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소개할 책은 <<레이황의 중국사 특강, 중국의 출로>>(레이 황 지음, 이영옥 옮김, 서울: 책과함께, 2005.6)이다. 저자 레이 황 (Ray Huang)은 1918년 6월 25일 중국 후난 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태어나, 2000년 1월 8일 미국에서 사망했다. 32살에 미국 미시간 대학에 입학하여 학사와 석사, 그리고 46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남일리노이 대학 조교수, 컬럼비아 대학 교환교수, 뉴욕 주립대학 교수, 하버드 대학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매크로 히스토리'(Macro History)라고 하는 독특한 사관(史觀)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던 때보다 오히려 퇴임 후에 정열적으로 활동한 학자이다. 그의 저작은 우리나라에도 1997년 이래 번역되어 나 역시 수년 전에 그의 저서를 읽었다. <<巨視中國史>>[黃仁宇 著, 홍광훈‧홍순도 옮김, 서울, 까치, 1997; <<중국, 그 거대한 행보>>(레이 황 著, 홍광훈 外 譯, 경당, 2002)로 다시 펴냄)],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레이 황 저, 박상이‧이순희 역, 서울, 가지않은 길, 1997;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레이 황 저, 김한식 외 옮김, 서울, 새물결, 2004.9)로 재간행],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레이 황(黃仁宇) 지음, 권중달 옮김, 서울, 푸른역사, 2001], <<자본주의역사와 중국의 21세기>>(황런위, 이재정 역, 이산, 2001. 5)이 그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한 학자의 여러 저작이 이렇게 다양한 출판사에서, 그리고 재출판까지 된 예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시장성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정말 그의 책은 참신하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현재적 관점과 실제적이다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이 책들을 통해서 계발된 바가 적지 않았으며 내가 평소에 강조하는 ‘상식적 역사학 하기’와도 일치한다.
<<레이황의 중국사 특강, 중국의 출로>>는 강연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므로 꼼꼼한 서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같은 말이나 내용이 거듭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사와 역사 전반에 대한 저자의 해박하고 깊은 이해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면에서 오히려 읽기가 편하다. 단 몇 시간만 투자하면 모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한 저자의 견해는 기존의 통설을 뛰어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책 말미의 ‘옮긴이의 말’에 자세히 설명해 놓았으므로 나의 소개가 잘못하면 사족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관점을 중심으로 거칠게나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의 핵심 개념은 ‘수량화 관리’이다. 정확한 수치에 근거한 계획과 운영이 근대 국가나 경제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차가 50만대인데 주차장이 15만대분이라면 당연히 주차대란이 날 것이며, 이런 수치에 근거하여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무조건 불법주차의 금지나 과태로 징수 등 처벌만으로는 주차대란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의 특징은 권위, 仁, 종교 등을 통하여 통치하고 운영하였으므로 수량화에 따른 합리적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저자는 근대 자본주의란 곧 수량화 관리 체제라는 정의함으로써 우리가 이념으로 접근한 자본주의의 개념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나아가 사회나 국가 역시 수량화 관리가 가능한 사회(국가)와 수량화 관리가 가능하지 않은 사회(국가)로 나누고 21세기 중국의 지향 역시 자본주의화=수량화 관리 체제라고 보았다.
역사적 예를 들면, 중국의 토지세율이 지나치게 낮았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행정적 효율성도 떨어졌다고 한다. 일반적인 개설서에 백성들이 높은 세금에 시달렸다는 통설을 부정하고, 베니스의 1/200~1/300, 영국의 1/8의 수준임을 강조하였다. 세율이 낮으니 세금이 적고, 세금이 적으니 국가의 관리비용을 늘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틈을 서리나 아역, 각종 부로커들이 횡행하게 되니 국가의 통제력은 더욱 약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할 수 있는 해결방법은 수량화 관리가 아니라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권위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으며, 그 황제의 권위는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종교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중국은 비록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는 아니지만 유교와 유교경전, 그리고 관료와 과거 예비군을 기초로 한 정교일치체제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런 체제에서 신용거래의 기초를 확립할 수 없었고 자본주의는 싹틀 수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저자의 인식은 實事求是이다. 저자가 강의 때마다 목청 높이는 것이 “이념이 역사를 따라가게 해야 하고, 이념으로 역사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최소한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타이완의 젊은이들이 걸핏하면 일본식 모자를 눌러쓴 채 시위를 벌이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고 극도로 경계하였다. 當爲의 주술에서 벋어날 것을 곳곳에서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강의 때마다 “나는 물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분명히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고 강조하였다.
예컨대 명중기 자본주의 맹아의 출현을 주장하는 주장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하였다. “자본주의사회라면 현대의 경제를 떠받치는 신용장·환어음·선하증권·복식부기 등이 통용되어야 한다. 또한 이 같은 경제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법률이 완비되어야 한다. 명청시대에는 화폐제도가 완비되지 않았고, 개인의 재산을 철저하게 보장해주는 법률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관념조차 없었다.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연좌제가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은행이나 보험업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고,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교통과 통신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자본주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는 일종의 조직이며 사회적 움직임이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명청시대와 자본주의를 연관 짓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사실을 은폐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셋째, 저자는 긍정적·적극적(positivism) 해석을 강조한다. 예컨대 군벌의 혼전을 비판하지만 항일전쟁 동안 중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많은 고위장군들이 군벌출신임을 상기시키고, ‘부패무능’으로 매도하는 장개석에 대하여 4억 달러에 불과한 국민정부 예산에도 불구하고 300만-500만의 군대를 이끌고 8년간 항일전쟁을 이끌었다는 것, 모택동 역시 가족을 희생하며 중국의 장기혁명에 분투하였음을 상기시켰다.
또 1930년 중원전쟁에 대한 평가는 전형적인 예이다. 중원전쟁은 1928년 북벌을 성공한 장개석이 군정비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염석산, 풍옥상이 반발하면서 쌍방 140만이 6개월간 싸운 것이다. 우선 원인에 대하여 기존의 설명은 군벌 우두머리의 개인적 야심에 따른 전쟁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우선 실업을 두려워하는 수백만 군인들에 착안하였다. 즉 군대를 떠나려 하지 않던 수많은 군인들이 윗사람들을 압박하여 발생한 것이며, 동시에 100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경쟁하면서 모두들 군대에 남아야 하고 정리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의의에 대하여 전형적으로 무의미한 전쟁, 내부적 소모전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저자는 이 전쟁을 통해 관세자주권을 확립하고 재정을 정비하였다는 발전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대단히 적극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저자는 이 전쟁은 항일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하였다. 이를 저자는 “역사가 지닌 장기적 합리성”이라고 인정하였다. “만약 우리가 1930년대의 사회적 상황이나 장교와 사병의 심리상태에 주목하게 된다면, 군벌이 할거하게 된 내재적 원인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세금징수와 군비조달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중국이 발전하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고 실사구시적 태도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책에 쓰인 내용을 盲信한다면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는 孟子의 말을 인용하며 이를 분명히 하였다.
넷째, 거시적 관점을 견지하였다. 저자는 1918년생으로 현대 중국의 격동을 몸으로 겪은 사람이다. 초급 장교로 국민당 군대에서 수년간 군생활 경험, 미국에서 중국사에 대한 연구, 그리고 미국 대학의 교수나 연구원로서의 경험 등이 중국을 넓고 깊게 볼 수 있게 하였고, 어느 한 시각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였다. 전근대 사회에 대해서는 대략 500년을 단위로 분석하고 근대사회는 70년에서 150년 정도를 제시하였다. 새로운 변화를 겪으며 그 변화에 대응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그 체제는 는 것을 전제로, 춘추전국시대의 변화에 대응한 진한제국, 삼국이래의 변화에 대응한 수당제국, 오대송원시대에 대응한 명청제국을 각각 들었으며, 아편전쟁 이후의 변화에 대응한 현재의 중국과 타이완을 관조하였다. 또 네덜란드와 영국의 사례를 통하여 장기간에 걸친 동란 이후 사회가 완전히 개조되어 강력한 국가가 되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역사를 관통하는 시각을 갖게 되면, 과거의 일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과거사가 지닌 긍정적인 측면을 중시하게 될 것이다”고 한 것은 거시적 역사와 긍정적 해석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압축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역사교사나 연구자들이 깊이 새겨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기층론, 사회구조론적 접근이다. 그는 “중국에서 아주 많은 일들이 마치 소수의 상층에 의해 모두 주관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소수는 종종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과 타협했다. 다시 말해서 밑바닥의 힘이 강력했다.”고 하였다. 왜 자강운동은 실패했던 것일까? 왜 중국은 일본만 못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당시 중국의 사회구조에서 그 해답을 구했다. 한마디로 사회구조적인 개혁이 없이 곧바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 했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왼손에 쥐고 있는 금과옥조를 포기하지 않은 채 오른손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셈이다.”고 평가하였다. 또 백일유신의 실패에 대해서도, “청나라 관료들은 이제 군사력이 무기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행정기구와 재정제도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정부의 기능은 사회가 부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 전체가 17세기에 머물러 있는 한, 황제가 내린 조서 한 장을 통해 20세기로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헛된 꿈에 불과했다”고 하였다.
여섯째, 현재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제공한다. 현재 중국에서 주장하는 一國兩制에 대하여, 이미 원대에 남중국과 북중국에 서로 다른 세제를 실시한 예를 들었으며, 그밖에도 남북전쟁시 미국,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 17세기 영국 등을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경제, 사회 등의 차이에 따른 것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역사의 효용성을 끊임없이 물을 때, 일국양제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해답의 하나는 될 것이다.
끝으로 역사교육과 관련한 그의 발언 한 구절이 있어서 소개한다. “현재 미국의 역사교육은 분석을 중시하고 종합을 소홀하게 여긴다. 연역적인 연구는 있어도 귀납적 연구는 없다. 이러한 역사연구방법은 종종 특정 인물, 특정 시기, 특정 사건들을 자의적으로 비판하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조직과 구조를 간과한다. 사소한 것을 크게 보기도 하고, 변화가 없는 데도 변화가 있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천편일률적으로 비난하고 잘못을 들춰내서 역사의 장기적인 합리성을 소홀히 한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인 역사만 있을 뿐, 역사의 긍정적인 성격을 꿰뚫어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는 우리 교육에서 어느 샌가 비판이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사회과 교육 목표에서도 비판적 사고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은 그 以上을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교육을 담당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우리에게 주는 귀한 충고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중국 근현대사,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 전통사회의 재정문제와 세금징수
-1992년 11월 9일, 둥하이대 강의
과도기의 사회와 경제
-1992년 11월 10일. 둥하이대 강의
현대 중국에 대한 전망
-1992년 11월 13일, 둥하이대 강의
질의 응답
2. 현대중국사회의 장기혁명
-1992년 11월 20일. 타이베이 화스스팅센터의 강의
3. 새로운 중국 근현대사를 위한 제언
-1991년 11월 5일.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강의
4. 한 국가, 두 체제의 역사적 사례
5. 자본주의와 중국의 21세기
보론 - 어떻게 그의 역사관을 수정할 것인가?
-1991년 7월 8일. '롄허바오'
옮긴이의 말
<2005. 8. 7. 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