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영방송에서 기독교를 박해한다.' -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기독교계 방송사에서 흘러나오는 로고와 맨트를 접하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SBS에서 일요일 밤에 기획방송으로 내보낸 영상과 내용이 문제였다.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밤 늦은 시간 텔레비젼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SBS 방송다시보기를 통해 볼 수 있었다.
2. 전체적인 소감은 한마디로 좀 아쉽다는 것. 아무래도 역사적 예수의 문제는 아직까지 - 그러나 어쩌면 영원히 -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나의 아쉬움은 방송내용의 편집과 구성력이 엉성해서 무엇을 핵심으로 말하려고 하는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다.
대학입학시험을 위해 기도하는 교인들을 보여준 후, 던진 질문: "우리가 아는 신의 아들 예수는 나사렛의 그 예수였는가?"라는 멘트가 이 방송의 핵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주어지지 않은 채로 방송은 끝이 났다. 방송은 신화없는 예수를 도마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말로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어떤 신적 힘을 가지지 않은 현자(a wise man)로서의 예수가 나사렛의 그 예수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기존의 메시야칭호나 기독론적 타이틀을 소개하지 않지만, 영지주의적 색채 속에서 이미 예수를 신적인 비밀을 계시하는 자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신화적이다. 역사적인 활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여기에서는 예수의 어록만 담고 있는 도마복음서에서 예수는 천상의 메신저의 화육일 뿐이다. 비록 도마복음서가, 예수의 말씀어록인 Q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문서에 속한다고 해도, 예수 전체를 온전히, 특히 역사상의 예수를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 모든 인간에겐 말뿐 아니라,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에는 삶이 없는 예수의 말만 나와있기에 오히려 비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렇다면, 과연 예수는 누구였을까? 방송의 멘트는 사실, 나사렛의 그 예수가 과연 우리가 아는 신의 아들 예수인가? 라는 물음으로 정당하게 물어져야 한다. 나사렛의 그 예수는 누구였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방송은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먼저 방송의 전체적인 구성부터 보자. 처음엔 "예수는 신화일 뿐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당시의 신화들과 복음서 사이의 유사성을 언급하더니 별 특별한 결론없이 유대교의 욤키루프(대속죄일)의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나서 예수의 행적이 민중과 함께 한 것이며, 예수의 천국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학자들의 말을 빌어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는 과연 신이었는지, 신화없는 예수의 어록으로는 도마복음서가 주목받고 있다는 말을 하고서 서서히 제1부를 마감한다.
마치, 취재진이나 편집부 자체가 아무런 신학적 기반이 없어 그들 스스로 취재한 내용에 당황한 듯 보인다. 무엇을 어떻게 연관시켜야 되는지 몰라, 새롭다(?)는 내용만을 주절거리는 듯 보였다. 너무 욕심을 낸 것일까? 복음서 내용의 신화적 내용에서 부터 예수의 메시지까지, 그리고 예수가 살았던 유대땅에 대한 어떤 종교적 배경까지 소개하고자 하다 보니,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혼돈스럽다. 차라리, 한가지 주제로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신학적으로도 의미있지 않았을까? 예컨대, 도대체 역사적 예수는 누구였을까?라는 주제로.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복음서의 내용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끝까지 밀고 나갔으면 어땠을까?
진실을 밝히려는 용기가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취재한 내용이나 신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일까? 어쨌든 아쉽다.
4.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오시리스 신화나 미트라스 신화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내용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미 종교학이나 신약학 또는 19세기 종교사학파의 글을 조금이나마 접해 본 사람이면 놀랄 일도 아니며, 오늘날 학계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더 더욱 아니다. 기자들은 항상 충격을 먹고 산다. 기사화하려고 한다.
사실 이시스나 오시리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밀의종교는 문헌상으로는 2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빌립보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찬가(2, 6-11)는 이미 이들 밀의종교보다 훨씬 앞선 주후 40년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죽음과 부활의 연관성을 동방의 밀의종교에서 찾는 것은 시대적인 착오일 수가 있다. 사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언급은 유대묵시문학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주류이다. SBS에서 이렇게 저렇게 (어렵게) 수집하여 짜깁어 놓은 논리는 학계에서 이미 옛 것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학계의 논점은 유사성이 아니라, 무엇이 다르냐에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가 오시리스의 신화와 유사하다고 해서 과연 오시리스 신화에서 의미하는 것과 동일하냐는 것이다. 이시스-오시리스 이야기를 아무리 뜯어봐도 거기에는 죽음과 부활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할 뿐이지, "누구를 위한"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마치 농경사회에서 자연에 대해 쉽게 체험할 수 있었던 탄생-소멸-재탄생의 순환적 생명(환생)의 논리를 이시스-오시리스 신화는 대변하고 있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이런 자연의 순환론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성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를 위한" 것으로 이해했고, 예수의 부활과 관련해서 예수를 신격화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과 연관시킨다. 그리고 그의 아들됨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됨을 부여하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스스-오시리스의 신화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구조상의 유사성 - 삶과 죽음 그리고 다시 삶 -이 내용상의 차이점까지 봉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오시리스 신화는 그저 신화일 뿐이다. 오시리스나 그의 아내 이시스, 그의 아들 호루스는 실존의 인물이 아니다. 아내 이시스에 의해 다시 부활하게 된 오시리스는 죽은 자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 되고, 호루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삼촌과 대결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삶을 관장하는 신이 된다. 그러나 성서에서 예수부활은 신화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실존에 대한, 나사렛의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이시스-오시리스 신화가 자연적이며 순환적이라고 한다면, 예수 부활은 보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서의 예수부활은 예수가 부활하여 신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이다. 더욱이 그의 부활은 항상 그의 죽음과 함께 이야기된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당시의 명백한 정치적인 사건과 연루해서. 이와 달리, 오시리스의 이야기는 신들의 전쟁으로 이해된다. 그야 말로 신들의 이야기, 신화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A.D 30년이라는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유대의 종교인들에게는 저주의 상징으로, 거리끼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의 신화관에서 볼 때는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된 것이다. 왜, 신이라는 존재가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말로 들린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먼저 예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은 자라고 선포한다. 그의 죽음은 신 들간의 암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삶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복수의 칼날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힘없이 죽임당한 자들의 승리에 대한 약속, 묵시사상에서 말하는 의인의 부활을 의미한다.
5. 방송은 미트라스 신화와 예수 탄생기념일 사이의 연관성을 상기시킨다. 12월 25일은 이 신화에 따른 로마의 축일이었다. 이것이 예수의 탄생일로 후에 지정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성서는 예수의 탄생이 12월 25일이라고 또, 추운 겨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연히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설정된 것이다. 부활절이 이와 맞물려 봄날로 제정된 것도 역사적 산물임에 틀림없다. 마치 오늘날 한국교회가 고유의 명절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삼듯이, 당시의 그리스도인이 된 로마인들에게 신의 아들 예수의 탄생에 대한 기념은 로마의 축일에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6. 나사렛 예수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신의 아들이었을까? 방송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교수이자 유대인인 게자 버메스 교수의 입을 통해 예수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현명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사실 번역상 오해가 많은 표현이다. 내 생각엔 현자라고 번역해야 오히려 오해가 덜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수는 소위 지혜의 교사였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깨우쳐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간단한 말과 비유 등으로 깨우쳐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동시에 예수는 당대에 흔히 있었던 악령 추방자였던 영적 치유자였다고 한다. 버메스 교수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또한 신에게 가까이 있는 자, 즉 영적인 사람이었다. 예수는 한 번도 하나님을 제3인칭으로,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언제나 아빠(abba) 아버지로 불린다.
방송은 예수가 신의 아들인가에 대해, 로버트 프라이스를 통해 예수를 신의 아들로 부르는 것은 신화에 나오는 영웅전에서 따온 것이라는 견해를 소개하는가 하면(구글 도서 검색 창에서 Jesus라고 한 번 쳐 보면, 권위있고 신빙성있는 학자들의 책들이 소개된다. 그런데, 프라이스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미국학계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펑크, 샌더스, 마커스 보그와 같이 권위있는 학자인 크로산 교수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예수는 당대에 비범한 인물(extraordinary man)이었으며, 이를 표현하는 말이 바로 신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당시에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로마의 황제들)에게 붙여졌던 칭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튀빙엔의 신약학자 마르틴 헹엘에 따르면, 이것은 지나친 표현이다. 이미 주후 40년 경에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가에서사용된 '선재하는 그리고 파송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헬레니즘 지역에서는 흔한 표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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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헬레니즘적 영향보다는 오히려 구약성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옳을 듯하다. 구약성경의 시편 2편에 보면, 왕을 가리켜 너는 내 아들이다. 라는 표현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언자를 향해서도 아들이라고 표현한다.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신적인 존재를 뜻한다기 보다는 신적 존재와의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고대의 신화적 영웅들을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헬라어로는 파이데스 데우, 즉 신의 자녀들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파이데스 데우가 아닌 위호스 데우라는 단수를 사용한다. 물론 이 명칭은 방송에서 말한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고 나서 사용된 것이지만, 그렇게 흔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후에 클라디우스 황제 이후에야 신과 황제 사이의 연관성을 언급하며 이 칭호를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는 예수를 이런 황제상으로 만들기를 원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자들에게서 도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은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섬기는 종으로 왔다고 말한다 - 마가10, 45절 이하.
7. 그렇다면, 예수는 신적 존재가 아닌가? 방송은 암묵적이지만 신적 존재가 아니다는 말로 대답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는 예수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가? 오히려 예수는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만이 선하다'고 답하지 않는가?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입을 통해, 나는 하나님이다, 라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 그는 늘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신이 아니다. 복음서의 예수는 철저히 인간이다. 그는 잠자고 먹고 마신다. 화를 내기도 하고, 예루살렘성전에서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크로산은 예수 운동이 비폭력적이라고 말하지만, 기조는 그렇지만 ... 글쎄 100%로 옳은 말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그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기도 하고, 절규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올린다. 철저하게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에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자신의 삶에 일치하는 삶을 살았던 예수의 모습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인간을 저주하거나 인간에게 보복하기 위해 신으로 변신(?)하는 그런 신화적인 모습 없이, 나약한 한 인간, 그러나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배척당했던 자들의 친구가 되었던 그의 모습 속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이런 모습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일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에게서 그려진 하나님 상은 여타의 신화에서 그려진 신에 대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오시리스 신화는 부활한 오시리스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통한 보복을 말한다. 죽임에 대해 죽임이 따라온다. 부활은 보복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보복이 아니었다. 죽임에 대해 죽임이 아니라, 용서를 선포한다. 그리고 예수처럼 살아간 삶, 참으로 인간적인 그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포기되거나 좌절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죽은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다시 예수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예수의 삶이 힘 있는 권력자들에 의해 죽임에 처하게 되고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저주를 받는다 해도, 포기되거나 좌절되어서는 안 되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살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예수와 함께 우리가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둠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피안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언설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의 방식, 태도, 결단을 의미한다.
9.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역사 안에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예수의 부활도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 그러나 역사 안에 부활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예수의 부활도 역사적 사실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이라는 말 속에 우리는 무엇을 집어넣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근대적인 사고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부활은 역사적일 수 없다. 그러나 성서를 기록하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부활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활은 기대되었고 많이들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였다.
10. 문제는 신의 아들이라는 자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신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영원이란 시간의 지속이라기 보다는 시간이 개입되지 않는 차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간 속의 존재와는 달리 신은 죽지 않는다. 또한 신은 고난당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처럼 아픔을 겪지 않는다. 아픔은 무언가가 부족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신은 온전하다. 신은 절대적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관에 따르면, 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끌리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보여진 하나님은 이런 헬라적 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고난을 당한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모든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부르짖고 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기 보다는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와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다. 초대교회는 이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 되시기를 희망하며, 이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는 그 날을 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