을 지날 때는 영화에서처럼 빨리 달리고 싶어 배를 두드렸으나 기술이 부족해서 인지, 말이 동양 사람을 깔보는 것인지 가볍게 뛰는 정도에서 더는 빨리 달리지 않았다. 가볍게 뛰는데도 말이 뛰는 동작에 엉덩이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리는 데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것을 알았다.
6. 파티 초대(Pool party and cook out)
학교에서 좀 떨어진 콩코드(Concord) 카운티(county)에 있는 팔콘(Carl Eveene Falcone) 집에서 파티(pool party and cook out)가 있었다. 학교에서 지역 내에 부자로 사는 주민에게 유학 온 학생들을 초청해 달라고 섭외를 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는 대부분 부자를 졸부로 여긴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부자들을 존경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수십억 원의 토지 보상을 받거나 아니면 수백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아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양심적인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부러움의 대상이지 원망의 대상은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부자가 내는 세금으로 미국사회가 굴러가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부자를 철저히 보호한다고 했다.
팔콘의 집은 7에이커(약 8500평) 대지 위에 나지막한 구릉언덕을 이용하여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건물과 부속시설로는 배구장. 수영장. 승마장(말 2필). 탁구장. 미니 골프연습장. 엽총사격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파티에 초대된 사람은 팔콘 집 주변의 주민과 일본에서 온 연수생 들이었다. 파티는 그 집에 있는 여러 가지 시설물을 이용하여 간단한 게임을 즐기거나 초대된 사람 서로 간에 대화도 나누고 오찬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초대에 참석한 지역 주민은 의도적인지 습관적인지 는 알 수 없으나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를 원했지만 알아듣는 것이 서툴러 대화가 길어지지 못하고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다. 눈이 마주치면 대화보다는 미소로서 어색한 순간을 모면했다. 우리 연수생 중에는 재미있게 대화를 이어가는 친구도 많았다.
오찬은 야외 잔디밭에 준비되어 있었다. 빵과 카배츠, 삶은 콩, 야채, 술과 코크(coke) 오렌지주스가 있었고, 돼지고기 바비큐가 통째로 돌아갔다.
서로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안타까움은 있었으나, 배구, 탁구 등 개임을 할 때는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 즐길 수가 있었다. 우리 연수생 중에 말에서 떨어져 병원으로 실려 가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미국인 가정에서 그들의 파티 문화를 체험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다음날 학교 수업은 어제 참석했든 파티에서의 일어났든 일들과 현지주민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파티문화에 대한 느낌 등을 먼저 발표하게 하고 교수와 학생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업의 끝 시간에는 우리를 초청하여준 집주인에게 감사 편지를 쓰게 했다.
처음 이곳저곳을 다닐 때는 그냥 미국문화를 체험하는가 보다고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문화를 먼저 체험하게 한 다음 그 체험을 바탕으로 비즈니스 영어를 익히게 하는 교수 방법이 이었다. 교수 방법을 눈치채고 부터는 어디를 가나 눈여겨보고 필요한 것은 메모해 두었다가 교수들의 꼬치꼬치 묻는 말에 이용하기도 했다. 매주 금요일은 일주일 동안 학습한 내용을 테스트해서 학습 진도를 체크했다.
살롯에 체류하는 동안 팔로미노(Plomino) 회관에서 댄스파티가 한 번 더 있었다. 초청된 사람은 우리가 살롯에 있으면서 한 번쯤 만났던 사람들과 춤추러온 현지 주민들이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무대에서 시범을 보이는 리더의 지시에 따라 춤동작을 하나씩 익혀갔다.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갔다 싶으면 리더의 지도 없이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실내 양 사이드에는 간이 바(Bar)와 휴식용 의자가 놓여 있었고 한쪽 모서리에는 포켓볼 당구대가 놓여 있었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인사를 나누었지만, 대화를 이끌어 가기는 어려웠다.
7. Glenayre Electronic 방문
살롯 시내에 지사를 두고 있는 그린에어(Glenayre)사에서 우리 연수생들을 회사로 초청했다. 그린에어사는 무선장비 및 단말기 제작회사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지만, 북미지역에서는 85%, 세계시장에서는 65%의 무선장비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큰 회사였다. 한국통신과는 기술이전 조건이 맞지 않아 제휴에 실패했다고 한다. 한국의 무선 장비시장은 모토로라(Motorola)가 선점한 상태다.
회사를 방문한 날이다. 흔히들 우리가 알고 있기에는 미국사회는 아무 데서나 청바지를 입거나 티셔츠를 걸치는 등 복장에 상당히 자유로운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꼭 그런 것 만도 아니었다. 그린에어사를 방문 할 때는 정장을 하고 가야 한다는 지도 교수의 공지가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회사에 들어서고 보니 정장을 하고 가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회사 내 전사원이 흰 와이셔츠에 감색 아니면 검은색 싱글을 입고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있었다. 인종과 나라와 관습은 달라도 복장은 세계인의 공통분모인 것 같았다.
회사 측에서 우리 연수팀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캐나다 밴쿠버지사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을 오게 해서 통역을 맡아 주었다. 그때 통역을 담당한 직원이 최원진 이였다. 최원진은 우연하게도 밴쿠버 시내에서 다시 만났다. 그것은 우연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지갑이 낡아서 하나 사야겠다고 조그만 가방 가계 에 들렀다가 쇼핑 나온 최원진 부부를 다시 만났다. 세상이 넓고도 좁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밴쿠버에 체류하는 동안 최원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안부를 묻고 지냈는데 그 후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고 한국지사에 근무한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연락하지 못했다.
홈스테이에 들어가면 차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다. 가까이 지내는 연수생끼리 네명이 한 조가 되어 시보래 한대를 렌트(rant)했다. 렌트비는 일주일에 보험 포함하여 347달러(278천원)였다. 차를 렌트해서 학교에 돌아오는데 대낮에도 전조등이 꺼지지 않아 다시 찾아가 확인하였더니 최근에 출고되는 차는 시동을 걸면 자동으로 전조등이 켜지고 시동을 꺼야 전조등이 꺼진다고 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전조등 켜기가 보편화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전조등이 꺼지지 않으면 고장인 줄 알았다. 낮에도 전조등을 켜는 것이 교통사고를 줄이는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8) Alltel Mobile 초청 오찬
한국통신의 간부직이 UNCC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Alltel Mobile이라는 전송시설 및 무선전화 단말기 판매회사에서 오찬 초청이 왔다. 회사에 들렀더니 여기서도 감색 싱글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업무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회사 벽에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어를 걸어 놓았는데 “If it is to be. It is up to ME!"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것이 존재하려면 그것은 내게 달렸다.” 중요한 말 같지만,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린에어사나 알텔모빌 회사를 방문하면서 느낀 것은 어느 부서를 가나 간부직이나 일반직을 막론하고 전체 직원이 남자 반 여자 반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선진국의 모습인가?
오전에는 알텔모빌이 개발한 교환장치 및 전송장치를, 오후에는 영업부서를 방문해 단말기 판매방법 등을 견학했다. 오찬은 회사 내에 별로로 마련된 장소에서 사장과 매니저급 세 명이 참석했다.
돌아오는 길에 야구 스타디움에 들러 어느 정도 수준의 경기인지는 알지도 못한 체 경기를 관람했다. 운동장 시설이나 관중의 분위기로 짐작해서는 동네 야구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빅게임도 아닌 것 같았다. 운동장 안에서 이동식 포장마차에서 생맥주 파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한국에서 왔다고 말을 붙였더니 뜻밖에 반색을 하면서 자기도 한국에 가본 적이 있다고 맥주 몇 컵을 서비스로 그냥 주었다. 미국에도 공짜 술은 있었다.
9. Charleston여행
7월 19일(토요일)부터 20일(일요일)까지 주말을 이용해 찰스턴으로 관광을 갔다. 살롯에서 찰스턴까지의 거리는 약 300마일(483km)로 승용차로 4시간 정도 걸렸다. 고속도로에는, Lest area(화장실, 공중전화)와, Food exit(식당, 화장실. 공중전화) 및 Gas exit(매점. 주유소. 화장실. 공중전화.)의 세 종류의 휴게소가 있었다. 어느 곳이든 우리나라 휴게소처럼 시설이 삐까번쩍 하지는 않았다.
찰스턴은 대서양 연안에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항구 도시이며 미국 동남부지역의 손꼽히는 관광지다. 18세기 도시 형태와 당시의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여 고전적인 관광지로 만들었다. 특히 1841년에 건축하였다는 재래시장에는 지금도 맨흙 바닥에 시장을 열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보게 했다. 거리에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마차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Palase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분홀(Boon Hall plantation and gardens)이란 농장으로 관광을 갔다. 분홀은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를 사용했던 대규모 목화농장이 잘 보존된 곳이다. 대문에서 주인집까지 비포장도로에는 하늘을 가리는 오크나무가 가로수처럼 양측에 늘어서 있는 것이 외국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바로 그 풍광이었다. 농장의 전체 면적이 17,000에이커(약2000만평)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그 규모가 어느 정도 인지는 알수 없었다. 농장 안에 넓은 호수가 있고, 농장 너어로 저녁노을이 지는 것으로 보아 그 넓이를 짐작할 따름이었다.
주인집(Host house)에는 화려함이 묻어 있는 집기들과 휘황찬란한 샹들리에로 보아 호화의 극치를 보여 주는 반면에, 노예들의 집(Slave street)은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아 놓은 것이 마구간과 다를 바 없었다. 노예제도를 고집 했던 백인 지주들의 오만함과 채찍아래 울부짖던 흑인 노예들의 한 맺힌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저녁에는 이태리 레스토랑에 들렀다. 메뉴로 보아서는 어떤 음식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서 눈길 가는 데로 수프는 Frence onion soup gratine($3.5)을, 메인 요리는 Bouillabaisse fraish fash ($17.5)를 주문했다. 다행히 수프는 양이 많아 먹을 것이 있었는데, 메인 요리로 시킨 것은 새우와 홍합 몇 마리 삶은 것이 전부여서 배를 채울 수 없었다. 저녁 식사 값으로 $21(17,000원)을 주고도 호텔에 와서 모자라는 배를 빵으로 다시 채워야 했다.
이튿날은 찰스턴 해변에 정박해둔 항공모함 요크타운(York town) 호를 관광했다. 요크타운 호는 2차대전 때 참전했던 항공모함을 찰스턴시티 에서 사들여 관광자원으로 만든 것이다. 항공모함은, 모함과 구축함, 잠수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하여 항공모함 내에는 영화관과 카폐등 각종 편의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잠수함은 해치 부분으로 들어가서 꼬리 부분으로 나오며 내부구조를 관광 것인데 공간이 너무 좁아서 몸을 운신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이처럼 좁은 공간에서 장기간 작전을 할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깐인데도 폐쇄 공포증을 느껴서 식겁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처음 본 대서양에 발이라도 담가 볼 욕심으로 해수욕장에 들렀다. 북적거리는 해수욕객 중에서도 선텐을 하고 있는 아가씨들의 쭉쭉빵빵이 눈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벌거벗은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으로 해변을 거닐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가관이었을 것이다. 찰스턴 관광을 마치고 다시 살롯으로 오는 고속도로에서는 폭우가 쏟아져 운전하는데 또 한 번 식겁을 했다.
10. Atlanta 올림픽
우리가 체류하는 기간에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애틀랜타는 조지아주의 주도로 인구 약 42만 명이 거주하는 미국 동남부 최대의 도시이다.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던 이곳은 우리에게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의 무대로 잘 알려져 진 도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세기 말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격렬하게 살아간 한 여인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 우리 시대 불후의 명작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언 리는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 스칼릿이 마지막에 절규한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거야(After all tomorrow is anther day)”라는 대사는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 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도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에게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명화다.
학과의 스케줄에는 올림픽 인프라 과정이 있었으나 참관 여부는 본인의 자율에 맡겨졌다. 우리 팀은 올림픽 보다는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을 관광하기로 하고 항공권을 예약하러 살롯공항에 나갔으나 비행기값이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비싸서 포기했다. 예약제도가 정착된 미국에서는 예약없이 움직이는 데는 요금이 비싸다고 했다.
미국에 체류한 지 한 달이 가까워지자 미국인에 대한 이질감이나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아무 곳에서나 주민을 만나면 무턱대고 말부터 건네는 습관이 늘어갔다. 어차피 말을 배우러 온 것이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것 같고, 또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니 조금 무례하게 보인들 어쩌랴 싶은 만용도 생겼다. 의사소통은 그다음의 문제였다. 다행히도 말을 건네면 상대가 누구든 상냥하게 관심을 보이는 그곳 사람들의 친절에 주춤하던 용기가 되살아나기도 했다.
학교에서 첫 강의 시간에 담당교수가 당부한 말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첫째, 영어를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미국 사람들도 한국말을 잘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문법을 맞추려고 하지 마라. 문법이 꼭 맞지 않더라도 다 알아듣는다.” 이 두 가지를 꼭 지키라고 했다.
I'm a boy, I'm a girl에서 시작하여 수십 년을 줄기차게 문법으로만 외우던 영어가 비로소 제길 을 찾은 느낌이었다. 어느 레스토랑을 가나 우리가 외우던 “Would you like to coffee or tea”라고 물어보는 호스티스는 없었다. 대답 또한 I do like to coffee가 아니라 coffee please면 끝이다.
어차피 현지인과 한마디라도 더 해보는 것이 영어를 배우는 데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길거리에서나 공원에서 여유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말을 건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는 길도 한 번 더 묻다 보면 또 다른 대화로 이을 수가 있었다. 무슨 말이든 건네면 어떻게든 알아들으려고 노력하고, 친절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머쓱해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아마 선진화된 국민의식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특히 미국 동남부 지역은 농업의 발달로 거친 중서부지역과는 달리 정적인 도시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정감이 많았다. 우리나라 표현으로 양반들이 사는 도시인 셈이다.
그날도 공항 벤치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앞뒤 말에다 눈치를 보태보니, 남편이 외지에 같다가 돌아오는데 마중 나왔다는 것 같았다.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면 우리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을 신명 나게 묘사하거나 할리우드 영화제목에 배우들의 이름을 줄줄이 엮으면 맞장구를 쳐준다.
올림픽 관람은 이번이 두 번째다. 서울 올림픽은 출장을 핑계로 관람했고, 애틀랜타 올림픽을 연수로 보게 되었으니 올림픽과는 인연이 좋은 것 같았다. 애틀랜타까지는 국내선 비행기로 이동했다.
올림픽을 관람하는 틈틈이 주변 관광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흑인 민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킹 목사의 유적지를 찾았다. 킹 목사는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의 지도자로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민권 운동가이다. 전철역에서 내려 유적지까지 가는 길은 온통 흑인 슬림가 처럼 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 지도자의 유적지가 있는 거리임에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주민의 행태나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무어라 구걸하는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 유적지에는 킹 목사의 생가와 무덤이 비교적 산뜻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무덤 앞에는 한줄기 횃불이 킹 목사의 영혼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킹 목사의 유적지를 나와 버스로 스톤마운틴(Stone Mountain)으로 갔다. 스톤마운틴은 해발 510m 높이의 산이 한 개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돌산이다. 암벽 중앙에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와 롬바드 리(Robert E. Lee) 총사령관,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장군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저녁에는 시가지 지도를 들고 나 혼자 시내 관광에 나섰다. 1달러, 10달러, 20달러를 모아 50달러를 넣은 지갑을 만들어 상의 주머니에 넣고 버스를 탔다. 여행하다 야간에 강도를 만나면 뒤돌아보지 말고 지갑을 던져 주라는 컨설팅회사의 당부를 따른 것이다. 무작정 내린 곳이 흑인 슬림가 처럼 보였다. 으슥한 기분이 들어서 다시 돌아오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도로 저편에서 덩치가 큰 흑인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시간이다. 그렇지 않아도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는 주의를 여러 번 들은 터라 속으로 이크! 걸려들었구나 생각하니 온몸이 오싹해 졌다. 준비해간 지갑을 만지며 눈치만 살피는데, 가까이 다가온 녀석은 어디서 구걸했는지 버스표 한 장을 내밀며 사달라고 했다. 놀란 것이 억울해서 그냥 오고 말았는데 돌아오는 길 내내 그 표를 사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흑인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사람을 옹졸하게 만드는지 알았다. 백인 또한 우리 유색 인종을 볼 때는 내 눈에 비치는 흑인과 뭐가 다르겠는가.
그 나라의 문화는 하루아침에 익혀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 체류한 지 한 달이 가까워져 오지만 아직도 동전계산이 금방 되지 않는다. 또 하나는 팁 문화이다. 팁을 줘야 할 만큼의 서비스를 받은 것도 아닌데 팁을 줘야 한단다. 문제는 걸핏하면 잊어버리고, 또 얼마를 줘야 하는지 얼른 계산되지 않는다. 아침에 숙소에서 나올 때는 배게 위에 1달러를 놓아야 한다고 여러 번 교육을 받았지만, 그것이 잘 챙겨지지 않아 부끄러울 때가 자주 있었다.
미국에는 기숙사나 호텔에서 청소나 벨보이등 허드렛일은 대부분 흑인이 한다. 따라서 팁을 잊어버리고 나면 검은 눈동자에 서운함이 어른거려 한동안 마음이 편치 않다. 애틀랜타도 첫날 아침 숙소를 나올 때 역시 팁을 잊어 버리고 나왔다. 이튿날 아침에 “I'm sorry, I forget to your tip yestday”이라는 메모와 함께 이틀 몫으로 2달러를 놓고 나왔더니 “Thank you"라고 쓴 답장과 함께 스마일 상을 그린 메모를 남겨 두어 감사에 대한 표시를 남겼다.
올림픽은 한국팀이 하는 경기가 딱히 없어 보고 싶은 경기는 없었지만, 학교에 돌아가면 경기내용을 가지고 수업을 하므로, 유도, 사격, 야구경기 등 경기장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스케치 했다. 남는 시간은 경기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거리의 풍물과 온갖 인종들의 행색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러다 여유로워 보이는 외국인을 만나면 한두 마디 말을 걸어 보는 것이 내가 하는 올림픽 관람이었다.
이튿날은 메인경기장 주변을 서성거리다 모자에 빼지를 잔뜩 붙인 늙은이가 벤치에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옆으로 닦아가 말을 걸었더니 뜻밖에 반색하며 6·25전쟁 참전 용사라고 했다. 열심히 전쟁이야기를 했지만, 잘 알아 듣지도 못한체 고개만 끄덕이다가 올림픽 빼지를 선물로 나누고 다음에 또 만났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헤어졌다.
셋째 날은 세계적 음료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코카 골라 본사와 뉴스 채널로 유명한 CNN 본사를 둘렀다. CNN에 대해서는 미국의 상업주의가 얼마나 확실한가를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어디까지 볼까 고민하다 15달러에 2층까지만 관람했다.
삼 일간의 올림픽 인프라 과정을 마치고 저녁 늦은 시간에 학교로 돌아왔다. 올림픽 인프라 과정을 떠날 때 기숙사는 체크 아웃 했기 때문에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홈스테이로 하루 앞당겨 들어갔다.
11. 홈스테이(Homestay)
내가 들어간 홈스테이는 헌팅턴 파크(Huntington park drive)에 있는 루시 엔 캔 사무엘슨(Ruth and Ken Samuelson) 부부의 집이었다. 캔은 보험회사 직원이었고, 루시는 집안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식구로는 11살 바비(Bobby)와 10살 데이비드(David)라는 두 아들과 8살 된 여자아이 조이(Joy)가 있었다. 조이는 얼굴이 까무잡잡한 것으로 보아 입양된 아이 같았다.
주택은 지하 1층 지상 1층의 목조 건물이었다. 미국의 주택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다. 집 주위에는 오래된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잔디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공원 같은 분위기였다. 아마 도로 이름이 Park Dr인 것으로 보아 공원화된 주택가이란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의 주택들은 주변이 숲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까이에 다른 주택이 없어서 자기 소유가 아니라도 자기 땅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다.
미국에는 고속도로는 Frwy(Free way)나 Hwy(High way)로 표시하고, 시가지 대로는 Blvd(Bouleard) 지선로는 St(Street), Ave(Avenue), Rr(Road), 주택가 안의 도로는 Dr(Drive). Ln(Lane). Ct(Court).등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살롯지역의 주택가는 주로 Dr. Ln. Ct를 많이 쓰나 LA처럼 일직선으로 그어진 도로는, 동서는 Ave. 남북은 St를 통일해서 쓰는 지역도 있었다.
외국영화에서 신발을 신고 안방까지 들어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눕는 장면을 볼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왜 저 사람들은 더러운 신발을 신고 방에까지 들어갈까? 하는 의구심이 많았다. 그런데 홈스테이를 하면서는 나도 자연스럽게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미국동남부지역은 먼지가 없다. 신발을 한 달 신었는데도 구두에 먼지 하나 묻히지 않았고, 자동차를 빌리고 보름이 넘었으나 먼지 한 톨 털어 낼 일이 없었다. 천혜의 자연적인 조건에다 어쩌다 맨땅이 있으면 나무껍질을 두껍게 깔아 먼지가 날지 못하도록 환경을 관리하고 있어서 신발에 먼지나 흙이 묻을 일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집 주변에는 온통 잔디밭 이어서 신발을 신기도 하고 맨발로 다니기도 하는 습관이 그대로 안방으로 연장되는 것이어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홈스테이에 들어갈 때 선물로 가지고 간 나무지게와 한국통신상표가 붙은 부채를 선물하였더니 현관 쪽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하여 두었다가 3일째 되는 날 치웠다. 선물을 받은 상대방에 대한 감사 표시인 것 같았다.
홈스테이는 자원봉사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먹고 자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거기다 외국 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혹시라도 실수나 하여 후진 국민이란 오명이나 남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긴장 속의 생활이었다. 집안의 분위기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주머니의 신경질 때문에 어두운 편이었다.
주인아저씨의 새벽 출근은, 아주머니 깰까 봐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빠져 나갔다. 덩달아 나도 숨소리를 죽인 체 식탁에 차려놓은 식사(빵, 우유, 바나바,)를 훔쳐 먹듯 하고는 발뒤꿈치를 들고 집을 빠져나와야 하는 형편이었다. 말을 하다 얼른 소통되지 않으면 신경질부터 부리기 때문에 아주머니 앞에서는 눈치부터 살펴야 한다. 다행히 아이들은 몸짓으로도 좋아하기 때문에 지하 놀이방에 내려가면 마음 놓고 떠들 수 있다. 홈스테이하는 동안에 조이(Joy)의 생일파티가 있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마트에서 인형을 사서 선물했다.
생일파티에는 조이의 외할머니, 할아버지와 이웃에 사는 조이 친구 한 명 그리고 지하방에 세들어 사는 스위스에서 온 축구선수 부부가 참석했다. 생일 선물은, 장난감 베이비 침대, 양말, 플라스틱 장난감세트, 인형 등이었는데 모두가 비싼 것은 아니었다. 파티의 특식은 아주머니가 손수 만든 초콜릿을 덮은 빵이었다. 밍밍한 맛이 니글거려 먹기가 좀 거북스러웠지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굿! 을 외쳤다. 그들 문화에 대한 예의라도 지켜야 할 것 같아서다. 그것이 그때의 내 처지 이기도 했다.
조이 생일을 핑계로 주인집 식구들에게 저녁 한 끼를 샀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먹었다. 된장찌개라는 것이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서 느끼한 수프처럼 싱거운 데다, 쌀밥은 낟알이 따로 굴러다니는 미국식 밥이어서 우리 입맛에는 영 맞지 않았다.
홈스테이하는 동안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것이 담배 피우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노스 케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가 있어서 비교적 흡연에는 관대한 지역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를 가나 담배 피우는 데는 애로사항을 느끼지 않았는데 저녁에 홈스테이에 들어가면 문제는 달라진다. 방안에서는 물론 엄두도 못 내지만 집 주위에서도 냄새가 풍길까 봐 건물에서 한참 떨어진 숲 속에서 피우고 와야 할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미국은 어디를 가나 흡연, 비흡연 지역이 뚜렷하게 구분이 되어 있어서 눈치만 잘 보면 흡연 때문에 애로사항은 느끼는 일은 없다. 오히려 국내에 들어와서는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불쾌함을 느꼈다.
홈스테이 식구들과는 미국을 다녀온 후에도 오랫동안 서신 교환을 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내게 보내온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사무엘슨 부부가 보여준 우정은 영원한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12. Microsoft 방문
마이크로 소프트사 하면 21세기를 사는 대부분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미국 위싱턴주 레드먼드에 본사가 있는 세계 최대 부자 회사다. 1975년 개인용 컴퓨터 PC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그 운영체제인 MS-DOS(Disk Operating System)를 제작하여 급성장한 회사로, 원도우(Windows)시리즈가 계속 성공을 거두면서 창업자인 40대 초반의 빌 게이츠(Bill Gates)를 세계에서 제일 부자로 만들었다. 우리가 방문한 회사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지사였다.
복도에서 만난 직원들의 모습이다. 짧은 셔츠에 반바지 끝단에 사원증을 달고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뽄세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회사원들의 몰골이었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회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회사에는 우리 지도 교수의 남편이 근무하고 있어서 비교적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설명에 의하면 출퇴근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고 본인이 알아서 하되, 쓸만한 아이디어만 내어 놓으면 된단다.
사원들은 각자 공간을 가졌는데 벽에는 온통 지저분한 자료들이나, 여자들의 나체 사진들이 어지러이 붙어 있었다. 머리에는 헤드폰을 뒤집어 쓴 체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고 드러누워 음악을 듣는지, 잠을 자는지, 사람이 지나가도 알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 회사의 매니저급 이상 간부들은 전부 여자였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쉽지 않은 우리나라 사회구조를 볼 때, 남녀평등 사회가 어떤 것인지 짐작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13. Glenayer 골프 회동
그린에어사와 골프 부킹이 되었다. 반장이 교과 협의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골프 초청을 OK 한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연수를 받는 동안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낭패를 본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교수와의 약속장소를 잘못 알아들어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수료식 날에는 우리가 지정한 교사에게 전달되어야 할 선물이 엉뚱한 교사에게 돌아가는 헤프닝도 있었다. 전달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이런 해프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알아 듯지 못해도 그냥 OK 하거나, 고개를 끄떡이는 습성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우리 팀 15명 중에 골프채를 잡아 본 사람은 셋밖에 없었다. 셋 중에도 필드에 나가본 사람은 나 혼자뿐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대전연수원에서 교육받으면서 연습장에 한 두달 나간 본 것이 골프 경력의 전부였다. 나도 윗사람 몰래 골프장을 드나들던 때였으니까, 골프를 친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의 골프는 직급이 높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형편이 이러니 진퇴양난에 빠진 반장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초청된 날까지 연습장에서 나마 연습을 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연습장은 그물망 없이 야외에 그냥 치게 되어 있었다.
학교수업이 끝나는 데로 연습장에서 골프채를 휘둘렀다. 연습공은 한박스에 3달러와 5달러, 두종류가 있었다. 2주간을 부지런히 연습했지만 골프라는 것이 그렇게 해서 될 운동이던가.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서, 학교를 통해 그린에어사에 초청을 취소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골프가 서툴러도 초청하겠단다. 아마 그때도 우리의 골프 실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예약된 날짜에 골프장(Old North Stata Club)으로 갔다. 그린에어 에서는 본사에서 회장(CEO : Ray Ardizzon)과 이사한 명이 직접 내려오고 살롯 지사장(President : Ken Thompson)과 담당자 한 명이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먼 거리를 회장이 직접 날라와 인력 마케팅을 하는 것은 우리 연수생들을 한국의 이동통신시장에 잠재적인 동반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린에어사 한 명과 연수생 세 명이 한팀이 되어 세 개 팀이 편성되었다. 나는 나이가 많다고 회장과 한팀이 되었다. 골프장은 호숫가의 홀 외에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필드만 보이고 주변 경치가 보이지 않아 답답함을 느꼈다. 우리나라 골프장처럼 티(Tee) 박스에 서면 멀리 산과 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과는 영 딴판이었다. 필드에는 오비(OB:Over Bound)가 없어서 공이 숲 속에 들어 가드라도 끝까지 따라가 칠 수 있으면 쳐야 한다. 아직 샷이 서툴다 보니 그린 밖으로 날아가는 공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나이 든 회장이 직접 뛰어가서 공을 찾아주는 친절을 보여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라운딩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라운딩을 마치고 골프장에 부설된 수영장에서 회사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살롯 지사장의 안내로 인근에 있는 호수(Dadin Lake)에서 보팅(Boating)을 즐겼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자연호수가 많이 형성되어 있어서 주말이면 모터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린에어사 자가용 보트로 쾌속을 즐겼다. 호수가 한없이 넓어서 꼭 바다에 나온 느낌이었다. 호수가 기슭에는 반쯤 숨어 있는 별장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부두 곳곳에 해상 주유소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호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14. UNCC 수료식
8월 2일 금요일 오전에 마지막 시험이 치러졌다. 시험방법은 필기시험과 담당교수와 마주앉아서 녹음기 틀어놓고 그동안 익혔던 상황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식이었다. 알아듣지 못할 때도 무슨 말이든 해놓고 보았다. 비록 동문서답이 될지라도 질문만 있고 대답이 없는 빈 테이프를 대전연수원으로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 때문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지도교수에게 그간의 노고에 감사한다는 편지를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UNCC에서 비즈니스 어학 과정의 모든 수업이 끝났다. 다음은 지도 교수 이반나에게 쓴 감사편지다.
Dear Mrs Ivanna
Thank you very much for your help and kindness. I think, you are very industrious woman. I learned to much English and American culture. That was greetings, party, dancing etc. There are very interesting of the visited to Microsoft, Glenayer, Alltel mobile. I was very enjoyed in UNCC with you and miss Susan. I'll miss you a lot, When come back to my country.
From : Jung Soo Kwon date: August 2 1996
수료식은 오찬(Farewell party)을 겸해서 진행되었는데 학교에서는 학장과
그동안 지도를 맡았던 교수님들이 참석했고 외부인으로는 홈스테이 주인(Host family)과 해외 유학 컨설팅회사인 아스팩 소장이 초청되었다. 내가 머물렀던 홈스테이 주인은 직장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수료식을 마치고 수료증과 함께 지도교수로부터 뜨거운 물을 부으면,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지도와 주화(州花) 주새(州鳥)가 나타나는 머그 찻잔 한 개를 선물로 받았다. 친절하게도 지도교수는 연수생 각자에게 감사카드를 주었다. 다음은 지도 교수 이반나가 내게 쓴 감사 카드내용이다.
Mr Kwon,
Thank you for all your hard work this summer.
I hope your fun on the U.S as much as
I enjoyed Korea. Ivanna Mann Theower. 1 Aug 1996.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라와 인종과 문화는 달라도 인간의 정이라는 것이 지구촌 어디를 가나 살아 있는 것인지, 헤어지기 서운한 정들이 모두의 가슴에 묻어 있었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허공에 뜬 소리처럼 또 만자는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돌이켜 보면 경험도 실력도 없이 도전해 본 미국생활에 혹시라도 중도 낙마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았다. 동료의 뒤 꼭지만 보고 따라온 미국땅에서 그동안 많이 보고 많이 배우기도 했지만, 눈치와 눈치 속에 외줄을 타는 심정으로 지낸 긴장 속의 한 달이었다.
첫댓글 오늘은 차트 4 까지 탐독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언제 그렇케 메모와 정리를 했는지 감탄스럽습니다.
시간, 장소, 이름등 이 글을 보니 그랬구나 싶을 정도입니다.
대단하신 코뿔소님 덕에 기억을 되살리면서....
내일 이후 차트를 탐독할께요...............
간간이 사진두 좀 올려주시면 무지 좋을것 같은데유 ?
어설픈 글 읽는다고 수고가 많습니다.
기억 저편에 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조각이라도 추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집안 결혼식에 다녀와서 차트 5 부터 쭈욱 .....
그옛날 승마, 요트, 사격, 골프 , 올림픽참관...........
생생하게 떠오르는군요.
코뿔소님이 아니면 이런 감회를 맛볼수 없었겠지요.
thank very much 권작가님.
읽어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분에 넘치는 격려까지.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