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 속에 자신도 모르게 부풀어가는 체중(87kg)과 악성 바이러스에도 견뎌낼 수 없는 허약한 체질로 변해가면서도 이게 사람이 살아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일상생활을 누리고 있음에 만족하였다.
살은 넘쳐 나는 지방질로 창상이 돋고 오장육부에는 종양의 기운이 넘나들고 멈추지 않는 천식과 가슴통증 식은땀으로 잠을 이룰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 멀쩡하리라던 기대와는 달리 순식간에 온몸을 지배하였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생사는 젊음과 늙음을 가리지 않는다더니 얼마남지 않은 죽음의 그림자를 은근히 생각하며 식구들의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세상에 대한 미련보다는 죽음의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
신체검사결과 간기능 이상으로 부산대학병원 고신대의료원에서 2,3차 검진을 받으며 수치를 낮추지 않으면 간경화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고 천식으로 병원문을 하루도 빠질 수 없는 가련한 처지에 주위에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신은 나를 이 땅에 더 남겨두시고 할 일을 더 주시고 싶으셨던지 같은 부서에 오래 전부터 마라톤에서 등산까지 섭렵하며 몸을 달련해 오신 선배를 보내신 것이다.
귀찮을 정도로 간섭과 회유로 달리기에 입문토록 강요하다시피 권하니 본성이 편하게 쉬거나 틈만 나면 자는 것을 좋아하던 몸이라도 귀가 거슬리니 발도 따라 움직이고 싶어지나 보다.
게다가 기침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없으니 고립된 생활에 염증도 나던터라 조건반사적으로 새벽에 운동장에 나서게 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불과 23개월전의 일이다.
마라톤 완주 42인치 허리가 32인치로
동아마라톤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는 특별한 인연이 있나보다. 왜 갑자기 달리기 시작하면서 동아에 유독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또 멋지게 그 자리에 서서 완주의 메달을 목에 걸고 싶었는지 알 수가 없다.
누가 동아마라톤이 일류대회라고 알려준 사실도 없는데...
어릴 때는 그저 동네 야산을 오르내리고 걷는 것을 유난히 즐겼다. 청년이 되어서도 가슴이 답답하면 그저 하염없이 부산의 거리를 두서너 시간 정처없이 걷다가 돌아오곤 하였고 실상 차비가 없어 10km떨어진 학교를 걸어서 다녔던게 달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지도 모른다.
처음 10km와 하프에서 느꼈던 희열이 새삼 풀코스를 달린 동아에서 다시 솟구쳐 올라온다. 죽어가던 육신의 허물을 벗어던지니 날씬하고 튼튼한 두 다리가 나타나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며 힘든 세상의 새로운 삶을 지탱해 준다.
멀리 계신 부모님도 건강이 걱정이 되어 먼저 안부전화를 해 주시고 아내도 늘 가슴조리며 자다 놀래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몰라 안절부절하던 급박한 순간들이 기억에서 조차 까마득해져 가는 사이에 40인치를 넘어서 42인치에 육박하던 허리는 32인치로 변해버렸으니 갓 결혼할 때 입었던 옷이 평상복이 되었다.
동아경주오픈마라톤대회에서 3시간29분대에 완주를 할 때만 해도 이 정도면 이 나이에 더이상 기록은 불가능하니 즐기면서 편안하게 달리라는 주위의 걱정어린 조언도 많았다. 혹여 달리다가 사망하는 불상사가 지면을 통해 간간이 소개되고 있는 영향도 있었으리라.
하고자 하면 오르지 못할 나무도 없지만 이루지 못할 것도 없고 없다는 신념이 다시 기록에 대한 도전을 부추기며 하루도 쉼 없는 전진만이 점점 생의 지표인 듯 밖으로 몰아낸다.
축포와 함께 시작한 힘찬 발걸음
3.16 이제 광화문 속에서 수많은 건각들과 축제의 한자리를 만들기 위해 모여 짐을 풀어 택배에 맡기고 클럽동호회원들과 기념사진도 찍고 오늘의 여정을 멋지게 장식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하늘은 아직까지 비를 내리지 않고 행사가 원만하게 진행되기를 기다려주니 귀빈과 식전행사가 멋드러지게 마쳐졌고 공중에 선회하는 헬리콥터의 환영을 받으며 축포소리에 밤낮없이 다져온 기량을 내 놓을 기회를 얻었다.
엘리트 선수들이 선두에 섰으나 많은 마스터즈에 가려 보이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앞을 향해 달려간다. 인생의 물결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곧곧하게 달려나가는 자아의 세계에서 힘을 주는 소리만이 귓가를 맴돈다.
초반의 오버페이스를 자제하면서 큰 대어를 낚아 볼까도 여러번 고심하고 번복하기를 수차례 걸치며 몸에 맞는 페이스분배표를 손에 쥐었다. 과연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풀코스 3시간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계획에 의하면 이미 포기쪽에 무게를 두었지만 상황에 따라 약간의 희망을 남겨두니 달리는 재미도 솔솔하다.
을지로 상가를 지나며 거리에서 열열히 응원하여 주시는 시민들과 각 클럽의 자원봉사자 여러분들의 환대속에서 멋진 폼을 잡으려고 애를 써 보기도 하면서 혹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모자도 새로 써보며 아직도 멀리만 있는 잠실운동장을 그리며 힘찬 발걸음을 내 딛는다.
언덕훈련과 인터벌훈련, 짧고 긴 지속주로 다져진 몸에 모든 희망을 걸고 또한 믿음마져 있으니 분명 완주후의 기쁨은 두배가 될 것이고 좋은 기록으로 대회 추억을 만들 것만 같아 흥분이 밀려온다.
인생과 너무 흡사한 마라톤 여정
동대문을 지나며 12km지점쯤에서 하늘도 더 이상 마려운 빗물을 참을 수는 없는지 그저 한 방울 두방울 흘리더니 금새 쏴버리는 통에 멋진 몸매는 초라한 생쥐꼴이 되어간다.
어린이대공원을 지나며 약간의 힘을 실어 비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 강한 노를 저어본다. 발바닥은 물기가 스며들기 시작하고 약간의 서늘한 기운도 전해져오고 아직도 갈 길은 먼데 모든게 사람 살아가는 과정과도 너무 흡사한 마라톤 여정이다.
항상 남부럽지 않을 것 같고 잘 먹을 것 같고 높은 직위나 명예를 쥐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와르르 모든 것이 신기루마냥 사라져 버리고 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하나 한숨을 토해내는 꼴이다.
잠실대교를 지나며 평소의 훈련량을 볼 때 후반부를 강하게 치고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얼마가지 못해 차고 들어오는 물에 발바닥도 촉감이 예민해지고 종아리부분의 근육이 댕겨오기 시작하면서 부풀었던 기대는 한 풀 꺾였다.
30km지점에서 스프레이파스를 줄을 서서 기다리며 한 두 차례 뿌려보며 마지막 힘을 쏟을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신께 간절히 바래 본다. 멋진 추억을 저 멀리 남쪽 부산에 가져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거리의 응원에 힘입어 새로운 힘이 다리에 불쑥 솟게 해 달라고 그러나 신은 철저하게 외면하고만 계시니 이를 어이할꼬.
근육통으로 Sub-3는 포기했지만
32km지점부터 더욱 강하게 밀려오는 근육통으로 km당 1분을 늦추지 않으면 오히려 완주도 불가능 할찌도 모를 돌발상황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힘이 남아 있는 데도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레 속도가 줄어든다.
이로서 3시간 내 완주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마지막 9km정도를 기분 좋은 엘에스디에 맞춰 달리면 3시간10분 이내에 메인스타디움을 밟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되면서 마음 또한 평정을 찾고 거리의 건물과 이정표를 살피며 아늑하고 살기 좋은 석촌호수의 주변풍광을 마음껏 눈에 담는다.
그렇게도 힘차게 뛰어 불과 5,6km 남은 지점에서 제법 걸음마로 마지막 여정을 위해 애쓰시는 안타까운 분들을 뒤로하며 그동안 흘린 땀의 보람이 나타나고 있음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지난해 봄 처녀 출전한 일간스포츠마라톤대회에서 턴천교를 하염없이 걸으며 두 번 다시 풀은 없다며 마음으로 달래었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웃음이 스쳐 지나간다.
마무리 잠실운동장을 향하여 종아리의 근육 댕김만 없었다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 두명을 제치며 앞으로 힘차게 달려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서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약간의 배고픔을 느낀다.
23개월 만에 3시간 9분… 스스로 대견
주로에서 물과 이온음료만으로도 거뜬히 먼 여정을 마칠 수 있는 체력에 실로 대견하고 놀랍다. 달린지 23개월 만에 이룩한 대기록 3시간09분44초!달리고 싶은 사람이나 달리기를 막 시작한 초보달림이에게 너무나 경이적인 기록으로 다가올 것이 틀림없지만 그저 묵묵히 하루를 인내로서 얻어진 선물일 뿐인 것이다.
동아와 함께 멋진 삶을 계속하여 만들어 가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늘 다정하게 나를 반겨주었으면 좋겠고 축제의 장에 늘 초대되어 많은 분들 속에서 정을 나누며 삶의 행진곡을 함께 부를 수 있으면 더 없이 좋겠다.
대회를 준비하신 모든 분들과 빗속을 함께 달리신 마스터즈님들과 응원으로 힘을 실어주신 자원봉사자 및 시민 여러분 교통통제를 위해 비를 맞아가면서도 변함없는 자세로 애쓰신 경찰아저씨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