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르르르릉~~”
솔희는 렛슨 스튜디오에서 사포의 녹턴을 연주하다가 돌연 중단하고 두 손바닥으로 피아노 건반을 내리쳤다.
인정사정없는 그녀의 손바닥에 눌린 건반은 생명을 구걸하듯 한동안 여러 갈래의 여음을 내며 죽어가고 있다.
그녀는 테이블 옆에 올려 놓은 녹음기를 끄고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품마냥 손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말까?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져, 더 이상은 내려갈 곳도 없지만.......”
솔희는 몇 개의 USB에서 그녀가 최고점을 찍었던 보스톤 초중기 시절의 레코딩을 들어보니, 정말로 그녀가 그렇게 칠수 있었던지가 의문일 정도로 황홀했다.
하지만 이런 노래를 모아 CD로 만들어 선물하기엔 적당하지 못했던 것이, 그녀의 최상으로 연주가 잘된 곡들은 보스톤 시절의 제이에게 트레이닝을 받고 그에 의해서 이끌어졌던 한마디로 다른 남자가 묻은 솜씨여서이다.
이제 그녀만의 솜씨로 레코딩을 해보려 했지만 지금의 솔희의 연주력은 보스턴을 떠날때보다도 더 쇠퇴되어 있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친정에서의 1년간의 공백이 큰 역할을 했고, 그때 고된 육체노동을 하며 팔근육을 노동근육으로 만들었던 이유로 인해 미세한 음정을 표현하는게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평생 안해준거, 마지막으로 녹음이라도 전달해주고 가려했건만, 그것도 안되네, 어쩌지?”
솔희는 정균과 6년만의 해후를 앞두고 빈손으로 가긴 뭐했고 값비싼 남성향수나 명품 따위는 그의 성격상 반기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정균이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남자가 아니란건 그녀도 알고 있었기에 고민중 떠오른 것은 ‘정균을 위한 연주’, 그로부터 그토록 부탁받았던 그 연주를 실황으로는 들려주지 못하지만 녹음이라도 해서 전달하겠다는 아이디어였다.
솔희는 힘없이 일어나 아까전에 렛슨생이 자리를 뜬 그곳을 정리하고 주차장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
옛날 대형 가정집을 여러 사무공간을 합쳐 놓은 곳으로 개조된 그 건물의 게이트가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솔희는 쓸쓸히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지금은 별로 할줄 아는게 없고, 아무것도 줄수 없는 여자가 되었구나.....그렇게 연주해달라고 졸랐을 때 한번 건성으로라도 해줬으면 나한테 어떤 찝찝한 것도 안 남아 있을텐데.”
어둑어둑해지는 엘에이 한인타운, 그녀의 배꼽시계는 저녁시간임을 알렸다.
주변에는 한인 쇼핑몰도 많고 식당가도 많았지만 솔희는 그곳 중의 식당에서 허기를 해결하려는 유혹을 이겨내며 다운타운의 그녀의 아파트를 향해 질주했다.
혼자 식당에 들렀을때의 그 청승맞음과 외로움에 더하여 슬쩍슬쩍 곁눈질하는 남자들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꽈다다다당~~
솔희를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가 아직도 어두운 새벽의 인천땅에 랜딩하는 순간 그녀는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눈을 떴다.
18년전, 두달 먼저 떠난 부모님을 따라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친 다음날 떠나왔던 그곳은 낯설었다.
그녀는 흰색 바지에 흰색 셔츠에 가벼운 가을용 패딩과 흰 운동화를 착용했고 짐을 찾고 입국수속을 마친 뒤 면세점 사인을 보고 눈이 솔깃해졌다.
“입국 수속 끝났는데도 면세점이 있다라?”
호기심에 면세점을 들러 보는 도중 고급 양주들이 즐비한 곳에 눈이 가긴 했다.
하지만 솔희는 정균에게는 어떤 선물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선물을 주는 명분 자체도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이내 공항전철에 올라 변화된 주변 풍경을 말없이 응시한다.
솔희는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그대로 춘천역까지 갈 생각이다.
가지고 있는 짐들이 있어서 환승하느니 그냥 주변 경치나 즐기는게 낫다는 결론이었고 어차피 정균과의 만남은 12시까지니깐 시간이 충분했다.
“아아..........”
그녀를 태운 1호선 전철이 터널을 빠져나올 때 처음보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지나며 멀리 있는 산야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그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오래지 않아 주변의 아름답고 밝은 경관은 다시 어두운 터널로 바뀐다.
솔희의 계획은 정균을 만나 근황을 묻고, 이혼후 보스톤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담담히 털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의 심경을 캐물을 것이다.
(어때요? 기분 좋나요? 당신이 날 저주하며 노골적으로 원하던 일이 고대로 벌어져서 솔희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몸이 되었거든요? 피아니스트로서 사형선고 받은지도 오래에요. 편의점 알바도 못할거라면서요? 이런 저를 보는 기분이 밝은지 진심 알고 싶어요)
그의 대답 여하에 솔희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생을 마감할 것인지, 미국에서 새 삶을 다시 개척할지의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춘천에서 하루를 머문뒤 솔희는 재단이 같은 중고등학교인 모교의 교정을 방문할 계획도 세웠다.
운동장의 벤치에 앉아 20년전의 그 소녀를 20년 후의 중년초입의 여인이 된 솔희가 먼발치에서 조용히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한다.
비록 3일이라는 극히 짧은 귀국여정이지만 많은 것을 솔희에게 알려주고 이야기해주고 미래의 아이디어를 얻어갈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춘천의 호반근처의 모텔에 여장을 푼 솔희는 샤워를 하며 여독을 풀고 타올로 전신을 감은뒤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블라인더가 재껴진 창밖을 멍하니 내다 보았다.
시차가 맞지 않으니 아무리 참으려 해도 하품이 나왔고, 기지개를 다시 켜자 솔희는 알수 없는 공포감과 불안에 휩싸였다.
“아, 무서워......이대로 서울로 올라갈까? 아니면 여기서 푹 자고 내일 혼자 이 근처를 둘러보고 서울로 갈까?”
솔희는 알수 없는 이유로 또 다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되었다.
새로이 깨끗이 씻은 등짝에 식은 땀이 베이고 맥박이 뛰는 공황장애 증상까지 그녀를 덮쳐왔다.
11년전 그에게 결혼을 승낙하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비로소 생각났다.
그녀에게 정균은 결혼생활 도중 음악적 성공가도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 미래가 확실해지면 버려야할 남자였었다는게 떠오른다.
섹스 횟수도 철저히 제한을 걸었고 결혼 3년차도 되지 않아 잠자리에서 그녀를 향해 돌아누우며 다가오던 정균을 귀챦다고 밀어냈을 때, 혼자만의 예민함에 도취되어 그에게 고함을 질러대며 감정을 해소하던 많은 순간들, 이메일 하나 달랑 보내 빠른 이혼절차를 요구하던 일이 갑자기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제이와 입맞추고 포옹하고 침대 위에서 얽혀 딩구는 순간 홀로 고독과 배신감과 싸웠을 정균의 심정이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이입되자 솔희는 이 어지러움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엎친데 덮친것같은 느낌 탓일까, 그와의 결혼 3년차에 날카로운 수술도구를 댔던 자궁의 특정 부위가 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깐걸 따져서 뭐하려고. 어차피 평생 안보기로 한 사람이고 내가 차버린 남자를 왜 만나서 그 예전 일을 따지려고 비행기탔나? 솔희야 너 뭐하는거니? 당장 엘에이로 돌아가야해”
솔희는 아주 피곤에 쩔은 사람처럼 의자와 테이블을 붙잡고 일어났고 그녀를 감싸던 전신타올은 힘없이 아래로 내려가 온몸이 한국 강원도의 가을 공기에 노출되었다.
사실 약속을 깨고 돌아갈 용기도 객기도 없다는걸 깨닫고 솔희는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 앉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비몽사몽 간에 무언가에 쫓기는 꿈, 비행기를 놓친 꿈같은 온갖 잡스러운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솔희는 자신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 열어둔 창문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텔 안으로 유입되어 그녀의 맨몸을 자극하던 춘천의 산들바람은 솔희를 다시 정신차리게 해주었다.
솔희는 비장하게 혼잣말을 큰 소리로 외친다.
“무서워도 에벌린의 섬찟한 눈매만큼 무서울까? 보스톤에서 날 어떻게 해보려고 찝적대던 그 위선자들만큼 불안하게 할까? 무슨 일이 일어난들 에벌린의 매질만큼이나 아프진 않겠지?”
솔희는 알수 없는 심연의 불안감과 싸우며 벌떡 일어나 화장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눈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정이 되자 지금 시간은 11시 20분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솔희는 핸드백을 열고 화장품을 꺼내어 로션을 바른뒤 색조화장을 시작했다.
솔희가 풀메이크업을 해본지 반년도 넘었고 그나마도 일년에 두세번 정도만 해서일까, 한참후 입술에 벽돌색 루즈를 진하게 바르고 마지막으로 빨간 펜슬로 립라인을 완성하는데 손목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윤양, 오늘 점심 약속이 있어서 일찍 나가니깐, 조금 늦게 들어올수도 있어”
사무실에서 정균은 온라인으로 거액을 장기 예치중인 은행 구좌의 잔액을 확인했다.
회사 직원들에게 점심약속을 알린 정균은 차를 몰고 솔희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의 심정은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어느 정도의 호기심은 있지만 기대감도 반가움도, 그렇다고 무슨 낯짝으로 찾아오는가라는 경멸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가진 호기심이란 6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찾아오는가였다.
정균은 솔희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실 솔희의 실력은 탑급 연주자가 아니라는 것을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그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균은 정확히 12시에 약속장소에 도착하여 차를 댔다.
주차장에서 나와 음식점인 2층 단독 건물로 걸어가는데 직각 방향에 검은색 도색의 그랜져 택시가 도착했다.
반사적이지만 무심하게 바라본 택시에서 푸른색 바탕의 연하게 붉은 꽃문양이 있는 플로랄 원피스 차림에 하이힐을 신은 긴머리 여자가 내렸다.
그 긴머리 여자는 핸드백 하나만 들고 있었고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아랑곳하지 않고 정균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기에 그가 여자를 향해 향해 천천히 여유있는 걸음으로 가까이 갔다.
“이렇게 정확히 12시에 도착하는구만,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입구에서 만나게 되네?”
“제가 시간 잘 맞춘건가요? 급하게 준비해서 나오느라고.....”
이혼하고 모든 연락을 끊은 부부가 6년만에 만나는것치고의 대화는 일상적인 톤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솔희는 정균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정균은 분명 솔희가 스트레스로 인해 살이 피둥피둥 쪘을거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매는 여전했다.
거기에 피부주름도 많이 생겼을거고, 만약 솔희가 화장을 하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면 분명히 분이 얼굴과 따로 놀 정도로 덕지덕지 먹었을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러 온 솔희는 한눈에 보아도 공이 들어간 풀메이크업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의 윤기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에 놀랐다.
(솔희가 이제 36살, 맞나? 갓 30이라고 해도 속겠지. 이런 여자를 한 남자에게만, 거기에 답답하고 재미없는 나에게만 묶이게 하려한 내가 잘못이긴 하지. 원래 얼굴값 다하게 되어 있는거야. 내가 그걸 부정하고 살았으니 나만 힘들었던거지.)
정균은 솔희의 여전한 아름다움과 뛰어난 코디와 화장술에 다시 한번 감탄했지만 이제는 그녀에게 냉소적이었다.
솔희가 정균을 위한 코디나 화장을 해본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정균은 솔희가 어떤 목적으로 그를 보고자 하는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택시에서 내린 솔희는 본능적으로 왼편의 남자를 바라보았으며 아직 서로 먼 거리지만 마주 선것처럼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보스톤생활 도중 엘에이에 와서 정균에게 끝간데없이 행패를 부리다가 어깨에 손바닥이 내려 앉았을 때 자동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올려 우러러 보았던 신박한 경험의 그때 분위기와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솔희는 정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린 것이다.
“자, 할 이야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정균은 솔희의 어깨 아래를 살짝 부드럽게 치며 안으로 들어가길 권했을뿐 둘 사이의 스킨쉽은 전혀 없었다.
“와아~ 경치 너무 아름답다! 방금 전철 1호선 타고 오면서도 그림같아서 반했는데 여기 정말 풍광좋은 장소 잘 잡았네요”
그들은 좌식구조로 된 독방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지대가 높은 곳인데 바로 호수가 보이고 반대편의 둘러싼 산이 첩첩으로 보여지는 곳이었다.
솔희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방금 전의 그 긴장과 초조감을 잃어버리고 그녀가 있는 곳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었다.
“엉? 전철 1호선? 이미 와 있는거 아니었나? 언제 도착했기에 방금 수도권전철 이야기를 해, ITX도 있는데? 친구들이 1호선 타자고 그러던가?”
“느리게 가는 전철이 운치가 있쟎아요? 옛날 비둘기호 대신에요, 우리는 죽어도 낭만 포기 못해요”
춘천으로 와서 3일 차에 잠깐 보자고 거짓말을 한 솔희는 자기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 죄로 속으로 뜨끔했지만 느린 기차가 운치가 있는건 사실이었다.
이들은 다소 가볍고 싱거운 대화로 긴장감이 사라져 마주 앉아 착석했다.
솔희는 치마를 잡아 펴며 얇은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편하게 장단지 옆으로 빼고 앉아”
“전 의외로 이렇게 앉는 것도 편하더라구요”
솔희는 무릎을 꿇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이유는 사실 정균과 함께 좌식 식당에 가는 것이 생전 처음이라 그의 앞에서 어떻게 앉아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정균의 눈에 비친 솔희는 변함이 없는 젊음과 미모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6년의 세월 이상으로 성숙함이 엿보였고 그녀의 매너도 남의 평가를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닌 것이 비처져 더욱 호기심을 부추켰다.
무엇보다도 솔희의 눈에는 웬지모를 깊은 슬픔과 아픔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쯔께다시와 대형 활어회가 들어오고 따뜻한 도꾸리가 들어왔다.
솔희는 심장이 뛰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공황장애 증상과 같은 심장의 떨림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정균이 따뜻한 정종 한잔을 권하자 솔희는 그 잔 또한 어떻게 받아야할지 몰라 친정아빠에게 하던대로 두손으로 잔을 받고 고개를 돌려 한손으로 가리고 마셨다.
따뜻한 술이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내려가자 솔희는 그때서야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식사를 천천히 하면서 정균은 이곳에서의 정착기와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솔희는 보스톤에서의 이야기는 대부분 생략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해 친정에서 1년간 두문불출한뒤 엘에이에서 렛슨스튜디오를 하고 있다는 말을 길게 했다.
서로간의 예민했던 과거사 이야기는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의 대화에서 스치듯이 지나갔다.
솔희는 어느 순간부터 정균이 하는 말과 짓는 표정 하나하나에 몰입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솔희의 함박 웃는 모습에 정균도 대화 도중 미소를 지었다.
(매번 저 웃음에 완전히 꽂혔었지. 저 웃음 좋아하는 남자들 많을거야. 왜 혼자 살고 있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정균은 그렇다고 솔희에게 혼자 사는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가 여자의 예민한 곳을 따진다며 솔희의 옛 곤조가 튀어나올까봐 불안한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음식도 비워지고 남아 있던 쯔께다시도 습기를 잃어갈때쯤 되자 이들은 이곳을 나가야할 때가 된 듯 싶었다.
정균이 종업원을 불러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솔희가 왜 만나자고 했던 것인지, 솔희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것을 이제 묻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당신, 아까 호반 산책하고 싶다 했지? 바로 이 주차장 앞에 산책로가 나 있어. 거기서 걸으면서 더 궁금했던 이야기를 하지”
“네, 좋아요!”
솔희는 방긋 웃으며 일어나려 했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은 흑빛으로 변했고 당황한듯한 분위기가 완연했다.
확실히 솔희는 분위기에 살고 분위기에 죽는 여자였다.
그녀가 한시간 조금 넘기는 내내 단지하고 앉은 자세를 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서로의 이야기 속으로, 정균의 말과 표정 안으로 몰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저, 이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되었어요. 하체 감각이 전혀 없어요. 엉덩이까지도요”
그녀는 사실대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 중간에 허벅지와 종아리가 저려오는 현상을 느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었고 몇 번의 저림 끝에 바보같이 그 저림현상이 없어졌다고 믿었던 것이다.
정균은 이 여자가 바보같이 이게 무슨 짓인지 한심한 곰같은 짓을 했다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도 이대로 솔희를 놓아둘수는 없었다.
그는 솔희의 앞으로 가서 살짝 엎드렸다.
“상체는 움직일수 있겠지. 일단 내 어깨를 꽉 잡고 가슴을 내 등에 붙여”
솔희는 머뭇거렸다.
그녀의 앞에 들이댄 정균의 등은 태산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솔희가 그의 어깨를 잡고 상체를 수그려 정균의 등에 댔다.
그녀의 단단하면서도 풍만한 두 가슴이 등에 닿자 정균은 순간 마음이 묘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일단 솔희를 이곳에서 끌어내야만 했다.
정균은 중심을 신중히 잡으며 솔희의 몸을 지탱해서 일어났고 한번 등을 내렸다가 도약시키면서 솔희의 몸을 완전히 그의 배후에 밀착시켰다.
솔희의 열 개의 발톱에 검정 바탕에 흰색 나비문양의 페디큐어가 드러났다.
정교하고 깨끗하고 발톱 윗부분까지 까만 광택의 도색이 되어 있는걸로 보아 엘에이를 떠나기 전날 페디큐어를 받은 듯 했다.
정균은 그녀의 하이힐과 핸드백을 수습해 손에 걸고 솔희를 들쳐업은 상태로 횟집을 빠져나와 호반 위를 걷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현실이야? 예상과 전혀 다르게 돌아가는데?)
솔희라는 50킬로 초반대의 몸무게를 온몸으로 받으며 걷고 있는 정균은 정말 이 상황이 말도 아니게 비현실적이라 생각하고 있다.
정균은 그녀와의 예전 결혼생활 기간 동안 그녀를 업은건 웨딩포토를 찍을 때 말고는 없었다.
그는 솔희를 업고 호반 전체를 돌수 있을 것 같았고 뛸 자신도 있는 만큼 체력이 향상되어 있었다.
여전히 솔희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정균이 할수 있는건 솔희의 하반신 마비가 풀릴 때까지 조용히 호반을 산책하는 것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네타듯 정균의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흑백 문양의 정교한 페디큐어가 발라진 솔희의 발가락은 알게 모르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정균은 등날개를 통해 푹 눌려진 솔희의 유방 아래의 들썩거리는 아랫배의 진동을 느끼고 있다.
솔희는 두 가슴을 그의 등 뒤에 밀착하고 양 팔을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접어 올려진 두 다리는 정균의 허벅지를 감쌌다.
그녀에게 다가온 정균의 등은 여전히 태산과 같았다.
하체를 완전히 땅에서 분리하고 상체만 그의 뒷품에 올려져 아름다운 자연 속을 움직이는 기분은 황홀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은 더 많았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흐으흐흐흑. 흑흑”
솔희는 숨을 꽉 막으며 소리를 내지 않고 울려고 애썼다.
그녀의 눈물자국은 정균의 와이셔츠 어깨에 소리없이 배이고 있다.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 낙엽과 모래위를 밟는 한 남자의 발걸음 소리와 두 남녀의 조용한 호흡소리만이 이 두 사람의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중간중간의 습기를 머금은 흙바닥을 지날 때 생성된 단 한명의 발자국은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는 듯 깊은 골이 패였다.
첫댓글 사람은 꼭 없어 봐야 소중함을 아는것 같아
많은 깨달음을 받았슴다 감사 함니다
행복은 늘 내 앞에 내 안에 있는데 그것을 당연한듯이 대하다가 놓치고나서야 깨닫는게 인간인듯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마음이 찡 합니다
바쁘신데 글 올려주셔서
감사히 읽었습니다
이 소설중 이번편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하려 했는데 잘 안된것 같아요.
@바다로간이리 아니예요 너무 좋았어요
잘됐으면 좋겠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