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전(慶基殿)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보관했던 곳으로 전북 전주시 풍남동에 있다. 세종 24년(1442) 건립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
영조 24년(1748) 함경도 출신의 승지 위창조(魏昌祖)가 함경도 내에 있는 이성계 일가의 무덤을 조사한 '북로릉전지(北路陵殿志)'를 임금에게 바쳤다.
여기에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장지(葬地)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공민왕 9년(1360) 부친이 사망하자 이성계는 명당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데 사제(師弟) 사이의 두 승려가 명당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스승이 동산(東山)을 가리키며 “여기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라고 묻자, 제자가 “세 갈래 중에서 가운데 낙맥(落脈)인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것 같습니다”고 대답했다. 스승은 “네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두 손을 쓰지만 오른손이 긴요한 것 같이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다”고 정정해 주었다. 가동(하인)에게 이 대화 내용을 들은 이성계는 말을 달려 뒤쫓아 함관령(咸關嶺) 밑에서 두 승려를 만났다.
이성계가 절을 하면서 간절히 청해 ‘왕이 날’ 장지를 얻었다는 이야기다.
'북로릉전지'보다 150여 년 전에 문신 차천로(車天輅·1556~1615)가 편찬한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두 승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자 두 승려는 산에 지팡이를 꽂고 말했다. “첫째 혈에는 왕후(王侯·임금)의 조짐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將相)의 자리이니 하나를 택하시오.” 이성계가 첫째 혈을 택하자 노승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탓했다.
이성계가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면 겨우 하(下)를 얻게 되는 법”이라고 변명했더니 두 승려는 웃으며 “원대로 하시오”라고 말하고 가버렸는데,
노승이 나옹(懶翁)이고 젊은 승려가 무학(無學)이라는 것이다. 부친 장지에 관한 이런 일화들이 사실이라면
이성계는 만 25세 때부터 개국을 꿈꾸었다는 뜻이 된다.
이 외에도 건국 조짐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전한다.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권근(權近·1352∼1409)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신도비명(建元陵神道碑銘)'에서 “예전부터 (고려) 서운관(書雲觀)에 전하던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가 있는데 ‘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목자(木子)는 이(李)씨를 파자한 것으로 역시 개국한다는 뜻이다.
‘
구변진단도’란 ‘아홉 번 변하는 진단(震檀·우리나라)의 그림’이란 뜻의 일종의 도참서(圖讖書)로, 천문(天文)·역수(曆數)·기후 등을 관측하던 고려 서운관에서 일부러 감추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1.준경묘(濬慶墓)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다. 목조 이안사의 부친 이양무의 묘인데, 이안사는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이주한 후 사망해 이곳에 묻혔다. 2.덕안릉 함경도 영광군 풍상리에 있는 목조 이안사의 무덤이다. 18세기에 그려진 39왕릉산도(王陵山圖)39에 나온다 |
선조 때 문신 이정형(李廷馨·1549~1607)은 '동각잡기(東閣雜記)'의 ‘본조 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에서 고려 서운관에는 “왕씨가 멸망하고 이씨가 흥한다(王氏滅李氏興)는 말도 있었지만,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비밀로 하고 발설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본조 선원보록’에는 이성계가 잠저(潛邸·즉위 전의 집)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지리산 바윗돌 속에서 얻었다’는 글을 바치고 사라졌는데,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三韓)의 지경을 바로잡는다(木子乘猪下, 復正三韓境)”는 내용이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는 닭 우는 소리와 세 서까래 이야기다. 이성계가 안변(安邊)에서 살 때 수많은 집의 닭이 한꺼번에 우는 와중에 허물어진 집에 가서 세 서까래를 지는 꿈을 꾸었다. 설봉산(雪峰山) 이승(異僧)에게 묻자
“닭들이 동시에 운 것은 고귀위(高貴位·높고 귀한 지위)요, 세 서까래를 진 것은 왕(王)자란 뜻”이라고 풀이했다.
이 일화는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 등 여러 문집에 실려 있다.
닭 우는 소리는 고려의 제8대 현종(顯宗·992~1031)의 사적에도 나온다. 현종은 어린 시절 궁에서 쫓겨나 신혈사(神穴寺·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을 때 꿈속에서 닭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다. 술사에게 뜻을 묻자 “닭 우는 소리는 고귀위요,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御近當)이니, 이는 즉위할 징조”라고 답했다는 것이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성계의 고귀위 일화의 출처를 짐작하게 해 주는 사례다.
이런 징조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국의 물적 토대가 무엇이었느냐다.
이성계는 즉위 후 4대조인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부터 목조(穆祖)로 추존했다. 제후는 4대 조를 추존한다는 원칙 때문만이 아니라 이안사가 건국의 기틀을 놓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3장은 “우리 시조가 경흥(慶興)에 살으샤 왕업(王業)을 여시니”라고
이안사가 왕업을 열었다고 노래했다. '용비어천가' 1장이 “해동 육룡(六龍)이 날으사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인데,
육룡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을 뜻한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안사는 전주에 있을 때 관기(官妓)를 두고 산성별감과 다툼이 생겨 170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 경흥 동쪽 30리의 오동(斡東·현재의 중국 옌지(延吉) 부근)으로 이주했다.
이안사는 여기에서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지원을 받아 원나라 오동천호소(斡東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된다.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것이 개국의 터전이 되었다는 뜻이다. '용비어천가' 4장은 이에 대해 “야인(野人) 사이에 가사 야인이 가래거늘(해롭게 함) 덕원(德源) 옮으심도 하늘 뜻이시니…”라고 묘사해 이안사의 잦은 이주가 건국의 천명에 따른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최근 이성계 가문이 동북 만주 대부분을 지배했던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 옷치긴 가문의 통치지역 내에 있던 고려계 몽골 군벌이라고 보는 논문이 나왔듯이
이성계 가문은 원나라의 지원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이안사의 원나라 관직은 원 세조 12년(1275·충렬왕 1년) 이행리(李行里:익조)가 이어받는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협력하기도 하는
이행리는 '고려사절요'충렬왕 7년(1281)조에 따르면 개경에 와서 충렬왕을 알현했다고 전한다. 이행리가 공손한 것을 본 충렬왕이 “경은 본래 사족(士族) 집안이니 근본을 잊을 리가 있겠느냐”라고 칭찬했다고 전한다.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李子春:환조)에게는 형 자흥(子興)이 있었으므로 집안의 종통을 잇기는 어려웠다.
이행리의 아들 이춘(李椿:도조)이 원 순제 지정(至正) 2년(1342) 7월에 죽고 장남 자흥도 그해 9월 죽자 원나라는 자흥의 아들 천주(天柱)가 어리다는 이유로 임시로 숙부 이자춘에게 관직을 이어받게 했다.
이때 이춘의 계처(繼妻·아내가 죽은 후 맞은 아내)인 쌍성총관(雙城摠管)의 딸 조씨(趙氏)가 이자춘의 관직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려고 하는데 이자춘이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종통의 지위를 굳혔다.
그래서 '용비어천가' 8장에서
“세자(환조)를 하늘이 가리사 제명(帝命:원 황제의 명)이 나리시어 성자(聖子)를 내셨나이다”며 장자(長子)가 아닌 이자춘이 종통을 이은 것을 하늘의 간택과 원나라 황제의 명령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천호 자리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이자춘은 곧 원나라의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다. 이 무렵 원나라에서 요양성(遼陽省) 등 3성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구분해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호적)를 작성하면서
원주민을 우대하자 이주민 세력인 이자춘이 반발한 것이다.
중원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 원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공민왕은 북방 강역을 되찾으려는 북강회수운동(北疆回收運動)을 일으키는데 이자춘이 여기에 가담하면서 부원세력이었던 이성계 일가는 친고려세력으로 말을 갈아탄다.
공민왕 4년(1355) 이자춘이 입조했을 때 공민왕은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몸은 비록 밖(원나라)에 있었지만 마음은 우리 왕실에 있었으므로 우리 할아버지(祖考)께서도 총애하고 가상히 여겼다”며 “내가 너를 성취시켜 주겠다”고 회유했다.
이듬해(1356) 이자춘이 다시 입조하자 공민왕은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고 유인우(柳仁雨)가 동북면(함경도 일대)을 공격할 때 병마판관 정신계(丁臣桂)를 이자춘에게 보내 내응할 것을 종용했다. 이때
이자춘이 고려에 가담해 고려가 99년 만에 동북면 지역을 회수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면서 부원세력이란 꼬리표를 떼게 된다.
공민왕은 재위 5년(1356) 이자춘을 태중대부 사복경(太中大夫司僕卿)으로 올리고 집 한 채를 하사하는데,
이때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인다.
태조실록은 이성계가 공민왕 앞에서 격구(擊毬)를 하면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활약을 펼쳤다고 전한다. 공민왕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만 21세의 격구 천재가 36년 후 고려를 멸망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1> 황산대첩비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다. 이성계는 운봉전투로 남방 사람들에게도 무명을 떨쳤다. 일제는 반(反)시국적인 고적(古蹟)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이 비를 깨뜨렸다. 지금 서있는 비석은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2> 삼봉집 목판 정도전이 쓴 삼봉집의 목판이다. 정조 때 왕명으로 재간한 것이다. 사진가 권태균 |
이성계 개국군주 태조② 天命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근본적 힘은 군사력에 있었다. 그의 군사력은 원나라 지방 세력의 일부였다.
원나라가 약해지면서 그의 부친 이자춘은 집안의 군사력을 고려에 소속시켰다.
이성계는 탁월한 무력으로 변방을 뛰어넘어 중앙으로 진출했다.
이성계 자신부터 힘이 장사였다. 함흥에서 큰 소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데 불을 붙여 던져도 말리지 못했으나 이성계가 양 손으로 두 소를 붙드니 더 이상 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전할 정도다.
삼국사기는 활 잘 쏘는 사람을 부여말로 주몽이라고 했다는데, 이성계가 바로 고려 말의 주몽이었다. 우왕 3년(1377) 경상도 원수(元帥) 우인열(禹仁烈)이 이성계와 서청(西廳)에 마주 앉았을 때 쥐 세 마리가 처마를 타고 달아났다. 이성계가 아이에게 활과 고도리(高刀里:작은 새를 잡는 데 쓰는 살) 세 개를 가져오게 하고는 “맞히기만 하고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나온 쥐를 쏘니 화살과 함께 떨어졌으나 죽지 않고 달아났으며, 다른 두 마리도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가 태조실록 총서에 전한다.
이성계가 고려를 위해 세운 첫 전공은 부친 이자춘의 사망 이듬해인 공민왕 10년(1361) 8월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동북면 상만호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으로 1500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로 도망간 박의 일당을 잡아 죽였다.
이 사건 이후 이성계는 북쪽의 홍건적(紅巾賊)과 남쪽의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국적 무명(武名)을 얻고 민심을 획득해간다. 하북성(河北省)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漢族) 반란군인 홍건적이 요동으로 진출했다가 원나라에 쫓겨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공민왕 10년(1361) 10월이었다. 반성(潘誠)·관선생(關先生)·사유(沙劉) 등이 이끄는 홍건적 10만 명은 삽시간에 삭주(朔州)·이성(泥城) 등을 함락시키고 개경(開京)까지 위협했다. 공민왕이 복주(福州:경북 안동)까지 파천하는 대혼란이 발생했다.
고려에서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삼고 각 도에서 20만 명을 징발해 이듬해 1월 개경에서 관선생과 사유 등을 잡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려사절요는 이때 이성계가 2000명을 거느리고 선두에 섰다고 전한다.
이때만 해도 이성계는 여러 무장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공민왕 11년(1362) 2월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침략했을 때에야 이성계는 비로소 독자적 무명을 떨친다.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심양(瀋陽)을 점령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을 자칭하던 나하추는 공민왕의 북강회수운동(北疆回收運動) 때 쫓겨난 원나라 쌍성총관 조소생(趙小生)의 부추김을 받고 고려를 침략했다.
공민왕 5년의 북강회수운동은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이 고려에 가담한 것이 결정적 전기가 되었으므로 나하추의 침략은 이성계 집안과도 관련이 있었다. 공민왕은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은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격퇴하라고 명했다.
세종 때 편찬한 고려사 등이 이 전투에 대해 자세하게 적고 있는 것은 이성계가 독자적 무명(武名)을 얻은 계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하추의 부하 중에 갑옷과 투구는 물론 얼굴을 가리는 면구(面具)와 턱을 가리는 이갑(<9824>甲)까지 두른 장수가 있었다. 이성계는 먼저 말을 쏴서 그 장수가 말고삐를 당기느라 입을 벌리게 만들고 입을 쏴 죽였다는 내용도 있다.
정도전이 태조 2년(1393) 납씨곡(納氏曲:납씨가)을 지어 “공을 이룸이 이 거사(擧事)에 있었으니 이를 천년만년 전하리이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 전투는 조선 개창의 한 명분이 되었다. 권근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도비명에서 “(나하추를 격퇴한) 그 다음 해인 계묘년(공민왕 12)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으니, 공민왕이 믿고 의지함이 더욱 두터워졌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진해 장(將)·상(相)에 이르게 되었다”며 이성계가 이 전투를 계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성계는 우왕 6년(1380) 전라도 운봉에서 왜적을 물리치면서 남방 백성들에게까지 무명(武名)을 드리우게 된다. 이때도 이성계의 신궁(神弓)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자 우왕은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로 삼아 보냈는데,
이때 적장 중에 아지발도(阿只拔都)라는 백마 탄 소년장수가 있었다. 그 역시 얼굴까지 갑옷으로 가렸으나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 의형제 퉁두란(<4F5F>古論豆蘭帖木兒:이지란)에게 “내가 투구 꼭지를 맞춰 떨어뜨리면 네가 쏘라”고 말한 후 투구를 떨어뜨리자 퉁두란이 쏘아 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일화는 퉁두란으로 대표되는 여진족 부대가 이성계 부대의 일원으로 참가했음을 말해준다. 이성계 부대는 기마병 위주의 여진족·몽골족 등이 포함된 다민족 혼성부대였기에 강했던 것이다.
훗날인 선조 8년(1575)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의 치계(馳啓)로 전투 현장인 운봉 동쪽 16리 지점에 황산대첩비를 세우는데,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은 비문에서 “성스러운 무력의 크고 맑은 공이 높고도 넓으셔서 만민이 영원히 의지하게 되었다”라고 이때의 승전으로 만민이 의지하는 천명이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황산대첩비를 읽고서(讀荒山大捷碑)라는 시에서 “이 거사로 한밤중 골짝에 있던 배 이미 자리 옮겨/위화도 회군할 때를 기다릴 것도 없었도다(此擧夜壑舟已徙/不待威化回軍時)”라고 노래하고, 황산대첩비 발문에서는 “신무(神武)로써 승리를 거둔 것이지 인력(人力)이 아니다”라며 천명의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권근도 건원릉 신도비명에서 “(개국은) 모두 하늘이 준 것이지 사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늘이 천명을 내렸을지라도 이를 현실로 만드는 능력이 없다면 한갓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무공을 세운 장수마다 모두 천명이 내렸다고 주장한다면 나라는 안정될 틈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운봉전투는 왜구의 주력이 이미 진포 전투에서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화포 공격에 무너지고 남은 패잔병에 불과했을 뿐이다.
운봉전투로 이성계의 무명이 더욱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의 이름을 가진 인물은 많았다. 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 건원릉(健元陵)조는 “(이성계가) 정승이 되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하늘에서 주면서,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백하지만 늙었고,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지만 조금 어리석으니 이 자를 가지고 정국(正國)할 자는 공(公)이 아니면 누구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태조실록에도 실린 이 글은 역으로 이성계 외에도 시중 경복흥과 최영이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개국 시조가 된 것은 이성계에게만 천명이 내렸기 때문은 아니다. 무엇보다 경복흥과 최영은 고려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성계가 공민왕 5년(1356) 부친 이자춘을 따라 처음 개경에 갔을 때는 만 21세 때였다. 그 전까지 이성계는 원나라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고려 왕실에 충성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지 않았다.
동북아의 질서가 바뀌는 원·명(元明) 교체기라는 혼란기 속에서 이성계는 고려의 허약함을 보았고, 전국적 명성을 얻으면서 자신도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계의 군사는 사실상 사병에 가까웠다. 그러나 군사력이 있다고 500년 고려 왕업을 목적(牧笛)에 부치고 새 나라를 개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국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고, 그 이념에 바탕한 새 정책이 필요했다. 이는 말 위의 사람인 이성계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재의 지식인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한 불우한 지식인의 머리에 이런 이념과 정책이 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풍운아 봉화정씨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 부록은 우왕 9년(1383) 가을 정도전이 함경도 함주(咸州)에서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비밀히 말했다고 전한다. 이성계가 “무엇을 이름인가?”라고 묻자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라고 답했지만 그 의미가 개국을 뜻한다는 것은 이심정심(李心鄭心)으로 서로 알아차렸다.
이때 정도전이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인간을 굽어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人間俯仰便陳<8E64>)”라는 것이었다. 용비어천가와 삼봉집등은 “태조에게 천명이 있음”을 빗긴 말이었다고 전한다. 인생은 순식간에 지나가니 작은 일에 구애받지 말고 대사를 이루라는 뜻이리라. 이 만남이 사실상 조선 개국을 결정지은 계기였다.
이성계의 군사력은 정도전의 이념과 결합하면서 비로소 혁명 무력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색 신도비와 사당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
개국군주 태조③ 과전법 실시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계기는 위화도 회군이다. 우왕 14년(1388) 3월 명나라가 고려와의 접경지역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갈등이 발생했다. 그간 국사교과서는 철령위를 함경도 원산만이라고 설명해 왔지만
최근 중국 사서(史書)를 근거로 ‘철령위가 만주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등장하고 있다.(복기대, 철령위 위치에 대한 재검토)
위화도 이성계를 비롯한 역성혁명 세력은 위화도 회군 직후 토지개혁을 주창해 정국 주도권을 잡았다. | |
실제로 명사(明史)오행지(五行志)는 “요동 철령위”라고 표기하고 있고, 같은
명사(明史)이원명(李原名)열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고려에서 국서를 보내 요동의 문주(文州),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는 다 고려의 옛 영토이니 철령에 군영을 설치해 지키겠다고 주청했다.
이원명이 “그 몇 주는 다 원(元)의 판도에 들어가 있어서 요에 속해 있고〔屬於遼〕, 고려 영토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지금 철령위를 이미 설치했는데, 다시 청한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반대했다.(明史,李原名 列傳)
요동을 차지하려는 고려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으려는 명의 갈등이 철령위 설치로 나타난 것이다.
철령이 원산이라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명나라에서 요동 반환을 거부하자 우왕은 무력 점령을 결심하는데,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치는 것,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 온 나라 군사를 들여 원정하는 틈을 타 왜적이 활개칠 것,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이 역병을 앓을 것.”
회군세력 사이 권력투쟁의 서전은 조민수의 승리였다. 하지만 회군 정국은 정도전과 조준의 기획에 의해 토지개혁 정국으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토지개혁을 통한 개국이 정도전의 개국 프로그램이었다. 고려사 ‘신돈(辛旽)’조는 “요사이 국가 기강이 무너져 백성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권세 있는 자들이 모두 빼앗고 노비로 삼았다. … 그 원한이 하늘을 움직여 수해와 가뭄이 끊이지 않고 질병도 그치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을 정도로 권세가의 불법적 사전(私田) 확장이 큰 문제였다.
고려사 ‘식화(食貨)’조는 “권세가들이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여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8~9할을 내어야 한다”고 적고 있고, “요즈음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며, 군(郡) 전체를 포함하여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고도 적고 있다.
농업국가에서 자영농의 몰락은 망국(亡國)조짐이었다. 충선왕을 비롯해 공민왕·우왕 등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등을 설치해 사전 개혁에 나선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막대한 사전의 소유자들이 모두 권력자들이기 때문에 고려 왕실에서 주도하는 사전 개혁은 실패했다. 우왕의 요동정벌론은 권력가들의 사전에 손을 댈 수 없는 형편에서 요동이라는 새 땅을 얻어 농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조준은 1388년 7월 “전제(田制: 토지제도)를 바로잡아 국용(國用)을 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는 것이…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회군 정국을 토지개혁 정국으로 바꾸었다. 조준은 “백성이 사전(私田)의 도조(賭租: 소작료)를 낼 때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충당하는데 그 빚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갚을 수 없고, 부모가 굶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사전 혁파를 주장했다.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도 잇따라 글을 올려 사전(私田) 개혁을 청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토지개혁 정국이 잘 짜인 개국 프로그램임을 말해준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부전(賦典)에서 “전하(殿下: 태조)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시고 개연히 사전(私田) 혁파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셨다.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백성 수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計民授田) 옛날의 올바른 전제(田制)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었다”라고 말한 대로 사전을 혁파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토지정책이 개국의 명분이었다.
회군 세력이 사전 혁파를 들고 나오자 권세가들의 침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천명의 소재가 확인됐다. 반면 이성계의 경쟁자였던 창녕조씨 조민수는 “사전(私田) 개혁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평양조씨 조준이 논핵하여 내쫓았다”는 고려사절요의 기사처럼 사전 개혁에 저항하다가 제거되었다.
첫댓글 본관이 전주인데 아주 잘보았습니다/모를는 내용이 많습니다
아 그랬군요
추후에 또 다른 자료 올려드릴게요
본관이 전주 이씨라 왕족이시네요. ^^
자랑스런부분도 있겠네요
@카페지기 크 세조 수양대군의 자로 대군출신이 아니라서요~~~ㅎㅎ
좋은 자료가 많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