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遊九曲(선유구곡)
선유仙遊란? 신선이 노닌다라는 의미의 빼어난 경치를 갖춘 곳을 말한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아름답고 경치가 좋은 곳이면 그에 걸맞은 시詩도 함께 지어 즐겼다.
방방곡곡에 이런 지명을 가진 곳이 많다,
문경시 가은읍 소재 선유동계곡은 말 그대로 신선이 노닐만한 빼어난 경치를 갖춘 계곡이다.
선유동을 찾아와 노닐며 감상하고 그 느낌을 구곡시九曲詩로 남겨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선유동계곡은 대야산 계곡에 있는데 대야산의 서쪽 괴산쪽으로 흐르는 계곡도 수려하다
그래서 헷갈리기도 하는데 기호지방 유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괴산 선유동을 내선유동이라 불렀다.
그리고 영남 유학자들은 자신의 고장인 문경 선유동을 내선유동이라 하고,
괴산 선유동을 외선유동이라 했다.
고산자 김정호는 괴산 선유동을 그냥 선유동이라 하고, 문경 것을 내선유동이라 했다.
상주 출신 우복 정경세는 이렇게 노래했다.
(兩仙遊洞好相隣,양선유동호상린) 두 선유동 사이좋게 서로 이웃이 되었는데
(只隔中間一嶺雲,지격중간일령운) 중간에 있는 한 고개로 구름이 떠가는구나
(莫把名區評甲乙,막파명구평갑을) 이름난 명승을 두고 우열을 논하지 말게
(天將水石與平分,천장수석여평분) 조물주는 시내와 바위 공평히 나누었다네
정경세는 이런 시를 지으면서 문경의 것을 東선유동,
괴산의 것을 西선유동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구곡을 연구한 학자들은 수백 년 간 이곳과 인연을 맺었던 인물 중에서
선유동에 옥하정을 짓고 머물던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1744∼1809)를 주요 인물로 여긴다.
손재가 세상을 떠나고, 1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찾아온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1876∼1960)은
손재의 7곡에 2곡을 더해 노래함으로써 비로소 선유동은 9곡으로 완성된다.
정태진은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경술국치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와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활약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 봉천(奉天)에서 독립운동 근거지 개척에 참여하였고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여 서명한 후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19년 12월 24일 불기소 처분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60년 5월 21일 지금의 문경시 마성면 모곡리 181번지에서 사망했다.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은 문경에 머물며 선유동을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이곳 선유동을 찾은 건 광복 이태 뒤인 1947년 음력 5월이었다.
그때의 선유동의 감흥을 두 수의 서시序詩로 이렇게 읊는다.
十載經營此一遊(십재경영차일유) 십년을 꿈꾸다 이렇게 한번 찾아오니
洞門深處興悠悠(동문심처흥유유) 선유동문 깊숙한 곳 흥취가 끝이 없네
淸溪曲曲靈源瀉(청계곡곡령원사) 맑은 시내 굽이굽이 원두에서 흘러오고
老石磷磷積翠浮(노석린린적취부) 늙은 돌은 울룩불룩 푸른빛이 감도는구나
曠世蒼茫追隱跡(광세창망추은적) 아득히 오랜 뒤에 은자 자취 찾아보네
幾時粧點獲勝籌(기시장점획승주) 어느 때나 터를 닦고 좋은 계책 얻을까
金丹歲暮無消息(금단세모무소식) 한 해가 다가도 선약 얻을 소식 없으니
羞向人間歎白頭(수향인간탄백두) 부끄러이 세상을 향해 백발을 탄식하노라
일제로부터 이런 절경을 되찾았으니 일흔이 넘는 늙은 몸에도 감동은 충만했으리라.
현지 안내판엔 당시 외재가 여행하면서 지은 한시가 쓰여 있어
오늘날 우리들을 신선의 세계로 차근차근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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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曲. 옥하대(玉霞臺)
白石朝暾相暎華(백석조돈상영화) 흰 바위에 아침 햇살 비추어 밝게 빛나고
晶流寒玉紫騰霞(정류한옥자등하) 맑은 시내 찬 물방울 안개 붉게 피어오르네
閒尋題字迷難辨(한심제자미난변) 바위에 새긴 글자 한가로이 찾지만 분별하기 어렵고
只有白雲臺上遐(지유백운대상하) 옥하대 위 저 허공에 흰 구름만 떠있구나
선유칠곡의 마지막 굽이인 ‘칠리계’를 지나면 문득 수백 평 되는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선유구곡의 제1곡 옥하대이다. 너럭바위 주변 물가로는 큼직한 바윗덩이가 놓여 있다.
시인은 노래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이곳이 선유구곡의 제1곡이다"
옛날엔 새긴 글자가 있었으나 큰 물에 갈라져 지금은 그 장소를 알아낼 수 없다.
"큰 물에 갈라졌다" 그렇다면 넘어져 있는 어느 바위에선가 그 글씨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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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곡. 영사석(靈槎石)
以石爲槎喚作靈(이석위사환작령) 너럭바위 뗏목 삼아 신령을 찾아가다
中流停著歲冥冥(중류정저세명명) 시내 속에 정박한 지 아득히 오랜 세월
傍崖又有仙人掌(방애우유선인장) 곁의 벼랑에도 선인의 자취 남아있으니
一路窮源指可聽(일로궁원지가청) 한 길로 원두 찾으면 신선을 만나리라
시인처럼 뗏목 앞에 서서 물길의 근원을 올려다본다.
시인이 찾고자하는 근원은 무엇일까.
그건 구곡을 연구한 전문학자들의 지적처럼 ‘유가의 도(道)를 이룬 선인 일 것이다.
이제 신선의 세계에 동참할 자격은 어느 정도 갖춘 셈이다.
영사석 오른쪽의 구불구불 아름드리 노송은 승천하는 용이 변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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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곡. 활청담(活靑潭)
靜處從看動處情(정처종간동처정) 고요한 곳에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는 마음
潭心活活水方淸(담심활활수방청) 못 속이 활발하여 못물이 청결하네
本來淸活休相溷(본래청활휴상혼) 본래의 맑고 활발함 흐리지 말게
一理虛明道自生(일리허명도자생) 한 이치 허명하면 도가 스스로 생기리라
징검다리 위쪽은 시원한 계류가 약간 경사진 너럭바위를 흐르다
맑은 물은 고요히 멈춰 있는 듯하지만, 역시 끊임없이 움직인다.
멈추는 듯 하면서도 다시 흘러 그 움직임이 활발하다. 뭐든지 움직임을 멈추면 곧 흐려진다.
자연과 인간 세상의 이치다. 시인은 여기서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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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곡. 세심대(洗心臺)
虛明一理本吾心(허명일리본오심) 텅 빈 밝은 이치가 본디 내 마음이거늘
枉被紛囂容染深(왕피분효용염심) 부질없이 세상사에 깊이 물들었네
到得玆臺思一洗(도득자대사일세) 이 대에 이르러 한번 씻길 생각 하니
肯留滓穢分毫侵(긍류재예분호침) 어찌 묵은 때를 추호라도 두겠는가
널찍한 반석에 두부처럼 반듯하게 잘린 바윗덩이들은 건져낼 수 있을 듯 생동감이 넘친다.
주사위를 닮은 마름모꼴 육면체 바위에 새겨진 글씨, 세심대(洗心臺).
마음을 씻는 ‘세심’이야 삼척동자도 알만한 글귀지만 전서체 글씨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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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곡. 관란담(觀瀾潭)
潭上湍流瀉作瀾(담상단류사작란) 못 위의 급한 물살 쏟아지며 이룬 물결
到來潭處勢全寬(도래담처세전관) 이 못에 이르러선 그 기세가 잔잔하네
觀他有本元如是(관타유본원여시) 본래 이와 같이 근본이 있는 물결 보며
照得吾心一鑑寒(조득오심일감한) 차가운 수면 위로 내 마음 비춰보네
맑은 계류와 시원한 반석, 절묘한 글씨로 마음을 씻고 한층 밝은 발걸음으로 오르는데,
작은 바위 위에 구로천(九老川)이라는 암각이 선명하다.
구로(九老)는 지혜를 상징하는 아홉 노인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늙어 벼슬을 그만두고 낙양(洛陽)에 물러나 살면서 만든 모임인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에서 유래한 고사다.
선유동 계곡 경사진 너럭바위 위를 요란하게 흘러내리는 물결은 이 소에서 잠시 잔잔해진다.
물의 흐름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맹자의 말씀이 생각난다.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여울목)을 보아야 한다.
(觀水有術, 必觀其瀾,)
해와 달이 밝음이 있으니, 빛을 용납하는 곳에는 반드시 비추는 것이다.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유학자들은 흐르는 물을 그냥 단순한 사물로 보지 않고, 깨달음의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겸재 정선의 송하관수도(松下觀水圖)를 비롯한 많은 관수도(觀水圖)와
거창 "구연서원"의 관수루(觀水樓) 등 전국의 명승지에 많은 정자 이름엔 이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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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곡. 탁청대(濯淸臺)
臺前流水絲漪橫(대전류수사의횡) 대 앞으로 흐르는 내 일어나는 가는 물결
一濯長纓萬累輕(일탁장영만루경) 한 번 긴 갓끈 씻으니 온갖 근심 가벼워지는구나
想像損翁當日趣(상상손옹당일취) 손옹이 여기 거할 때 품었던 마음가짐을 상상하니
滄浪一曲玩心明(창랑일곡완심명) 푸른 시내 한 굽이서 오롯한 마음 밝아지네
탁청(濯淸)이라는 말은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를 떠올린다.
강남으로 귀양 와 있던 굴원이 거기서 만난 어부에게
‘다른 이는 다 틀리고 자신만의 곧음’을 내세우자,
어부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滄浪之水淸兮可 以濯吾纓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라고 노래한 고사다.
여기서 탁청(濯淸)이라는 말이 나왔다.
"외재 정태진선생"은 여기서 그렇게 맑게 산 인물을 떠 올린다.
바로 탁청대 서쪽에 세심정(洗心亭) 지어 놓고 살았던 "손재 남한조"이다.
상주 출신인 손재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초야에 은둔한 처사이다.
탁청대의 고즈넉한 풍경. 맑은 계류는 세속의 공명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몰두한 선비,
우리는 맑고 깨끗한 계류에 갓끈을 씻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니 어떻게 세속의 때를 지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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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곡. 영귀암(詠歸巖)
臨流盡日弄晴暉(임류진일롱청휘) 물가에서 온종일 맑은 풍광 즐기다가
風浴隨時可詠歸(풍욕수시가영귀) 때 맞춰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네
不必沂雩能撰志(불필기우능찬지) 기우, 무우 아니어도 뜻을 펼 수 있으니
巖臺自足振春衣(암대자족진춘의) 바위 대에서 자족하며 봄옷자락 펄럭이네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는 뜻의 영귀(詠歸)는 공자와 증석(曾晳)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인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와 대화를 나누다
제자들에게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을 한마디씩 말해보라고 했다.
모두들 벼슬하여 펼쳐 보일 정치적인 야망을 말한다.
그런데 증석은 뜻 밖의 대답을 한다.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대여섯 명과
동자(童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
벼슬에는 뜻이 없고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희망한 것이다.
외재선생은 노래한다.
봄옷을 펄럭이며 자연 속에서의 삶을 고대하던 시인의 모습이 신록의 산하에 겹쳐진다.
영귀암 위에 쓰인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만족하고 노래하며 돌아오는 무욕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증석일까? 남한조일까? 시인의 모습일까?
바위에 앉아 가만히 귀 기울이면 바람소리에 묻어 들려오는 새소리 물소리,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한층 더 성숙해지는 선유동. 계곡을 거슬러 오르며 외재선생의 정신은 점점 더 고양돼간다.
떨치기 아쉬운 발걸음 겨우 떼어 수십 보 오르니 바위가 층을 이루고 있는데, 자연의 조화가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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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곡. 난생뢰(鸞笙瀨)
琮琤石瀨奏笙鸞(종쟁석뢰주생란) 반석 여울 물소리는 생황을 연주하듯
縹渺仙踪底處看(표묘선종저처간) 가물가물 신선 자취 어디서 찾아보나
從古閬林多怪秘(종고랑림다괴비) 예로부터 선계엔 신비스러운 일 많으니
雲間鷄犬是劉安(운간계견시류안) 구름 사이 닭과 개는 유안이 기르던 것
난생(鸞笙)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난(鸞) 새와 악기인 생황(笙簧)을 뜻하니
이는 곧 난을 타고 생황을 부는 신선이 노는 뢰(瀨)는 여울이다.
여울에 흐르는 물소리가 바로 신선의 피리 소리와 같음이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덧 신선의 세계에 들어 선 것이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여울물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난새의 피리소리.
외재선생은 저 구름 사이에서 신선의 흔적을 본다.
이 노래 마지막 구절의 ‘유안의 닭과 개’는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임종할 때
남긴 단약을 먹은 닭과 개도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를 말한다.
난생뢰를 떠나는데도, 신선의 생황소리는 여전히 귓전에 울린다.
일곱 번째 굽이인 영귀암. 선유구곡의 제8곡 난생뢰 앞으로 맑은 계류가 흘러간다.
여기가 바로 절정의 선계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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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곡. 옥석대(玉舃臺)
全石跨溪鏡面開(전석과계경면개) 계곡에 누운 반석 위엔 거울 같은 맑은 물
凹爲泉瀑峙爲臺(요위천폭치위대) 움푹한 곳 폭포 되고 불룩한 곳 대 되었네
仙人遺寫今何在(선인유사금하재) 선인이 남기고 간 신발 지금 어디 있는가
應有雙鳧葉縣來(응유쌍부엽현래) 섭현에서 날아온 오리 두 마리 있으리라
평평한 너럭바위 앞면엔 옥석대(玉舃臺)라는 세 글자가 가로로 새겨져 있다.
옥석(玉舃)은 옥으로 만든 신발을 말하는데, 이를 득도자가 남긴 유물이 아닐까.
계곡 오른쪽에 솟아 있는 바위엔 "고운 최치원선생"의 글씨로 알려진 "선유동(仙遊洞)"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신선의 세계이지만, 인간들이 빚어놓은 이야깃거리도 많은 공간이다.
우선 옥석대 바위 위 한쪽에 쓰인 학천(鶴泉)이란 두 글자.
이 글씨의 주인공은 바로 을사오적의 한명인 이완용(李完用)이라 한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그가 이 신령한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으니
이 또한 후안무치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옆엔 자기 이름도 새겼는데,
어느 목동이 이를 더럽다고 생각하여 쪼아서 지워버렸다는 웃지 못할 전설,
계곡 건너 학천정(鶴泉亭)은 도암(陶菴) 이재(李縡 ; 1680∼1746) 선생을 기려 세운 것이다.
도암은 대야산 용추(龍湫) 부근에 둔산정사(屯山精舍)를 세우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세상을 떠난 뒤 세월이 오래돼 퇴락하자 鄕內의 사림들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학천정 오른쪽 바위벽의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힘찬 글씨는
산은 높고 물은 유유(悠悠)하게 흐른다는 뜻으로,
군자(君子)의 덕이 높고 끝없음을 산의 우뚝 솟음과 큰 냇물의 창창흐름에 비유한 말이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재를 기리는 글귀일 것이다.
계곡 오른쪽 평평한 바위 벼랑 우측엔 ‘남근흥암(南近興巖) 서접화양(西接華陽)’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흥암(興巖)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모신
경북 상주의 흥암서원(興巖書院)이고, 화양(華陽)은 우암 송시열을 모신
충북 괴산의 화양서원(華陽書院)을 말한다.
노론 유학자들이 새겨 놓은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선유구곡의 마지막 장소로서 속세의 일을 초월할 수 있는
제9곡은 인간이 빚은 세속의 공간이기도 하다.
최치원이 썼다는 선유동 글자 아래서 지나온 물길을 그윽이 바라본다.
저 물줄기는 폭포, 담, 소, 여울 등을 만들어 가며 선유동 절경을 빚어 갈 것이다.
그 신령스런 물줄기를 거슬러 올랐으니 오늘 우리 모두 신선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고운의 흔적인 듯 낙엽하나 허공에 빗금을 긋는다.
안동처사 택전 윤동원 씨 글을 가감하여 나의 예서 글씨를 첨가하여 포스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