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벽에 걸린 웃옷 주머니에서 투명한 비닐 커버 안의 은색 도구를 꺼낸다. 몇 달 전부터 남자는 여자에게 더 이상 하이힐을 신지 말거나 다음에 올 때 손톱 소제용 도구를 가져오라고 했다. 여자는 그 때마다 알았다고 했지만 여전히 하이힐을 신고 나타났다. 남자는 어제 이곳에 오기 전 화장품 할인코너에 들렀다. 조각칼 모양의 뾰족한 도구는 출입문 가까이 여러 가지 미용도구들과 행어에 걸려 있었다.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여자의 발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죽은 피부의 조직들을 파내기 시작한다. 여자의 양쪽 발바닥에 박혀있는 두 개의 티눈은 날이 갈수록 깊고 커져갔다. 남자의 어깨에 힘이 들어 갈 때마다 여자는 잠깐 발바닥을 떨지만 완전히 잠에서 빠져 나오지는 않는다. 각질이 사각 휴지 위에 모일수록 여자의 발바닥 구멍은 깊어진다. 이마에 땀이 맺힐 때쯤, 남자는 모아진 각질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린다. 손을 씻고 거실에 서서 남자는 저만큼 떠오르는 붉은 해를 무덤덤히 바라본다. 여자는 기척이 없다.
“이 신발, 뭐야?”
오전 9시에 일어난 여자는 산책을 나가려다 개수대에서 야채를 씻는 남자를 향해 묻는다.
“이제 그거 신고 다녀.”
남자는 천천히 돌아보며 애써 힘주어 말한다.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대해 남자는 긴장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어제 화장품 할인코너에서 나와 몇 번이나 구둣가게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다 결국 여자의 굽 낮은 구두를 한 켤레 샀다.
“내 구두는 어떻게 했어?”
“버렸어.”
여자는 무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남자를 바라본다. 잠시 집안엔 물 흐르는 소리만 나고 곧이어 계단을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해변 아파트 앞의 논둑을 지나 여자는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새 구두가 거슬리는 것일까. 어느 쯤에서 여자는 신발을 벗어놓고 바다로 향한다. 남자는 찌개가 끓는 동안 베란다 한 쪽에서 여자를 지켜보고 있다. 5월의 아침 햇살은 이미 열기를 내뿜는다. 여자의 발목을 휘감는 바닷물의 온도는 상쾌할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져간다. 간혹 그러했듯 갯바위가 몰려있는 곳까지 산책을 다녀올 것이다. 언젠가, 아마 처음 그곳에 들렀을 때였던 것 같다. 남자는 간간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갯바위에 앉아 낚시를 했고 여자는 커다란 우산을 펴들고 바위 위를 오가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여자는 이따금씩 다가와 그물 망을 들여다보거나 남자의 곁에 앉아 무슨 말인가를 걸어오곤 했다. 오후 늦게야 겨우 두 마리의 활어를 그물 망에 가둘 수 있었다. 남자는 근처의 구멍가게로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보일 듯 말 듯한 언덕 위의 푸른 일렁임을 언뜻 보았다. 여자는 줄곧 시선을 아래로 하고 모래 위를 걸어 나가고 있었다. 쉰을 바라보는 남자와 스물여덟 여자의 얼마간의 만남에서, 남자는 특히 여자 쪽에서 위태로움을 느낄만한 어떤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지금처럼 월급 통장을 아내에게 내준다면 아내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두 아이들 역시 제 또래나 미래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서 남자의 일상을 간섭하지 않았다.
남자는 활어의 배를 단번에 가른 다음 주루룩 달려나오는 내장을 바닷물에 던졌다. 미물은 비어 있는 배를 내보이고도 눈을 껌벅거렸다. 남자는 다시 눈 아래 부분을 겨냥해 정확하게 칼을 찍어 눌렀다. 여자가 돌아왔을 때 활어 두 마리의 흔적은 창백한 살점 한 접시로 남았다. 여자는 접시 위의 고요한 살점같은 얼굴로 비닐봉지에서 담배 한 갑과 소주 한 병, 그리고 초고추장을 꺼냈다. 남자와 여자는 푸른 일렁임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며 소주 한 병을 비웠다. 가랑비와 바람이 섞이는 5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낯선 건 싫어. 당신 그런 거 알아? 저녁이면 하나 둘 불이 켜지는 남의 집 창을 지켜보는 기분 말이야. 이런 시간에 아무나 머물다 가는 낯선 방에서 주말을 보내야 하다니... .
마을엔 백사장을 낀 좁은 길을 따라 서둘러 지은 러브호텔과 소형 아파트 한 동이 들어서고 있었다. 남자는 아내 몰래 푼푼이 모아두었던 약간의 돈과 퇴직금 중 일부를 대출 받아 해변마을 아파트의 마지막 입주자가 되었다. 아파트의 창들은 대부분 주말에만 불빛을 내보냈다. 불빛 속의 주인공들은 날씨에 상관없이 선글라스를 즐겨 썼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둘만의 새로운 공간에서 여자는 거실을 오가며 자주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여자의 눈빛은 늘 우울하고 불안해 보였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남자는 여자가 잠들어 있을 때 여자의 몸을 관찰했다. 어느 아침, 남자와 함께 근처의 온천에 간 여자는 남자가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 그대로 차 안에 남아 있었다. 남자는 전날 밤의 일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날 밤 10시, 남자가 일주일간 비어있던 집안의 눅눅한 공기를 몰아내고 깨끗이 닦은 욕조에 물을 받아 놓기를 세 번쯤 반복했을 때 여자는 귀가했다.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은 무너지듯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축하려는 남자에게서 벗어나 여자는 곧장 욕실로 갔다. 여자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동안 남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베란다에 서 있었다. 오징어잡이배 불빛이 캄캄한 물위에서 반짝였다. 그것은 가족이 모여드는 세상의 모든 집들의 불빛을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쓸쓸함을 안겨주었다. 남자의 눈에 물기와 힘이 동시에 느껴졌다. 여자는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남자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과장하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피곤하니? 조금. 여자는 열려진 방문을 밀고 침대 위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선 자리에서 한동안 발을 떼어놓지 못했다. 여자가 잠든 사이 남자는 여자의 딱딱한 발바닥부터 어루만지며 하얀 나신을 들여다보았다. 여자 몸의 탐스런 굴곡에 남자는 새삼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이 검게 빛나는 여자의 몸 한가운데에 닿았다. 남자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집안을 바삐 오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신문지와 면도기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여자 가랑이 사이에 손전등을 밝혔다. 빛을 받은 여자의 거웃은 더욱 찬란했다. 남자는 환한 불빛 아래 신문지를 편 다음 면도기의 날을 세웠다. 여자는 늘 어딘가를 헤매다가 남자보다 늦게, 어둠이 내릴 즈음 해변 아파트로 왔다. 남자는 일이 끝나는 대로 대형 할인 마트에 들러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저녁까지 먹을 수 있는 양식과 생필품을 구했다. 혼자 카트를 밀고 식료품 코너를 도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꼭 모자를 눌러썼고 선택한 물건을 카트에 집어던질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에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신문지 위에 수북했던 여자의 거웃이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자는 한 손으로 타일 벽을 짚고 그것을 지켜보다가 욕실을 나왔다. 현관문 앞에 여자의 하이힐이 남자의 구두 위에서 배를 맞대고 있었다.
파도에 실려 온 미역 줄기가 여자의 발목을 간지럽힌다. 손으로 건져 올리자 물이 뚝뚝 흐르는 갈색의 해조물에 햇살이 쨍 비친다. 여자는 모래 위에 앉아 아려오는 발바닥을 들여다본다. 오래도록 혈액이 통하지 않았던 티눈은 두 개의 구멍으로 남아있다. 바늘로 여러 차례 찔러놓은 듯한 구멍 안의 깊은 상처에 미역을 문지른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감촉은 플레어 스커트 밑까지 서서히, 그러나 은밀하고 강렬하게 파고든다. 여자는 파도처럼 달려드는 욕망의 전조에 쓰러지듯 눕는다.
이마에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이 여자를 일으킨다. 스커트 자락을 반쯤 적신 여자는 후들거리며 갯바위에 닿는다. 그리고 곧 먼 수평선에 눈동자를 꽂고 바위에 오도마니 앉아 따뜻한 비를 맞는다. 여자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어떻게든 다시 증발할 것이며 끝내 여자의 몸 속으로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물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일정한 박자로 바다 속에 스민다.
3년 전, 여자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 때문에 버스는 한 시간 이상 지체되었지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여자는 약속이 없는 채 길을 나선 것이다. 토요일 오후면 누구나 살던 곳을 잠시 떠나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버스는 흡사 라이트를 켠 얼음 동굴 같은 모습으로 산모퉁이를 돌아왔다. 여자는 기사가 자동문 버튼을 누르는 동안 눈을 털기 위해 몸을 두어 번 흔들었다. 버스 안은 비릿하고 눅눅했다. 승객들은 마치 오랜 굶주림 끝에 전쟁터에 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처럼 초점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앞쪽에서 세 번째 자리의 창측에 앉았다. 유일하게 비어있던 자리였다. 여자가 내측에 앉은 남자의 무릎을 부딪히며 창측으로 들어가는 동안 남자는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대부분 그 같은 경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무릎 끝을 살짝 안으로 당겨주거나 엉거주춤 일어나는 시늉을 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창측으로 자리를 옮겨주는 정도의 도움을 주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체인을 감은 버스는 해발 700m의 산 마을을 천천히 벗어났다. 여자는 김이 서린 유리창을 벙어리 장갑을 낀 손으로 간혹 문지르며 오직 나무와 눈과 하늘만이 존재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교대를 졸업하고 산 마을에 들어온 지 2년, 전교생 마흔 명의 작은 학교와 그 옆에 붙은 관사에서 보내는 이십대의 중간 토막은 권태로웠다. 권태의 반복성은 날이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마침내 뙤약볕 아래를 맨 몸으로 기어 감자 한 알을 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자 알이 영그는 동안 잠시 허리를 일으킬 뿐이었지만 언제나 태풍은 수확을 앞둘 무렵에 불어와 비탈 밭의 감자를 흙더미와 함께 쓸어갔다. 여자는 그들의 아이들과 우산을 쓰고 다리 난간에 서서 자갈밭이 된 감자밭과 감자밭이 된 개울가를 바라보았다. 땅을 파다 허리를 펴고 참을 먹고 술을 마시고 마침내 쌓여 가는 농협 빚의 무게 때문에 마을이 떠나가라 주사를 벌이는 삶. 그것도 모자라면 그들은 전세버스를 타고 단체로 어디론가 떠나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 돌아왔다. 그러다 다음날 아침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맨 채 발견되기도 했다.
마을은 계절을 따라 춤추듯 돌아가는데 여자의 삶은 고요하기만 했다. 낮 동안 빈집에 혼자 있던 아이들과 엉겅퀴가 핀 들길을 걷다가 함께 책을 읽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해질 녘의 고요는 바윗덩이보다 더 무거웠다. 여자가 나가지 않는 날도 아이들은 들꽃을 꺾어다 여자에게 안기고는 뜀박질로 돌아갔다. 여자는 아이들이 안기는 들꽃을 모두 물에 꽂지 못해 거꾸로 매달아 말리기 시작했다. 바싹 마른 꽃들은 다시 관사 마루의 한켠에 화단을 장식했다. 실내의 마른 꽃 화단인 것이다. 여자가 마른 꽃들을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차마 아이들의 손끝으로 꺾어 온 꽃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인생을 더 살면서 수없이 겪게 될, 이미 부모들의 삶에서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내침‘을 일깨워져야 할 사람이 꼭 여자일 필요는 없었다.
단풍이 산비탈을 줄달음쳐 번져가던 맑은 날, 아이 하나가 여자의 손을 끌었다. 선생님, 나무가 하늘에 닿았어요. 해를 막 자르잖아요. 저기 봐요. 석양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아이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우와. 해가 다시 붙었어요! 석양이 나뭇가지에서 벗어나 해넘이를 하고 있었다. 쌉쌀한 바람이 마른 옥수수 대궁을 흔들며 강가로 몰려가자 아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선생님, 잡혀가요. 바람이 해를 끌고 가잖아요. 저기 봐요. 마을이 조금씩 조금씩 어둠에 묻히기 시작했다. 아이의 부모가 들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아이는 뜨락을 밟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저녁, 여자는 집안으로 들어오다 마루의 벽 모서리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마른 꽃이 차지하는 공간이 커갈수록 여자도 점점 건조되어 갔다. 부실한 슬라브 건물의 창 틈으로 그날따라 유난했던 바람이 안으로 불어 들어 마루는 꽃의 잔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자는 벽에 거꾸로 매달린 억새풀 다발 아래 무릎을 꺾어 앉았다. 여자의 웨이브 진 긴 머리는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한 밤이었다.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여자는 주말마다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옆자리의 남자는 눈을 감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여자는 다시 김이 서린 유리창을 닦다가 어떤 시선을 느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은 임산부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본다기 보다 여자가 닦아놓은 유리창 너머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이미 임산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마침내 옆에 앉은 노인의 팔을 잡아당기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이-! 버스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뒤돌아보았고 반동에 의해 몇 명의 승객들이 일어났다. 아가 나오나보네! 이를 어쩌누! 노인이 임산부에게 팔을 잡힌 채 허둥거리며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버스는 고갯마루에서 멈추었고 기사는 실과 가위와 신문지를 던져주고 대부분의 남자 승객들과 버스에서 내렸다. 여자는 자꾸만 서리는 김을 천천히 닦아내며 바깥에만 시선을 둔 채 비릿한 피 냄새를 견뎠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몰려든 여자 승객들 어깨너머로 새어나왔다. 몇 몇 아낙의 몸에 밴 빠른 움직임에 잠시의 수선스러움이 지나고 그들 중의 누군가 갓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라는 말을 했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입과 입을 통해 승객 전원은 잠깐 사이에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임산부는 흐느낌 같은 소리를 약하게 내며 설핏 웃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야 여자는 옆자리의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은 임산부를 부축하느라 바로 옆에 앉은 남자에게 강보에 싸인 아이를 건넸을 것이다. 남자는 아직 눈을 제대로 못 뜨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자도 하얀 눈밭에서 태어난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뜻밖에도 여자의 눈시울이 젖기 시작했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다시 유리창을 닦았다. 이미 남자가 여자의 눈 밑에 흐르는 눈물을 본 다음이었다. 여자는 털장갑을 벗고 물기를 찍어냈다.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잠깐 쓰다듬었다. 남자가 여자를 의식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자는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버스는 다시 평온한 눈길을 더듬어갔다. 버스 안 사람들 사이에 뭔지 모를 기운이 깔렸다.
남자는 식탁의자에 앉아 안으로 들이치는 비를 바라본다. 반쯤 젖은 커튼의 한가로운 나부낌이 불현듯 흐르던 여자의 눈물처럼 어떤 격정을 불러들인다. 남자는 싱크대 문을 여닫으며 남아있는지 확실치 않은 술병을 찾는다.
남자가 결혼한 것은 스물 여덟 살 때였다. 아내는 근무하고 있던 학교의 제자였다. 남자는 새 학기에 여고 3학년의 담임을 맡으면서 한 여학생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에 띄게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조용한 성격의 여학생이었다. 그리고 눈이 맑았다. 그녀의 이름인 수정(水晶)처럼... .
학기 첫날 출석을 부르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남자는 한동안 자신을 수습하느라 헛기침을 두어 번 해야 했다. 여학생들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겨울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녀가 대학을 포기하자 남자는 결혼을 서둘렀다. 그 대가로 남자는 오지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마을에서 두 사람은 행복했다. 마당엔 계절따라 꽃이 폈고 화단에 물을 뿌리는 아내의 뺨은 늘 발그레했다. 남자는 여름 방학이면 물 조리개를 잡은 아내의 손을 끌고 나무 그늘에 앉았다. 그리고 활짝 핀 봉선화의 꽃잎을 찧어 아내의 손톱 위를 감쌌다. 아침이면 맑은 손톱은 주홍빛으로 곱게 물들었다. 겨울이 올 때까지 남자는 아내의 손톱을 조금씩만 잘라내었다. 그래서 해마다 첫눈이 내린 다음 꽃물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게 했다.
언젠가부터 마당의 꽃들이 저희끼리 피다가 서리를 맞고 쓰러졌다. 아내의 손때가 묻은 물 조리개는 마당 한 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있었다. 아내는 10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 취한 듯 살아온 3년을 제외하면 나머지 7년은 아이를 갖기 위한 세월이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내는 효능이 확실치 않은 약을 사들이고 여러 점쟁이를 찾아 다녔다. 그들로부터 들은 비법을 실험하느라 남자에게 갖가지 행위를 강요했다. 수업을 하다말고 아내가 정한 시간에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가 아랫도리를 벗은 일만 해도 셀 수가 없다. 잉태에 집착하는 여자의 몸은 더 이상 관능적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것을 더 예민하게 느끼는 아내는 말을 잃고 그림자처럼 집안을 오갔다. 남자는 아내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공부나 취미생활, 그도 아니라면 입양을 하면 어떻겠냐고. 그러나 아내는 어떤 것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겨울 방학을 하는 날이었다. 남자는 방학식을 끝내고 일찍 돌아왔다. 아내는 마루에 쓰러져 있었다. 남자의 와이셔츠는 달궈진 다리미 밑에서 찌그러들고 있었다. 남자는 늘어진 아내를 업고 눈 내리는 소읍의 거리로 내달렸다. 산소호흡기도 없는 산골의 작은 병원에서 아내는 서른이 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정확한 사인은 모른다. 그저 시골의사의 말대로 심장마비라고 추측할 뿐... .
몇 년 뒤에 남자는 주변의 권유로 아이가 둘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고 일상은 특별한 혼돈 없이 흘러갔다. 남자는 새 아내와 아이들과 방학을 제외하면 주말에만 만났다. 남자는 가족이 있는 도시로 전근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가족들 역시 남자와 함께 사는 일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버스에서 태어난 아이를 엉겁결에 받은 날 역시 겨울 방학을 하는 날이었다. 남자의 모든 신경은 노인의 부축을 받으며 옆자리에 앉은 임산부에게 쏠려 있었다. 버스가 거북이 걸음을 하면 할수록 임산부와 태아의 병원행이 늦어질 것 같아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조바심을 쳤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 잠깐 눈을 떴고 하얀 눈 위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코트에 달린 모자를 털며 버스에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개의 빈자리가 남아 있는지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옆에 탈것이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누구나 비릿한 기운이 퍼져 있는 시골 완행버스의 뒷자리보다는 앞자리를 더 선호할 테니까. 문이 열리고 여자가 막 차에 오를 때 남자는 눈을 감았다. 곧 여자의 장단지 부분이 남자의 무릎께를 스쳤고 잠시 후 어깨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었다. 임산부가 아이를 낳는 동안 남자는 버스에서 내려 대부분의 다른 남자들처럼 담배 한 개비를 태웠다. 살다보면 때로는 예기치 않게 쉬어 가야 할 때가 있다. 남자는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며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내의 죽음을 확인하고 병원 마당에 섰을 때 외마디 탄성처럼 쏟아지던 함박눈! 아내가 잠든 묘지에 가보지 않은 지도 몇 년이 흘렀다. 새 아내가 언젠가 제사 이야기를 꺼낸 일이 있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자식이라도 하나 남겼다면 달랐을 것이다. 아이가 없어서 많이 불행했다기 보다 아이가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한 아내 때문에 불행했다고 생각했는데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새 아내와의 관계는 함께 공유한 것이 없는 인간관계가 대부분 그러하듯 보통의 부부라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응어리조차 없었다. 늘 각자 조금씩 조심했고 이따금 별 감흥 없는 섹스를 나누었다. 아내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채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남자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인생을 소진하며 조금씩 조금씩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미미했던 아내와의 교합마저 불가능하게 된 이후 남자는 집으로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길에서 한동안 허둥거리곤 했다.
도심의 눈은 아스팔트 바닥을 보이며 질척거렸다. 기사 양반! 차 좀 세워 주시오. 산모가 몸을 웅크리며 먼저 내렸고 노인이 남자에게서 아이를 받아 갔다. 어쩌실라고요? 누군가 노인의 등뒤에 대고 걱정 어린 말을 건넸다. 여서 택시 잡아타고 다시 올라가야지요. 노인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버스 안을 향해 조금 웃어 보였고 문은 곧 닫혔다. 세 사람이 내리자 버스 안은 정전이 된 듯 적막감이 들었다. 남자는 그 적막감을 쳐내려는 듯 아직 집과는 거리가 먼 그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도심 한 가운데의 극장 앞에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몇 명이 더 내렸다. 여자는 숄더 백을 어깨에 맨 채 저만큼 앞서 걸었다. 여자의 하이힐 밑에서 눈이 찰박찰박 튀어 올랐다. 더 이상 눈발이 날리지 않는 거리를 남자는 여자보다 조금 떨어져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싫지 않았다. 여자는 간혹 쇼 윈도우에 눈길을 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었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여자는 맥도널드 체인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햄버거 한 개와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남자 역시 여자가 주문했던 커피와 햄버거를 들고 여자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햄버거 포장을 펼치다 잠깐 창 밖의 풍경을 내다볼 뿐 체인점 안의 사람들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남자는 털장갑으로 버스 유리창의 김을 닦아 내던 여자를 떠올렸다. 바깥 풍경 보는 게 취미로군. 여자가 입에 무는 햄버거의 한 번에 잘려나가는 크기와 속도에 맞추어 남자도 천천히 감각에 치중한 서양음식을 씹어 삼켰다. 여자가 수거함에 용기들을 정리하고 거리로 나서는 것을 보고 남자도 일어났다. 여자는 다시 극장 앞으로 되돌아 가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탔다. 겨울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여자는 하이힐을 벗어들고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발이 시릴 텐데. 남자는 하나의 점으로 멀어져 가는 여자를 선 채 지켜보았다. 겨울바다는 한산했다. 여자가 다소 헝클어진 모습으로 되돌아왔을 때 남자는 정면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여자 또한 피하지 않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지 않을 건가요? 막차 시간이 다 됐는데... . 남자는 여자가 그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주말이면 여자는 같은 자리에서 차를 기다렸다. 남자는 뒷좌석에 앉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중심을 잡아가며 빈자리를 찾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바다 쪽으로 돌리며 하이힐을 신었다. 남자는 담배 한 개비를 태웠다. 돌아가야 할 곳이지만 지금은 아니예요. 붉게 물든 바다와 하늘에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해안상가 쪽으로 먼저 걸어 나가 주황색 천막이 쳐진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어묵 국물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와 허공에서 흩어졌다. 남자는 국물을 일회용 컵에 담아 여자에게 건넸고 여자는 그것을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조금 마셨다. 이런 날 그런 거 신으면 춥지 않아요? 남자는 여자에게 소주 한 잔을 부어 주며 다시 말을 건넸다. 여자는 자신의 하이힐을 내려다보고 말없이 웃었다. 날씨에 맞지 않는 여자의 하이힐은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여자가 그 어떤 것에도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하고 전체적으로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도발적인 하이힐은 여자의 머리끝에서 발목까지의 심드렁한 분위기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새삼 남자에게 묘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다분히 유혹적이었다. 남자가 앞서 걷기 시작하자 여자가 그 뒤를 따랐다.
여자의 맨발은 티눈과 굳은살 투성이였다. 남자는 침대 발치에 나와 있는 여자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몇 번인가 쓰다듬었다. 여자는 이따금 낮은 신음소리를 냈지만 잠 속에서 빠져 나오지는 않았다. 여자와 3년 동안 거의 주말마다 만나 밤을 함께 보냈지만 정상적인 성 관계를 맺어 본 일이 없다. 여자는 남자와 엉켜 빤한 혼돈 속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남자의 성 불능은 차라리 반가운 것이라 했다. 그러나 남자는 간혹 몸부림을 쳤다. 어느 아침, 창가에 앉아 있는 여자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여자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 초췌한 안색은 남자에게 어딘가 낯익은 것이었다. 아내가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를 채찍질하던 그 때, 문득 거울 속에서 보았던 어느 아침 자신의 얼굴...... . 남자는 밤새도록 여자의 수면을 방해했음을 기억했다.
한차례의 장대비가 지나가자 바다는 울음을 그친 아기처럼 가볍게 몸부림을 치고 다시 고요를 찾는다. 여자가 앉아 있는 바다와 도로 건너편 언덕에 무지개가 솟고 그 아래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린다. 상쾌한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은 언뜻 보리밭 같다. 여자가 어린 시절, 학교 가는 길에 보리밭이 많았다. 바람에 실리는 그 푸릇한 내음에 코를 맡기고 종종걸음을 치다보면 사내 아이들이 깜부기를 찾아내어 달려왔다. 그리고 달음박질에서 진 여자의 뒷 목덜미를 잡고 숯 검정같은 깜부기를 스윽 그으면 몸 안의 무엇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여자는 젖은 스커트 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마 전 인테리어 잡지에서 투명하고 목이 긴 유리병에 꽂힌 보리를 본 일이 있다. 마른 꽃 더미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후 꽃을 꽂아 본 기억이 없다. 여자의 맨발은 모래 위를, 따끈한 아스팔트 위를, 그리고 미로의 골목을 빠져 나와 구릉으로 오른다.
아,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던 그곳은 보리밭이 아니라 청밀밭이다. 밀밭 한켠에는 열 마리 남짓한 사슴이 우리 안에서 한아름의 청밀을 먹고 있다. 개량종 철쭉이 흐드러진 마당을 가진 집안에서 노인과 사내 한 명이 나온다. 사내가 마당가의 묵직한 자루를 걸머 매고 사슴 우리 쪽으로 간다. 사슴들이 발을 세우며 우리 안을 뛰어 다니기 시작한다. 여자는 궁지에 몰린 짐승의 저항을 뒤로하고 구릉을 내려온다. 외지 번호판을 단 승합차 두 대가 여자를 스쳐 농장 마당으로 들어간다.
바닷가의 포장마차에서 남자와 소주잔을 기울이던 날, 여자는 남자의 자켓 안에 입은 빨간색 티셔츠를 보았다.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그것은 난데없는 코디였다. 정수리에 몇 개의 흰머리가 보이긴 했지만 밤색 골덴 바지와 같은 계열의 약간 옅은 골덴 자켓을 입은 안쪽에 빨간 티셔츠라니... .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 언밸런스한 빨간 셔츠가 이상하게도 남자의 짙은 눈 주변을 훨씬 더 깊고 우수에 차 보이게 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이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한 듯한 얼굴로 살지만 남자 역시 무언가 희망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나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면 몰릴수록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다고 할 테니까. 여자 역시 막다른 골목에서 나와 남자와 가끔 쉬어 가고 싶었을 뿐이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욕실로 들어가려던 여자는 현관에서 주춤한다. 남자는 여자의 맨발을 흘낏 본다. 남자가 위스키 병을 거꾸로 들고 마지막 한 잔을 채운다.
“멀리 갔었어?”
“...... 근처에 푸른 밀밭이 있다는 걸 여태 몰랐어.”
남자의 눈 앞에 언덕 위의 푸른 일렁임이 펼쳐진다. 여자가 갯바위 쪽으로 산책을 나갈 때마다 남자는 집안을 서성거렸다. 언뜻 스쳐보았던 그 푸른 일렁임은 남자에게 알 수 없는 불안을 주었다. 남자는 담배를 피워 물며 마지막 술잔을 들어 보인다. 여자의 입술이 바짝 말라 있다.
“마실래?”
여자가 다가와 술잔을 든다. 그러나 마른 입술만 약간 축일 뿐 잔을 다시 내려 놓는다. 남자는 여자의 갈증을 안다.
“물 줄까?”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들어간다. 마른 바람이 거실 안을 넘나든다. 욕실에서 나온 여자는 젖은 머리를 털며 조금 전 남자가 앉았던 식탁 의자에 앉는다. 의자엔 아직 남자의 체온이 남아있다. 문득 집안을 둘러본다. 식탁 위의 국산 양주병, 담배와 재떨이, 햇빛을 받아 더 드러난 싱크대의 얼룩, 국물이 끓어 넘친 찌개 냄비, 열려진 문틈으로 보이는 침대 위의 싸구려 이불... . 마른 꽃의 잔해보다 더 한 버석거림이 온 집안에 가득하다. 여자는 청밀 이삭 몇 개를 꺾어오지 못했음을 그제야 알지만 푸른 이삭 몇 개를 꽂을만한 화병도 없다.
여자는 주말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서로에게 무기력한 밤이 지나면 여자는 홀로 산책을 나갔다. 주말마다 버스를 타러 나갔던 것처럼. 여자 대신 마지막 잔을 비운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여자는 해변으로 나간다. 남자가 사 준 굽 낮은 구두가 모래 위에서 볕을 받고 있다. 여자는 맨발을 넣어본다. 따끈하다. 발바닥의 패인 상처에 통증이 느껴진다.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삶은 또다시 혈전처럼 엉키는 것인가. 거웃을 깎였을 때 남자가 여자의 하이힐을 참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멈춰야 했다. 주말에 갈 곳이 없었지만 떠나야 했다. 버스에서 남자와 같은 자리에 앉았던 그 마을을 떠난 지는 1년이 훨씬 지나 있었다. 마을을 떠나던 날, 배웅 나온 아이들이 관사 마당가에 내던져진 마른 꽃무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는 갯바위에 올라서서 언덕 위의 푸른 일렁임을 바라본다. 비 온 뒤의 바람은 풀내음과 바다내음을 섞는다. 남자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따라 모래 위를 걸어나간다. 사슴농장 마당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남자는 마당으로 들어선다. 노인이 커다란 대야에 담긴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소주를 부어가며 쉬지 않고 젓는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용 가스 레인지 위에서 소독한 사발 하나씩을 일군다. 약간의 거품이 이는 피를 한 국자씩 퍼 담자 줄을 선 사람들이 한 명씩 노인 앞에 다가온다. 그들은 성스럽기까지 한 얼굴로 피를 받아 천천히 마신다. 줄의 맨 끝에 서 있는 남자의 안색은 창백하다. 남자의 차례가 되었을 때, 노인은 국자질을 멈추고 남자를 응시한다.
“못 보던 분인데... .”
“저 아래 아파트에 삽니다.”
“아파트라... 거기 젊은 여자와 주말에만 들르는 사내들이 몇 있다지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암튼 먹어둬요. 원 없이 살아야지 어쩌겠수.”
안경 너머의 눈빛이 형형한 노인은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조금 굳어진 남자 앞으로 피 사발을 내민다. 남자는 뜨거운 사발을 받아든다. 사발에서 역한 피 냄새보다는 소주 냄새가 훅 끼친다. 남자는 천천히, 그러나 단숨에 피를 들이킨다. 사발을 내려놓는 손이 조금 떨린다.
남자의 눈이 붉어진다. 바람에 떨어지는 시든 장미 꽃잎처럼 붉은 뺨들이 여기저기 땡볕 아래서 흐느적거린다.
남자는 천천히 푸른 밀밭 사이를 걷는다. 현기증이 인다. 남자의 눈앞이 뿌예진다. 저 멀리 한 개의 점으로 보이던 모래 위의 여자가 천천히 움직인다. 바다 끝에서부터 사방이 어두워지며 푸른 밀밭 위로 눈발이 흩날린다. 헤드라이트를 켠 버스가 언덕을 넘어와 여자를 내려놓고 사라진다. 하얀 눈사람이 된 여자가 다가온다. 여자의 시선은 잠시 남자의 턱에 눈물처럼 흘러내린 빨간 핏자국에 머문다. 그러나 어깨의 스침도 없이 여자는 이미 저만큼 지나간다. 점점 거세지는 눈보라가 멀어지는 하이힐 소리와 섞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