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어느 남자시인은 자신은 시를 창작할 때에 산고(産苦)를 느낀다고 말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다. 그 시인은 시 한 행을 완성할 때마다 착상한 시상(詩想)을 놓치지 않기 위해 걸려오는 전화도 안 받고, 적당한 시어를 선택하느라 토씨 하나에도 뜻이 달라진다며 국어사전과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골머리를 싸맨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이미 존재한 땅을 발견한 데 비해 시인은 미지의 땅을 만들기 때문이다.물론 시를 비롯한 모든 문학 장르가 그러하다. 그 괴로움의 정도가 여자의 산고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파도와 같은 리듬, 주술적인 언어의 신비로움이 만들어내는 바다를 지나는 길이다.”(시집 <PC통신으로 나왔다구요>, 문학마을, 1995, 서문에서)라고나 할까.
여기서는 시의 이해를 위해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운율․정서환기․산문과의 차이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동시에 시를 창작하는 분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뜻에서 시 창작 이론까지 곁들이며 설명한다.
문학의 발생 기원을 본다면 시가 먼저 나왔다. 시라는 장르의 일차적 특징은 운율(리듬)과 절제된 간결한 표현, 정서에 호소함 등에 있다. 시가 사람들을 흡입시키는 주된 요소는 운율이다. 그래서 시는 운치 있게 의미를 살려가며 행과 연을 구분하며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자연과 인간은 모든 움직임에서 음악성을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기에, 일상대화나 놀이에서 운율을 자연적으로 만들어왔다. 어린아이들이 잘 하는 전래 동요, 유희, 구구단 외우기 등에서 보듯이 우리 생활에서도 일정한 음수율이나 음악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생물의 맥박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서 파생되는 자연의 운율은 시의 운율과는 다르다. 시의 운율은 자연의 리듬이 주는 반복을 파괴할 때 비로소 보다 분명하고 의미 있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자연의 자동화된 리듬을 낯설게 하는 것이 바로 시만이 지니는 운율이다. 시에서는 음악처럼 소리의 일정한 반복 패턴이 있어야 언어예술의 미를 전달할 수 있다. 시조로 대표되는 정형시는 물론이려니와 단락 위주로 짜여진 산문시와 자유시에서도 운율을 눈에 보이지 않게 지니고 있다.
한편의 시가 전달하는 의미는, 운율 그리고 ‘시적 언어’라는 이름 하에 선택된 절제된 언어의 조탁(彫琢)이 풍기는 정서환기에 힘입어서 더욱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시어가 영탄법과 비유법으로 단순히 어감이 좋고 아름다운 말로만 된다는 것은 저 1930년대 박인환, 정지용, 김영랑 시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을 체감한 근대에 올수록 그런 경향은 정설에서 멀어졌다. 특히 해방 후의 김수영 시에서는 일상적이고 사변적인 시어가 투입되었다.
“風景이 風景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速度가 速度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拙劣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김수영의 <絶望>에서)
시에서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부터가 시인의 시적 사유를 짐작케 한다.
열매란 꽃이 피고 난 후에야 생기는 것인데 열매의 상부에 핀 것과 줄넘기 장난 같은 엉뚱한 짓(시 전체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뜻)을 하는 ‘너’. 그에 맞서 올바른 일을 하려 하나 군대의 작전처럼 어렵다고 느끼는 시적 화자. 생활난에 처한 시적 화자와 지향하고자 하는 내부 가치(공자의 사상)와의 충돌이다.
애초부터 시적 언어와 일상 언어(지시적 의미)에는 특별한 구분이란 없다. 시인이 그 시 안에서 선택한 단어가 그 전체 의미상 조화를 이루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기여한다면 그 시 안에서만은 ‘시적 언어’가 된다. ‘시적 언어’란 일상 언어를 바탕으로 상상력에 힘입어 비유되고 재창조된 언어를 뜻한다.
소설, 수필 등 산문은 본래가 정리된 생각이 문장으로 나타낸 ‘서술 또는 묘사’로서 표현된다. 산문은 ‘머리로 표현한다’라는 말 그대로 전달과 이해를 주목적으로 하지만 시는 그보다 우선 ‘가슴으로 표현한다’라는 말 그대로 ‘정서 환기’. ‘감정의 교감(交感)’이라는 효과를 우선한다. 그래서 시에 대해 설명은 ‘서정시(리리시즘)’에서 찾을 수 있다. 실지로 중고 국어교과서 수록된 시는 거의가 형태로는 자유시이고 내용으로는 서정시이다. 이 정도로 우리는 서정시에만 익숙해 왔다. 시의 발생을 보더라도 서정시가 시의 출발이었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김소월의 <진달래꽃> 끝연)에서 슬퍼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이별을 당한 시적 화자를 보자. 지극히 인간다운 솔직한 서정(감정)의 노출이다.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끝연)에서는 시적 화자의 강한 삶의 지향을 담았으면서도 비유법으로 형상화된 절제된 감정을 보이고 있다.
하나의 사건을 드러낸 서사시도 근본 흐름은 서정에 있다. 모든 시는 근본적으로 서정성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전개는 사건의 흐름에 있다해도 선택된 언어는 적어도 그 시 안에서는 시어다운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시를 잘 쓰기 위해 우선 갖출 요소란 개인의 풍부한 감성과 문학적 상상력을 들 수 있다. 남들이 일상에서 예사로 보고 지나치는 대상을 자신만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참신하게 바라보는 관점이 있어야 한다.
시는 흔히 말하듯 감상의 나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
때로는 시에서 주제 찾기를 반드시 문장으로 구체화하기 난감할 때가 있다. 시인만의 통찰력 있는 현실인식과 그에 따른 절제된 감정에서 우리가 충분히 교감했으면 설명이 필요 없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경우를 겪어보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여태까지 우리는 중등학교 국어시간에 시를 공부하면 으레 ‘님과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고운 봄날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라는 식으로 주제를 외우며 지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는 서로간에 “나는 너를 좋아해…”란 말을 한 마디도 건네지 않는다. 그래도 독자는 둘의 행동을 보면서 둘의 그런 감정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에서도 ‘보여주고 있는’ 내용 자체에서 주제를 알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시적 언어가 그 시 안에서 풍기는 어조, 분위기, 뉘앙스라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시가 절망에 처한 인간 삶을 노래했다 치자. 그 시에서 보여주는 것은 절망에 대한 그 어떤 분위기이다. 시인은 그 시에서 왜 절망에 처했는지 어떻게 하면 절망에서 벗어나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절망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여운 있게 보여주면서 언어 표현이 주는 감동과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그러기 위해선 시의 언어는 그만큼 시인만의 개성적인 표현력(흔히 ‘언어를 다룬다’라고 한다)에 힘입어 아무리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이라도 시 안에서는 구상어(具象語)로 형상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상력이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상상력이란 원래가 추상, 관념을 떠나서 구상성(具象性)을 띠어야 한다. 구상성이 있어야 독자에게 강하게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
다음 시들을 본다면 굳이 주제를 말로 드러내기 앞서 ‘보여 주고 있는’ 내용 자체와 분위기가 그대로 의미가 됨을 알 것이다.
“그것은 움직이는 화산/밀폐한 우주/간단없이 흐르는 시내//그것은 가혹한 천국/허망한 수렁/개방된 하늘//그것은 미련의 종말/욕망의 흔적/비밀의 궁전//그것은 움직이는 영원/기름진 갈망/마르지 않는 신비” (조병화 <女人>전문)
“죽음은 갈 것이다/어딘가 거기/草綠의 샘터에/빛 뿌리며 섰는 黃金의 나무…/죽음은 갈 것이다/바람도 나무도 잠든/한 밤에/죽음이 가고 있는 敬虔한 발소리를/너는 들을 것이다//죽음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가을 어느 날/네가 걷고 있는 잎 진 街路樹 곁을/돌아오는 죽음의/풋풋하고 의젓한 無名의 그 얼굴,/죽음은 너를 향하여/未知의 제 손을 흔들 것이다./죽음은/네 속에서 다시/숨쉬며 자라갈 것이다. (김춘수의 <죽음>전문) ”순간 순간을 위한/意志에의 불기둥을/붙안고 가는/긴 旅程에서//현실을/꿈으로/승화시키는 상황에의/공간 창조 과정에 핀/예술의 꽃/정수리여!“ (김석철의 <곡예사> 1연에서)
“시장에 가면 알 수 있다/사람들이 어떻게 거친/생의 바다를 노저어 가는가를/어떻게 스스로를 그 높고 푸르게 출렁이는/삶의 정수리 속에 잘 묶어낼 줄 아는가를/
(권현형의 <저녁 나절 시장에 가면>에서)
이 외 유명 시인의 시에도 이처럼 부담 없이 감동과 흥미를 가져다주는 시들이 있다.
짤막한 분량의 시에서는 많은 이야기나 사연을 담고 있다. 단지 여과된 채 표현한 것이다.
요즘 노래로 불리는 정지용의 <향수>가 시에서 말하는 주제와 시어를 그대로 살려서 수필이나 소설로 창작된다면 독자로선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를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사소한 것이든 아니든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산문에서도 흔히 나오는 내용이다. 다음 시에서는 이렇게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개인의 갈등을 나타내고 있는데 여러분이 산문에서 보았던 그런 갈등 내용과 그 느낌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 하네./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중략)/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신경림의 <목계장터>에서)
시인 황지우는 다음과 같이 시의 간결성에 대해 광고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했다.
“재빠른 인상 포착과 즉각적인 환기(喚起)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광고와 시는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시가 노리는 환기 효과는 우리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무의식을 통과하면서 발효된다. 우리는 그것을 인지(認知)하는 것이 아니라 감지(感知)하는 것이다. 또 시인이란 언어 이전의 어떤 내밀한 내용을 언어로 통화 가능케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광고 같은 인상(印象)과 환기의 기능적 관계에 있어서 시는 다양하고 열린 관계를 갖는다.” (황지우, ‘과대와 호화 속의 헐벗은 삶’, <한국인>1986.3.)
시인 이승훈은 다음과 같이 한 편의 시에는 시인의 인격이 숨어 있기에 현실인식이 그만큼 투철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는 황량(荒凉)한 자기 표현이다. 질서의 기원에 대한 무서운 감각, 환상에 의하여 지탱되는 어떤 최고의 윤리이다. 미지의 전율, 가혹한 미, 슬픔의 암호, 아아, 황량한 미사(彌撒:천주교의 의식)여.”(<60년대한국시선집>,범서출판사,198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