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21. 2. 17.(수) - 음력(1. 6.), 일출 07:32~일몰 17:36
●산행지: 여수지맥 1구간 (창무고개-힛도마을)
●산행코스: 창무고개/ 22번국지도→비봉산(311m)→233m봉→상촌도로→199m봉→219m봉→도로→288m봉→안양산(327m)→232m봉→화동리도로→227m봉→도로→307m봉→도로→고봉산(363.7m)→도로→봉화산(372m)→도로→863지방도→77번 국지도→77번 국지도→76m봉→22번국지도→힛도
●먹거리: 파워에이드1.5리터, 빵2, 땅콩샌드, 단백질바, 자유시간, 양갱, 홀스, 사탕10, 게비스콘3
●준비물: 고아텍스, 쟈켓, 경량 우모, 스틱, 구급약, 마스크3, 충전지2, 충전짹, 장갑, 손수건, 휴지, 우의, 물티슈, 긴팔, 부직반창고, 매트, 스패츠, 안대, 귀마개, 양말
●거리: 약 22.1km
●소요시간: 9h
●누구랑: 나홀로
●경비: 여수심야고속버스40,300, 식사6,000, 편의점5,400, 고속버스36,600, 뒤풀이9,500
●날씨: -4~0, 바람이 세고 약간 흐림, 눈발 조금씩 날림...
●산행경과:
- 06:35 : 창무고개
- 07:20~07:36 : 비봉산
- 07:30 : 비봉산
- 08:09 : 상촌고개/ 상전고개
- 08:53 : 나진고개/ 옥천로
- 09:43 : 안양산
- 10:18 : 화동고개/ 고인돌고개
- 12:07 : 정자
- 12:35 : 고봉산
- 13:04~25 : 봉화산
- 14:20 : 골프장
- 14:40 : 세포삼거리/ 77번국도
- 14:54 : 요지막산
- 15:05 : 돌산개마을
- 15:29 : 힛도마을
- 15:34 : 안포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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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무리~힛도마을 19.8km, 9.30h
-. 상촌고개~백야대교 17.4km
-. 화동고개~백야삼거리 16.5km
-. 나진고개~힛도마을 13.8km
- 여천장로교회/도원로~화동고개 18.3km
-. 나진고개~백야도 20.18km
* 사전 정보 및 식수 공급처
- 화양면 택시: 061-682-8272
- 비봉산: 왕복 300m, 15분 소요
- 화동고개: 250m 마트
- 세포삼거리: 중앙식당, 편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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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창무고개 가는길
- 센트럴시티~여수: 05:50, 07:30, 10:10~19:40, 20:40, 24시, 4.15h, 40,300
- 여수~창무고개: 여수종합터미널 건너편 버스정류소 23번 시내버스, 06:20
여수에서 돈자랑 하지 말랬는데 여수종합터미널 행색이 초라합니다.^^
돈이 많으니 여수분들은 여수공항에서 항공기나 여천역에서 KTX를 주로 이용하고 고속버스엔 관심이 적다는 후문이네요.^^ ㅎㅎ
* 여수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힛도버스정류소~여수: 28번 시내버스, 0.40h
- 여수~서울: KTX
- 여수~서울: 15:40, 16:20, 17:40, 19:00, 20:40, 24:00, 4.20h, 33,200~3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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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샷원킬에 대지 못하는 체력으로 인하여 그 댓가를 2구간으로 지불합니다.
덕분에 심야버스로 여수를 한번 더 찾아보는 행운도 있어 크게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돌산지맥은 어설프게 두번 가보았습니다. 한번은 완빵으로 끝냈고, 한번은 그렇질 못한것 같습니다.
향일암에도 두어번 갔습니다. 그런데 여수는 그냥 주마간산격으로 지나쳤던 중간 기착지로만 기억에 있었습니다.
광양만의 묘도와 가막만의 섬들을 1구간은 너무 양이 많은듯 하여 2구간에 포스팅합니다.
여수지맥!
역시 이순신장군의 족적이 크네요.
7년 전쟁의 임진왜란 말미에 노량해전(1598년, 선조31, 11월 19일)에 앞서 광양만 순천왜성에서 벌어진 왜교성전투(1598년, 9월 20일~10월 7일)에 대해 새삼스레 다시 알았습니다.
- 1차 진주성전투(1592년, 선조25년, 10월 5일~10일)와 2차 진주성전투(1593년, 선조26년, 5월 21~29일)
단지 지맥길을 지나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지 않고, 오래 기억하도록 지맥이 지나는 지역의 많은 사연들과 접해보고 싶습니다.
먼저 가신 선답자님 분들 중에 저와 같은 취향의 선배님들이 계시기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고봉산과 백야곶봉수대 중 어느 곳의 전망이 더 좋으냐고 물으신다면,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이렇게 답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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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간 곡고산에서 바라보았던 검단산과 우측 순천왜성의 배치입니다. 지금은 갯벌이 간척되어 장도와 송도마저 육지로 연결되었습니다.
♤ 순천왜성 전투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정유재란 당시 쌓은 왜성(倭城)이 있다. 순천왜성(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이 그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성이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육지부를 파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낮에는 다리로 사용하고, 밤이면 다리를 끌어들였다. 그래서 조·명 연합군은 이 성을 왜교(倭橋), 왜교성(倭橋城) 또는 예교(曳橋)라 부르기도 했다. 일본군은 왜 순천에 왜성을 건립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 1만 3천의 주력군을 주둔시켰을까?
명군과 왜군 사이에 지루하게 이어지던 강화 협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된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2차 조선 침략을 명한다. 정유재란이다. 일본군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야키(小早川秀秋)는 좌·우 2개 군과 수군을 편성,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이를 지휘하게 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좌군은 남원을 함락시킨 후 전주에 입성하였고, 모리 히데모토의 우군도 함양의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후 전주에 들어온다. 전라도 진출에 성공한 왜군은, 좌·우군으로 편성 후 우군은 충청도로 진출하고 좌군은 전라도를 장악하기로 역할을 분담한다. 하지만 북상하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휘하의 왜군은 9월 초 직산 전투에서 명군에게 패배한다. 패배한 왜군은 9월 중순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여 분산 주둔하면서 지역의 요충지를 택해 성을 쌓는다. 이때 축성된 왜성 중 하나가 순천왜성이다. 순천왜성의 축성은 본국과 가까운 지역, 병참보급선이 원활한 지역에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북상할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이었다. 순천왜성에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주력군을 배치한 것은 순천왜성이 호남공략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순천왜성은 남해·사천·고성·창원·양산·울산왜성으로 이어지는 왜군 거점 벨트 중 하나였다.
순천왜성의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난중잡록』 정유년 9월 초하루 기사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적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에 결집하여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는 내용과, 12월 초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우키타 히데이에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앞으로 축성 완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아, 1597년 9월부터 11월 말까지 3개월에 걸쳐 축성한 성으로 추정된다. 성의 구조도 궁금하다. 순천왜성은 바다에 면한 천수각이 있는 내성과 본성을 육지 쪽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3겹의 외성으로 축성되었다. 조선인의 눈에 비친 순천 왜성의 모습은 나주 출신 진경문이 쓴 '예교진병일록'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진경문은 정유재란 당시 소의장(昭義將) 임환의 의병부대에서 종사관으로 활약했던 분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순천부의 남쪽 예교에 퇴거했는데…… 고니시가 위쪽에 넓은 마당을 만들어 놓고 흙을 더해 성을 축성하여 수천의 군인을 수용하였다. 5층 망루를 지어 백토를 칠하고 기와와 벽돌을 덮었으니, 그 모양이 마치 나는 새 날개 같다.…… 동서쪽의 바다와 접하게 하여 선박을 끌어 출입하였다. 그 바깥에 또 한줄기 외성을 쌓아 동서로 바다에 맞닿았고, 그 가운데에 문루를 세우고 흙을 덮었는데, 사면을 거기서 살펴보았다. 성 밖은 목책을 두 겹으로 둘러 설치하고, 그 북쪽 한 면에 한 겹의 목책을 더 세웠다." 조선인의 눈에도 순천 왜성은 2중, 3중의 철옹성이었던 것 같다.
그 철옹성이던 왜성을 1598년 9월부터 10월 초까지 조·명 연합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공격했다. 왜성은 함락되지 않았지만 왜군은 여전히 독안에 갇힌 쥐 신세였다. 육지 쪽도, 바다 쪽도 출구가 막혔다. 그래서 쓴 간책(奸策), 간사한 계책이 뇌물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무장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진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을 받고 왜의 통신선 1척이 빠져나가는 것을 묵인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통신선이 도착하자, 남해·고성에 주둔 중인 왜장들은 고니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500여 척의 전선을 순천왜성으로 보낸다. 조·명 연합 수군은 엄청난 규모의 적들이 진격해온다는 보고를 받고, 470척의 전선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향했다. 1598년 11월 19일 시작된 노량해전은 조·명 연합군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 목숨을 바쳐야 했다. 11월 20일, 왜성에 갇힌 고시니 유키나가는 광양 앞바다에 조·명 연합 수군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철수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것이다. 순천 왜성 전투와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최후의 육·해상 전투였다.
☞ http://news.donga.com/3/all/20171118/87320034/1
1구간 수암산에서 바라보았던 광양만입니다. 뒤쪽으로 광양시와 광양만 우측으로 묘도와 이순신대교가 보입니다.
♤ 장도(獐島)
섬의 모양이 노루를 닮아서 '노루섬'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 표기로 바꾸면서 노루 장(獐)자를 써서 장도라고 하였다. 원래 광양군 골약면에 속하였던 섬이지만 1973년 여천군 율촌면 송장리로 편입되었고, 1998년 여천군이 여수시로 통합되면서 여수시 율촌면 장도리로 편입되었다. 이 섬은 율촌 제1산업단지 매립공사로 현재 육지화되었다. 600년 전에 코끼리를 사육한 섬이자 임진왜란 때 일본의 병참기지가 있었다는 중대한 역사적인 의의를 가지는 장도, 또 하나의 섬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유구한 섬의 역사가 경제적인 논리에 밀려 율촌산단 개발이라는 산업화의 이름 아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위해 몰래 장도 해역에 조선인으로 위장하여 들어왔다. 그리고 왜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백성들은 그 성이 관군의 성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극비리 완성된 왜성에 수많은 군량물자를 비축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왜군은 정유재란 때에도 다시 장도에 왜성을 축성하여 군량미를 비축하고 장도를 근거로 전쟁을 일으켰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는 1598년(선조 31년)의 순천왜성 전투에서 조선군과 명나라 수군이 장도에 주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묘도(猫島)
1896년(고종 23) 홍양, 낙안, 순천, 광양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섬들을 묶어 돌산군에 편입될 때 묘도도 같이 편입되었다. 1914년 돌산군 태인면에서 여천군 삼일면으로 변경되었다. 1949년 삼일면 묘도리로, 1980년 여천군 삼일읍 묘도리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1986년 여천시로 승격되면서 묘도동이 되었다. 1998년 삼여통합으로 인해 현재는 여수시 묘도동으로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읍동마을, 온동마을, 광양포마을, 도독마을, 창촌마을이 있다. 2012년에 준공한 묘도와 여수를 연결하는 묘도대교, 2007년 11월 착공하여 2013년 2월에 준공한 여수산단과 광양산단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4차선도로 묘도와 광양 금호동을 연결하는 이순신대교가 개통되었다. 봉화산 봉수대, 묘도산성, 도독마을 등 1598년(선조 31) 9월부터 11월 19일 노량해전이 발생하기까지 약 2개월간에 걸쳐 조명연합 수군이 진을 쳤던 흔적이 남아있다. 묘도에는 진린 도독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진린은 명나라 장수이며 1597(선조 30)년 정유재란에 조선에 파견되었다. 1598년(선조 31) 9월 21일 진린도독은 수군 5천 명과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고금도를 출발하여 순천 왜성에 갇혀 있던 왜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묘도에 진을 쳤다. 진린은 2일동안 군장을 수습하고 나서 곧바로 장도에 비축한 적의 군량을 불사르고 왜성을 공격했다. 진린은 적의 퇴로를 열어주는 휴전 제의에 승낙하고 1598년 10월 9일 고금도로 철수했다. 진린은 왜군들의 뇌물공세에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순신의 설득으로 1598년 11월 11일 묘도에 진을 쳤다. 이후 노량해전에 첨전해 공을 세웠다. 진린은 묘도에 진을 친 기간은 27일이 되는데 묘도의 도독마을이 바로 그 흔적의 터이다.
♤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왜구와 접촉이 빈번하고 해안선이 길어 해안방어의 어려움이 극심했던 경상도와 전라도에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주진을 각각 2군데 설치했는데, 서울에서 보아 각 도의 왼쪽, 즉 동쪽편을 담당한 주진을 좌수영이라고 했으며, 오른쪽인 서쪽편을 담당한 주진을 우수영이라고 불렀다. 전라도 좌수영은 1479년(성종 10) 이후 순천(順天)의 오동포(梧桐浦 : 지금의 麗水)에 두었고, 경상도 좌수영은 효종 이후 동래에 두었다. 전라좌수영은 13개 읍진(邑鎭)을 관할했으며, 경상좌수영은 9개 읍진을 관할했다. 경상좌수영의 주진에는 경상좌수사 1명, 우후(虞候) 1명, 대변군관(待變軍官) 100명, 선장(船將) 8명, 선감관(船監官) 2명, 군기감관 1명, 지구관(知官) 6명, 기패관 70명, 도훈도(都訓導) 5명, 교사 20명, 사부(射夫) 132명, 포수 156명, 표하군 191명, 타공 25명, 능로군(能櫓軍) 575명, 선고지기[船庫直] 6명 등의 인원과 전선 3척, 거북선 1척, 병선 5척, 탐선 1척, 사후선(伺候船) 11척 등의 군선이 있었다. 소속 읍진에는 전선 9척, 거북선 2척, 병선 10척, 사후선 22척, 장졸 2,696명, 영·진(營鎭)의 방수군(防水軍) 1만 440명, 첨격사부(添格射夫) 911명, 선후운사부(先後運射夫) 312명, 차비군(差備軍) 111명, 탄사부 528명, 탄장 180명 등이 있었다. 전라좌수영에는 전라좌수사 1명, 우후 1명, 대변군관 170명, 선장 7명, 지구관 2명, 기패관 60명 등의 인원과 전선 4척, 병선 5척, 사후선 11척 등의 군선이 있었다. 그리고 소속 읍진에는 전선 14척, 거북선 1척, 병선 14척, 방선 1척, 사후선 30척, 왜선 1척, 장졸 3,615명, 입방군(入防軍) 7,910명, 모군(募軍) 100명 등이 있었다. 1907년(융희 1) 군대해산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1구간 무선산에서 바라보았던 가막만의 모습입니다. 소호항 앞쪽으로 가덕도와 장도가 보이고 멀리 중앙에 가막섬도 보입니다.
1구간 안심산에서 바라보았던 가막만이 모습입니다. 정면 뒤쪽이 돌산도입니다. 왼편으로 가덕도가 살짝 보이네요. 그 뒤로 소경도와 대경도입니다.
♤ 장도(長島)
1930년 초 정채민씨 일가가 입도하면서 장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시전동에 달린 섬으로 면적이 0.09㎡, 해안선 길이 1,85km이며 섬이 길게 놓여 있다하여 '진섬(장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물때에 따라 열리고 닫혀 썰물때 바닷길이 드러나야 건너갈 수 있는 방파제 다리가 있어 바다위를 걸어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섬이다. gs칼텍스에서 야외조각공원을 설치하고 웅천근린공원을 조성하여 예술의 섬으로 변환 중이다.
♤ 가덕도(加德島)
여수 가막만에 있는 무인도로, 소호동 동쪽 해상으로 0.5km 떨어져 있다. 면적 0.0239㎢, 섬 둘레 0.65km, 최고점의 해발고도 30m이다. 원래 이름은 '더덕섬'이었는데 한자로 바꾸면서 더덕의 '더'자를 더한다는 뜻의 '가(加)'자로 표기하여 가덕도(加德島)가 되었다고 한다. 근처에 웅천동에 속해있는 두력도(斗力島)라는 무인도가 있다.
♤ 경도/ 대경도, 소경도
고려시대 한 후궁이 귀양 온 뒤 사람이 거주하면서부터 경도(京島)라고 불렀고, 섬 전체가 고래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명 경도(鯨島)/ 고래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10년 이후부터는 섬 주변의 바다가 거울과 같이 맑다고 하여 경호도라고 불렀으며, 지금은 두 개의 섬 중 큰 섬을 대경도(大鏡島)라고 하고 작은 섬을 소경도(小鏡島)라고 부른다.
♤ 금죽도
돌산읍 금봉리에 있는 섬으로 예전에 대나무가 많아 멀리서 보면 금빛이 나므로 금죽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금죽도에 자생한 대나무는 화살을 만들기에 적합하여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화살을 만들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월호도
화정면 월호리에 있는 섬으로 지형이 반달형의 해수와 같다하여 월호(月湖)라 부르고 있으며, 개도 동쪽에 있는 섬으로 다리 역할을 하므로 다리도(다리도)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세 군데의 조개더미가 확인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시람이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 금오도
섬에 산림이 울창하여 검게 보였기 때문에 거무섬이라 부르던 것을 비슷한 한자로 표기하면서 금오도(金鰲島)가 되었다. 금오도가 금빛의 거북을 닮아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이야기 역시 한자를 뜻풀이한 결과이다. 금오도는 한때 거마도(巨磨島)라고도 하였는데, 이 또한 거무섬의 이름을 비슷한 한자로 표기한 경우이다. 옛 지도 「대동여지도」에는 거마도로 표기되어 있다.
♤ 자봉도
섬의 산봉우리가 하나이고, 섬 모양이 큰 새가 앉아 있는 형세라 하여 자리좌(座)자, 새봉(鳳)자를 써서 좌봉도(座鳳島)라 불렀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봉(鳳) 중에서도 붉은 새가 길조라 하여 자봉(자봉)이라 고쳐 불렀으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자봉도(자봉도)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개도
섬 명칭은 개(蓋)라는 한자가 덮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개도에 있는 화개산의 모양이 솥뚜껑 모양을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수여천향토지」에 의하면 개도의 봉화산과 천제산 모양이 개귀처럼 보이므로 개섬이라 하였으며, 이것이 한자화되면서 개도(蓋島)가 된 것이라 한다. 한편, 「도서지」에 의하면 주위의 작은 섬들을 거느린다는 뜻으로 '덮을 개(蓋)'를 써서 개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거문도(巨文島)
고흥반도로부터 남쪽으로 40㎞ 지점에 있다. 삼도(三島)·삼산도(三山島)·거마도(巨磨島)라고도 불린다. 고도(古島)·동도(東島)·서도(西島)의 세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고도만을 거문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도의 면적은 0.42㎢이고, 해안선 길이는 3.70㎞이다. 서도의 면적은 7.77㎢이고, 동도의 면적은 3.43㎢이다. 서도는 세 섬 중 가장 큰 섬으로서 온 섬이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어 연중 푸른데, 이곳에 위치한 수월산(水越山, 128m)에는 다도해의 뱃길을 비춰주는 거문도 등대가 있다. 고도와 서도는 삼호교로 연결되어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에 영속되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원촌현에 속하여 삼호(三湖)라고 하였다. 1396년(태조 5)에는 흥양현(현재의 고흥군)에 속하여 삼도라고 불렸으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수군 소속이 되었다. 1949년에는 여천군으로 이속되었다가 1998년에 통합 여수시 삼산면이 되었다. 1885년(고종 22)에 영국은 청·러시아·일본과의 세력 균형을 이유로 동양 함대를 주둔시켜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여 해밀턴항(Port ㏊milton)으로 불렀다. 그 뒤 영국은 섬을 매수하겠다는 등 갖은 술책을 쓰다가 결국 1887년 2월 27일에 이곳에서 철수하였다. 이때 종래 부르던 삼도를 거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과거 러시아의 태평양 출구 구실을 하여 ‘동양의 지브롤터(Gibralter)’라고도 불리었다. 지명은 삼도에 문장가가 많아서 거문도(巨文島)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곳에 왜인들이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살았기 때문에 ‘왜섬’이라고 부르던 것을 ‘왜’와 훈이 비슷한 ‘외섬’으로 훈차(訓借)해 고도(孤島)로 불리다가 후에 고도(古島)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도·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도내해(島內海)라고 하는데, 수심이 깊어 큰 배의 출입이 자유롭다.
심야버스로 여수로 내려가 터미널에서 조금 쉬다가 터미널 앞 은수저라는 식당에서 6,000원 뷔페를 먹고, 터미널옆 육교 아래 정류소에서 25번? 버스를 타고 창무리에 왔습니다.
♤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昌武里)
여수시 화양면에 있는 동리로서 바다로 길게 뻗은 육지에 위치하여 양쪽 옆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창무, 성줏골, 배낭골, 백초 등이 있는데 성줏골은 창무마을과 용창초등학교 사이의 마을로 곡화목장의 성주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고 배낭골은 마을 북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배나무골이 변한 말이다. 백초는 마을 주변이 갈대와 같이 하얀색을 띤 풀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을이 하얗게 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신추라고도 하였다. 화양면의 입구에 있는 창무마을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도 '문꾸지'라 불렸는데 이는 창무 마을의 순 우리말 이름으로 곡화목의 마성 성문이 있던 곳이란 뜻으로 지어졌다. ‘문꾸지’는 ‘문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화양면 지역에 곡화목장이 설치되어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송소마을에서 오천마을에 걸쳐 성을 쌓고, 성문을 이 마을에 두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지금의 ‘창무’란 이름도 ‘문꾸지’와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의 옛 땅 이름 중 하나인 ‘창마징이’의 유래에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오는데, ‘칭마징이’는 ‘창으로 막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어서 생겼다는 이야기와 돌산만호진 입구를 지키는 창을 든 초병에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북으로는 소라면 관기리에 접하고 남으로는 용주리에 접하며 마을 동쪽으로 국도 77호선이 지난다. 마을 서쪽은 비봉산이 있어 서고동저형의 지형으로,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대부분이 바다를 끼고 있는 화양면 지역에서 바다와 접하지 않은 마을에 속한다. 관기마을과의 사이에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관기들이 넓게 펼쳐진다.
여기다 배낭 놓고 잠시 다녀옵니다.
전망 좋은 곳에 산패가 장식되어 있네요.
해가 떠오르고....
지나온 지맥길입니다. 우측 멀리 아파트 뒤로 무선산이 보입니다. 안심산에서 우측으로 돌아 사방산-문덕산을 지나 창무고개로 내려서서 창무옻닭에서 들머리를 찾아 비봉산에 올랐습니다. 여기 또한 빽빽하기로 유명한 가시잡목지역인데 유감없이 전지가위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산불감시초소에서 순천만쪽을 조망합니다. 팔영산이 보여야 하는데 바람도 세차고 바다위로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 비봉산(飛鳳山, 310.4m)/ 마거산(馬距山), 돌탑 좌측에 산불감시초소/ 0.2km
전남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와 옥적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화양면 가장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있으며 소라면과 경계를 이룬다. 비봉산에 관한 자세한 명칭유래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는 곡화목장의 말들이 서로 지나간다고 하여 마거산이라고 하였다. 산 전체의 경사가 가파른한 편이다. 옥적천 등 하천이 발원하면서 사방으로 흘러 저수지가 발달해 있고 비봉산 남쪽 산록에는 692년(통일신라 효소왕 1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용문사가 있어 이곳을 찾는 불자들과 관광객들의 내왕이 잦은 편이다. 여수군읍지와 여수읍지에 용문암이 서쪽 30리 마거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비봉산이 마거산으로 불린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조선지지자료의 순천에 화양면 창무리에 비봉산이 있다고 하여 일제강점기에 비봉산 지명이 비로소 등장한다.
- 지맥은 좌측 안양산 방향으로 꺾어지나 직진하여 맥에서 우측으로 벗어나 있는 비봉산을 찍는다. (0.3km, 15분 소요) 비봉산 정상은 나무에 가려 그다지 조망이 좋지않다. 전위봉인 헬기장이 조망이 훨씬 좋다. 안심산에서 이어오는 지맥능선이 보이고, 정상 바로 아래 우측 초소가 있는 전망대에 내려서야 순천만의 바다풍광 등 시원한 조망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봉산과 봉화산 너머로 고흥 팔영산이 보인다.
♤ 웅동마을
여수시 화양면 나진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나진마을 북동쪽 약 1.2 Km 지점에 있으며 고무골이라는 땅이름을 곰(웅)골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곰 웅(熊)자를 써서 웅동이라 하였다. 예전에 곰이 많이 살아서 또는 이 마을 주변의 땅의 모양이 곰의 형상을 하여서 고무골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나 고무골은 움푹 들어간 곳을 뜻하는 구무와 골이 합쳐 이루어진 말로서 지형이 구멍처럼 들어간 마을이라는 뜻이다.
♤ 상전마을
여수시 화양면 옥적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옥적리는 대부분 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천이 흐르고 옥적저수지가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산전, 논골 등이 있는데 산전은 18 세기말의 순천 고돌산진 지도를 보면 곡화목에 있었던 네군데의 송전을 지금은 모두 산전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중에 화양면의 송전이 있던 곳이고 논골은 논이 많은 골짜기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상촌고개/ 상전고개/ 17번 2차선 포장도로
여수시 화양면 나진리(羅陣里) 웅동과 옥적리(玉笛里) 상전, 상촌을 잇는 2차선 군도가 지나며 차량 통행은 뜸한 편이다. 건너편 나무계단으로 올라선다.
- 비봉산을 왕복한 후 '곡화목장 둘레길'이라는 이정표가 있는 상전길 2차선 도로를 지나면 비봉산과 안양산을 연결하는 등로는 나름 정비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타조농장이 있는 나진재(옥천로)에 내려설 수 있다.
- 용문사갈림길 지나고, 웅동마을갈림길 지나고 상전길 임도로 내려서서 상촌고개 2차선 도로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진입한다.
♤ 옥적리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인 옥적리는 마상, 신기, 대옥, 소옥, 산전마을을 병합한 법정리 이름이자 신기와 소옥마을만을 칭하는 행정마을 이름이기도 한데 곡화목장이 있던 조선시대에 여러 마을의 목동들이 모여들어 말거리산이라 불렀다. 산자락이 남서쪽으로 길게 뻗쳐 큰 골과 작은골을 이루고 이 산의 모양이 옥피리를 닮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옥적이라 하였다 전해 온다. 비슷한 형상의 지형이었던 율촌면의 취적마을도 뒷산의 이름이 대통산으로 대나무통 모양으로 생긴 산의 모양에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으며 옥적마을의 유래와 함께 옥피리형 지세에 대한 풍수의 설명도 전해오는데 옥피리형 지세는 자손들이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신비한 힘을 가진 옥피리산의 동쪽 큰 골짜기 마을은 대옥이라 하고 서쪽의 작은골 마을을 소옥이라고 한다. 옥적리는 밀양박씨와 인동장씨 및 전주이씨 등이 처음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조선시대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옥적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옥, 소옥, 신기, 논골, 마상 기밀개를 병합하여 법정리인 옥적리가 되었다. 옥적리는 창무리와 사이에 있는 비봉산 자락에 형성된 마을이며 일제강점기에 신기마을 남쪽에 간척지가 조성되었으며 마상마을 서쪽으로는 포구가 있다.
♤ 나진리
여수시 화양면 면소재지로서 동쪽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산지와 평지로 되어 있는데 앞 바다에는 죽도가 위치한다. 자연마을로는 나지개, 소장, 응동 등이 있는데 나지개는 나진리의 본 마을로 지명은 바다의 깊이가 낮아서 물이 빠지면 배가 다닐 수 없는 개에 위치한다고 하여 낮은 개를 소리나는데로 쓰면서 나진개로 굳어졌다. 호구총수에도 나지포라고 하였으며 1990년대 초에 발행된 마을유래지에서는 나진이라 하여 비단 같이 아름다운 포구여서 이름 지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나진고개 마루에 인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상전고개~나진고개는 약 1시간 소요되며 199m봉(벤치), 219.2m봉을 지납니다.
- 나진마을(0.7km) 갈림길을 지나고, 석교마을 갈림길(219.2m봉)에서 나진재를 향해 가파르게 치고 내려선다.
눈이 내리는 바다건너 돌산도를 바라보는데요. 좌측의 소미산-대미산 무술목과 우측의 방답진 화태대교까지 한꺼번에 조망됩니다.
♤ 나진고개(옥천로)
나진리~서촌리 석교마을간 2차선 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제일타조농장 간판이 보인다. 우측으로 도로따라 조금 걸어 제일 타조
농장 간판이 보이는곳에서 좌측 계단길로 올라서면 생각보다 길이 잘 열려있어 잠시 편하게 걸어간다.
- 나진공동묘지 입구를 지나 3등분된 잘린 바위를 지나간다.
♤ 곡화목장(曲華牧場)
곡화목장은 말을 놓아 길렀던 조선시대의 목장으로 원래 백야곶목장이라고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곡화목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451년(세종 16)의 기록에 전라도 백야곶목장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전라도 지역에 목장이 집중적으로 세워졌던 1445년(세종 10)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수시 소호동 해안으로부터 화양면 이천리 오천마을까지 이어진 곡화목장의 경계를 구분 짓고 말이 달아나지 못하게 돌로 쌓은 분계성의 흔적이 화양면 곳곳에 남아 있다. 성을 쌓았던 사람들이 성벽에 새겼다는 흥양(현재의 고흥)과 보성 등의 글자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전라도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쌓은 성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한때 곡화목장에는 1027필의 말이 수용되어 있었고 목자는 446명이었다고 하는데 철 따라 목장을 이동하여 봄에는 통구미산, 여름에는 이영산, 가을에는 천마산, 겨울에는 서이산에서 군마를 길렀으며 밤에는 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산등성이 1Km에 걸쳐 등불을 켰다고 전해진다.
바삐 안양산 정상을 지나며 조망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습니다. 안양산만 목적으로 간게 아니기에 오르며내리며 전망은 봅니다만 좌우측 전망을 한꺼번에 살필 수 있는 장소련만...
좌틀하여 산패를 확인하고 곧바로 안양산을 지납니다.
♤ 안양산(安養山, 327.5m)/ 산불감시카메라, 폐헬기장/ 화산/ 화동리 진산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나진리·서촌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산 전체의 경사가 가파른 편이다. 무선산에서 이어지는 여수지맥이 안심산을 지나 통과하는 곳이며, 서촌천의 발원지에 해당된다. 산 서쪽 중턱에 안양암의 옛터가 있으며, 조선시대에 곡화목장이 있던 곳으로 산 아래 감목관아사(監牧官衙舍)가 있었다. 곡화목장은 소호동 바닷가로부터 오천동까지 곡화목장 분계성을 만들고 그 서쪽 화양반도를 목장으로 삼아 말을 놓아서 길렀다. 이 당시 곡화목장에서 길렀던 말은 1,027필이었으며, 목자는 446명이었다. 봄에는 통구미산, 여름에는 이영산, 가을에는 천마산, 겨울에는 서이산 등 계절에 따라 이목구미의 5개 산으로 목장을 이동하였다.
- 안양산 정상엔 이정표와 산불감시카메라가 서있다. 준.희님 팻말이 걸려있는 좌측 남동방향으로 안양산 정상을 내려선다. 조망은 꽝이다.
♤ 화양면 화동리(華東里)
화동리의 이름은 곡화목장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곡화의 ‘화(華)’와 동쪽의 ‘동(東)’을 합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으로, 이 마을의 옛 이름은 동편·댕핀·코캐 등으로 전해진다. 댕핀은 동편의 방언이고 코캐는 곡화(曲華)가 변한 말이다. 곡화는 조선조 초기부터 지금의 화양면 지역에 자리했던 곡화목장의 감목관이 거주했던 중심 마을이었기에 목장의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의 기록에는 화동이라는 이름은 없고 돌고개(乭古介)란 이름으로 나타나 있어 예전에는 돌고개가 마을이름으로 불렸던 모양이다. 돌고개는 화동리의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고인돌고개로, 느티나무·팽나무와 함께 큰 바위가 쉬어가기 좋게 놓여 있어서 여름철에는 마을을 오가던 사람들에게 시원한 쉼터를 제공해 주던 곳이다. 화동리 고인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조선조 곡화목장이 있던 시절에 감목관들의 치적을 기리는 글을 비석 대신 고인돌의 표면에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2기의 고인돌이 고갯마루에 남아 있는데 빙옥같이 투명하게 다스렸다는 빙옥기정(氷玉其政)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고갯마루 뒤편에 세워진 화양고등학교 학생을 비롯한 뒷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다. 동구 근처 고개에 이처럼 수십 기의 고인돌이 있었기에 돌고개란 이름이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관건물 뒤쪽으로 신축 기숙사건물이 눈에 들어오네요. 쾌적한 환경에서 먹고자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는 조건이 부럽습니다.
화양고 좌측으로 우측 도로따라 250m 내려가면 마트가 보입니다.
♤ 화동고개/ 여수화양고등학교/ 돌고개/ 고인돌고개
화동리에서 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화양고는 남녀공학으로 도농복합기숙형 농어촌특별전형 고등학교이다.
- 화양고에서 화동 고인돌, 화양고 버스정류장 뒤로 보이는 이동통신탑이 서있는 곳을 향하여 잡풀을 제끼며 둔덕을 올라, 이동통신탑을 지나고, 무덤이 있는 밭가에 놓여있는 106.9m 삼각점을 확인하고 지나간다.
여수지맥의 마루금은 사유지로 밭을 가로질러 올라서야 합니다.
- 나무계단으로 만든 등산로는 있는데 잡목과 가시넝굴에 묻혀 한발한발 헤치며 226.7m봉 약100m 전에 마루금에 접속한다.
♤ 고봉산 들머리 정자가 있는 2차선 도로
화양고 고인돌고개에서 출발하여 226.7m봉에서부터 279.6m봉을 거쳐 고봉산 입구 정자가 있는 도로에 도착할 때까지 마루금을 타고 두시간 가까이 소요되었습니다. 279.6m봉에서 내려서다 좌틀하여 임도를 따라 정자가 있는 고봉산 입구 육각정자가 서있는 고봉산등산로 입구로 내려섭니다. 이곳 역시 잡목과 명감나무 가시로 유명한 곳인데 휴대용 전지 가위가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하며 막힘없이 지났네요. 고봉산으로 오르는 정자고개에 승용차 한대가 서있는데 여수지맥 마지막구간을 하시는 분이실까요?^^
- 많은 선답자들이 길이 나빠 226.7m봉과 279.6m봉은 생략하고 화양고에서부터 도로를 따라 산전마을을 지나 육각정이 있는 고봉산 입구 도로까지 약2km를 우회하는 경우가 많다는 구간이다.
고개에 내려서니 돌산도 전경이 아주 가까이 보입니다.
♤ 돌산도
전남 여수시 돌산읍에 있는 섬으로 여수반도에서 남쪽으로 약 450미터 떨어져 있다. 백제 때는 돌산현에 통일신라 때는 여산현에 속했다가 고려초에 다시 돌산현이 되었고 1914년 여수군에 병합되어 두남면이 되었으며 그 뒤 1917년 두남면이 돌산면으로 개칭되었고 1980년에 돌산읍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른다. 섬의 이름은 여덟개의 큰 산이 있다는 뜻에서 산과 팔 및 대자를 합하여 돌산도라 했다고 전한다. 최고봉인 봉황산(460m)과 천왕산(385m), 대미산(359m), 금오산(323m), 천마산(271m) 등이 사방에 우뚝 솟아 있고 동쪽의 둔전리와 죽포리 일대에는 논밭으로 이용되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해안은 소규모의 만과 갑이 이어져 드나듦이 비교적 심하며 남동쪽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이고 서쪽해안은 약간의 갯벌이 펼쳐져 있다. 1984년과 2012년에 각각 개통된 돌산대교와 제2돌산대교로 인해서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여수 앞바다에 있는 돌산도의 아름다운 자연경치,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 월암산성, 방죽포·무슬포 해수욕장 등은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돌산대교와 오동도 인근을 일주하는 유람선과 금오도 및 마족항과 연결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 화양면 장수리(長水里)
봉화산 남쪽으로 자리한 장수리 일대는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며,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 물놀이에 적합한 장등해수욕장이 있다. 동쪽으로 안포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이목리와 접하며 마을 뒤쪽으로 봉화산이 솟아 있어 마을을 안고 있는 형국이다. 장수리는 ‘장척’과 ‘수문마을’의 앞 글자를 따서 ‘장수리’라 하였다. 장수리는 공정(公亭)·자매(自梅)·수문(水門)·장척(長尺)·장등(長燈)마을이 통합된 법정리이다. 각 마을의 이름 또한 유래가 있다. 수문마을은 옛 이름이 ‘수문동’이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를 ‘물 수(水)’ 자와 ‘문 문(門)’ 자의 한자를 풀이하여, 장수만 바다의 문이 이 마을에 있어 바닷물의 근원지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역시 한자를 풀이한 이름이다. 수문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 이름은 대부분 숨어 있다는 뜻의 우리말인 ‘숨은’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가까운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의 수문포(水門浦)[숨은개]와 소라면 가사리의 수문개[水門浦][숨은개]도 바다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고 숨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수문동마을도 바다에서 보면 마을 앞의 산등에 가려 마을이 보이지 않고 숨어 있다. 이에 따라 ‘등 속에 숨어 있는 마을’이란 뜻의 ‘숨은등’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그러나 한자 표기인 ‘수문(水門)’이라는 글자 때문에 뜻이 왜곡되었던 것이다. 수문마을 앞 어귀의 ‘날개’라는 모퉁이에는 동학농민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던 돌무덤이 남아서 여수 지역 동학의 흔적을 전해주고 있다.
바람이 세차고 눈발이 날리는 정상입니다. 회색 구름 아래로 바다에는 희뿌옇게 눈이 내리고 있어요.
여수시 돌산읍부터 고흥군 영남면까지 11개의 다리(일레븐 브릿지)가 모두 연결되면 2026년 여수세계섬박람회의 든든한 기반이 될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 전 세계 섬을 가진 국가들이 모여 '살아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을 주제로 세계 최초 2026여수섬박람회를 개최한다. 여수시는 섬박람회 개최를 통해, 미래 섬발전의 청사진을 마련하고 여수 제2의 도약기로 삼는다는 전략이다.
여수시 네개 섬(조발도, 낭도, 둔병도, 적금도)을 연결하는 화양~적금 간 해상교량이 2020년 2월 28일 개통되었습니다.
오늘 사진 중에 최우수작입니다. 순천만 건너 고흥의 진산 점암면 팔영산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네요.
고흥군 영남면 우천리와 여수를 잇는 77번 국도와 다리도 내려다 보입니다.
여수지맥의 끝 백야대교와 백야도의 모습이 보입니다. 뒤쪽으로는 개도(蓋島).... 우측으로는 화도가 보입니다.
- 고흥과 여수를 잇는 77번 국도가 내려다 보이고 금오도, 개도, 화도(꽃섬), 나로도에서 고흥 팔영산까지 사방으로 조망이 좋은 곳이다.
♤ 고봉산高峰山, 363.7m)/ 여수3등삼각점/ 2층 팔각정전망대
전남 여수시 화양면 장수리의 중앙에 솟아 있는 산으로 자세한 명칭유래는 알 수 없으나, 지명에서 나타나 있듯이 인근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산 전체의 경사가 가파른 육산이다. 고봉산에서 발원하는 화양천은 이 지역의 중요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으며, 이 물줄기는 화양면에서 가장 큰 수원지인 화동제(華東堤)를 이루어 화양면 서촌들의 수원이 되고 있다. 원포에서 화동으로 넘어가는 동안 산이 높기 때문에 하천과 지류가 발달하여 화동제, 원포제, 안정제 등 저수지가 발달하였다.
건너편 고흥군 봉래면 나로도의 해안가 마을도 보입니다.
고봉산에서 봉화산으로 가다가 서쪽이 환하게 트인 전망 좋은 언덕이 나옵니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래요.
숨이 막힐듯한 이 경치를 어찌해야 하오리잇까? 여수지맥의 마지막 부분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전경입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가 안됩니다. 물곤장 100대를 때렸다고 나오네요.
남해안 해안가 주변을 감제할 수 있는 봉우리마다 왜선의 출현을 먼저 포착하고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인간레이다로 봉수대를 세웠습니다.
백야대교로 향하는 여수지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보고 또 보고 다시 보아도 질리지 않고 외려 눈이 맑아지는 전경입니다.
봉수꾼의 후예 산림감시원 아저씨가 머무는 초소에서 커피 한잔 얻어마시고,
바다에 눈이 내리고 있어서 흐릿합니다만 가막만 안쪽으로 여수항이 바라다보입니다.
가막만 건너편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종횡무진 하였던 돌산도의 방답진선소가 있는 곳입니다. 디오션골프장 이스트홀도 내려다 보이고요. 그 옆으로 삼섬마을의 섬도 보입니다. 백야곶봉수대는 우측으로 여자만과 좌측으로 가막만의 섬들을 굽어볼 수 있는 감제고지입니다.
♤ 여수 봉화산(烽火山, 372.4m)/ 백야곶봉수대, 산불감시초소
백야곶 봉수대는 화양면 장수리와 안포리 사이에 있는 봉화산 정상에 위치한다. 봉수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축조 연대나 기능을 알 수 없다. 다만, 위치상으로 볼 때 동쪽으로는 돌산 방답진 봉수대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팔영산 봉수대와 응하여 서울 남산으로 전달했던 전술상의 요충지로 추정된다. 봉수는 변방 국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 수단이다. 적이 침입했을 때 현지에서 직접 전투를 담당한 군사적 고지(高地)이기도 하다. 백야곶 봉수대는 화양반도에서 백야도를 왕래하는 관문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우측으로 조망바위, 바로 아래 장등해수욕장과 힛도, 백야도 방향 조망하고 봉수대 우측으로 내려간다.
- 봉화대를 비롯해 여러 운동기구와 안내판이 산불감시용 무인카메라와 초소가함께 설치된 정상에서 각방향을 조망한후 봉화대 좌측 9시방향의 내리막길을 내려섭니다.
재머당고개에서 올라선 198.5m봉에서부터 선답자들이 혀를 내두르게 하는 지옥이 시작됩니다. 저는 휴대용 전지가위로 보이는 족족 명감나무를 토막치며 내려서니 한결 수월하였습니다.
♤ 재머당고개
정면의 마루금을 조망후 둘레에 낮은 돌담이 쌓여있는 묘터를 지나서 좌우측으로 굽어가는 임도에 도착하여 직진의 잡목지대를 내려가 좌우측으로 연결되는 비포장임도인 “재머당고개“를 통과한다. 잡목지대 오르막길을 올라 후방의 봉화산과 우측 아래의 원포 장등터널 방향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조망되는 지점을 지난후 가파른 잡목지대를 올라 아무런 표시와 특징이 없는 198.5m봉에 도착한다. 소나무와 잡목들이 청미래덩쿨과 함께 우거져 있어 진행하기가 쉽지 않은 지옥같은 지역이다.
-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자리한 지점에서 봉화산방향과 우측의 섬들을 비롯해 백야도 방향의 마루금을 함께 조망한후 잡목지대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가시넝쿨과 잡목들을 헤치며 골프장 절개지로 내려와 골프장 그린이 가깝게 위치한 도로를 횡단합니다.
- 봉화산에서 내려와 임도와 만나는 재머당고개에서 우측 마루금으로 내려간다. 안부사거리에서 임도따라 198.5m봉은 비켜서 가는 방법도 있다.
- 수레길 따라 걸어가다 임도를 가로질러 끝까지 걸어가니 길이 막혀 버린다. 이리저리 출구를 찾아보다 좌측으로 꺾어 내려서니 골프장이 나와 디오션 골프장 안으로 진입한다.
♤ 디오션 골프장(The Ocean Country Club)
장수만이 내려다보이는 화양면 안포리에 2012년 개장한 디오션CC는 이스트 9코스 웨스트 9코스로 총 18홀입니다. 절개지를 내려 CC관리도로를 지나 디따시 큰 방뎅이돌을 뛰어 넘어 직진하여 WEST 3번홀을 지납니다. 우측의 그린과 나란히 이어지는 임도를 이어가 통신사 기지국이 설치되어 있으며 좌측의 돌산도가 조망되는 3번홀에 도착합니다.
- 이 그림에서 좌측 부분에 골프장을 벗어나 내려서는 지맥길의 들머리가 있습니다. 등로가 뚜렸합니다. 띠지 하나 걸어두었습니다.
♤ 전남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
안포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안정·원포·세포(細浦)마을을 합병하여 지어진 법정리 이름이지만, 안정리만을 이르기도 한다. 안정리의 순 우리말 이름은 ‘안징이’인데, ‘안’은 사물의 안쪽이고 ‘징이’는 지역을 뜻하는 접미사로 ‘안징이’는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 지역의 마을이란 뜻이다. 여천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집』에 의하면 ‘안정’을 한자로 풀이하여 ‘편안하고 고요한 마을이어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였다. 이 중에 가장 남쪽의 마을인 세포마을은 산과 산 사이의 길고 가늘게 갈라진 포구의 모양 때문에 ‘가는개’라고 한 것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지금은 간척 공사로 ‘가는개’가 있던 곳이 논으로 변하였지만 안일초등학교 앞으로 보이는 들을 바라보면 길고 가는 포구가 한눈에 들어와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이 밖에도 세포마을에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로 해서 매일 세 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하나의 육지로 합쳐지는 ‘삼섬’마을, 새터에 들어선 마을 ‘새텃몰’이 있으며, 원포와 세포리 사이에 있는 ‘석개’마을은 세포나 원포 마을의 배들이 폭풍우를 피하던 포구로 배들이 폭풍우를 피한다는 뜻의 ‘석’과 해변·포구란 뜻인 ‘개’가 합쳐진 우리말 이름으로 대피항(待避港)이라는 뜻이다. ‘석’이라는 말이 최근에는 많이 사용되어지지 않아 돌 석(石)으로 해석하여 해안에 돌이 많아서 지어진 이름으로 생각하기 쉬운 땅이름이다.
- 골프장 갈림길(우측 산길진입) 남동방향으로 골프장길을 따라오다 골프장길과 헤어져 우측 거친 숲으로 들어서니 다시 등로가 열리며 돌담으로 둘러쳐진 묘지도 지나고 시야가 터진곳으로 여수지맥의 종점인 백야대교와 백호산이 보인다.
- 정면 백야도와 진행하게될 마루금이 조망되는 지점을 지나서 양파를 재배하는 밭의 절개지 상단부에 도착한다. 정면 조망후 양파밭 울타리를 따라 양파 밭으로 연결되는 시멘트 도로와 합류하여 내림길을 내려가 좌측의 22번도로와 우측의 77번도로가 합류되는 교차로의 지하통로를 통과해야 한다.
세포마을입니다.
세포교회 뒤로 요지막산으로 오르며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뒷산 봉수대와 앞산 골프장도 보이고, 우측으로 보이는 절개지위 묘지로 내려와 22번도로와 77번국도가 만나는 지하도를 횡단해서 왼쪽의 언덕 위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서서 이쪽으로 오는 지맥길이 보입니다.
세포마을로 들어서지 않고 77번 도로를 따르다가 좌측 세포교회가 보이는 곳에서 곧바로 세포교회에서 올라오는 등로로 합류했기에 세포마을에 있는 식당과 편의점에는 들르지 못했습니다. 음료수도 충분하고 먹거리도 부족하지 않았답니다.
♤ 세포삼거리/ 77번 국도
우측 3시방향의 새터물길을 진행하여 마을을 통과후 세포교회 앞 정류장에 도착한다. 도로로 인해 주변 지형이 바뀌어 지하차도로를 통과하여 도로를 따르면 세포마을 편의점, 중앙식당이 나온다. 세포삼거리를 지나 식당 앞에서 우측으로 올라 세포교회 방향으로 간다.
요지막산으로 오르면서도 방해되는 찔레, 줄딸기가시, 명감나무를 밑둥까지 잘라서 토막을 치며 진행했습니다.
♤ 요지막산(79.3m)/ 여수4등삼각점
세포교회 뒤로 잡목과 억새를 뚫고 올라서면 준희님 산패가 있다. 영진 5만지도에는 72.5m로 표기되어 있다.
삼각점(여수421 2002재설)을 확인후 좌향의 완만한 잡목지대를 내려가 정면이 탁트인 억새군락지를 내려섭니다.
요지막산을 내려서며 가야할 방향입니다. 아래 돌산개마을로 내려서서 좌측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가면 끝입니다. 좌측으로 내려가면 삼섬마을이고 산너머 바닷가에는 힛도마을이 있습니다.
- 좌우측으로 임도가 연결되며 넓게 조성된 평장 묘터와 우측으로 김녕김씨 봉안당이 설치된 79.3m봉에 도착하여 지맥길은 좌측 내리막길로 우회하여 진행합니다.
돌산개마을, 우측으로 백야마을과 정면의 백야산이 조망되는 넓은 개활지를 지납니다.
삼섬마을 입구를 지납니다.
삼섬교차로 입니다. 지맥은 앞에 보이는 마지막 봉우리 우측으로 가서 끝나고요. 도로를 따라 다시 이곳으로 나와 저기 보이는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려야 합니다.
- 요지막산에서 77번 도로로 내려오니 백야도와 백야대교가 보이는 돌산개정류소를 지나고 삼섬교차로에서 좌측으로 임도따라 올라서니 바로 앞에 이동통신사기지국철탑이 있고 길이 잘 나있다.
- 여수지맥 마지막 봉인 79.3m봉을 지나고 창원황씨 가족묘지로 내려와 돌산개마을과 삼섬마을 입구를 지나고 여기 삼섬마을교차로에서 좌측에 보이는 정류소를 지나 임도로 들어서서 묘지를 통해 얕은 산마루를 넘어서면 흑염소농장으로 내려서게 됩니다.
♤ 힛도
백야도와 화양반도 사이 좁은 해협을 원래 힛도라고 했으나 지금은 백야수도라고 부르고, 화양면의 도건너마을을 힛도라고 부르고 있다. 2005년 4월 화양면 안포리와 화정면 백야리를 연결하는 백야대교가 완공되었다.
힛도는 원래 백야도[화정면 백야리]와 화양반도 사이 좁은 해협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흰섬’이라고도 불렸는데 해양 지명 중 도진(渡津)[나루터를 중심으로 발달한 취락]의 대표적인 예이다. ‘힛’은 백야도가 하얗게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접두사이며, ‘도’는 명량(鳴梁)이나 노량(露梁)의 ‘량(梁)’과 같이 좁은 해협을 말한다. 여수 지역에서는 남면의 금오도와 대두라도[남면 두라리] 사이를 ‘한도’라고 하고, 안도[남면 안도리]와 연도[남면 연도리] 사이를 ‘신갱이도’라고 부른다. 현재 힛도는 백야도와 화양면 사이 해협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라 해협 건너 화양면 안포리 세포마을의 자연마을을 이른다. 힛도는 원래 힛도 건넛마을이라는 뜻으로 ‘도건너마을’이라고 불렀다. 힛도는 해양 지명이 육지 지명으로 변한 대표적인 예로서, 비슷한 사례가 힛도 뒤에 있는 ‘삼섬’이라는 지명이다.
♤ 화양면 안포리 힛도마을
‘힛도’마을은 화양반도의 최남단 마을로서 여수반도의 ‘땅끝마을’이기도 하다. 힛도는 백야도의 우리말 이름인 ‘희섬(흰섬)’에 작은 해협을 뜻하는 ‘도’가 합쳐진 이름으로 ‘희섬’ 앞의 ‘도’가 있는 곳에 마을이 있기에 불려진 마을 이름이다.
아래로 힛도마을이 보입니다.
가막만 건너편에는 방답진선소 우측으로 돌산읍에서 화태도를 연결하는 화태대교가 보입니다. 그 뒤쪽이 금오산의 향일암입니다.
가막만 건너편 돌산읍 방답진선소는 거북선을 건조하던 선소입니다. 방답진선소에는 첨병돌격대가 상주하여 왜선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출항하는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곳입니다.
정면으로 백야대교 건너편 화정면사무소가 있는 백야도 백야항이 보입니다. 앞에 보이는 파란색지붕이 흑염소 농장입니다.
- 좌측 멀리 화태대교가 보이는 돌산도를 조망하며, 우측에 있는 흑염소농장을 농장을 통과하여 좌측 10시 방향으로 내려서는 임도를 버리고 마루금으로 직진하여 개활지를 지나 완만한 내림길을 내려가 백야대교가 가깝게 위치한 절개지 상단부에 도착해 좌향의 배수관로를 따라 내려가 힛도중앙교회가 자리한 힛도마을 도로에 도착합니다.
백야대교 직전에 다달아 절개지 위에서 백야대교를 바라봅니다. 아래로 절개지를 내려서기가 난감하군요. 낙석방지 울타리도 견고하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 백야도 백호산(백호산, 283.5m)
여수지맥은 끝이났지만 백야대교를 건너서면 화백 삼거리이다. 산행내내 눈에 보이던 백호산을 들르지 않으면 아쉬움이 클 것 같다면 이곳에서 좌측으로 도로따라 백호산으로 향한다. 백호산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편편한 바위에 제1봉(281m봉) 정상판이 서있고 남동쪽으로 진행하여 2봉(286m봉)으로 향한다. 세개의 봉우리로 되어있는 백호산 정상은 삼각점이 놓여있는 283.5m봉이다. 최고의 조망을 제공한다. 처음에 좋던 길은 사라지고 길없는 잡목사이로 힘겹게 백호산을 내려선다.
낙석방지 울타리를 내려다보며 좌측으로 진행하니 수로가 나오고 수로를 넘어 내려서니 힛도마을 입구 중앙교회입니다.
힛도중앙교회에서 90m 걸어 다시 백야대교로 나옵니다. 백야대교와 힛도마을입구인 안포교차로에서 여수지맥을 종료합니다. 이제 우측으로 도로를 따라 여수로 나가는 28번 버스를 타기 위해 좀전에 지나온 삼섬교차로 버스정류소로 나갑니다.
- 힛도마을 백야대교 아래에서 여수지맥을 종료하고 백야도에서 여수로 운행하는 28번 시내버스를 이용하기 위해 우측 도로를 따라 지나왔던 삼섬교차로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삼섬교차로에 있는 마을정류장에서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여수시로 나옵니다.
8:2로 나눠 여수지맥을 2구간으로 졸업했습니다.
해발고도는 낮지만 거북선이 항해하던 좌측 순천만과 우측 가막만을 바라보며 진행하는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여수지맥 1구간 82.4km, 2구간 22.1km 도합 104.5km(어프로치 4.2km포함)로 졸업합니다.^^ 감사합니다.
여수지맥이 바다에 가라앉은 곳에 솟아 있는 백야도
입력 2020.10.06 09:52 한적하고 산행 난이도 낮아 이미지 크게보기 여수지맥은 호남정맥을 따라 미사치를 지나 백운산 방향으로 2.2km 정도 진행하다가 순천시 서면·황전면·광양시 봉강면의 3면 경계봉(820m)에서 호남정맥과 이별해 남쪽으로 가지를 친 산줄기를 의미한다. 길이는 분기점에서 여수반도의 끝단인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 힛도마을까지 약 84km에 이른다. 지맥 상에서 눈에 띄는 산들로는 계족산·용계산·봉화산·웅방산·옥녀봉·앵무산·국사봉·수암산·황새봉·비봉산·안심산·안양산·고봉산·봉화산 등이 있다. 지맥 상에 그다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산은 없다. 여수를 찾는 산꾼들은 보통 금오도 비렁길이나 진달래 명산으로 유명한 영취산을 들르거나 돌산지맥을 종주하기에 여수지맥은 찾는 이가 적어 한적한 편이다. 하지만 여수지맥은 한반도에서 가장 길게 이어지는 산줄기의 마지막 끝이 되는 구간이라는 상징성이 있어 종주 산꾼들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 백두대간과 정맥을 따라 산줄기 한붓그리기를 이어 볼 때 남한 향로봉부터 여수지맥까지는 총 1,176.3km(함경도 끝 연두봉에서는 2,394km)로, 이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산줄기로 여겨진다. 이미지 크게보기 보통 여수지맥 종주는 준족의 경우 4구간, 여유를 가질 경우에는 6구간 이상으로 쪼개어 진행한다. 4구간으로 진행할 경우에 1구간은 황전터널 입구~미사치~여수지맥 분기점~계족산~용계산~구상치~봉화산~웅방산~2번국도, 2구간은 2번국도~옥녀봉~검단산성~곡고산~앵무산~국사봉~수암산~황새봉~복촌마을, 3구간은 북촌마을~마산마을~비봉산~4차선 도로(안산동), 4구간은 4차선 도로(안산동)~안심산~사방산~비봉산~안양산~고봉산~봉화산~국지도~힛도마을로 진행한다. 6구간으로 진행할 경우에 1구간은 깃대봉~계족산~용계산~봉화산에서 끊고, 2구간은 웅방산~옥녀봉~천황산, 3구간은 곡고산~앵무산~국사봉~수암산, 4구간은 황새봉~비봉산~무선산, 5구간은 안심산~사방산~비봉산~안양산, 6구간은 고봉산~봉화산~힛도마을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산행 난이도는 다른 정맥, 지맥에 비해 낮은 편이다. 바다로 가라앉는 지맥답게 지맥 초입 구간인 계족산(723m)과 용계산(626m)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지맥의 해발고도는 200~300m를 넘나드는 수준이다. 초반 구간만 넘기면 마을길이 자주 나타나 탈출하기도 쉽다. 또한 거리상으로 수도권이나 강원도 산꾼들이 접근하기에 먼 편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대중교통 편으로 접근하기 용이하다. 여수지맥 후반부는 여수종합버스터미널, 여수지맥 초반부는 순천종합버스터미널이 근접해 있다. 실제로 종주를 위해 이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김포공항에서 여수공항까지 운행하는 비행기편도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모든 정맥·지맥 종주가 그렇듯 여수지맥 역시 독도에 유의해야 한다. 일부 기점에는 선답자들의 표지기나 등산로 안내판이 잘 마련돼 있으나, 전반적으로 사람의 흔적이 적어 길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지맥상의 무명봉들은 거의 등산로가 없는 수준이라 잡목을 헤치고 올라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이 모든 고생을 마무리하고 지맥 끝에 내려서면 아름다운 섬들이 동동 떠 있는 여수밤바다가 펼쳐지며 그동안 흘린 땀과 노력을 한껏 보상해 준다. |
첫댓글 와! 눈내리는 바닷길.. 지맥 종착점 백야대교로 내려서기가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백야대교 맞은편 백호산에서 본 백야도 모습은 한폭의 그림같습니다.
눈내리는 좋은 날에 남해의 정취에 듬뿍빠지셨으니 여한이 없을 것 같네요.~
좀처럼 보기힘든 장관을 함께 즐깁니다.
여수지맥 졸업을 축하드려요.!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장님!^^
창무고개에 내려 아직 어둑한 길을 따라 옻닭집을 찾아가는데 댓바람이 몹시 추웠습니다.^^
비봉산에 오르니 눈발도 조금씩 날리고요.
흐리다고 했지만 바람이 10m/s로 분다니 경관이 전혀 없진 않겠지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졸업했으니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화원지맥에 들어서야 하는데 25~26일에 비가 잡혀있어서요.
그리고 원샷원킬로 끝내지 못할 바에야 이번엔 5대5로 나눠,,,,
1구간은 교통이 좋은 황산면에서 끊을려고 합니다.
해남은 심야버스가 없어 부득불 광주로 가서 찜질방에 묵고 첫차로 해남에 들어가야 할까봅니다.
해남에서 자경고개로 택시로 가면 8시쯤은 출발하겠죠?
부지런히 가면 역마산에서 주성분맥(산이분맥)분기점 지나 용반이나 삼포마을로 내려설려나요.
거기서 택시로 나와 해남찜질방을 이용하고, 다음날 이어서 황산면소재지까지 갔으면 싶습니다.
2구간은 황산면소재지에서 일성산 지나 효심사입구에서 끊고 문내면(우수영)으로 나와서 숙박하고,
다음날 새벽 일찍 붙어 마지막 구간 21.6km를 마무리 하려고 계획을 세워보았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화원지맥 하신다는데 저는 거리가 멀어 팀산행 계획하고 있는데 코로나19로 영산기맥도 마무리 못하고 있습니다. 먼거리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참고 하십시요. 해남터미널에서 07시20분에 519번(해남~조운) 타시고 용심(15분 소요 예상)에서 하차하여 택시 진입가능한 바람재까지(1.8Km) 이동하면 8시경 산행 가능할것 같습니다
레드벅선배님 감사합니다.^^
영산기맥 휴대용 전지 가위 꼭 추천드리고 싶네요.
싹둑싹둑 자르고 가니 제 아무리 명감나무도 무서울게 없습니다.
용심에서 하차해서 바람재까지 도보로 1.8km를 걸으라는 거죠, 저는 터미널에서 1만원 이내면 바람재까지 택시를 이용하려고 했거든요.
용심에서 화원지맥 분기점 근처 차량이 진입가능한 거리가 1.8km 입니다. 도보로 20분 예상합니다
서울에서 여수쪽은 그나마 교통이 나을듯합니다
항상 홀로 산행 외로워보이기도 하지만
더 멋져보입니다..
퐁갑장님 멋진 산행 응원합니다
항상 안전하고 건강한 산행되세요..
온갖 자연이 함께하는데 외로울 리가 있나요.
청계천따라 걸어서 출근 중이라 손가락 내놓기가 어렵네요. 감사합니다.^^
우와~~ 역시 바닷가 끼고 있으니 경치는 끝내줍니다.
퐁박사님 말대로 큰 부담 안갖고 사진 보고 글은 대충 건너뛰는 식으로 읽으며 산행기 감상합니다.
역시 이런 길은 걸어도 걸어도 행복할 듯 합니다.
물론 좋지 않은 길은 생략되어 힘든 과정도 있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만 ㅋㅋ
그래도 이기 어딥니까?
너무도 좋네요
덕분에 고맙습니다. 앉아서 이쁜 경치 주시는 대로 쪽쪽 빨아마시는 것 같아 조금은 미안키도 합니다.
이번 주말도 머나먼 설악으로 올라갈거 같습니다.
세상사 마음먹은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지만 또 한편으론
가만히 있어도 갈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기기 마련인가 봅니다. ㅎㅎ
저두 시원한 사진 많이 담아오께요
주말 잘 보내십시오 ^^
부케님!
크게 걱정 안합니다.
어렵고 위험한 길에서 모험은 하지않을 분이라서....
기대하겠습니다.^^
여수지맥 마무리 뜨거운 박수를 드림니다 2년전 진행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퐁라라님의 산행기를 읽으며 안면홍조(부끄부끄)가 ~그 많은 자료를 준비하고
자료를 음미하며 진행하시는군요 저는 대간,정맥등 목적산행에 늦게 입문하다보니
70전에 지맥까지 마친다는 계획이 모든것에 우선이었거든요 !
님을 따라 하지는 못하더라도 남은지맥을 진행함에 참고토록 하겠습니다
악명 높은 화원지맥을 계획하신다니 그 만능가위가 위력을 발휘 하것네요
기억이 가물한 화원지맥 후기가 기대됩니다 .
묵언선배님!
열심히 준비하여 포스팅한 보람도 없이 한편으론,
못난 사람의 시기심을 이끌지 않을까 걱정했던게 사실입니다.
겸손하게 다독여주는 말씀에 모든 걱정이 눈녹듯 사라졌습니다.
더 잘 해야겠다는 용기도 얻을 수 있고요.
화원지맥에 가서도 휴대용 전지가위가 큰 도움이 되리라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퐁라라님 반갑습니다
여수지맥 졸업 축하합니다
이미 고인되신 "조은산" 님
그리고 '조진대고문' 부처
無心이 님과 여수지맥을 걸었던
추억이 떠 올라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안전한 산행길 이어가시길 기원드립니다
아, 그러셨군요.^^
고인이 되신 조은산님 후기는 접했는데 미처 누구와 동행했는지는 몰랐습니다.
힛도에 대해서 무슨 말인지 궁금해 하셨길래 좀더 신경써서 찾아보았거든요.
제가 괜히 그리움의 눈물샘만 자극해 드린건 아닌지요.
청계천변에 봄기운을 안고 산책나오신 분들이 많으시네요.
계백대선배님도 그리움을 새봄의 정서로 녹여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 많고많은 섬들중에 여수주변에 섬들이 이리 아름다운줄 몰랏네요.
청명한 날씨의 도음도 있었겠지만 풍경을잡아내는 기술이 전문작가 수준입니다.
머쪄요. 너무멋짐니다.
여수지맥 졸업 축하드림니다.
이번주에 화원에 드신다고요.
우리도 27~28일에 화원에들려고 날을 잡았는데 비소식이 있네요.
부뜰이운영자님!
날씨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는데요. 사실은 제가 택일을 잘한거 아닐까요?^^ㅎㅎ
사진을 신경써서 찍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나가다 후딱 찍고 돌아서서 가고,,,
어제 오늘 화원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먼저 휴가를 간 동료가 있어서 못 내려갔습니다.
저도 비가와서 3월 초로 갈려고 합니다. 3~5일 될걸 같은데요.
화원지맥 공부는 다 해두었고, 어제부터는 수도지맥 공부에 들어갔습니다.^^
수도지맥 길이 너무 좋은데요. 시코봉, 단지봉 등등 먼말인가 했는데 알아가니 재미있네요.^^
8:2로 나누어 마무리 하신 여수지맥 축하드립니다.
호남 줄기의 억샌 지맥길들을 긴 줄기 위주로 하나하나
섭렵해 나가십니다. ^^
산줄기 곳곳에 지명과 유래 등을 소개 하시며 진행하시니
후답하시는 분들 도움이 많이 될듯 합니다.
요즘 먹고 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댓글 달기도
만만치 않네요..
읽지도 못하고 댓글 달수도 없고 하다보니 댓글이 자꾸
늦어 집니다. ^^;;
벌써 다음구간 갈 준비도 마치신듯 하네요..
남도에 까칠한 무명봉과 산길들이 많으니 조심히 진행
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류대장님!
댓글이 늦은게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오셔야할 분들 중에 게으름을 피우시는 분이 계시네요.ㅋㅋ~
화원을 다녀오면 한숨 돌릴것 같은데 기럭지 순서로 지맥을 잡아놔서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서두르고 싶지는 않고요.
기분 내키면 한달에 세번도 불사하겠습니다.^^
지맥 다니시랴,
생업 이어가시랴,
안주인마님 심기 보좌하랴...
바쁘신 생활인건 안봐도 비디오네요.^^ 감사합니다.
여수지맥 완주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잘보고 따라가겠습니다 화이팅입니다~~~~
수장산 오름길에 보니 상당히 두꺼운 나무도 절단되어 있었습니다.
휴대용 절단기 어디 제품 쓰시죠?^^
화원 진행하고 있는데 날씨가 영~
세르파선배님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퐁라라 과수원 절단기이고 수장산 이후 어두워서 알바요 어두울때 간 것이 패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