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川李氏 始祖 및 本貫의 由來
영천이씨(永川李氏)의 본원(本源)은 신라 유리왕 (新羅 儒理王) 9년(서기 32년)에 신라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씨족집단(氏族集團)인 진한(辰韓)당의 육촌(六村)을 육부(六部)로 개칭(改稱)할 때,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을 급량부(及梁部)라 바꾸어 부르고 제일성(第一姓)으로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한 급량대인(及梁大人- 알평공)에서 비롯되었으나 후 세계(世系) 가 실전(失傳)되어 분명하지 않으므로 고려초(高麗初)에 평장사(平章事)벼슬을 지내신 휘(諱) 문자한자(文漢) 할아버지를 시조(始祖)로 뫼시고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며,
시조(始祖) 할아버지의 칠세손(七世孫)으로 고려 신종(高麗 神宗)때 경주 별초군(慶州 別抄軍)이 운문적(雲門賊)과 부인(符仁) 동화(桐華) 양사(兩寺)의 승도(僧徒)들을 이끌고 일으킨 반란(反亂)을 진압(鎭壓)하시고 그 공(功)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신 휘(諱) 극자인자(克仁) 할아버지께서 광록대부(光祿大夫)의 벼슬에 오르시고 익양(益陽-永川의 옛 이름) 군(君)으로 봉(封)하여 지셨고,
익양군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영양군파의 파조(派祖)가 되신 휘(諱) 대자영자(大榮) 할아버지께서 고려조에서 봉의대부(奉議大夫) 정동행 중서성 신호위 대장군 겸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벼슬에 오르시고 성근이란 호를 하사 받았고, 익충좌명공신 삼중대광 보국 영양군(翊忠 佐命功臣 三重大匡 補國 영양군(永陽-영천의 옛 이름)에 봉작(封爵)되었으며,
원(元)나라에서 봉승량 겸 권농방어사의 벼슬을 하시고 크게 공을 세워 자금어대(紫金魚帶)를 하사 받으시고,
고려에 돌아오셔서는 울주사(蔚州事)의 벼슬을 지내신 휘 중자영자(仲榮) 할아버지께서 울산군에 봉하여 지셨고,
고려조에서 찬성판삼사(贊成判三司)의 벼슬에까지 오르신 휘 호자(瑚) 할아버지께서 영양군에 봉하여 지셨고,
李朝初의 개국공신으로 예조 호조(戶曹) 병조판서(兵曹判書)등의 벼슬을 두루 지내시고 판 중추원사의 벼슬에까지 오르시고 정경이란 호를 하사 받으신 휘 응(膺)字 할아버지께서 영양군에 봉하여 졌으며
이조초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으로 예조(禮曹)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거쳐 우찬성(右贊成)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에까지 오르시고, 성청(成청)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신 휘 승子손子 할아버지께서 영양군에 봉하여 지는 등 후손들이 영천에서 代代로 살았기 때문에 본관(本貫)을 영천으로 하게 되었다.
우리 영천이씨(永川李氏)는 인구 십오만을 훨씬 웃도는 것으로 추산되는 대족(大族)으로 칠세(七世)에 이르러 4파(四派)로 나누어졌는데
장손이신 휘 광자순자(光純)하시는 할아버지의 현손(玄孫)이약할아버지는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의 외조부 되시며 고려조에서 선관서승(膳官署丞)의 벼슬을 지내신 휘 약자(約)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서승공파를 장파로 하고
고려 때 상장군으로 광록대부의 벼슬에 오르신 익양군 휘 극인(克仁)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익양군파를 차파로 경주별초군의 반란을 형(兄)되시는 익양군 할아버지와 함께 진압(鎭壓)하시고 그 공으로 상장군에 오르는 휘 수자춘자(守椿)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상장군공파
고려조에서 호부상서의 벼슬을 지내신 휘 세자화자(世和)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상서공파 등으로 분파된 상파가 있고,
익양군 할아버지의 후손(後孫)이나 소목(昭穆)을 밝히기 어려워 영양군 휘 대자영자 하시는 할아버지를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영양군파(永陽君派)와 울산군(蔚山君) 휘 중자영자(仲榮) 할아버지를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울산군파(蔚山君派)등 대파가 있고,
영양군 대자영자(大榮)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육세에 이르러
고려조에서 소부소감(小府小監)의 벼슬을 지내신 휘 백자고자(伯古)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소감공파(小監公派)와 보문각 대제학 판도판서(寶文閣 大提學 版圖判書)의 벼슬을 지내시고 충정(忠貞)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신 고려말의 두문충현(杜門忠賢)이신 호 남곡(南谷) 휘 석자지자(釋之) 할아버지를 파조(派祖)로 하는 남곡공파(南谷公派)와 고려말에 봉선대부(奉善大夫)로 군기사(軍器寺)의 소윤(小尹)벼슬을 지냈으며,
관향지인 영천에서 예안(禮安-安東)으로 이거(移居)하여 예안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신 호(號) 낙은(洛隱) 휘 헌자(軒)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소윤공파(小尹公派)와 고려말에 중랑장(中郞將)의 벼슬을 지내신 휘 간자(侃)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랑장공파와 이조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의 벼슬을 지내신 호 송헌(松軒) 휘 은자(殷)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감사공파(監司公派)와 생원(生員)이신 휘(諱) 안자방자(安邦)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생원공파(生員公派)와 영양군 대자영자(大榮) 할아버지의 칠세손으로 이조 태종(李朝 太宗)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이며 승문제조 공조판서(承文提調 工曹判書)의 벼슬을 지내셨고 함흥으로 이거 (移居)하여 관북영천이씨(關北永川李氏)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신 휘 백자(伯) 할아버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등 칠파(七派)가 있고, 아래에 많은 지파(支派)를 거느리고 있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서 이인(仁)과 이당이 좌우위 상장군을, 국보(國寶)가 공조전서를 역임했다.
고려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석지(李釋之)가 있다.
고려말에 보문각 대제학 판도판서의 벼슬을 지내셨고 고려가 망하고 이조가 등극함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용인남곡(龍仁南谷)에 은둔하시며 충절(忠節)을 지키신 두문충현(杜門忠賢) 으로 충정(忠貞)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신 석자지자(釋之) 할아버지,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에 불복, 절의를 지키고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고려말 문한당(文閒堂) 이감(李敢)은 창왕 때 문과에 장원,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거쳐 전라 관찰사(全羅 觀察使)등 벼슬을 지내시고 물러나 부모님을 시봉(侍奉)함에 있어 효성(孝誠)이 지극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에서 전후 육년간을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할아버지의 효행(孝行)을 가상(嘉尙)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 받으신 호 문한당(文閒堂) 휘 감자(敢) 할아버지,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될 때 북청(北靑)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효성이 자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 졌다.
이자용(李子庸)은 우왕조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침입을 금하도록 청했고, 138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가 북원(北元)과 수교하는 사실에 격분한 명나라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남곡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던 이석지
궁중비사 태조-태종편
이응(李膺)은 일찌기 문과에 급제하여 1400년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영양군에 봉해졌으며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예조판서(禮曺判書), 호조판서(戶曺判書),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병조판서(兵曺判書)를 지냈다. 태종의 척불정책(斥佛政策)을 도왔고, 1403년 우대언(右代言)으로 계미자주조(癸未字鑄造)에 공이컸다.
그의 아들 위양공(威襄公) 이순몽(李順蒙)은 세종 때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의 토벌에 공을 세우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으며 뒤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올랐다. 이조 세종(李朝世宗) 때의 무관(武官)으로 대마도(對馬島)위 정벌과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우셔서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의 벼슬에 까지 오르시고 위양(威양)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 받으신 휘 순자몽자(順夢) 할아버지,
이종검(李宗儉)은 직제학 안직(安直)의 아들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직제학·대사간 등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훈(錄勳)되었으며, 벼슬에서 물러나 부모님을 시봉(侍奉)함에 효성이 지극하더니 잡닭이 학(鶴)을 낳은 상서(祥瑞)로운 이변을 가져온 일도 있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문종(文宗)이 이를 듣고 효우당(孝友堂)이란 시호(諡號)를 내리신 휘 종자검자(宗儉) 할아버지
이보홈(李甫欽)은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으로 류방선(柳方善)의 문인으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박사(集賢殿傅士)를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사창법에 관한 건의를 하여 세종 30년(1448) 대구지역에서 시범적인 시행을 하였고, 이 법이 효과를 거두자 계속적인 실시를 위해 힘을 다하였다.『세종실록』의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단종 손위 후 순흥(현재 영주)부사로 있으면서 그곳에 유배된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박천(博川)에 유배된 후 순절했다 사육신(死六臣)에 한 분을 더하여 사칠신(死七臣)이라 일컬어지며 충장(忠莊)이란 시호를 하사 받으신 휘 보자흠자(甫欽) 할아버지. 정조때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공주숙모전,순흥금성단,영월32배식단,청원죽계서원,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寺)와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금성단 신숙주의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는 영천이씨가 배출한 당대의 명신이며 대표적 학자였다. 그는 현감(縣監) 이흠(李欽)의 아들로서 연산군 4년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正言), 지평(持平) 등을 거쳐 여러 고을의 목사(牧使), 부사(府使) 등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으며 뒤에 부제학(副提學), 호조참판(戶曺參判),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에 이르러 청백리에도 녹선되었다. 그는 자연을 노래한 시인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농암가(聾巖歌)", "춘민곡(春珉曲)" 등의 시조와 "어부가(魚父歌)"를 개작(改作)했고 "농암문집(聾巖文集)"을 남겼다.
농암사당
그의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淑梁)은 이퇴계(李退溪) 문하의 성리학자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도 이황의 문인으로 주역(周易)에 뛰어났으며, 《중용(中庸)》·《심경(心經)》《고문전후집(古文前後集)》《가례(家禮)》 등을 주석(註釋)했다. 그는 선조 때 이름난 선비 9명중 제4위로 뽑혀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로 호종했다.
괘편(掛鞭) 이영(李榮)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외직으로 군수·부사 등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고, 명종 때 병조참판·제주목사·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이 밖의 인물로는 선조조에 무과에 급제,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모아 모령(毛嶺)에서 적을 대파하고 기호·호서 지방의 의병과 합체, 활약하다가 전사하여 충신 정문이 세워진 이덕남(李德男)이 있다.
상기 외에도 수많은 충효절의(忠孝節義)와 도덕문학(道德文學)이 계셨으니, 우리 영천이씨는 7봉군, 시호:12명, 공신:27명. 정1품(국무총리):1명, 종1품(부총리):11명, 정2품(장.차관급):271명,찬성사(정2품):4명, 평장사(정2품):7명,판서(정2품):20명. 대제학(정2품):3명,제학(종2품):9명, 상장군(정3품):2명,대장군(종3품):3명,청백리(2):이현보,이영, 기로소(3):이현보,이린,이희발,불천위(2):이현보,이덕홍등 단종사화로 300년의 멸문지화에도 불구 많은 문무충신들이 배출되었으므로 우리 후손들은 永川李氏로 태어났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조상님의 빛나는 업적에 부끄러움이 없는 문중은 훌륭한 나라의 기둥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와 사적(事蹟)은 실전(失傳)되었으나 2005년 영천시 오미동 (永川市 五味洞) 산121번지에 시조공제단소가 설립되었으며,존덕사(尊德祠)에서 시조 할아버지와 익양군(益陽君) 할아버지, 영양군(永陽君) 할아버지 삼현(三賢)을 뫼시고 每年 二月 中丁에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