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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권씨 스크랩 종가기행 ⑧ 안동 권씨( 安東 權氏)충재 권벌
노당을알고님 추천 0 조회 44 08.03.15 10: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종가기행 ⑧] 충재 권벌
절개의 개혁파 정치인… 기묘사화에 휘말려 파직

안동 권씨 충재 권벌
1478년 (성종9) - 1548년 (명종3)

▲ 밀부교지

충재 권벌의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또는 훤정(萱亭)이다.

그는 성종9년 11월 6일 안동 도촌리(속명, 도계촌)에서 태어나 19세 때인1496년(연산군2)에 진사, 1507년(중종2)에는 문과에 급제했고, 42세 때인 1519년 (중종14) 2월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사화가 일어날 조짐을 보고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11월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기묘사화의 피바람에 끝내 휘말려 파직되어 낙향했다.

중종 초년(1516년)에 조광조와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적극 가담했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파직을 당했던 것이다.

이후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그 화를 온몸으로 맞아 결국 평안도 삭주 지방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연도에 백성들이 눈물을 흘린 천리길 운구가 있었고 지금도 상여가 지나갔던 마을 앞 고개 이름을 부여현(扶輿峴)이라고 부른다.

그는 살아있을 때 병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사후에 관작이 회복됨은 물론 영의정에 추증되어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고 문집 9권 5책을 남겼다.

그의 일생을 정리한 대표적인 글로 퇴계 이황이 행장(行狀)을, 사암 박순과 우복 정경세가 각각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남겼다.

행장은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글로, 집안 사람이나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는 유사(遺事)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공인이 되는 객관적인 글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문중 인사보다는 이를 감당할 만한 명망있는 외부 인사에게 맡겨 짓게 한다. 당시 퇴계 선생이 행장을 지었다면 이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외 충재 선생의 삶을 정리한 글로는 묘갈명과 묘표, 묘지명, 시장(諡狀) 등이 있다.

퇴계는 제자들이 작은 학문공간을 마련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손수 현판이나 시를 써서 격려했다. 그런 일에는 자신의 글을 애써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제자들이 자신의 선대(先代)에 대한 행장을 봉청했을 테고 퇴계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을 것이다.

퇴계 선생이 남긴 문집의 분량이 방대한 것을 보더라도 그가 글쓰기를 얼마나 즐겼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장과 관련해서 퇴계는 매우 엄선된 몇몇 인물에 한해서만 글을 남겼다.

퇴계집 중에 행장 부문은 두 권 분량이다. 48, 49권에는 명종, 농암 이 선생, 성주목사 황 공, 정암 조 선생, 회재 이 선생, 의정부우찬성 권 공, 선부군 행장초 등 8명에 대해서 쓴 행장만이 남아 있다.

그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명종은 당시의 국왕이고, 농암 이 선생은 주변에서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조선 중기의 명신 이현보이며, 성주목사 황공은 자신의 애제자로 먼저 세상을 버린 금계 황준량, 정암 조 선생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자신이 존경했던 선배인 조광조다.

다음 권에는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부친에 대한 행장을 임시로 적어두었다.

이를 정리하면 ‘선생(先生)’이라는 표현을 쓴 이는 농암 이현보,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이고 ‘공(公)’이라는 표현을 쓴 이로는 금계 황준량과 충재 권벌을 들 수 있다.

표현에 있어서 ‘선생’이냐 ‘공’이냐 하는 문제는 이후 논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정암 조광조의 경우는 예외지만, 농암 이현보와 회재 이언적 양 가문에 있어서는 공히 퇴계 선생과의 관계와 관련해 논란이 있었다. 농암 문중과 야기된 사승(師承) 논쟁(論爭)이 그것이다.

그런데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을 두고 한 사람은 선생을, 또 다른 한 사람은 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둔 것으로, 학자와 정치인으로서의 비중을 고려해 잣대를 달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이도 간단치는 않다. 금계 황준량의 경우는 자신의 제자이기에 공이라는 표현이 합당하지만, 충재의 경우는 안동 지역의 23년 선배며, 국왕도 인정했을 정도로 학문을 즐겼던 실천 유학자였던 점을 감안하면 선생이라 표현해도 큰 문제는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퇴계가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면 그에 따른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은 을사사화라는 혼란기를 수습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주역이었다. 두 사람은 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이복동생이던 명종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원상(院相:국왕 사후 졸곡까지 26일까지 정무를 총괄하던 임시벼슬)에 함께 임명되었다.

그러나 후일 회재 이언적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나 충재 권벌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리고 회재의 고향인 경주 양동과 배향 서원인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비중에 비해 충재 권벌의 고향인 봉화 유곡(닭실)과 배향 서원인 삼계서원은 일반의 관심권밖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충재 권벌은 이 시대에 재조명되어야 할, 잊어서는 안 될 큰 인물이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절개를 지녔다. 이는 영의정을 지냈던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으며(公有死難不可奪之節), 이를 행장의 글에서 인용한 퇴계는 ‘그 말씀이 참으로 인정된다(其言不信然也哉)’고 평가했다.

그러나 충재의 절개는 강성 일변도로 흐른 것은 아니었다. 을사사화를 평한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글에 “대신의 풍도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으니 곧 찬성 권벌이다(得大臣風度者一人 曰權贊成). 오호라, 참으로 위대하도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권벌은 을사사화 당시 병조판서로 있었다. 그때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 등이 억울하게 귀양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죄 없는 대신을 귀양 보내는 것에 반발해 강개하게 항의했다.

이때 원상으로 있던 회재 이언적은 권벌이 항의해 올린 글을 보고 놀라며 “이렇게 하면 화변(禍變)을 더욱 일으키게 할 뿐”이라며 지나치게 직설적인 문구를 지웠다. 이에 권벌은 탄식하며 “이런 말을 지워버리면 차라리 아뢰지 않는 것이 옳소”라며 반박했다. 결국 문제의 원고를 고쳐 상소했으나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사 귀양을 면치 못했다.

▲ 문과급제 교지

이런 사실을 전한 율곡 이이는 자신의 석담일기에서 “행실에 있어서는 권 공이 이 공을 따르지 못했으나 화난(禍難)에 임해 항절(抗節)한 데 있어서는 이 공이 권 공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공이 권 공보다 우월하다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흥미로운 평이 아닐 수 없다. 충재에게 후한 점수를 준 점은 기질적으로 율곡과 통하는 점이 충재에게 있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충재의 묘소는 봉화 유곡리 중마을(내유곡) 큰재궁골에 있다. 단분(單墳)으로 정경부인 화순 최씨와 합장이다.

묘갈에는 ‘충정공충재권선생지묘(忠定公충齋權先生之墓)’라고 쓰여 있다. 부친인 의정공 권사빈(權士彬)과 모친인 파평 윤씨, 숙부인 교수공 권사수와 부인 봉화 금씨, 아들 권동보와 권동미 등 후손들의 묘소가 함께 자리잡고 있다.

선생의 신도비명은 특이하게도 두 기가 서 있다. 원래는 사후 20년이 되던 1568년(선조1)에 좌의정에 추증되었을 때 사암 박순이 지었으나, 1591년(선조24)에 재차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어 영의정으로 증직되자 우복 정경세가 다시 지은 때문이다.

근사록(近思錄) - 영조가 하사한 서책, 종택에 보관

조선시대에 있어 학자의 필독서였던 근사록은 원래 중국에서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등 네 학자의 글에서 일상 생활에 절실한 것을 뽑아 편집한 책자다. 제목은 논어(論語)의 '절문근사(切問近思)'에서 나온 말로 ‘절실하게 묻고 그것을 가까운 데서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전체 14권 622조목으로 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에 우리나라로 들어온 이래 수차에 걸쳐 간행됐고 몇 종은 현재 보물로까지 지정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책들 중의 두 종류는 충재 종택에 보관되어 있다.

중종 초년에 충재 선생은 국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루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여러 신하와 함께 상화연(賞花宴)을 벌였는데 행사를 마친 뒤 내시가 수진본 근사록을 주웠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책을 본 중종은 즉시 “이것은 권벌의 수중물(袖中物)일 것이다”하고 즉시 돌려줄 것을 명했다. 이는 국왕도 알아줄 정도로 충재가 근사록에 심취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 뒤 영조 때에 이르러 이러한 전조(前朝)의 고사(故事)를 들어 국왕이 영남 감영을 통해 후손으로 하여금 당시의 책자를 받들고 오게 하라고 명했다.

이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하고 있는 충재의 후손 강좌(江左) 권만(權萬)이 책을 받들고 조정에 들자 영조는 의관을 정제하고 맞아들여 보고는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대학연의(大學衍義) 등 서책을 하사해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영조가 내사(內賜)한 이들 서책들은 모두 종택에 잘 보관되어 있다.

청암정에 올라보면 ‘근사재(近思齋)’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충재의 서책이요 가문의 자랑인 근사록을 보관하고 있는 유서깊은 공간이다.



입력시간 : 2006/06/16 14:35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종가기행 ⑧] 安東 權氏
영남 4대 길지에 자리한 종택, 선현의 올곧은 기개 대물림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⑧ - 17대 종손 권정우씨…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된 마을, 차종손이 보물급 유물관리

조선 중기의 정치가로 숱한 사화 속에서도 꿋꿋한 절개를 지켰던 충재 권벌.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봉화군 유곡리 닭실마을은 영남의 4대 길지(吉地)로 손꼽히던 명기(名基)로, 충재 자신이 선택한 땅이다. 4대 길지는 풍산 류씨가 사는 안동 하회마을, 의성 김씨가 사는 안동 내앞마을, 월성 손씨와 여강이씨가 함께 사는 경주 양동마을, 안동 권씨가 사는 봉화 닭실마을을 일컫는다.

이들 네 곳 중 닭실마을만이 1963년부터 사적 및 명승 제3호(내성유곡 권충재 관계유적)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 1호가 경주 포석정지, 명승1호가 명주 청학동의 소금강이며, 이와는 별도로 사적 및 명승이란 국가 지정이 있다.

사적 및 명승은 경주 불국사 경내가 1호요, 내물왕릉 계림월성지대가 2호, 속리산 법주사 일원이 4호,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5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닭실마을의 비중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선정 기준이 풍광이 뛰어나고 이름난 인물이 배출된 곳, 그리고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세 마을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 ‘봉화 유곡’ 하면 우선 '유과를 만드는 고장'을 떠올린다.

충재의 종택이 자리잡은 후 불천위 종가의 제사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500여 년 전통의 ‘닭실 유과’는 이제 전국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1992년부터 마을 부녀회에서 ‘두레’의 전통을 계승해 유과를 공동으로 제작해 외처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충재 선생의 종택을 닭실마을 앞 부여현 언덕에서 바라보면 참으로 장엄하다.

솟을대문과 입구자형 종택, 그리고 외삼문과 내삼문까지 갖춘 불천위 사당과 가묘(家廟), 별당형 정자인 충재와 거북바위 위에 섬과 같이 자리 잡은 영남에서도 이름난 청암정(靑巖亭), 그리고 44평 규모의 유물전시관, 잘 손질된 마당의 잔디과 담장은 전통 건축미의 정수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 종택은 다시 소위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으로 감싸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곳은 우리나라의 길지요 명당이라고 할 만하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문자도 떠올리게 한다.

필자는 수차 종택을 방문하면서 특히 ‘충재(일명 寒棲堂)’라고 쓰인 선생의 일자형 정자의 현판에 주목했다. 그야말로 선비의 거조를 닮은 아담하면서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은 현판이라 늘상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바로 옆에 자리잡은 그 아름다운 청암정에 홀려 충재 정자와 현판은 간과하고 만다. 더구나 ‘음란서생’ 등 여러 영화가 이 청암정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는 설명까지 더해지면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 현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는 충재의 절조는 바로 이 작은 정자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충재 선생의 17대 종손은 권정우(權廷羽, 1922년생) 씨다. 차종손은 권종목(1943년생) 씨, 맏손자는 권용철(35세) 이다. 종손의 처가는 안동 하회마을이다. 그리고 차종손은 경주 양동의 월성 손씨에게 장가들었다.

차종손의 경우는 영남 4대 길지(四大吉地) 중에 안동 내앞(川前)만 빼고는 모두 깊은 관련이 있으니 참으로 누리기 어려운 복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며느리를 내앞에서 보면 ‘싸이클히트’를 치시겠습니다”라고 우스갯 소리를 하자, 아직 장가 안 간 아들 하나 남아있으니 잘하면 그런 기록을 세울 수도 있겠다고 농으로 맞받는다.

권종목 씨의 맏며느리는 경북 예천의 명문 초간 종택 출신이다. 초간은 권문해 선생으로 퇴계의 제자이며 대학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을 남긴 이다.

일반인들은 우리나라 권씨는 무조건 안동 권씨만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소수이긴 하지만 예천 권씨가 있다. 그래서 일부 청첩장에는 신부댁에 괄호를 하고 예천 권씨라고 표시할 정도로 일반의 오해가 있었다. 안동 권씨와 예천 권씨는 종씨이기는 하지만 조상이 달라 혼인을 할 수 있다.

'노 서방댁 어록' 남긴 차종손

권종목 씨는 훤칠한 키에 호남형으로 유머감각까지 있지만 강단도 그 못지않다.

한번은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로부터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접견에 앞서 비서들의 사전교육이 있었는데, 절대 영부인이라고 하시면 안 된다는 당부였다.

그래서 권 씨는, “영남에서는 남의 부인도 높임말을 씁니다. 영부인이라고 하면 왜 안 됩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호칭해야 합니까. 노서방댁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영남 지방에서 회자된 어록 ‘노서방댁’은 그렇게 생겨났다.

일반인들은 청와대에 들어가면 일단은 최고 권력의 권위 앞에 주눅들기 쉽상이다. 그런데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봉화군청 말단 공무원 출신이 어떻게 그런 ‘간이 퉁퉁 부은’ 표현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생명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언을 했던 그 옛날 충재 선생의 기골이 스며있기 때문이 아니고서는 그러하지 못할 것이다.

차종손은 일견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느낌도 든다. 종택이 몇 평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한 2,000 평은 안 되겠느냐고 되레 반문한다. 자신의 아파트가 몇 평이며 평당 얼마나 간다고 으시대는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부끄러워 할 말이다.

▲ 청암정
▲ 충제 현판
▲ 17대 종손 권정우씨

그렇지만 그에게도 그 넓은 집을 관리하며 봉제사접빈객을 하는 일상이 한없이 힘들어 보인다. 그래도 예의를 갖춘 내방객이면 괜찮지만 몹쓸 불청객(?)이 집안으로 들어오면 가슴이 철렁하기도 한단다. 혹시라도 고택에 있는 유품이나 골동품을 노리고 사전 염탐을 하러 온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경험이 있어 더 그렇다고 한다.

“저기 유물전시관의 정문인 철문 지주에 남은 험한 상처를 보세요.” 종택 옆에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문화재절도범들이 억지로 문을 열려고 철문을 뒤흔든 흔적이 역력하다.

유물전시관에는 충재일기(보물 제261호), 근사록(보물 제262호), 연산일기 등 귀중한 문화재 467점이 보관되어 있으니 밤손님이 노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듯도 하다.

그래서 차종손이 손님을 맞아 유물전시관을 열고 설명을 하는 모습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는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특유의 환한 얼굴로 유머까지 곁들이며 차분히 설명을 한다.

그의 조상과 관련된 기억력은 비상했다. 충재 선생의1507년(중종2) 문과급제 친필답안지를 특히 감회 깊게 소개했다.

“여러분, 요즈음 시험을 칠 때 각자 자신의 이름을 쓰지요? 그런데 시험을 칠 때 아버지 성함을 쓴 적이 있습니까?” (일행 웃음)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아버지는 물론 조부, 증조부 그리고 외조부 성함까지 모두 썼어요. 선발할 인재에 대한 철저한 점검을 하기 위해서였죠.” (일행 공감)
“그리고 이 친필 시험 답안지는 500년이 넘은 것입니다. 보세요.” (일행 모두 눈이 휘둥그레짐)

그리고 그는 조선 시대는 어느 정도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던 사회였음을 충재 선생의 부인이 정경부인으로 교지를 받은 것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필자는1989년 가을 종택 마당에서 가진 유물전시관 개관식에서 이정섭 문화재전문위원과 함께 감사패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마을의 역사를 엮은 석천지(石泉誌) 국역과 유물전시관의 전시를 도와준 때문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전시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전시 유물 중 상당수가 보물급인 점을 고려하면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유물 도난의 문제다. 종손의 힘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지키기에는 힘에 부친다. 잠시 외지에 볼일을 보러 가 종택을 비우기라도 하면 도난에 대한 우려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한다. 또한 협소한 전시공간과 과학적인 보존의 한계도 애로가 많다고 차종손은 덧붙였다.

그나마 종택 오른편 청암정 뒤에 터를 마련해 100평이 넘는 새로운 전시공간을 조성 중에 있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더라도 귀한 종택유물의 보존에 대해 정부도 지자체도 함께 철저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삼계서원(三溪書院) - 충정공 권벌 선생 모신 서원

봉화읍 삼계리에 있는 삼계서원은 충정공 권벌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1588년 (선조 21년)에 서원이 건립되어 1660년(현종 원년)에 삼계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년)에 훼철되었다가 1960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계서원은 봉화를 대표하는 중심서원으로 선생의 춘추 향사는 물론 많은 후학들을 배출했다. 특히 이곳은 학문 연구의 중심지가 되어 여러 문집들이 간행되었고 수준 높은 책자들이 편찬, 기획되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들 수많은 자료들은 서원 훼철과 함께 후손가와 지역 사림 집안으로 흩어졌고, 이는 1960년 복원 때도 다시 한자리에 모이지는 못했다.



입력시간 : 2006/06/16 14:23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출처:http://blog.naver.com/sudony 

       http://blog.naver.com/sudony/100025339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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