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5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3월 17일(주일)
레위기 16:1-10, 20-22
“삶을 리셋(reset)하라!”
우리는 지금 사순절((四旬節)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四旬節/Lent)은 부활절을 앞두고 약 40일간 몸과 마음을 정결하고 경건하게 하며 지내는 기독교의 절기를 말합니다. 곧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이지요. 특히 이 절기는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을 생각하며 매일 성경을 읽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빕니다. 말하자면 자기를 성찰하는 거지요. 또한 금식하기도 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자기를 성찰하고 금식하는 행위는 형식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내 삶을 돌이키는 게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잡는 회개(悔改)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를 회복하는 거예요. 성서에서 죄를 바로잡는 회개(속죄)의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의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예언자들의 시각입니다.
제사장의 시각에서 보면, 죄는 ‘얼룩’(stain)과 같습니다.
“이날은 너희의 죄를 속하는 날, 너희가 깨끗하게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지은 온갖 죄가 주 앞에서 씻기는 날이다.”(레 16:30/표준새번역)
여기서 두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속죄하다’는 뜻의 카파르(כְּפַר/kaphar/to atone)와 ‘깨끗하게 하다’, ‘말끔하게 씻다/정화하다’는 뜻의 타헤르(ר/taher/to clean)입니다. 카파르는 원래 ‘덮다’는 뜻이 있습니다. 얼룩진 옷을 깨끗한 천으로 덮어 겉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얼룩은 여전히 남아 있지요. 그래서 타헤르가 중요합니다. 타헤르는 얼룩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시각에서 회개는 속죄하고(카파르), 깨끗하게 해주는(타헤르) 것으로 본 거예요.
반면 예언자들의 시각에서 죄는 길을 잃거나, 길에서 벗어나거나,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는 거예요.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일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면서 일어난 일입니다.-(『오경의 평화강론』, 랍비 조너선 색스 지음/김대옥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210-211)
그러니까 예언자들이 말하는 회개는 ‘돌이키다’, ‘돌아가다’(슈브/שׁוּב/to return)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회개는 돌아오는 것,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지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지요. 이 ‘회개’(속죄)를 가리켜 유대인들은 '테슈바‘(תשובה)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회개‘(테슈바)는 자기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 때문에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여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테슈바‘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테슈바’(תשובה/회개)란 히브리말에는 참 흥미로운 의미가 담겨 있어요. 히브리말은 뜻글자인 한자와 비슷한 매력이 있지요. 히브리어 단어인 ‘테슈바’는 히브리어 여섯 번째 알파벳인 '바브(ו)'가 포함되어 있어요. '바브(ו)'는 갈고리(hook), 못, 사람이란 뜻이 있고요. 또 숫자 값은 6이고, 상징적 의미는 ‘붙이다’입니다. 그리고 단어의 첫머리에서는 접속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접속사 ‘그리고’란 뜻의 ‘워에트’(חוְ)'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속에 ‘바브(ו)'란 글자가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바브’는 곧 ‘하늘’(하샤마임)과 ‘땅’(하아레츠) 사이를 연결하는 힘이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브’의 뜻을 알면 테슈바(회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힘이 됩니다. 곧 하나님과 나 사이를 잇는 힘이지요.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테슈바’(회개)를 일종의 기계를 수리하는 거라고 여깁니다. 신앙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는 회복인 거예요. 이런 사람을 유대인들은 ‘바알 테슈바’(baal teshuva), 곧 회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회개가 바로 전인격의 방향 전환이지요. 말하자면 회개는 자기 삶의 새 출발인 거예요.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속죄일은 히브리어로 '욤 키푸르'(יום כיפור)입니다.
욤 키푸르는 '날(day)'을 뜻하는 '욤(yom)'과 '속죄(atonement)'를 뜻하는 '키푸르(kippur)'가 합쳐진 말입니다. 유대 달력으로 새해(7월)의 열 번째 되는 날을 말한다. 양력으로 7월 10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매년 7월 10일에 속죄의 날(화해의 날)을 통해 속죄제를 드리고 성막을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불의가 제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속죄의 날은 1년에 한 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 불의, 죄악을 깨끗하게 하여 새롭게 출발하게 하셨지요. 이런 점에서 속죄의 날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베푸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의 날이었습니다.
비록 사람이 회개한다고 해서 새롭게 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속죄의 날은 실제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날이지요.
그리고 흠 없는 희생제물을 통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면 흠 없는 예수의 피를 통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제사장의 중재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는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몸을 단 한 번에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셨고(히 10:12), 그분의 죽음으로 성소의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피로 다른 중재자 없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사귀게 되었다는 뜻이에요(히 10:19~20).-(『오늘을 위한 레위기』, 김근주 지음, IVP, P.349-351)
구약의 속죄 제사가 희생제물로 완성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어요. 뿐만 아닙니다. 구약의 아자젤 염소 역시 예수에게서 완성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와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돌아올 수 없는 광야로 아자젤 염소가 보내지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해 우리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속죄 제사든지, 아니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게 허무할 뿐입니다. 그러나 속죄 제사든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든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가 새롭게 출발하고, 새 삶을 열어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매년 한 번 드리는 속죄의 날은 다시 일상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 속죄의 날, 곧 화해의 날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실제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속죄의 날, 곧 속죄일에 관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아론은 두 아들을 성소에서 잃었습니다. 늘 피워두는 번제 단의 불을 취하지 않고 다른 불을 담아 하나님 앞에 분향했기 때문입니다(레 10:1~2). 그런데도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첫 속죄일 제사 예식을 하게 됩니다. 본래 지성소는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었어요. 아론이 지성소에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는 까닭은 그 속죄소(판) 위에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속죄소는 본래 ‘덮개’란 뜻인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좌, 또는 발등상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론을 구별하시고 거룩하게 하셔도 그는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정하신 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성소에 들어가는 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정하신다는 거지요. 아론도 역시 하나님이 정하신 때 지성소에 들어가는 거예요. 특히 아론의 두 아들 아비후와 나답의 죽음이 1절에 언급된 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대제사장이라도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론이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아론은 속죄 제물로 수송아지를, 번제물로 숫양을 준비합니다. 아울러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속죄 제사하기 위해 평상시 입었던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 검소한 세마포 옷을 새로 빨아 입었지요. 대제사장은 세마포로 된 속옷과 속바지를 입고 띠를 두르고 머리에 관을 씁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입는 옷은 바로 흰색으로 된 세마포 옷입니다.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입을 세마포 의복은 이런 뜻이 있습니다. 세마포 옷은 겸손한 태도의 표현이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자각의 표현일 거예요. 하여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관주∙해설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 해설, 대한성서공회, P.170)
그리고 속죄 제사를 마친 뒤 대제사장은 다시 평상복장으로 갈아입습니다. 속죄일에 세마포로 갈아입는다는 건 그만큼 속죄 제사를 거룩하게 구별해야 함을 강조한 거지요. 아울러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후에 물로 몸을 씻는다는 것도 속죄 제사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 3~4절이 아론이 준비한 속죄 제물과 의복이라면 5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한 제물입니다. 속죄 제물은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숫양 한 마리입니다.
5절에서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회중이 준비한 속죄 제물이 수송아지가 아니고 숫염소 두 마리였을까요?
원래 회중을 위한 속죄 제물도 수송아지이지만 수송아지는 이미 아론이 자신을 위해 속죄 제물로 썼기에 숫염소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여기서 숫염소 역시 수송아지처럼 속죄 제물로써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아론은 숫염소 두 마리를 위하여 제비들을 뽑아야 하니,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한 것이고, 한 제비는 아자젤을 위한 것이다.”(직역 성경)
회중을 위해 숫염소 두 마리가 준비되었는데, 둘 중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사용되고 다른 한 마리는 광야로 내보냅니다. 이런 점에서 두 마리 모두 속죄 제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때 광야로 내보내는 염소를 ‘아자젤’(עֲזָאזֵל)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아자젤 염소’에 대해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인 숫염소 두 마리를 끌고 성막 문 여호와 앞에 둡니다(6절).
그리고 그는 제비들을 염소들 위에 둡니다. 한 제비에는 “여호와를 위하여”(יהוה)라고 적혀 있고 다른 제비에는 “아자젤을 위하여”(עֲזָאזֵל)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란 제비가 놓인 염소는 속죄제로 드립니다. 하지만 “아자젤을 위하여”란 제비가 놓인 염소는 우선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둡니다. 그런 다음 첫 염소를 속죄제로 드린 뒤에 아자젤 염소는 광야로 내보냅니다.
특히 20~22절에 나온 아자젤(scapegoat) 염소 예식은 아론이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숫염소 머리에 손을 얹고 동시에 죄를 고백해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죄가 그 염소에게 지워져요. 이때 한 남자가 이 염소를 광야로 끌려 나가서 자유롭게 놓아주지요.
하여 그 숫염소가 이스라엘의 죄를 알지 못하는 외딴곳으로 가버리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숫염소를 광야로 끌고 가서 내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멀리 보내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아자젤 염소 예식은 속죄일에 상징적이면서 현실적으로 죄를 없애는 예식인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불의, 부정, 모든 죄를 염소에게 대신 지워 광야로 내몰아 죽게 합니다.
여기서 아자젤 염소는 곧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를 암시합니다. 히브리서는 레위기 16장을 근거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죽음으로써 사람이 바치는 모든 제사에 마침표를 찍는 속죄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보았어요(히 9~10장).
그러니까 속죄의 날에 핵심은 속죄 제사와 아자젤 염소 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속죄일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죄 제사로 드린 수송아지와 숫염소의 피를 바르고 뿌리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을 행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부정과 그들의 모든 죄뿐만 아니라 더럽혀진 제단까지 정결해지고 거룩해지는 거예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과 모든 죄는 죄를 범한 사람뿐만 아니라 성막을 더럽히고 지성소까지 더럽히게 됩니다. 하여 속죄 제사 피는 지성소에서 시작하여 번제 단까지 뿌리지요. 이런 과정은 가장 깊은 곳에서 바깥까지 더러움을 없애는 거지요(*성막 평면도 ppt).-(위의 책, P.335)
이렇게 성막까지 정결하게 끝마무리한 다음 속죄 제물의 기름은 제단 위에 불태웁니다(25절). 아자젤 염소를 끌고 갔던 사람은 입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뒤에 진 안으로 들어갑니다(26절). 물로 몸을 씻는다는 건 마무리처럼 보이지만 실상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속죄일에 드리는 속죄 제사는 성소 정결에 모든 초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이스라엘의 속죄일 예식은 어떤 특정한 죄에 방점이 찍힌 게 아녜요. 하나님 앞에 새로운 출발, 곧 정결을 통한 새 출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예식을 통해 성소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와 부정에서 깨끗하게 되었던 거지요.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속죄일은 하나님 앞에 정결한 백성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리셋 기능을 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컴퓨터나 핸드폰이 고장 나면 처음 산 상태로 초기화(reset)해서 사용해야 하듯이 우리의 삶도 때때로 속죄일과 같은 리셋기능이 필요하지요. 리셋은 초기화란 의미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돌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새 삶으로 초기화(初期化)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scapegoat) 예수 그리스도만이 리셋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예요. 하여 하나님께로 인격을 전환하는 사람, 곧 바알 테슈바(baal teshuva)가 되시기를 빕니다.
기계도 오래 쓰다 보면 고장이 납니다.
기계가 계속 돌아가려면 기름칠하고 수리해서 써야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 자신의 삶도 얼룩진 옷에 깨끗한 천을 덮는 카파르(כְּפַר/kaphar/to atone)에 머물지 말고 그 얼룩을 완전히 없애고 깨끗해지게 하는 타헤르(ר/taher/to clean)가 되십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속죄일 규례는 이스라엘이 영원히 지켜야 하는 규례(29/34절)입니다. 그렇듯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똑같이 지켜야 할 삶의 규례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의 속죄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속죄일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를 기억하는 근거와 또한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새 출발의 리셋기능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기도 / 날마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
부정과 불의한 세상의 죄가 가득한데 우리 역시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지 않은지요? 이스라엘은 속죄의 날에 속죄제와 아자젤 염소 예식을 통해 백성의 부정과 불의와 모든 죄를 정결하게 했습니다. 또한 성소까지 정결하게 했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완성된 거지요.
주님,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도 속죄일과 같은 리셋기능을 갖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 예수를 기억하고 자꾸만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옵소서. 그게 신앙을 처음으로 돌리는 삶이 될 줄 확신합니다. 어린양 예수만이 새 출발의 유일한 근거인 줄 믿고 날마다 하나님과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바브/ו)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