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강변의 한 지명에 이지함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가 있었다.
한강을 따라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선 서울 마포구에는 아직도 토정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다.
마포대교 입구에서 상수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토정로'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토정 이지함이 살았던 집터>도 있다. 이지함은 이곳 마포 한강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지대가 낮고 물이 괴는 쓸모없는 땅에 가난한 백성들을 모아 흙을 메우고 집을 지은 것이다.
'흙으로 지은 정자', '토정(土亭)'이다."
토정 이지함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학자이면서도 기인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본관은 한산이고 호는 수산, 토정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있어서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종류의 서적을 섭렵하였다.서경덕의 문하에 입문하여 서경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지함이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 해박한 것은 이때 서경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정치에 입문을 하게 된다.이때부터 그의 인생의 생각을 몸소 실천하는 시기가 될 수 있다 하겠다.
이지함 선생은 정치에 입문한 후부터 거의 대부분은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지냈다고 할 수 있다.
이때에 생긴 호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토정이었다.
관내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기에 평생을 바쳤으며 또한 백성들 뿐 아니라 길거리의 걸인들에게도
구휼의 손길을 내밀었다. 학문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시대에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서로 다른 업을 상호 보충하는 단계까지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1578년 7월. 충남 아산현 관아.
이 고을의 백성들이 뛰쳐나와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바로 이 고을 현감 토정 이지함의 죽음때문이었다.
부임한 지 3개월 밖에 되지않은 고을 현감의 죽음.그러나 백성들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피 울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석달 남짓 짧은 기간 동안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
그가 바로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다.
토정 이지함(李之函.1517-1578)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토정비결(土亭秘訣)>이다.
<토정비결>은 한 해의 운수를 점치는 것으로 그 저자가 이지함으로 널리 알려져 와서,이지함 하면 미래를 점치고
예언하는 기이한 인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지함이 죽은 후 고을 백성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이지함은 더 없이 존경하는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지함은 이상한 행동들로 종종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부러 관인들의 앞길을 막고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행동보다 더 기이한 것은 그의 행색이었다.
그는 나막신을 신고, 머리에는 무쇠솥을 뒤집어쓰고
다녔다.이지함은 무쇠솥을 마치 갓처럼 머리에 쓰고 다닌 사람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지함은 전국 유람을 좋아해서 다니다가 어디서든
밥을 해먹기 좋도록 머리에 솥을 이고 다닌 것이라
한다.또 당시 관리들의 횡포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해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나막신을 신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성시)에 나오면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 <선조수정실록>
이지함의 갖가지 기이한 행동은 <실록>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 <선조수정실록>
기이한 풍모만큼이나 이지함은 사는 모습도 남달랐다.스스로 척박한 땅에 들어와 보잘 것 없는 흙집을 하나 짓고
살았던 것이다.1549년. 지함의 나이 33세 어느날 이지함은 형을 찾아와 다급히 말했다.
"긴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아내의 가문에 큰 화가 미칠 것 같습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큰 화가 저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지함은 사가에 닥친 불긴한 기운을 예감하고가족들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날밤 지함은 식솔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음날 지함의 예언은 현실로 나타났다.'이홍난의 고변'이라고 알려진 이 역모사건에
장인은 끌려가 무고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훗날 이지함의 행적을 모아 후학들이 남긴 <토정유고>에는 이지함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기록까지 나와 있다.
1576년 지함은 제자들을 만나 15년 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을 했다.
"15년 후에 피가 천리를 흐를 것이다."
"15년 안에 옛날 성현들의 글을 많이 읽고,임금에게 덕을 권장하여, 난리가 사라지고 앙화가 없어지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에 대해 전혀 뜻밖의 기록이 있다.
<북학의(北學議)>.조선후기 실학사상을 담은 박제가의 대표적인 저서다.
청의 선진문물 수용과 상공업 진흥을 주장했던 박제가의 그 책에 토정 이지함의 이름이 등장한다.
"토정 이지함이 일찌기 외국상선 수 척과 통상하고자 했다."
조선후기 백과사전격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저자 이규경은
이지함의 선구적인 면모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이지함이 포천현감에 재직 당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왕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육지와 바다의 자원을 개발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돕자는 것이었다.
"산과 들에 버려져 있는 은(銀)은 무엇이 아까워서 주조를 못하게 하며 옥(玉)은 무엇이 아까워서 채굴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바닷 속에 무궁무진한 고기(魚)는 무엇이 아까워서 잡지 못하게 하며 갯벌에 무궁무진한
소금(鹽)은 무엇이 아까워서 굽지 못하게 하십니까?"
"육지와 바다는 온갖 재물을 간수해 둔 창고입니다.이것은 눈에 훤히 보이는 실물이니
이것을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고 나라가 다스려진 경우는 없습니다.만약 이 자원의 창고를 열 수만 있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지함은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한다.
"전라도 만경현에 고기잡이 할 수 있는 섬이 있고,황해도 풍천부에 소금을 구울 수 있는 섬이 있고,
이 섬들은 국가나 개인에게 소속된 적이 없다고 하니,포천현에 임시로 빌려주시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겠습니다.
이것들을 팔아 곡식을 마련한다면 2~3년 안에 몇 천 섬의 곡식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자원개발을 하고,이 자원들을 통상에 이용하자는 이지함의 주장은 농업 이외의 산업을 천시하면서
그 이익을 독점했던 지배층에게는 경악할만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땅과 바다를 백성들과 공유한다는 큰 원칙을 세운다.
"땅과 바다의 모든 자원들을 백성들과 공유한다.(山林川澤與民共之)"
그 누구든 먼저 개발하면 그것은 생산자의 몫이었다.하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이었고,
자원개발의 실질적 이득은 모두 소수 힘있는 권력층의 것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생산을 해내면 거기에 갖가지 이유와 핑계를 붙여 관리들이 착취했다.
이 때문에 자원개발은 적극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금이다.
당시 막대한 이윤을 냈던 소금도 이런 방식으로 대부분 지도층에게 이윤이 넘어갔다.
현대의 사람들은 토정비결로 인하여 이지함 선생이 무슨 큰 역술인으로 알고 있지만
역술인이라기 보다는 정치인이라고 해야지 맞다.
이지함이 현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계기는 토정비결이라는 저서다.
토정비결은 이지함 선생이 역학과 천문에 밝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찾아와 한 해의 운세를 알려달라고
사정을 하여서 이지함이 저술을 한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지함의 이름만을
택한 저서라는 설도 있다. 자신보다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며 자신의 위치에 자만하지 않고
겸손함과 항상 탐구하고 노력하는 자세야말로 지금까지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지함은 이처럼 주먹구구식으로 관리되고 소수 지배층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자원들을
국가가 나서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통상에도 이용하자는 선구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조선시대 보수적 성리학자였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조차
이지함의 이런 선구적 면모에 대해 감탄과 존경을 전했다.
"내가 세상에 늦게 태어나 토정의 문하에서 배우지는 못했으나 선배들에게 그 풍요와 명성을 듣고서는
우러러 공경하며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스미스.
그는 국민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 먼저 나라의 부를 키워야 한다는 이른바 <국부론>을 주장한 학자다.
그런데 아담스미스보다 200년 앞서서 조선의 토정 이지함은 이 같은 주장을 했다.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선 해외통상과 자원개발에 국가경제정책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분과 신분질서가 우선시 되던 조선사회에서
그는 어떻게 이처럼 선진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었을까?
충남 보령 청리동.
지금은 물에 잠긴 이곳이 이지함이 태어난 곳이다.이지함은 사대부 명문가인 한산 이씨 가문에 태어났다.
화암서원.
이지함이 죽은 지 100년 지나 1686년 숙종이 사액을 내릴 정도로 한산 이씨 가문은 그 명망이 높다.
이지함은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의 6대손이며 이지함의 조카 이산해는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명망있는 사대부 출신의 이지함은, 그러나 전혀 뜻밖의 길을 걷는다.
그가 집을 떠나 주로 활동했던 곳은, 바로 상인들과 천민들이 사는 저자거리였다.
이곳에서 이지함은 사업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배우며 몸소 장사의 길을 나선다.
양반이 저자 거리에 나서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함은 양반이라는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상인들 틈에 끼여 물건을 팔았다.
"몸소 장사를 하고 생업을 경영하여 2~3년 만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다."
- <토정유고>
이렇게 장사에 뛰어든 이지함은 뛰어난 상인이었다.수완이 좋아 장사를 나설 때마다 매번 많은 이윤을 남겼다고
기록은 전한다. 신분 구별이 엄격한 조선사회에서 상인을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그리고 이렇게 천한 일은 양반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하고 천한 것은 길이 달라서 서로 섞일 수도 없고 뒤섞여서는 안 되는 것이 명백하다." - <성종실록>
이런 상황에서도 이지함은 배를 타고 무인도까지 들어가 장사를 했다.박을 심어 바가지를 만들었다.
"섬에 들어가서 박을 심어 익은 박 수만 개를 수확했다.바가지를 만들어 팔면 곡식이 몇 천섬이나 생겼다."
- <토정유고>
그러나 지함이 장사를 했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헐벗고 굶주리던 백성이 넘쳐나는 시대,
지함은 자신이 번 돈을 모두 곡식으로 바꿨고 이 곡식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모두 나눠준다.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다가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준 다음 옷자락을 털로 떠나곤 했다."
- <토정유고>
그가 장사를 하고 사업을 일으킨 모든 이유가 가난한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했던 것이다.
토정이 살았던 16세기 중반 백성들의 생활고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조선초기의 국가 토지제도는 과전법 -> 직전법 -> 관수관급제로 거듭 바뀌어 가며국가 통제력이 약해지고 무너지고
그 틈을 타서 양반들은 마구 토지를 사들였고 농민들은 소작농 신세로 내몰렸다.
농민들의 땅을 강탈하는데는 왕실도 앞장섰다.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왕실 소유 토지를 늘려나갔다.땅을 잃은 농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지주들의 땅을 붙여 겨우 제 손에 들어오는 수확으로 입에 풀칠을 하기도 힘겨웠다.
굶주림과 학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도적이 되었고이 도적떼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명종 대 '임꺽정의 난'이 그 대표적이다.
가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했던 이지함은 농사 지을 땅에만 의지했던 조선사회에
상품을 유통시켜 이윤을 남기는 상업에 눈을 돌렸다.
"농촌경제에만 한정되지 말고상업, 수공업, 유통경제 황성화를 통한 전반적인 국가경제의 부를 창출하고,
그 창출된 부의 혜택이 백성들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조선사회를 이지함은 구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몸소 나서고 그런 분위기 만들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이지함은 상업유통을 하면서 찾아갔던 곳은 화담 서경덕의 문하였다.
서경덕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문의 수용을 견지하는 개방적인 학풍의 지식인 그룹이었다.
이것은 서경덕과 그 문하들이 개성 출신이라는 것도 연관이 되는데
개성지역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통해 일찌기 상업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지함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농업중심의 조선사회에 취약성을 보완하는 장치로 상업의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된다.
토정 이지함의 무덤이 충남 보령시 주교면에 있다.
이지함의 고향에는 아직도 '지함재'라는 고개길이 있다.상담을 했고 토정의 조언에 큰 힘을 얻어가곤 했다.
"토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점), 율려(음악), 산수, 소리에 능했다.
관상, 신방과 비결에 통하지 않았던 분야가 없었다."
- <토정유고>
책 제목 <토정비결>도 이지함의 호에서 따온 것으로, 이지함의 저서임을 가장 강하게 뒷받침한다.
이 책의 특징은 70% 이상이 행운의 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토정비결>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희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토정비결>은 어떻게든 희망을 주기 위한 역술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정비결>의 운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온 걸까?
한 역술인을 찾았다.<토정비결>을 보기전에 먼저 사주로 운세를 보았다.
"주역이란 사주로 보니까, 손재수가 나와 있네요.사실은 금년에 투자하는 게 위험합니다.
금년은 투자를 자제하고 현상유지, 복지부동하는 게 낫습니다."
- 김찬동 역술인
그렇다면 <토정비결> 운세는 어떻게 나올까?
"길함은 있고 흉함은 없다.재수대통이다 해서 재물관계에 크게 형통한다, 큰 돈을 만진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금년도 <토정비결>을 보니까 다 좋고 뭘 해도 잘 된다는 뜻입니다."
- 김찬동 역술인
<토정비결> 또한 주역의 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훨씬 단순한 방법으로 누구나 손쉽게 볼 수 있는 역술서다.
<토정비결>을 이지함의 저술이라 믿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고도 쉽게 자신의 운세를 보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 책이 삶에 지친 백성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끊임없이 주려고 했던 토정 이지함의 면모와 그대로 닮아 있다.
<토정비결>이 단순한 역술서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민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저자의 사상과 철학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토정 이지함의 삶과 그대로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지함의 이러한 애민사상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명문 사대부 집안에 태어나 관직에 나가 부와 명예를 누리며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놀랍게도 이지함은 스스로 양반의 삶을 포기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지함이 살았던 조선중기는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정치적 혼란기였다.
집권층인 훈구 척신과 신진 사림들간에 갈등이 계속 되고명종때까지 네 차례 사화(士禍)로 수많은 선비들이
숙청을 당했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1년) 을사사화(乙巳士禍)
특히 을사사화 이후 권력을 잡은 문정왕후와 척신들의 학정은 극에 달했다.
이런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이지함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지함의 절친한 친구였던 안명세(安名世, 1518~1548)는 을사사화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 주범들이었던 권력자들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이 사료는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들의 손에 들어가고 그들은 이 기록을 문제 삼으며 안명세를 잡아들인다.
끌려간 안명세는 끝까지 을사사화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는 고문끝에 숨진다.
사관으로서의 양심을 지키며 죽어간 친구 안명세는 지함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전라도 양재역 벽에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글이 나붙으면서 또 한 차례 사림들이 대거 숙청당하게 된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이다.
"여주(女主)가 정권을 잡고 아래에서는 간신들이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
이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정국이 들끓는 가운데 2년 후엔 '이홍난의 고변'으로 지함의 장인이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다.
절친한 친구와 장인의 죽음을 목격한 지함은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는다.
이지함에게 있어 벼슬길은 부당한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이후 이지함은 기나긴 유랑을 시작했다.
이 유랑시절에도 지함은 거의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돌아다녀야 할 만큼 당시는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이지함은 안명세의 처형을 보고 바닷가를 돌아다니면서 거짓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하지만 이지함은 이 유랑기간 동안 백성들의 현실을 목격하며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뜻을 품는다.
그는 재야의 지식인을 끊임없이 만나며 개혁의 방안을 모색했다.
지함과 두터운 교분을 나눴던 분들중에 대표적인 분이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선생이다.
그는 재야에 머무르면서도 현실정치에 비판을 가한 강직한
학자였다. 이지함과 조식은 둘다 나라가 해결하지 못한
백성들의 곤궁문제를 깊이 고민하며극복할 현실을 모색해왔던
사람들이다. 조식은 명종 말년에 왕의 명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했다.
이 자리에서 조식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
정치를 혁신하는 것, 인재를 등용하는 것, 임금 자신이 학문에 힘쓰는 것 등 강조했다.
이지함은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았다.특히 그는 재능있는 양민이나 천민 출신의 제자를 가르치는데 힘썼다.
천민출신의 서기라는 사람이 공부하는데 도와주는가 하면,노비출신의 김순종이란 아이를 데려와 가르치며
그 노비 본역까지 삭제시켰다.김순종은 이지함의 도움으로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여 사대부까지 되었다.
"서기는 출신이 미천한 사람이었는데 이지함이 재물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어서 성취하도록 하였다."
"김순종의 노비문서에 올라있는 본역을 삭제시켰다(本役而率)" - <토정유고>
이지함은 재야에 있었지만 현실 정치인과도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책임과 본분을 다할 것을 강조한다.
한 번은 이율곡이 병을 핑계로 관직을 관두려 하자 이를 호되게 꾸짖었다.
"공자는 신병이 났다는 핑계로 유비를 만나주지 않았고 맹자 역시 병이 낫다는 핑계로 왕의 부름에 아니 나갔잖는가?
그런 탓에 후세의 선비들까지도 아무 병이 없으면서 툭하면 병이 들었다고 엉뚱한 핑계를 대는 자들이 많아진 것일세."
서경덕, 조식 같은 이들은 당대 성리학적 주류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화를 꿈꿨던 지식인들이다.
이지함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익혔고 현실세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가치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서민들과 더불어 장사하고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그의 견문과 학식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쉰 일곱이 되던 해,
이지함은 마침내 그가 꿈꿨던 세상을 현실에서 이룰 기회의 발판을 얻게 된다. 명종 이후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의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당시 조정에서는 어지러운 정치를
쇄신하기 위해 '유일등용책' 즉 재야에 있는 인재들을 뽑아
관리로 등용하고자 했다.
"'유일지사(遺逸之士)'를 추천하여 등용하는 것은 새로 정사를
하는 데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 <선조실록(1567)>
선조 6년(1574). 이지함도 율곡의추천을 받아 관리로 발탁되었다.지함은 종 6품직 포천현감에 임명되었다.
나이 쉰을 넘어 처음 벼슬을 얻었다.재야에서 학문을 얻고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며 지함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
그 오랜 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백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려 나라의 보장(保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선조수정실록>
부임 첫날밤.밥상을 받은 지함은 아전들을 꾸짖는다.
"밥상을 보니 먹을 것이 없다."
지함의 꾸지람에 놀란 아전들은 더욱 진수성찬을 차려 상을 올린다.
"역시 먹을 것이 없구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데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런 진수성찬을 먹는 현실에 대해
지함은 탓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함은 앞으로 오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만 담아올리게 한다.
그가 고을현감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부정부패를 한 관리를 문책하는 것이었다.
관리를 벌하는 방법도 남달랐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관리라도 잘못을 하면 아이처럼 머리를 길게 땋게 했다.
덕이 부족해 아이만 같지 못하니 스스로 깨우치고 뉘우치라는 것이었다.
이지함이 목격한 백성들의 삶은 기막힘 자체였다.
포천은 토지가 척박해 기본적으로 농사 지을 땅이 부족했다.
땅이 없는 백성들은 거리로 나앉았고 굶어죽는 이들도 허다했다.
지함은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고민끝에 그는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포천현의 가난을 구제할 방도를 쓴 것이었다.
은, 옥, 물고기, 소금 등 자원을 개발해 먼저 빈민구제에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재물을 추구하지 않는 게 조선사회의 이념이지만
재물과 이익도 좋은 마음으로 쓰면 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義)와 이(利)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서 나쁜 사람이 악용을 하면 욕심을 채우는 것이 되지만,
선한 사람이 사용한다면 재물과 이익도 모두 덕이 될 것입니다."
- 1578년 이지함의 상소중에서
그러나 그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자
지함은 부임 1년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3년후 지함은 다시 아산현감으로 부임한다.
아산에 부임하고 그가 처음한 일도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산 백성들은 물고기를 잡아 왕에게 바치고 있었는데
지함은 물고기를 잡던 못을 메워 버린다.
"물고기를 기르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못을 메워 없애 버렸다."
- <토정유고>
(有養魚池 其池永絶)
"이 공지내에 숭어지가 있어서 숭어를 잡아서 진상하였는데
백성들이 어려움이 있어 토정 현감이 그걸 메워 백성들에게
나눠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이 근처인데 경지정리를 몇 번씩 해서 정확한 자리를
모르겠습니다" - 김일희(향토사학자)
지함은 이번에도 백성들을 위한 혁신적인 정치를 펼쳐냈다.
그는 먼저 '걸인청(乞人廳)'을 세웠다. 이곳에 걸인들을 모아 먹이고 잘 수 있게 했다.
그런데 걸인청은 단순한 보호시설이 아니었다.
걸인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기술을 가르쳤고각자의 능력에 맞춰 일감을 나눠줬다.
또 지함이 직접 걸인들을 시장에 데리고 나가 장사를 가르치기도 한다.
지함은 조선중기 봉건사회에 최초로 근대적 재활기관을 탄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지함은 부임 3개월만에 돌연 세상을 뜬다.그의 나이 예순 둘에 역질에 걸려 죽은 것이다.
"그의 정치는 백성 사랑을 위주로 하고, 해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했다.
한창 기반을 갖추어 나갔는데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 <선조수정실록>
가난한 백성을 단순히 먹이고 재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가르쳤던 21세기형 복지가.이것이 토정 이지함의 참모습이다.
200년후의 실학자들에게도 높이 평가받았을 만큼 혁신적이고 선구적인 실학사상을 펼쳤던 이지함이다.
그는 조선사회의 개혁을 꿈꿨던 기인(奇人)이었다.
우리에게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이지함은 (1517~1578)은 고려의 대문호 이색의 후손이다.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농업과 상업에도 박식한 지식이 넘쳤다.
그 당시 재야 성리학자로 유명한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햇다.
토정이란 마포강변에 지은 허름한 흙집을 스스로 토정(土亭)이라 불렀다.
지금도 마포 토정동이 그가 살던 곳이다.그는 주역(周易)을 많이 읽고,특히 관상을 잘 보았다.
평상시 글을 읽어면 밤을 새워 읽었다.한겨울에 눈 덮인 바위 위에 알몸으로 앉아 있기도 하고
한여름엔 솜옷을 두텁게 껴입고 다니기도 했다.또 한여름엔 며칠씩 물을 마시지 않기도 했다.
열흘 동안 익힌 음식을 먹지않기도 하고 수백리를 걸어도 피로한 기색도 없었다.
먼길을 가다가 잠잘 때면 두 손으로 지팽이를 집고 몸을 굽인 채 서서 며칠째 자기도하고
그 숨쉬는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한다.
그는 구리로 된 모자를 쓰고 다니다가 쌀이 생기면 벗어서 밥을 지어 먹었다.
가고 싶은 곳은 안가본 곳이 없고 훌륭한 사람은 누구건 찾아보았다.
그리하여 당대의 저명한 이이,남명,송익필,박순,성혼,조식과도 친했다.
토정은 초립동 시절 왕족 모산수 이정랑의 사위가 되었다.
혼례식을 올린 이튿날 눈이 오고 몹시 추운 겨울이 였다.그는 슬그머니 나가서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신랑이 말도없이 나가 난리가 났다. 들어서는 그를 보니 추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홍제천 다리밑을 지날때 거지 아이 셋이서 벌벌 떨고 있어,
혼자서 명주 옷을 입기가 민망해서세조각으로 찢어서 나눠주고 왔다는 것이다.
그는 평상시 굵은 베옷과 헌 짚신 다 부서진 갓을 둘러쓴 채 거지꼴로 돌아다녔다.
어려운 이를 보면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였다.
명문거족인 그가 스스로 천한 생활을 하며 방랑생활을 하는 동안 민초들의 애환과
고통당하는 희망없는 백성들의 삶을 뼈저리게 체득했다.
한번은 토정이 매맞는 민초의 고통을 알기 위하여 원님이 백성을 잡아다가 놓고 볼기 때리는 현장을 보고
뛰어들어 원님에게 행패를 부렸다. 토정을 잡아 동헌 뜰에 엎어 놓고 볼기를 치려다 보니 토정의 용모와 거동이
심상치 않게 여겨,
"보아하니, 젊잖은 노인네시구려, 어서 나가시오"
"허허,,, 매 맞기도 어렵군..."
언젠가 김계휘란 자가 율곡 이이에게 물었다.
"토정이 제갈량에 비해 어떠하오?"
"토정이 기이한 화초 같아서 높이 구경할 만은 하다."
"그러나 베나 비단이나 콩과 조같이 긴요한 것은 못되니 직용할 인재는 아니다."
자부심이 강한 토정은 율곡의 이같은 평을 듣고,..
"허어,내가 콩이나 조가 못된다면 도토리나 밤(栗:율곡을 비유함)은 될 것이니 어찌 전혀 쓸곳이 없겠소?"
율곡같은 대학자 마저 그의 진가를 몰랐으니 그가 고의로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며
세상을 비웃고 다니는 까닭을 그 당시 알 자가 누구였겠는가?
"제가 처가집을 보니 길한 구석이 한 구석도 없습니다,"
오래지 않아 무슨 화를 입을 것같으니 빨리 피해야 겠습니다."
그는 형님에게 고하고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떠나버렸다.
이듬해에 처가에 양재동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장인 모산수 이정랑이 죽엇다.
동생 토정의 박식함과 영민함에 항상 탄복한 형이지만 토정의 선견지명에 또 한반 놀랬다.
토정이 어느날 초라하게 이사가는 집을 보았다.
그집 아이가 예사스럽지가 않아 ,관상을 보니 장차 정승이 상이였다.
토정에게는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라는 조카가 있었다.
조카를 찾아가 크게 될 아이이니 장차 사위를 삼아라했다.
아직 애가 어리니 장차 사위 삼기로 약조하고 ,그후 사위를 삼았는데. 그 아이도 정승이 되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유학자 이덕형이였다.
토정의 사람 보는 관상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늘 "내게 일백리 되는 고을을 맡긴다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해 왔다.
그런데 1573년(선조6)에 기회가 왔다.
말년에 친구들의 권고로 포천현감이 된 것이다.
그는 여전히 무명 베옷에다 짚신을 신고 다녔다.
부임 첫날 저녁,그 고을 특산물로 도임상(到任床)이 올라왔다.
"그는 먹을 것이 없다고 물리쳤다"
아전들은 쩔 절매며 다시 상을 훨씬 잘 차려올렸다.
"먹을 것이 없다"
아전들은 그저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사죄 했다..
"저희 고을은 빈촌이라....."
토정은 온화하게 대답했다...
"이 고을에는 잡곡밥도 없느냐?"
" 나는 원래 좋은 음식을 먹어 본적이 없어 상을 물렸다"
백성들이 생활이 어렵고 고달픈 것은 관리가 먹고 마사는 것을 절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부터는 오곡밥 한 그릇과 나물이나 시래기국 한 그릇이면 그만이였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면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였다.
토정은 정부에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황해도 풍천부 초도를 포천군에 비지로 소속시켜 주면, 군민을 부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였다.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곡식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뜻이 받아들려 지지않자 사임했다.
군내 사람들은 떠나는 길을 막고 사또의 옷자락을 붙잡고 유임을 눈물로 간청했다.
그는 농본주의를 탈피해 상공업을 중시하고 바다를 개발하여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 구상을 했다.
그는 가난한 백성을 사랑했다.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사상이며 애민, 보민,중민 양민,안민이 그의 정치사상의 중심이였다.
토정은 지네즙을 먹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다.하루 한 그릇씩 지내즙을 마시곤 해독을 위해 곧장 날밤(生栗)을 먹었다.
그런데, 하루는 토정에 앙심을 품은 아전이 날밤 대신 버드나무를 날밤처럼 깍아 토정을 속였다.
그의 나이 62세에 지네독이 온몸에 퍼져 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