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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시즌부터 대학축구 무대에 뛰어든 김의도(금호고 3년)는 광주FC가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차세대 유망주이다.
김의도는 전남 여주미평초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6학년시절 차범근 축구 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프랑스 유학생활을 통해 선진축구를 배워 2년 만에 귀국, 전통의 명문 서울 경신중학교를 거쳐 광주FC 유스팀 금호고 졸업을 앞두고 내년 3월부터 건국대학교 축구부 유니폼을 입는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주 포지션인 김의도는 재치 있고 빠른 드리블이 장점이며, 축구에 대한 뛰어난 감각도 지니고 있다. 패싱력과 경기를 읽는 시야 역시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더군다나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투지도 강한 것이 장점. 플레이 스타일을 살펴보면 패스도 즐기지만, 그보다는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더 선호하는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굳이 비교한다면 스페인을 대표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인 다비드 비야(바르셀로나)와 여러모로 비슷한 느낌을 준다.
김의도는 올 SBS 고교클럽 챌린지리그에서 당초 '고교축구 최고의 미드필더'라고 평가받으며 시즌을 준비한 것에 비하면 기대만큼의 활약을 펼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리그중 부상과 슬럼프가 찾아오면서 페이스가 떨어진 원인이다. 그러나 광주FC는 김의도를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장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진학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김의도의 타고난 축구 감각을 생각해볼 때, 대학무대에서 서서히 적응하고 경험을 쌓게 한다면 그 성과는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올 수 있다는 계산이다. 중고교 시절에 보여줬던 그의 번뜩이는 감각은 대학축구 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여수미평초, 성은준 감독에 의해 축구부에 입문하다.
▲여수미평초 시절 그해 차범근 축구 대상을 받으며 초등학교 최고의 선수로 지칭 받았다. ⓒ 사진제공: 연합
김의도가 처음 축구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에 3학년 때였다.
전남 여수에서 골목축구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던 김의도, 재능을 알아 본 당시 여수미평초 성은준 감독이 아버지를 설득해 축구부에 입문을 시켰다.
"축구부에 입문해 처음에는 5~6학년 형들이 볼 차고 노는 것을 보고 저도 너무 하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3학년이라 게임은 안 넣어주고 매일 기본기만 시키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오는데 그 당시 기본기를 수없이 반복한 결과, 지금에 왔어 패스와 볼트래핑 등 축구에 대한 기본적인 기초기술들이 동료들보다 월등하다고 봐요. 당시 아버지께서 학교운동 이후에도 하루에 100~200번씩 패스 연습을 하라고 하셔서 그대로 했더니 재미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실력도 많이 늘었죠."
"결국 5학년이 되면서 형들의 경기에 투입되기 시작했는데 막내라 패스를 잘 안 해주더라고요. 나중에는 저도 화가 나서 패스도 안하고, 직접 드리블로 치고 들어가서 골까지 넣었어요.(웃음)"
“어린 마음에 유니폼 입고 축구하는 게 너무 멋이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오른쪽 윙으로 뛰었는데, 나중에는 센터포워드, 미드필드 등 공격 전반에 걸쳐 전 포지션을 다 봤어요. 그러면서 점점 경기에 많이 나가게 됏고, 골도 더 많이 넣게 되면서 기량도 몰라보게 발전했어요.”
김의도는 이러한 성장기를 통해 축구실력이 나날이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6학년이 되면서 전국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라서게 되는데 당신 여수미평초는 전국 상위랭킹으로 전국대회를 휩쓸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김의도가 함께 했다. 그런 결과는 2006년 소년한국일보, 일간스포츠가 공동 제정한 제18회 차범근축구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프랑스 유학, 경신중을 거치며 본격적인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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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중 시절 때의 8번 김의도의 경기 모습, 이 당시 최고의 테크닉으로 빠른 발을 활용한 돌파력이 탁월했다. ⓒ 사진제공: 영싸커
여수미평초를 졸업한 김의도는 전국에서 가장 잘하는 중학생들만 모인다는 프로산하 유스 팀들로 부터 끊임없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김의도가 선택한 곳은 프랑스유학이었다.
“선택에 후회가 없었어요. 처음 프랑스에 갔을 때 음식 때문에 많이 고생했는데 금방 익숙해지더라고요. 학교생활도 재밌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접하지 못했던 축구생활은 또 다른 재미를 가져다 줬어요. 우선 강압적인 게 없었고, 자신이 하고자하는 플레이에 대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어요. 자유분방함 속에서 프랑스 친구들과 구슬땀을 흘렀어요. 그때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실력도 고급스럽게 다듬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갔더니 부모님 생각과 동생들 생각이 가장 많이 났어요. 낮에 운동할 때는 몰랐는데 밤이 되면 고행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렀어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친구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어린나이에 해봤다는 것에 새삼 부모님한테 고맙다는 생각과 정말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요.
“프랑스에 유학을 하면서 1학년 때는 조커로 20분 정도씩 뛰다가 2학년 때부터 경기를 많이 뛸 수 있었어요. 2학년 때 저를 지도하는 코치 선생님이 계셨는데, 특히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저를 보시더니 체구는 작지만 축구를 아주 영리하게 잘 한다고 하셨는데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어요. 지금도 가끔 연락은 하는데 빨리 한번 뵙고 싶어요.”
2년간의 유학생활을 통해 선진축구를 연마한 김의도는 3학년이 되면서 비자문제로 축구 명문교인 서울 경신중학교에로 돌아오게 된다. 김의도의 귀국 소식을 접한 여러 프로산하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 왔지만 김의도는 학원축구부 팀에서 중학교시절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경신중 이희철 감독을 만났는데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때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데 경신중에 오면 ‘너하고 싶은 플레이를 마음껏 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막상 입학을 하니 이런저런 잔소리를 바가지로 들었어요.(웃음) 그 당시 제가 자유분방한 프랑스축구에 너무 익숙해 있었다는 이유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이희철 감독님의 잔소리가 없었다면 더 많은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을 거예요. 좋은 건 갖고 가고 나쁜 습관을 빨리 버리도록 이희철 감독님이 제게 깨우쳐 주셨어요. 그런 결과는 또 다른 축구스타일이 제 몸에 맞춰졌고 중학교 3학년 시절 동료들과 전국대회와 서울시 대회에서 상위 입상을 거둘 수 있었어요.”
호남축구의 젖줄 광주FC 프로산하 명문 금호고에 입학하다.
경신중을 거치며 고향 팀이나 마찬가지인 광주FC U-18세 유스팀 금호고로 돌아온 김의도는 한결 성숙해졌고, 1학년 때부터 반 게임을 소화하면서 고교 최고의 선수로 자랄 것으로 한 몸에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김의도의 고교시절 역시 ‘사춘기’의 방황은 비켜가지 않았다. 최고의 테크닉션으로 인정받으면 하루하루 발전을 거듭하던 그에게 사춘기의 설렘은 한순간 방황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스러워요. 고2 때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는데 축구가 갑자기 하기 싫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과 한동안 축구부에서 탈선, 잠시 도망도 다녔어요.(웃음) 그 당시 최수용 감독님이 하신 말 중에 실컷 놀고 축구하고 싶을 때 들어와라! 하셨는데 그 말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속으로 축구를 때려치우라고 하시는 구나 싶었죠. 그런데 나중에 감독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감독님 역시 고교시절 너희들 같이 방황을 하면서 숙소이탈도 해봤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원상태로 돌아오더라고요.”
특히 감독님이 그때 저랑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의도 너는 타고난 기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더 노력하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 이후로 정말 열심히 했어요. 뒤 늦게 정신을 차린 거죠.
고교클럽 챌린지리그에서 예상보다 저조한 성적을 거둔 금호고, 김의도는 거기에 대해 책임감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리그전에 우승하자고 몇 번이고 결의를 다졌어요. 그런데 마음먹은 것처럼 플레이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다 잡은 경기도 후반 갔어. 뒤집어지고 리그중반을 돌면서 하위권으로 내려앉았는데 자존심이 무척 상했어요.”
경기력도 리그 내내 줄곧 회복기미를 보이지 못하면서 통합순위에서 바닥권에 머물고 말았다. 또한 방학기간 열린 전국대회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김의도는 금호고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비록 고교시절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했지만 앞으로 축구선수생활을 더해 나간다고 생각해 볼 때 많은 것을 배웠어요. 특히 최수용 감독님이 축구선수로써의 삶에 대한 인간적인 면을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방법을 일깨워주셨어요.”
“감독님 감사합니다. 이제 몸은 감독님 곁을 떠나지만 늘 감독님의 가르침 머릿속에 담아 멀지 않아 프로유니폼을 입고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저희 모교 금호고축구부 발전에 온 힘을 쏟아 주십시오.”
대학축구무대,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내년 3월 건국대학교 축구부 유니폼을 입는 김의도는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캠퍼스생활의 즐거움이 아니라 대학축구무대에 데뷔한다는 것 때문이다.
“대학축구는 성인축구나 다름없잖아요. 고교시절 대학팀들과 연습경기를 많이 가졌는데 정말 멋졌어요. 특히 제가 입학하는 건국대 선배님들은 다른 학교와 비교해 더욱 멋이 있어 보였어요. 빠른 템포의 공격과 파워 넘치는 플레이, 제가 꿈꾸고 하고 싶은 플레이인데 저 같은 경우 지금껏 세밀하고 아기자기한 플레이를 즐겨했는데 대학에 들어가면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보고 싶어요. 물론 팀컬러에 맞게 가야겠지만 아무래도 대학 감독님들은 선 굵은 스타일을 많이 요구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겨울동안 웨이트트레이닝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지금보다 몸을 많이 키워야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고 더욱이 제가 공격수다보니 상대 몸집이 좋은 수비수들을 돌파하려면 파워가 좋아야 할 것 같아요.”
김의도는 축구실력만큼이나 그동안 대한축구협회 연령별 상비군에 제대로 선발되지 못해 속상해 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차범근 축구 대상을 수상하고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통에 상비군에 뽑히지 못했고, 이후에는 이 연령 때 선수들은 선발과정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이유다. 하지만 지난 10월 이광종 감독의 U-18세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면서 적잖은 실망감을 나타냈다.
“사실 U-18세 대표팀 선발 목표로 많은 땀을 흘렀어요. 결국 1차 명단에 조차 제 이름이 빠진 걸 보고 크게 실망을 했어요. 저보다 아버지가 더 실망이 컸어요. 하지만 지나간 일로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아요. 기회는 분명히 오게 돼 있으니까요. 내년 본선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다시 한 번 준비하려고 합니다. 우선 건방진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대학교 입학해 주전 자리를 차지하는 게 1차 목표고 그런 다음 대학 U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다면 분명히 기회가 올 것으로 믿고, 그 이후에는 더 상위 대표팀들도 노려봐야죠. 최종적으로는 한국축구사에 남을 만한 선수, 박지성, 박주영 선수 다음을 장식할 수 있는 선수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앞만 보고 힘차게 달려 갈 겁니다.”
유소년시절부터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김의도.
하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과 풍파도 뒤 따랐다. 그 모든 게 한 인간을 축구제왕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김의도의 축구인생이 이제부터 제 2막이 시작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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