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거울 1 김지하
겨울 거울 1
노을 사그라져
밤하늘
둥실 떴다 달님아
온몸에 돋아오는
새파란 별자리
옷 갈아입고
겨울 뜨락에 눕는다
마주 우러른 북두
내 모든 허물도 함께 눕는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겨울 거울 6 김지하
겨울 거울 6
아침에
저녁을 배운다
대낮에는
밤을 배우고
겨울이면 여름을 배운다
배운다
겨울보리 여름에 먹고
여름쌀 겨울에 먹는 것
천지 이치를 배운다
새벽 샘물 길러 가는 날마다
아침학교에서 배운다
이차저차하는 모든 삶
줏대를 배운다
요즈막 내 공부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겨울 거울 7 김지하
겨울 거울 7
천리향도 시들고
동백도 자취 없다
가슴은 마당 복판에서 두근거리고
발은 이미 문을 나선다
현수막 현수막
찢긴 포스터들 어지러운데
홀로 샘물 길러 간다
내일 마실 물.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겨울에 김지하
겨울에
마음 산란하여
문을 여니
흰눈 가득한데
푸른 대가 겨울 견디네
사나운 짐승도 상처받으면
굴 속에 내내 웅크리는 법
아아
아직 한참 멀었다
마음만 열고
문은 닫아라.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결별 김지하
결별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은빛 반짝이는 낮은 구릉을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춤추는 꽃들을 따라
멀어져가는 도시여
피투성이 내 청춘을 묻고 온 도시
잘 있거라
낮게 기운 판잣집
무너져 앉은 울타리마다
바람은 끝없이 펄럭거린다
황토에 찢긴 햇살들이 소리지른다
그 무엇으로도 부실 수 없는 침묵이
가득 찬 저 웨침들을 짓누르고
가슴엔 나직히 타는 통곡
닳아빠진 작업복 속에 구겨진 육신 속에 나직히 타는
이 오래고 오랜 통곡
끌 수 없는 통곡
잊음도 죽음도 끌 수 없는 이 설움의 새파란 불길
하루도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었고
하루도 싸움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삶은 수치였다 모멸이었다 죽을 수도 없었다
남김없이 불사르고 떠나갈 대륙마저 없었다
웨치고 웨치고
짓밟히고 짓밟히고
마지막 남은 한줌의
청춘의 자랑마저 갈래갈래 찢기고
아편을 찔리운 채
무거운 낙인 아래 이윽고 잠들었다
눈빛마저 애잔한 양떼로 바뀌었다
고개를 숙여
내 초라한 그림자에 이별을 고하고
눈을 들어 이제는 차라리 낯선 곳
마을과 숲과 시뻘건 대지를 눈물로 입맞춘다
온몸을 내던져 싸워야 할 대지의 내일의
저 벌거벗은 고통들을 끌어안는다
미친 반역의 가슴 가득가득히 안겨오는 고향이여
짙은 짙은 흙 냄새여 가슴 가득히
사랑하는 사람들 아아 가장 척박한 땅에
가장 의연히 버티어 선 사람들
이제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금 피투성이 쓰라린 긴 세월을
굳게 굳게 껴안으리라 잘 있거라
키 큰 미루나무 달리는 외줄기
눈부신 황톳길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따라
멀어져가는 도시여
잘 있거라 잘 있거라.
황토, 한얼문고, 1970
결핍 김지하
결핍
쥐었다 폈다
두 손을 매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쌓는 건
알겠니
애린
무엇이든 동그랗고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무엇이든 가볍고 밝고 작고 해맑은
공, 풍선, 비눗방울, 능금, 은행, 귤, 수국, 함박, 수박, 참외, 솜사탕, 뭉게구름, 고양이 허리, 애기 턱, 아가씨들 엉덩이, 하얀 옛 항아리, 그저 둥근 원
그리고
애린
네 작고 보드라운 젖가슴을 만지고 싶기 때문에.
찬 것
모난 것
딱딱한 것 녹슨 것
낡고 썩고 삭아지는 것뿐
이곳은 온통 그런 것들뿐
내 마음마저 녹슬고 모가 났어
애린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조금씩 동그래져
애린
네 얼굴을 그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보드라워져
애린
네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해맑아져
애린
그러나 이제
아무리 부르려 해도
아무리 아무리 그리려 해도
떠올리려 해도
난
안돼
그게 안돼
모두 다 잘 안돼
쥐었다 폈다
두 손을 온종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쌓는 건
알겠니
애린.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고사목 김지하
고사목
고목에 기대 서서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 서서만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 설 때만
고목을 생각하자
불타 죽은 나무
나무의 혼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그 소, 애린 1 김지하
그 소, 애린 1
단 한 번 울고 가
자취 없는 새
그리도 가슴 설렐 줄이야
단 한 순간 빛났다
사라져가는 아침빛이며
눈부신 그 이슬
그리도 가슴 벅찰 줄이야
한때
내 너를 단 하루뿐
단 한 시간뿐
진실되이 사랑하지 않았건만
이리도 긴 세월
내 마음 길 양식으로 남을 줄이야
애린
두 눈도 두 손 다 잘리고
이젠 두 발 모두 잘려 없는 쓰레기
이 쓰레기에서 돋는 것
분홍빛 새살로 무심결 돋아오는
애린
애린
애린아.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그 소, 애린 4 김지하
그 소, 애린 4
외롭다
이 말 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라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 가는 빗살
빗살 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란 해살들이 얕게 얕게
지난날들 스쳐 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 건넬 이 이 세상엔 이미 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질 것 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진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 소리 한 자락
이리 외롭다.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그 소, 애린 6 김지하
그 소, 애린 6
아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날 우습게 알기 시작했고
아이들마저 이제는
말대답이 느리다
아무런 노여움도 슬픔도 없이
머얼건 애들 눈자위 건너다보는
내 눈자위에 걸린 머얼건
저 낮달
한낮 이 머얼건 쪼각달.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그 소, 애린 8 김지하
그 소, 애린 8
버들잎 타고
천리를 흘러와
무에 좋아서 이러는가
어쩌다 스스로 또 귀양살인가
차차 눈 침침해가는 이 나이에
해남 남동 남녘 끝까지 흘러 흘러와.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그 소, 애린 12 김지하
그 소, 애린 12
눈보라치다 볕들다
진눈깨비 몰아치다 소나기 퍼붓다
서풍은 끝간 데 없이 휘몰아치다
세상은 문득 적막
아니다 얘야
널더러 굽히란 말 아니다
너 하나 바라고 사는 이 어미
어찌하면 좋으냐고 묻는다 얘야
가르쳐다오 얘야 부디
내게 가르쳐다오
꽃샘철
잠시 한낮 세상은 적막
담 넘어오는 희미한 목소리 희미한 흐느낌
일찍 핀 매화 봉오리 가지째 찢어져
눈밭에 누워버린
누워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꽃샘철
세상은 문득 적막
내 마음 눈보라치다 볕들다
진눈깨비 몰아치다 소나기 퍼붓다
서풍은 끝간 데 없이 휘몰아치다.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그 소, 애린 16 김지하
그 소, 애린 16
황매꽃 피는 사월 밤
가까이서 잎새 지는 소리
잔바람 나직이 스쳐 지나고
가까이서 누군가
숨죽여 내쉬는 한숨 소리
어두운 방에 누워
팔 뻗어 찾는 물주전자
손끝에 와 닿는 차가움
가까이서 가까이서
꽃몽올 하나 지는 소리
수첩 속에 적힌
깨알 같은 몇 줄 짧은 글귀들
불붙어 화안히 천정에서 스러지고
내일 다시는 해가 뜨지 않으리
무너져 내리는 마음
밑 모를 어둠으로 한없이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
가까이서 문득 멈춰 서는
발자욱 소리.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그 소, 애린 22 김지하
그 소, 애린 22
온종일 난초
허리는 굽고 다리는 펼 수 없고
눈은 차차 침침해지는데
온종일 난초 또 난초
가슴 속 위 아래 좌우 함부로 불던
바람도 그쳐 이젠 기척 없고
노을 무렵 이윽고
잎새도 마저 자취 없고
땅에 기울어 시드는 꽃대
오월 가까운 초저녁 꿈속을
문득 배회하는 아득한 향기
흰 종이 위에 멈춰 소리 없는 몇 방울의 먹.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그 소, 애린 34 김지하
그 소, 애린 34
마루 밑은 들여다볼수록 컴컴하다
열길 물 속보다 더 알 수 없는 사람 속
더우기 내 속 그 속속에 있는 네 속
안팎 본디 없는데 자꾸 이러니 병일지?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그 소, 애린 45 김지하
그 소, 애린 45
풀 끝
흰 이슬에서만 아니라
시드는 춘란 잎새에서도
파릇파릇한 상치싹만 아닌
흩어진 겹동백 저 지저분한 죽음에서도
외로운 겨울 햇빛처럼
작게 반짝이는
네 눈
애린의 눈
천둥 아직 들리지 않는 뭉글대는
태풍구름 속 번뜩이는
빈 눈.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그 소, 애린 50 김지하
그 소, 애린 50
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 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기마상 김지하
기마상(騎馬像)
살아 있는 힘의 동결
살아 있는 민중의 거센 힘의
동결, 전진하는 싸움의 동결
빛나는 근육의 파도와
쏟아져 흐르는 땀의 눈부심과
외침과 쇳소리들의 동결
뜨거운 대낮의 햇빛 아래서의
동결, 표정과 노여움과 용기의 동결
사랑의 동결, 부재(不在), 꽉 찬
부재(不在), 그러나 동결은 나이를
먹는다 기마상이 금이 가듯이
동결은 늙어 어린이
처럼 부드러워진다
다시금 움직이려 한다
굳게 다문 입술에 미소가 번진다
육체의 이 살아 있는 육체
의 기쁨이 샘솟는다
소리가 시작되려고 한다
말은 울려고 한다
발굽이 움직인다 말갈기가
움직인다
아아 그러나 햇빛 탓인가
더욱 강렬한 저 햇빛 탓인가?
바람 탓인가?
훈훈한 사(四)월의 바람
탓인가? 착각이었던가?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남한강에서 김지하
남한강에서
덧없는
이 한때
남김없는 짤막한 시간
머언 산과 산
아득한 곳 불빛 켜질 때
둘러봐도 가까운 곳 어디에도
인기척 없고 어스름만 짙어갈 때
오느냐
이 시간에 애린아
내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으로
내 내쉬는 탄식
그 탄식 속으로
네 넋이 오느냐 저녁놀 타고
어둑한 하늘에 가득한 네 얼굴
이 시간에만 오느냐
남김없는 시간
머지않아 외투깃을 여미고
나는 추위에 떨며 낯선 여인숙을
찾아 나설 게다
먼 곳에 불빛 켜져 주위는
더욱 캄캄해지는 시간
이 시간에만 오느냐
짤막한 덧없는 남김없는
이 한때를
애린
노을진 겨울강 얼음판 위를
천천히 한 소년이
이리로 오고 있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노을 무렵 김지하
노을 무렵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행길 저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하는 내 속에
행길 여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보고 있는 내 속에
담배 피우며 신문을 읽고 있는
내 속에 노을 무렵에
되똥거리는 빛나는 재잘거리는
닭, 참새, 붉은 구름, 사철나무 스쳐
지나는 바람, 머언 거리의 노래 소리
노래 소리 속에
나와 함께 공받기 하는 아이들 속에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우리 집에 문득
불 켜질 때 나는 다시 혼자다
오늘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자.
애린, 실천문학사, 1987
녹두꽃 김지하
녹두꽃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 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황토, 한얼문고, 1970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김지하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당신이 내게 올 수 있다면
고원에 만발한 한아름 나리꽃 안고 산철쭉도 안고
그보다도 더 아리따운
환한 웃음 안고 내게 올 수 있다면
내가 나가 반겨
당신이 아닌 당신 몸이 아닌
당신의 꽃들과 웃음을 껴안고 눈물 흘릴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원주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원주로
북으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오락가락할 이유가 없겠지
낡아빠진 석탄차
녹슬은 기관차
지금은 국민학생들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차
그 차
휴전선에 잘린 경의선
경의선 화통
그것을 타고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면
그 기관차를
새파란 동백잎, 빛나는 유자 무더기, 향기 짙은 치자꽃으로 무화과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그리고 못난 내 얼굴에라도
함박꽃 같은 달덩이 같은 째진 웃음지어 만나고 싶다
나 오늘 눈 내리는 원주 거리에 다시 서서
다시금 남쪽으로 돌아갈 자리에 서서
거리를 질주하는 영업용 택시를 보며
경의선 끊어진 철로 위에
홀로 남겨진 기관차 속에 홀로 남을
민족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소주 한 잔을 국토 위에 붓는다
아 아 꽃들이여
너희들의 영광은 언제 오려는가.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달램 김지하
달램
스산한 것
어디 마음뿐이랴
아프다
온몸이 여기저기
동백마저 얼어 시커먼 이 한때를
속절없이 달랠 뿐
밤이면
별바래기로 올려 달래고
나 또한 한 떨기 허공중에
별자리로 누워 내리 달래고.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동짓날 김지하
동짓날
첫봄 잉태하는 동짓날 자시
거칠게 흩어지는 육신 속에서
샘물 소리 들려라
귀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샘물 소리 들려라
한 가지 희망에
팔만사천 가지 괴로움 걸고
지금도 밤이 되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날 뿐
아무것도 없고
샘물 흐르는 소리만
귀기울여 귀기울여 들려라.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둥글기 때문 김지하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아이들 공놀이에 갑자기 뛰어들어
손으로 마구 공 주무르는 건
철부지여서가 아니야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골동상 유리창 느닷없이 깨뜨리고
옛 항아리 미친 듯 쓰다듬는 건
훔치려는 게 아니야
이것 봐, 자넨 몰라서 그래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노점상 좌판 위에 수북수북히 쌓아놓은
사과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
아니야
먹고 싶어서가 아니야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
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좁은 바지 차림 아가씨
뒷모습에 불현듯 걸음 바빠지는 건
맵시 좋아서가 아니야
반해서도 아니야
천만의 말씀
색골이어서는 더욱 절대 아니야
둥글기 때문
불룩한 젖가슴 도톰한 입술
새빨간 젖꼭지나 새빨간 연지
그 때문도 아니야
뚫어져라 끝내 마주 쳐다보는 건
모두 다 그건
딱딱한 데, 뾰족한 데 얻어맞고 찔려 산 내겐
환장하게 보드랍고 미치고 초치게
둥글기 때문
애린, 실천문학사, 1987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김지하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벌거벗은 내 생각의
새 뿌리가 자라는 곳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진종일 이마 위를
얇은 생각의 삽질만이 스쳐 가는 자리
가슴의 뜀질마저 나직나직한 자리
아, 고름이 흘러
흘러 놀랄 때 놀라 깨어 외칠 때
나는 이미 옷이었다
횟대에 걸려 잠든 옷
눈초리는 눈초리대로
신문지는 신문지대로
소매 끝에 앞섶에 바지주름에 기어다니고
걷고 지껄이고
나빈 양
펄렁이는 옷
단 한 벌의 깨끗한 눈치 빠른 옷
땅거미가 지고
뒷짐을 지고
시뻘건 주둥이들 허옇게 웃는 뒷골목
가자 부산집으로
히히 웃으며 주물렁탕 하러 가자
나비들이 살풋 앉을 때
지분 냄새 콧가에 설핏 스칠 때
나는 이미 알몸이었다
주무르고 벗기고 악을 쓰고 빨고 핥고
나는 고름 담긴
술 한 잔의 고름
시궁창 속 얼굴이
달과 내 오줌에 맞아 깨어질 때
울다 칼부림하다 단 한 벌의 옷이 깨끗이
술값에 벗겨질 때
이마 깊이 찬바람이 와서 화살 되어 박힐 때
알몸에 알몸에 아아 고름이 흘러
벌거벗은 내 생각의
새 뿌리가 자라는 곳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들녘 김지하
들녘
무엇이 여기서
무너지고 있느냐
무엇이 저렇게 소리치고 있느냐
아름다운 바람의 저 흰 물결은 밀려와
뜨거운 흙을 적시는 한탄리 들녘
무엇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느냐
참혹한 옛 싸움터의 꿈인 듯
햇살은 부르르 떨리고
하얗게 빛 바랜 돌무더기 위를
이윽고 몇 발의 총소리가 울려 간 뒤
바람은 나직히 속살거린다
그것은
늙은 산맥이 찢어지는 소리
그것은 허물어진 옛 성터에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붉은 산딸기와
꽃들의 웨침 소리
그것은 그리고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
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 소리
내 귓속에서
또 내 가슴속에서 울리는
피끓는 소리
잔잔하게
저녁 물살처럼 잔잔하게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에 서면
무엇인가 자꾸만 무너지는 소리
무엇인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소리.
황토, 한얼문고, 1970
또 남한강에서 김지하
또 남한강에서
춤추어라
애린
네 발끝 흰 눈부심 춤추어라
자작나무만 아니다
은사시나무 미류나무만 아니다
눈 내리는 겨울
모든 나무
모든 풀
돌마저도 하얗다 춤추어라
햇살
겨울 바람 없는 날 한낮
세상 온통 흰 햇살 속에 잠들 때
아아 흰빛
눈부시게 눈부시게 더욱 흰빛으로
애린
춤추어라
소복춤으로 흰빛을 딛고
얼음 사위로 얼음을 밟고
노을이 타도 새벽 푸르름이 와도
변함없는 흰빛
아아 흰빛
네 발끝 흰 눈부심으로 가볍게
흰빛을 딛고 춤추어라
애린
춤추어라
강가에 얼어붙은 겨울나무숲
배마저 얼어붙은
하얀 겨울강
그 얼음 위에
그 외로움 위에
춤추느냐 펄럭이는 옷자락
너 선혈아
사랑하는 애린
타오르는 타오르는
애잔한 노을
노을
내 애린의 얼굴.
애린, 실천문학사, 1987
똥 김지하
똥
똥 보면 베먹고 싶어
새벽 샘물
샘 뒤 어덩 위
산죽닢 스쳐 오는 바람을 마셔
동트는 분홍 산봉우리 흰 안개구름 마셔
똥만 보면 못 견디게 베먹고 싶어
내 몸이 곧 흙이어설 게야
흙이 똥을 마다 안함
오곡이 장차 가득가득히 익어 끝내는
열매 열리게 될 터이어설 게야
똥 속에서 배시시
애린이 웃어설 게야
꼭 그럴 게야.
애린, 실천문학사, 1987
만남 김지하
만남
밤이라도 이리 깊으면
밤이라 할 수 없겠지
앞길 뒷길 다 끊긴 곳에
문득 노여움처럼
난데없는 희망 한 오리.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매장 김지하
매장
번개와 폭풍의 밤에
스물일곱 해의 굶주림의 곤혹에
가장 모질은 돌밭에 삽질을 한다
너는 그것을 원했다 빈손으로 일군 땅
네 피가 아직 더운 흙가슴의 모진 곳
좌절당한 반역의 이 불밭에 운명에
너를 묻기 위해
뜬눈의 주검
더없이 억센 뜬눈의 주검
염도 새끼줄도 관조차도 없다
네겐 한 권의 함석헌과 한 송이의 박꽃뿐
너는 그것을 원했다 황량한 옥금리 들녘
황토로 변하기를 너는 원했다
볕에 타고 거친 바람에 시달려
끝끝내 빛나기를, 끝끝내 흔들리기를
성장의 밑바닥에 타오르기를
죽음 속에서도 붉게 타는 뜬눈의
치열한 핏발 내 가슴속에 쟁쟁히 울리는
그 굵은 목소리 아직도 더운 흙가슴에
살아 있는 너
살아있는 반역의 이 불밭에 운명에
삽질을 한다 너를 묻기 위해
번개와 폭풍의 밤에 통곡하며 통곡하며
나는 삽질을 한다.
황토, 한얼문고, 1970
목련 김지하
목련&
눈을 뜨면 시커먼 나무 등걸
죽음 함께 눈감으면
눈부신 목련
내 몸 어딘가에서 아련히
새살 돋아오는 아픔
눈부신 눈부신 저 목련.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무화과 김지하
무화과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물구나무 김지하
물구나무
남으로 귀양갔다 북으로 가고
다시 또 남으로 옮기니
두 해에 세 번이나 한강배를 불렀네
나루터 사공이 그 전 죄로 가는 줄 모르고
날더러 가는 곳마다 새 죄 짓는다 이르리
― 김덕성
감옥이라도
하늘만은 막지 못해
밤마다 두견새 와서 울고
시간이 무너진 자리
귀틀상자에도 봄이 와
하얀 민들레씨 가득히 날아든단다
사람이 그만 못하랴
이 봄엔 물구나무를 서겠다
사람이 그만 못하랴
이 봄엔 물구나무를 서겠다
몇 차례고 어디서고
빼앗긴 봄날엔 웃어 물구나무를 서겠다
지구를 받쳐 들고
두견새 소리 맞춰 굿거리장단으로
창공에서 한바탕 발춤 추어볼란다
구경 오너라
애린
웃지는 말고 애린
오늘 밤 나는 화성에서 잔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민족의 비극이지 뭘 김지하
민족의 비극이지 뭘
원주에서 자유당 때
동아일보 지사를
지방에서 하는 일은
고달픈 일이었다
몇 차례고 몇 차례고
구타당하고 억압당하고
온갖 핍박을 다 당하며
그래도 끝까지
4․19까지 버티어낸
한 형이 있었다
겨우 한글이나 해독하고
불친절한 보수지의 한문 글자는
물어서 물어서
나에게까지 물어서
기뻐 벌쭉이며
고개 주억거리며
바삐 다방을 뛰쳐나가던 모습이 선하다.
그는 한때 국군이었고
그 뒤 그는 포로가 되어 인민군 병사가 되었고
그 뒤 탈출하여 유엔군에 편입되었고
그 뒤 또다시 붙잡혀 중공군 병사가 된 사람이다
`형이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요, 있었소?'
`있었지
중공군이 아직 들어오지 않고
유엔군도 아직 들어오지 않고
포탄만 하늘로 슝슝 날아다닐 때
칼빈 한 자루 메고
원주 대로를 활보하던 자는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게 몇 시간쯤이오?'
`한 세 시간쯤'
`그때 뭘 했소?'
`바로 그거야
그때가 나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어
원주역에는 팔몰, 켄트, 카멜, 아까다마, 생전 맛도 보지 못하던 양담배가 산처럼 쌓였고
위스키, 브랜디, 포도주 산처럼 쌓였고
쇠고기 통조림, 햄, 쏘세지 산처럼 쌓였고
코쟁이들이 불지르고 갈 틈이 없었단 말야
한꺼번에 담배를 다섯 개피씩이나 피우고
한꺼번에 포도주, 브랜디, 위스키를 세 병씩이나 한꺼번에 섞어 마시고
쇠고기, 햄, 쏘세지를 한꺼번에 까서 막 처먹었단 말이지
나중에는
그 산더미 속에 들어가서 막 뒹굴었단 말이야
그게 행복 아니겠어
6․25는 좋았어
나 같은 놈에겐'
`그래서 결론이 뭐요?'
그 형은 잎담배가 반쯤 빠져나간
화랑 담배를 쪽쪽 피워 태우며
비장 처절한 얼굴로
대답했것다
`민족의 비극이지 뭘.'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바다 김지하
바다&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참으로 이제 가겠다
손짓해 부르는
저 큰 물결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망망한 바다
바다로
없는 것
아득한 바다로 가지 않고는
끝없는 무궁의 바다로 가는 꿈 없이는 없는 것
검은 산 하얀 방 저 울음 소리 그칠 길
아예 여긴 없는 것
나 이제 바다로
창공만큼한
창공보다 더 큰 우주만큼한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만큼한
끝간 데 없는 것 꿈꿈 없이는
작은 벌레의
아주 작은 깨침도 있을 수 없듯
가겠다
나 이제 가겠다
숱한 저 옛 벗들이
빛 밝은 날 눈부신 물 속의 이어도
일곱 빛 영롱한 낙토의 꿈에 미쳐
가차없이 파멸해갔듯
여지없이 파멸해갔듯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백방포에서 가겠다
무릉계에서 가겠다
아오지 끝에서부터라도 가겠다
새빨간 동백꽃 한 잎
아직 봉오리일 때
입에 물고만 가겠다
조각배 한 척 없이도
반드시 반드시 이젠 한사코
당신과 함께 가겠다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
바다가 소리질러
나를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의 이슬
이슬 가득 찬 한 아침에
그 아침에
문득 일어서
우리 그날 함께 가겠다
살아서 가겠다
죽어 넋이라도 가겠다
아아
삶이 들끓는 바다, 바다 너머
저 가없이 넓고 깊은, 떠나온 생명의 고향
저 까마득한 화엄의 바다
가지 않겠다
가지 않겠다
혼자서라면
함께가 아니라면 헤어져서라면
나는 결코 가지 않겠다
바다보다 더 큰 하늘이라도
하늘보다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라도
화엄의 바다라도
극락이라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바람에게 김지하
바람에게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 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 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바랄 것은
몹시도 시장한 중에
눈 밝혀 찾아 먹는 밥 한 그릇
배부르면 배 두드려
대중없이 부르는 밥노래 한 가락뿐
춘란 뽑혀
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
못생긴 여뀌닢여뀌 잎으로 잔뜩
비틀어져 내 다시 났으니
바람아
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
새 햇살로 흔들려라.
애린, 실천문학사, 1987
바램 1 김지하
바램 1
내
다시금 칼을 뽑을 땐
칼날이여
연꽃이 되라
죽을 싸움 싸우다 죽어
피투성이 피투성일지라도
손에 쥔 것은 칼이 아닌
연꽃이 되라
연꽃이 되라
반쪽만 남은 돌미륵
모로 누운 채 잠든 내
주검 곁에서 웃어라
너는 크게 웃어라
아아아
이 커다란 품.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밤나라 김지하
밤나라
밤은 소리들의 나라
보드라운 날카로운 엷고 때론 아득히
공고한 것이여 높고 낮은
울렁임 가득히 영글어가는 귀한 것이여
밤은 불멸의
아 저 숱한 소리들의 나라
온갖 것 다 살아 춤추어서 애틋하여라
그지없어라 가없어라
이슬에 깨어
깨어 어디에도 이를 곳 없이 떠나
쇠북에 떠나 다시는
흰 이마 위 저 고운 샘물 소리론 죽음 후에도
넋이라도 못 올 나라
아아 밤나라
분홍빛 작은 아기의 발
샘물 위에 춤추던 사뿐거리던 네 가벼운
소리에마저 입맞춤도 이제는 찌는 낮
고요 때문이어라
목마름 때문이어라
미친 듯 홀로 외치다 죽을 운명 때문이어라.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백방 1 김지하
백방 1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백방산 나가미 위에
무수히 서 있는 저 여인들의
얼굴 얼굴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저 무수히 바람에 갇혀
옹송거리는 어깨 움직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여기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이리 떠나고 떠나오던
그 숱한 작별의 이야기들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어느 나무에
어느 나무 그늘에
그 사연 새겨졌는가
내 이제 짧은 머리
짧은 바지 차림으로
이 자리에 서서
홀로
잿빛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긴 왜 이제 항구가 아니냐.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백방 2 김지하
백방 2
하얀 방에 누웠네
내 누구를 원망하랴
하얀 방에 누웠네
내 이제 와서 누구를 기다리랴
저 형광등 소리
저 형광등 타는 소리
빛깔이 아닌
빛깔이 아닌
흰 빛깔이 아닌
가래 타는 소리
곁에 하나만 있다면
곁에 하나의 휴지통만 있다면
내 누구를 원망하랴
더 무엇을 그리워하랴
어차피 죽어가는 것을
그리고 가래를 뱉고 난 뒤
어차피 난 일어서 이 자리를 떠날 것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백방 10 김지하
백방 10
뒷숲에선 바람이 불어요
바람 속에선 뒷숲이 내게 와요
가까이 늘 밤마다
뒷숲속에
홈 패인 자국
자국 있는 샘물
샘 곁에 남겨진 끊어진 두레박
아 오세요
두레박 속에서 오세요
그날의 창도 버리고
그날의 핏발 선 눈도 버리고
오세요
뒤꼍 바람을 타고
웃음으로라도 오세요
머리 끝 흩날리는
바람으로라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베짜는 누이에게 김지하
베짜는 누이에게
잘 있느냐
실꾸리 얼키기 쉽고
건강하냐
실꾸리 설키기 좋은 이때
웃고 사냐
실 끊어질라
울고 있냐
올 늘어질라
팽개치냐
바늘 부러진다
내던지냐
북통 깨진다
성을 내냐
날 처지고
화를 내냐
씨 흐트러진다
수선대냐
날씨도 매우 안 좋은데
서성대냐
내일은 더 궂다는데
토심나냐
궂은 날씨 조심 안허면
베는 확 잡치는 법이다
얘야
생각나냐
곰보할매 베틀 잉아
감잡히냐
날실을 못 처지게
뜻지피냐
굵은 줄로 올려메야
해볼 테냐
씨줄 모두 편다분해서
어쩔 테냐
날도 씨도 잘 짜인다
그리해라
베짜는 일이 다시없는
우주의 으뜸 철리이니
건강해라
바디를 부디 고르게 써서
잘 있거라
상목 좋은 놈 내거들랑
여불비례
두루막 한 벌씩 지어 입고
총총
성묘 가자
모년 모월 모일 모시
반쪽 오빠 짐땅밑이 쓴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벼랑 김지하
벼랑
북풍은 가슴을 꿰뚫고
이마 위에 눈 쌓인 시루봉이 차다
삶은 명치 끝에
노을만큼 타다 사위어가는데
온몸 저려오는 소리 있어
살아라
살아라
울부짖는다
한치 틈도 없는 벼랑에 서서
살자 살자고
누군가 부르짖는다
거리에 나서도
아는 사람 없는 빈 오후에.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벽 김지하
벽
벽
그것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벽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벽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네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임이 화안히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불귀 김지하
불귀(不歸)
못 돌아가리
한번 디뎌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욱 소리 밤새워
천정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모를 어지러움
뽑혀 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짖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 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비녀산 김지하
비녀산
무성하던 삼밭도 이제
기름진 벌판도 없네 비녀산 밤봉우리
웨쳐 부르든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시퍼런 하늘을 찢고
치솟아오르는 맨드라미
터질 듯 터질 듯
거역의 몸짓으로 떨리는 땅
어느 곳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옛이야기 속에서는 뜨겁고 힘차고
가득하던 꿈을 그리다
죽도록 황토에만 그리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
송진 타는 여름 머나먼 철길을 따라
그리고 삶은 떠나가는 것
아아 누군가 그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참혹한 옛 싸움에 몸바친 아버지
빛 바랜 사진 앞에 숨죽여 울다
박차고 일어섰다
입을 다물고
마즈막 우럴은 비녀산 밤봉우리
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무거운 연자매 돌아 해 가고
기인 그림자들 밤으로 밤으로 무덤을 파는 곳
피비린내 목줄기마다 되살아오고
터질 듯한 노여움이 되살아오고
낡은 삽날에 찢긴 밤바람
웨쳐대는 곳
여기
삶은 그러나
낯선 사람들의 것.
황토, 한얼문고, 1970
비어 김지하
비어(蜚語)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 야릇한 소리하나가 자꾸만 들려와
그 소리만 들으면 사시같이 떨어대며
식은땀을 주울줄 흘려샀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괴한 일다.
이는 대개 돈푼이나 있고 똥깨나 귀는 사람들이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쿵 -
바로 저 소리다 쿵
저 소리가 무슨 소리냐 최루탄 터지는 소리냐 아니다 쿵
난리 터지는 소리냐 핵 터지는 소리냐 히로히도 방귓소리냐 아니다
닉슨 기침소리냐 아니다 북경(北京)도 천안문(天安門) 앞
코쟁이 맞아들이는 중공군(中共軍) 예포(禮砲)소리냐 아니다 그럼뭐냐
쿵 저봐라 쿵 또 들린다 쿵
저 쿵소리 내력을 누가 알꺼나 쿠궁쿵
어화 사람들아 저 소리 내력을 들어봐라
아라사도 미국 중국 일본국도 아닌 대한민국 서울 동편에
먼지펄펄 시끌덤벙 청량리 훨씬 지나가면 새까아만
연탄보다도 더 새까아만 쫄쫄 개굴창
물썩는 내 진동하는 중량천 기인긴 방축 위에 줄을 지어 다닥다닥
금슬좋게 들러붙어 비그닥
삐끄 삐끄 삐끄다다닥
바람결에 전후 좌우로 몸을 흔들어대면서
노래 노래 불러쌌는 판잣집 한 모퉁이 그 한귀퉁이 방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서 올라와 세들어사는 안도(安道)라는 놈이 있었것다.
하략
창조, 1972
빈 산 김지하
빈 산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빈집 김지하
빈집&
달빛 고일 때
새푸르른 답싸리
무성한 저 빈집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삭아내린 삽작문 너머
그림자 하나 하얗다 사라져버리네 기인
기인 비명이 꿈처럼 들려오던
빈집이여 가득히
달빛 고일 때
먼 마을로부터 삘리리
눈부신 구름으로부터 바람결에 삘리 삘리리
아련한 날라리 소리 들려오는 빈집이여
뜨락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아아 낫 가는 사람
숨죽여 흐느끼며 낫 가는 사람
대처로 떠나갔다 숨어 돌아와 마지막
한 벌 흰옷으로 갈아입고 난 사람
땅에 떨어진
낫 끝에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아득한 하늘에 천둥 은은하게 흐를 때
땅에 떨어진
빈집이여 빈집이여
땅에 떨어진.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산정리 일기 김지하
산정리 일기(山亭里 日記)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뜨거운 햇발 아래 하얗게 빛날 뿐
고여 흐르지 않는 둠벙 속에 깊이 숨어
끝끝내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눈부신 붉은 산비탈
간간이 흔들리는 흰 들꽃들조차
가까이 터지는 남포 소리조차 아득히 멀고
흙에 갇힌 고된 노동도 죽음마저도
나를 일깨우지 않는다
흐린 불빛이
가슴을 누르는 소주에 취한 밤
목쉬인 노래와 칼부림으로 지새우는 모든 밤
뜬눈으로 지새우는 알 수 없는 몸부림에
기어이 나를 묶는 것은
아아 무엇이냐 무엇이냐
깨어 있지도 잠들지도 않는
끝없는 소리 없는 이 어설픔은 무엇이냐
밤마다 취해서 울던
붉은 눈의 해주(海州) 영감은 죽어버렸다
열여섯 살짜리 깨곰보도
취한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디에 와 있는 것이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냐
무딘 느낌과 예리한 어둠이 맞서
섞이지 않는다 부딪히지도 않는다
또다시 시퍼런 새벽이 온다
남포가 터진다
흙차가 돌아간다
나는 흙 속에 천천히 깊숙히
대낮 속에 새하얀 잠의 늪 속에 빠져들어간다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산조 김지하
산조(散調)
초승달 등에 걸고
먼동으로 떠난다
뼛속 깊이
찬바람 으등대고
뼛속 깊이
붉은 먼동
흰 초생달
몸 한복판에
산조(散調) 한 자락
겨울이 자라고
뿌윰한 새벽길
쓸쓸한 삶의 향기가 자라고.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살림 김지하
살림
화분 속에 수수 심어
가는 잎 보며 즐기는 사람
천정에 무우를 달아
돋아나는 푸른 싹 즐기는 사람
마음속에
마음속에 너를 키우는
짙은 냄새 억세찬 푸르름
다 잃어버리고
가늘어져 가늘어져
난초가 된 너를
마음속에만 그저 키우는 사람
햇빛 없는 날
오늘에 너를 묶는 나라는 사람
바람 없는 곳
추억에 너를 가두는 사람
그 마음의 감옥
부셔라
애린
끊어라 애린
탈출하라 바람 부는 저 벌판으로
내 사랑하는 애린
한 떨기 들꽃으로 시뻘건 흙으로
살아나라
다시 다시 살아나라
죽어가는 나
감옥은 죽음에게 맡기고
뒤에 남기고 뒤에 남기고
돌아보지 말고.
애린, 실천문학사, 1987
삼라만상 1 김지하
삼라만상 1
썩은 물도 물은 물
흐르는구나
하늘을 비추는구나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아니
구름 한 점 어린 것 보니
돌아오겠다
깨끗이 되어
또 오고
또 돌아오겠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새 김지하
새&
저 청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 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둥아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 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가는
넋 속의 저 짧은
여위어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떠나가는 새
청청한 하늘 끝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덧없는 가없는 저 눈부신 구름
아아 묶인 이 가슴.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새봄 1 김지하
새봄 1
바람 차다
온몸에 새순 돋는다
새들이 우짖는다
터파기 굉음이 시끄럽다
쓰레기산 난지도
통일전망대 가는 길.
중심의 괴로움, 솔, 1994
새봄 2 김지하
새봄 2
삼월
온몸에 새순 돋고
꽃샘바람 부는
긴 우주에 앉아
진종일 편안하다
밥 한술 떠먹고
몸아픈 친구 찾아
불편한 거리를
어칠비칠 걸어간다
세월아 멈추지 마라
지금 여기 내 마음에
사과나무 심으리라.
중심의 괴로움, 솔, 1994
생명 김지하
생명&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서울길 김지하
서울길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황토, 한얼문고, 1970
성자동 언덕의 눈 김지하
성자동 언덕의 눈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아득한 뱃길 푸른 물구비 구비 위에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산 채로
산 채로 묻힌 붉은 흙을 헤치고
등에 칼을 꽂은 채 바다로 열린 푸른 눈
썩은 보리와 갈라진 논바닥이 거기서 웨치고
거기서 나의 비탄은 새파란
불꽃으로 변한다 너는 타느냐
마주한 저 월출산 아래 내리는
저 용당리 들녘에 내리는 은빛
비행기의 은빛 비늘의 눈부심, 독한 눈부심 위에 아아 푸른 눈
침묵한 아우성의 번뜩임이 거기서 타느냐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황토, 한얼문고, 1970
소를 논함 김지하
소를 논함
소가 아니면 소가 아닐세
이중섭이 소는 조선 소가 아닐세
조선 소 아니면 소 그림 안되는 법
조선엔 자고로 미친 소 없네
얼룩소 수입소 물론 코뿔소
사람 무는 소 사람 들이받는 소
노기등등 분기탱천하는 소
뼈만 남은 이중섭이 소
절간에서 소소소소소 하는 그런 소
거 다 소 아닐세
조선 소
조선놈 닮아 어질고 에미령하고
때려도 밟아도 치고 차고 패도 그저
끄덕끄덕 일하는 소
갈 데 없는 그 소
그것이 소
조선엔 자고로 미친 소 없네
우황 들어 앓긴 해도
미치는 일 따윈 아예 없어
천만의 말씀, 뼈만 남은 소라니!
소 죽어 뼈는 커녕
터럭 한 올 남기는 걸 본 일 있던가
없어
다 주고 가지
가죽은 가죽대로
꼬리는 꼬리대로 다 먹어라 주고 가지
없어
없다니까
그게 소여 조선 소
조선 소가 소여.
애린, 실천문학사, 1987
소를 보다 김지하
소를 보다
꾀꼬리 나무에 앉아 꾀꼴꾀꼴 우는데
봄날 산들바람에 버들가지 하늘거리네
이제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곳에
한량없는 소 모습을 무엇으로 그려낼꼬
―소노래 셋째
천구백칠십구년 겨울 난데없는 꾀꼬리 울음 소리
`머리 고옵게 빗고 시집가고지고!'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소를 찾아 나서다 김지하
소를 찾아 나서다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히 찾아가니
물은 넓고 산은 멀어 갈수록 험하구나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저문 날 단풍숲에서 매미 울음 들려오네
―열 가지 소노래 첫째
네 얼굴이
애린
네 목소리가 생각 안 난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기인 그림자 끌며 노을진 낯선 도시
거리 거리 찾아 헤맨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캄캄한 지하실 시멘트벽에 피로 그린
네 미소가
애린
네 속삭임 소리가 기억 안 난다
지쳐 엎드린 포장마차 좌판 위에
타오르는 카바이드 불꽃 홀로
가녀리게 애잔하게
가투 나선 젊은이들 노래 소리에 흔들린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속 1 김지하
속 1
이리 괴로운 건 옛일 때문이다
옛일에의 집착 때문
한번 놓자
놓아버리니
먼 곳에서 희미한 고물장수 가윗소리.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안산 김지하
안산
저녁 무렵
여기 서서 보니
쇠창살 너머로 보니
피 흐르는 노을 인왕산을 넘어
노을에 찢긴 안산 피
인왕산을 넘어
내리 쏟아져 몰려가는 걸 보니
오른손도 왼손도
닿지 않는 내 등 한복판에 꽂힌 칼
칼이 밀어 노을에
노여움도 설움도
막지 못해 흐르는 내 가슴의 끝없는 새 피
피가 밀어 노을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인왕산을 넘어
내리 엎으러져 몰려가는 내 마음속
부릅뜬 이괄의 두 눈 타는 핏발
외치는 이귀 저 쌔하얀 이빨을 보니
변함없는 것
되풀이되는 것
작은 풀씨 속에 초원이 자라는 것
좁은 빈틈에서 폭풍이 터져나오는 것
가마 한 채 말 한 필 겨우
다닐똥 말똥 좁아터진 길마재 외길에
서울 온 목숨이 달렸던 걸 보니
안산 노을을
여기 서서 보니
쇠창살 너머로 치어다보니.
애린, 실천문학사, 1987
안팎 김지하
안팎
□ 1
새 속에서 묶인 내가
날으는 새 본다
노을로 타는 새 나 본다
핏발로 타는 내 눈 속에서 노을로 타는
날으는 묶인 새 본다
내가 끝끝내
나팔 소리 울리면 스러져갈
새.
□ 2
참새라면 쥐라면 파리 모기 빈대라면
풀 돌 물 연기 구름이라면
한줌 흙이라면
차라리 아예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태어나도 노을진 어느 보리밭 가녘
귀 떨어진 돌부처로 모로 누웠더라면
일그러진 오지그릇 속
텅 빈 기다림으로나 기다림으로나
거기서 항시 멈췄더라면
차라리
먼저 간 벗
가느다란 그 한 올
머리카락이었더라면.
□ 3
입 안에 신침 괴는 날은 틀림없이
귤 넣어주셨고
발 시리다 싶은 날은 어김없이
털양말 넣어주셨다
면회는 한 달에 단 한 번
편지는 써본 일도 받은 일도 없는 긴 세월
내 몸과 당신 몸 바꾸어
어머니는 부처 이루셨나.
□ 4
얘야
괜찮다
교도소 벽돌담 위에 풀꽃님도 피시니 괜찮다
건너편 병식님 계시던 방 창살 사이
가죽나무님도 자라신다 아주 괜찮다
아침엔 참새님 와서 악쓰시고
저녁엔 쥐님 와서 춤추시고
이 빈대 모기 파리 구더기님도 계신다
옆방에 그 옆방에 도둑님들 잔뜩 계시고
황공하옵게도 내 앞엔 간수님도 한 분 계신다
괜찮다
얘야
이만하면 견딜 만하니
염려하지 마라
네 하느님께도
그렇게 말씀 올려라.
□ 5
벽 속에 누군가 누워 있는데
거기 내가 누워 있는데
창살 너머 민들레씨 가득히 날고
마룻장에 깊이 새긴 빈 장기판
밖에서 소리 없이
온종일을 누군가가 걷고 있는데
내 속에 걷고 있는데
내가 그 속에 걷고 있는데.
애린, 실천문학사, 1987
앵적가 김지하
앵적가(櫻賊歌)
만물의 이치는 음양이 근본이라
화합하면 태평하고 상극하면 서로 싸워
싸우는 것 두 중간에 항용 기이한 기이한 꽃이 핀다 전하나니
이 꽃을 두고 일러 사꾸라라 부르것다.
아동방(我東方)이 반도(半島)로서
넓직한 대륙과 길쭉한 도국(島國)에 끼어 밤낮으로
동서남북 왼갖 잡것들이 서로 들어와 맞서 끝없이 불질하는 중에
김성(金姓), 목성(木姓)이 또한 다투고
폭군과 백성이 노상 부딪쳐
하루도 욕질에 매질, 칼질에 팔매질이 멈출 날 없으니
그 사이 맞아 죽는 자 부지기수요
안죽간(安竹間)에 송장이 산더미 같이 쌓이고
수당간(隋唐間)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워 끝없은 즉
밸 없고 뼈 없는 자 애오라지 바라는 것 그저 제한몸 안명보신(安命保身) 뿐이것다
하략
다리, 1971
역려 김지하
역려(逆旅)
내가 가끔
꿈에 보는 집이 하나 있는데
세칸짜리 초가집
빈 초가집
댓돌에 피 고이고 부엌엔
식칼 떨어진
그 집에
내가 사는 꿈이 하나 있는데
뒷곁에 우엉은
키 넘게 자라고 거기
거적에 싸인 시체가 하나
아득한 곳에서 천둥소리 울려오는
잿빛 꿈속의 내 집
옛 고부군에 있었다는
고즈넉한
그 집.
아침 길 기다란 그림자에서
바람 많던 날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길 옆 벽돌담엔
죽어간 이들의 얼굴이 어린다
내 이마는 기억의 집
회한과 원한 가득한 진흙창
연꽃 한 송이 일찍 피어
이마를 가르며 붉게 벌어진다
어젯밤 어느 문으로 들어왔을까
미친 버드나무가 천정에 목매었는데
산조 한 자락 들려오고
바람이 우수수 일어나고
대낮에도 식은땀 흘리며
감옥꿈 꾸며 미소 짓는 주름살 몇 가닥.
고름 질질 흐르는
썩어가는 도시의 살에 맑게 비치는
옛 마을의 희미한 실핏줄
핏줄을 찾아
벗이여 살 속으로
다리를 놓자
무쇠솥다리
집을 짓자
세 발 달린 집
고름 흐르는
썩어가는 도시의 살 속에
묻혔던 우뢰가 솟아 터져오르듯
물과 불이 서로 싸우는 다리
혁명이다
무쇠솥다리
세 발 달린 집 쇄신이다
부활이다
옛 마을의 희미한 실핏줄
핏줄을 찾아 벗이여
다리를 놓자 살 속으로
큰 산이 쿵쿵 울릴 때까지
다리를 놓아
무쇠솥다리
집을 짓자
세 발 달린 집.
중심의 괴로움, 솔, 1994
오적 김지하
오적(五賊)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것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기를 하나 쓰것다.
엣날도 먼옛날 상달 초사흘날 백두산 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아흐로 단군이래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사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살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족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솟구싶은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가 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는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렸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곁붙어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는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겄다.
― 하략 ―
사상계, 1970
우리가 하자 김지하
우리가 하자
몹시도 눈이 쌓인 날
치악산 밑에 사는
한 친구 집에 간 일이 있었지.
지금도 생각난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들을 하는지
참 우수한 아이들이었는데
넷이었던가
다섯이었던가
기억은 참되지 않다
기억은 오직 구성될 뿐이다
눈에 덮인 너와집
그 작은 방
그 희미한 촛불
해월 선생처럼 수염을 기르고 엄장 큰 한 분이 농주를 마시고 있었다
첫마디
`베토벤이 죽던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긴 논쟁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나는 낫셀의 방향을 주장했던 것 같고
공과를 지망했던 내 친구는 그 무렵에 벌써 로스토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얘기는 사분 오열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똑같은 것이었다
`베토벤이 죽어간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다
이 점을 기억하라
역사는 대를 이어서 자기의 본체 이성을 발전시키는 법이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고등학교 모자가 날아가고
다시 줏어 쓰며
우리가 얘기한 것은
한 가지였다
`우린 아직 어리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것도 저것도 다 틀렸다
우리가 하자!'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우물 김지하
우물&
우물에서 달을 길어
빠져 죽었네.
두레박에
길게 누운 구름에 묻고 죽었네
꿈꾸든 산머리는
바람에 짤려
고원
아아 고원에서 지나간
지나간 날의 눈 깊은 국경의 밤에
높이 울든 하얀 말
높이 울든 무성의 찰수숫대
목줄기가 찢어졌네
꽃샘 아래 철죽목
온갖 이쁜 소리의 방울과 우렁찬
모든 종들이 굳게 굳게 입을 다물 때
밤이 깊으면 마른번개의 밤이 깊으면
젊어서들 죽었네
홀로 깨어 일어나 촛불을 밝힌 죄로
도래질을 남기고 끄덕임도 남기고
물 마른 우물전엔 홈을 남기고
드레박에 죽었네
우물에서 달을 길어
빠져 죽었네.
황토, 한얼문고, 1970
저자에 들어가 손을 내리다 김지하
저자에 들어가 손을 내리다
맨가슴 벗은 발에 흙먼지 덮어쓰고
웃음 가득 띄우고 마을 찾아 들어온다
신선의 비결 따위 쓰지 않아도
마른 나무에 봄이 오면 꽃이 피듯 하리라
―소노래 열째
시끄럽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줄탁 김지하
줄탁
저녁 몸 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중심의 괴로움, 솔, 1994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중심의 괴로움, 솔, 1994
지리산 김지하
지리산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사ㅍ 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사ㅍ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책들 김지하
책들
책들은 웅장하다
모든 책들은 질서를 갖기 때문에
나보다는 웅장하다
비극적인 명성을 꿈꾸고
마릴린 몬로와의 있을 법도 않은
간통을 꿈꾸고 벌거벗고 빨고
핥고 그러나 새카만
옷 속의 볕에 탄 아도니스의 몸을 꿈꾸고
동시에 혁명을 혁명의
비극적인 명성을 게바라를 꿈꾸는 그런
나보다는 웅장하다
나에겐 이제 질서가 없다
하루살이만한 질서도 없다
다만
책을 읽을수록 바보가 된다는
모택동을 소주 이홉에 타서
위로한다
책에 짓눌린 모든 이해 못한
책들에 억눌린 나의 불쾌감을
상상의 고갈을 위로한다
무엇이 될까?
하루살이 벼룩 빈대 모기
그보다도 못한 밥벌레겠지
나의 내세(來世)가
내세가 책 속에 있다
그래서 웅장하다
나는 현세조차 모른다
그러나 책들이여
반성하라 책들이여
어째서 너희들의 소리가 없는가
반란이 없는가 거스르는 미친 피
내 손의 피, 내 피의 저 미친, 미친, 미친, 소용돌이치는
저 피가 없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너의 웅장은 어째서
침묵하는가
이 밤에 이 무료함 속에
내 이 불타는 부끄러움 속에마저 책들이여.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쳐라 김지하
쳐라
노을이여
나를 쳐라
내 마음을 쳐라
불타는 노을이여
새벽에나 겨우겨우 길 찾아 나서는
둔한 내 마음을
잠든 내 삶을 쳐라
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
산란한 내 마음
더욱더 산란하게 쳐라
산란하여
아으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게 쳐라
일어서 아무때 아무 곳이든
뚜벅뚜벅 진흙길 나서게 쳐라
쳐라 쳐라
힘차게 쳐라
사그라드는 애잔한 끝만 남은
덧없는 노을이여
노을이여
쳐라 쳐라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초파일 밤 김지하
초파일 밤&
꽃 같네요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 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 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상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을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가욱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상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말 꽃 같네요
참말 꽃밭 같네요.
애린, 실천문학사, 1986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푸른 옷 김지하
푸른 옷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 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든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워지지만 않는다면.
황토, 한얼문고, 1970
풀에도 남북이 있는가 김지하
풀에도 남북이 있는가
풀에도 남북
바람에도 남북
구름에도 남북
다람쥐에게, 노루에게, 사슴에게, 늑대와 호랑이에게도 남북이 있는가
양파에게도 남북의 대립이 있는가
흙에게도 남북 사이의 전쟁이 있는가
총에게도 이데올로기가 있는가
이데올로기 대결이 있는가
철조망의 쇠는 이데올로기를 의식하고 있는가
물에게도
새와 벌레에게도 있는가
없다
없다면 큰일이다
우리 모두가 천치 바보라는 증명이기 때문에.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한숨 김지하
한숨
겨울 깊다
땅은 한숨
눈부신 흰 한숨
은사시나무도
한숨
동짓날 밤
깊은 잠 속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쌔하얀 사슬 끄을고
한숨
이 기이한 겨울 한복판
봄 오는 소리
또 한숨.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해남에서 김지하
해남에서
섣달 보름달 기우는 새벽
용머리 샘물 속에
건너편 우슬고개 붉게 물들이며
갓 태어나는 애기먼동
내 얼굴 함께
시누대 함께 비칠 때
언제든 어디서든
눌러앉을 차비 끝낸 마음이
잠시 서성여 거기 흔들릴때
잔설 밟고 온 내 발자욱 나란히
아침해 향해 거꾸로 찍혀 있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화살내 김지하
화살내
화살은 왜 나에게 떠 오나
화살은 왜 나를 향해서 오나
화살은 왜
화살은 왜 내 가슴에 아프게 박히나
화살은 왜 이 개울을 따라서 흘러 오나
화살은 왜 물을 따라 흐르나
화살은 물을 따라 나에게 오고
나는 물을 따라 화살을 거슬러 가고
너는 누구냐
물.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황불 김지하
황불
갔네
황불이 일어
하늬도 소소리도
회오리도 없이 고인 불
잠 속에 고인
불 속에 깊이 고인 불 속에 내린
육신의 육신의 뿌리에 내린
쳐라 신명을 타내리네
황불이 일어
내리는 빗발이
솟구치는 육신의 휘모리에 타내리네
신명을 타내리네
황불이 황불이 황불이 일어 쳐라
나는 물덩어리 너는 물덩어리
나는 너의 불덩어리
차라리 서로 부딪쳐 파열해버려야만
속시원할 난장의 빗발 아래
황불이 일어
갔네
육신에 내리친 계엄의 미친
저 난장 위에 저 총창 위에 저 말발굽 위에
저 바리케이트 위에도 되게 쳐라
활활활 황불이 일어
갔네
개처럼 끌려갔네
하늬도 소소리도 회오리도 없이 고인 불
황불이 일어.
황토, 한얼문고, 1970
황톳길 김지하
황톳길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사ㅍ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황토, 한얼문고, 1970
회귀 김지하
회귀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에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하나 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등걸 속
애틋했던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은 가데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 가데.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