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
- 이웃 사랑 나라 사랑 위해 -
이 해 주
수필집 <덤으로 사는 인생> 박문하 추천으로 등단
수필부산문학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회원,한국시인협회 회원
수필집 <여백의 자유> 외 5권
시집 <위치> 외 4권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올해는 대한제국이 굴욕스런 한일 병합을 강요당한 해로부터 망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왕조의 멸망 과정을 돌이켜보면, 제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은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상을 받아 호의호식하고 권세를 누렸으며, 해방 후에는 그들의 자손들까지 부와 명예를 대물림했다. 이에 비해 온갖 고초를 겪으며 독립 운동을 했던 항일독립 투사와 그 후손들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요즘 우리 주위에서 곧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원래 이 말은 프랑스어로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 즉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오늘날 유럽 사회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을 지탱해 온 정신적인 뿌리라고 지적한다.
현재 세계화를 지향하는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사회 현상 속에서 우리는 가진 자들의 졸부 근성만을 개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에서도 떳떳하고 값진 자랑스러운 선각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얼마 전 KBS에서 방영한 ‘대자유인 이회영’이 그 좋은 예이다.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우당 이회영 육형제는 모두 독립 운동에 투신,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하고 독립 운동 중에 모두 순국하였다. 병으로 아니면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이회영의 형은 중국에서 독립 운동에 투신 중 굶주림으로 죽고, 육형제 중 넷째 이회영은 옥중에서 의문사했다.
사실 이회영 일가는 그 유명한 이항복의 후손이며, 정승을 무려 10여 명이나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이자 부자였다. 그런 명문가 형제들이 나라의 위기 앞에서 전 재산을 털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그리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하고, 독립 운동에 전 재산을 헌납하여 조선 사대부의 양심을 꼿꼿이 지켜 낸 것이다.
광복 후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비록 친일파들이 청산되지 못한 안타까움은 있으나, 이처럼 우리에게도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역사와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일깨워 주어야 할 것이다.
최근 세계 최고 갑부인 마이크로소프트 창시자 빌게이츠와 세계적 투자자인 워렌 버핏 회장이 억만장자들을 대상으로 재산의 절반 이상을 시회에 기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우리 사회에서도 빈부 격차의 심화로 고통받는 계층을 위해 사회 지도층과 부유층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에 앞장서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참으로 어려운 과제다. 무엇보다 부유층의 각성과 세제상의 혜택 등 제도적 보완을 해 가자면 아직도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진정으로 남모르게 베푸는 게 기부 문화인데, 남에게 보여 주는 ‘전시성’ 위주로 흘러가서야 되겠는가.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도 경주 최 씨 가문이나, 유한양행 등 지도층의 선례가 있고, 요즘은 숨은 독지가들의 선행이 자주 보도되고 있어 기부 문화의 앞날을 한결 밝게 해 주고 있다.
기부 문화와 자선 활동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데는 필수적이다. 이를 통해 사회 양극화를 줄이고 나아가서는 사회 통합도 가능케 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참여와 활성화를 촉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참뜻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니 어떤 미천한 일이라도 열심히 벌어서, 쓸 때는 떳떳이 보람 있고 빛나게 쓰라는 말이라고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
내가 평소 존경하는 재일 동포 가정 정환기(佳亭 鄭煥麒) 선생은 일찍 일본 나고야에서 ‘나고야한국학교’와 ‘아이치(愛知)상업은행’을 설립하는 등 사업가로서 저명한 분이다. 그런데 그는 지난 10여 년간 고향에 있는 진주교육대학의 발전을 위해 거금을 기부하고, 솔선하여 연구 장학재단을 마련하여 이제는 기금이 100억 원을 거뜬히 초과했다고 한다. 이처럼 초등교육의 중요성과 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니, 듣기만 해도 가슴이 뿌듯하다.
문득 그 분의 선친 운강 정환주(雲崗 鄭桓柱) 공의 기적비 제막식(1982.5.16.)에 참석하여 송시를 헌사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분의 고향은 진양군 사봉면 우곡리(隅谷里)인데, 항시 가난했던 고향을 잊지 못해 당시로서는 그리 여유가 없으면서도 향리의 전화(電化) 사업과 마을회관 건립, 장학 시혜(獎學施惠), 사봉초등학교의 교사 수리 등 향토 사업에 많은 사재를 털어 고향 사람들의 숙원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 분의 애향 정신을 기리기 위해 향민들이 기적비의 제막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의 감상을 나는 ‘우곡 선생과 그 후손’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써서 <수필> 제26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진주교대의 연구 장학 기금 마련에 있어서도 정환기 선생은 물론 아드님 통규 씨도 함께 앞장서고 있어 그때의 우곡 선생 얘기가 새삼 선명하게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처럼 대를 이어 묵묵히 이웃 사랑 나라 사랑을 실천해 가는 분들이 기부 문화를 확산시켜 간다면 우리 사회가 한결 건강해지고 성큼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2010. 9. 22. 경인 중추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