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게 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게 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유교경전 예기 중용 23장 중에서-
인월로 가는길에 해는 서산너머로 떨어지고
마음은 급해지는데 황산대첩과 피바위 비석이 길가에 서있다.
피바위는 임천강(람천) 강가에 자리잡고 있어 어둠이 내려 가보지 못하고
지난날 걸었던 임천강으로 만족한다.
고려말 삼도 도순찰사에 임명된 이성계가 전남 남원에 도착한 다음 여원재나 입망치를 넘어 운봉 인근 황산에서
왜구와 전투를 벌여 이지발도(阿只拔刀)를 포함한 많은 왜구를 물리친 이성계 장군에 관한 비석이다.
인월에 도착하여
이곳에 오기전에 운봉에서 잔치국수 한 그릇 먹은 탓에 배고픔을 잊었다
오늘 슬치재에서 남원지나 인월까지 일정은 이곳에서 정리할까 했으나 일기예보에 내일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하니
알록달록한 무지개 우산과 먹을 것 사고 다시 길 건너 약국에 들러 파스 몇 장 사서 배낭에 넣고 산삼의 고장 함양으로 다시 걸음 한다.
어둠은 가득하고 인월에서...
늘 낯선 곳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인월땅
그동안 지리산을 찾으며 얼마나 찾아왔던 곳인가
초창기 지리태극을 알리면서 장거리 산행에 있어 극한의 무너지지 않은 힘을 배웠던 곳이 아닌가
수년간 지리 태극코스가 자리 잡기까지 미쳤다는 소리를 했지만 결국 성공하면 그 길은 길이라 부르게 되어있다
인월면 성산리 영선사 입구 유리창이 있는 정자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하고
문을 열어보니 이불도 있고...
안성맞춤 럭셔리한 곳이다.
행여나 마을 사람들이 찾아올까 조심스레 침낭 깔고 몇 시간 자고 일어나
다시 길을 간다
밤하늘은 어둡고 침침한 게 금방이라도 비가 올듯하다.
이른 새벽 이라고는 하지만 이직 03시도 안 된 시간
토깽이 간이 필요했던 용왕님의 심부름꾼 거북이의 별주부전
공양미 삼백석에 임당수에 빠졌으나 씩씩하게 살아난 심청전
그 다음으로 인기가 많았던 흥부전 이야기
그리고 비 올 때 파전이 생각나는 4파전 이야기
놀부 형님과 흥부 아제가 태어난 곳이 이곳 성산마을이던가
재미난 세상 이야기는 흥부네 자식 낳듯 야한 밤에 야사는 주렁주렁 열리고
요즘 세상에 흥부는 게으름의 상징이라 할만한데
연약한 제비가 물어다 주는 박은 필요 없고 그저 로또 당첨만 빌뿐이다.
흥부 아제가 태어난 성산마을
잠시 쉬는 동안 비는 내리고
전주에서 남원 일월까지 전라도 땅은 지나고 이제 팔령재를 기점으로 경상도 땅에 입성한다.
경상남도 땅이라는 이야기인데
땅끝에서 시작하는 삼남(三南) 길은 강진-영암-나주-장성-정읍-전주-익산-공주-천안-수원-과천-한양 삼남길인데
전남과 충남이고 삼남길이라지만 경남은 속하지 않는데 통영대로가 전주까지 이어지면서 이후길이 삼남길이 완전체가 된다.
산삼의 고장 함양
산에 들면 내 것이 아니기에 케는건 불가능하고 어디 가서 한 뿌리 얻어먹어 봤으면 좋으련만
한때는 지리에 엄청 찾아들었지만 지금은 일부러 지리를 찾지는 않는다.
함양 버스 터미널 인근에서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6,25 전쟁과 베트남전 참전 기념탑 앞을 지나
함양땅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깊은 산속이라 빨치산의 은신처로써
어느 지역보다 더 힘든 시기를 겪은 곳이다.
인근의 거창땅 역시 함양과 마찬가지로 참 힘든 시기를 이겨야 했던 곳이고
새벽부터 빗님은 그칠 줄 모르시고
주룩주룩 내립니다.
몇 해 전 대간길에 산신께 맞짱 떴다가 17일간 빗님을 내려 주셨어 얼마나 감사했던지? 아주 골병을 들었던 대간길
이제는 하루 이틀 내리는 빗님은 그저 좋기만 하고
남강을 건너며 본 수동면과 연하산 사근산성이 있는 곳인데
비 구름이 몰려와 있어 사근산성은 보이지 않는다.
성벽 길이는 1,218m , 높이 4미터 성벽은 네모나게 가공한 납작한 돌과 자연석을 단단하게 쌓아 올렸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연못과 봉수대가 기록되어 있는데 봉수대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신라시대에 백제에 대비해 쌓았다고 하며 인근의 마안산성과 황석산성, 방지산성이 연계되어 있고
1380년에 왜구의 침입에 죽음으로 항전했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남강 186km 발원지는 남덕유산
남덕유산 서쪽 계곡에서 흐르는 남강물은 모두 경남의 식수원이며 남한에서 가장 긴 낙동강(513km)에 합수되기까지
낙동강 제1지류로써 유역면적 3467㎢. 길이 186.3km에 달하며 서쪽 끝자락에서 함양군 서상면에서 시작해서
동부 지역 창녕지역까지 내륙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끝모두 경남에 두고 있는 역사가 살아있는 강이다..
산청군 생초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본 함양땅
산삼의 고장 함양땅에서 약초의 고장 산청으로 들어서며
산청군은 철쭉의 황매와 국내 최고의 지리를 품은 고장으로 10개의 면(面)을 가진 지역이다
산청군 생초면(生草面)에 들어와
전날까지 무슨 행사를 했다는데
비가 오니 조용하기만 하고
비 오는 날은 주막에 들어가 막걸리에 파전이 제격인데
흐릿하고 비가 오니 아침인 듯 점심 무렵인 듯 시계를 보지 않으면 알길 없는 시간이다.
남강이 산청군 구간에서 경호강이라 불리는 곳이죠
장재 고갯마루
산청 향교에서
비는 내리고 문은 굳게 닫혀있다
우리나라 향교의 역사는 고려 태조 13년 평양에 공자의 사당인 향교를 만들어 유생들을 가르쳤고
문묘(공자를 정위에 그리고 좌, 우에 우리나라 명헌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이후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후 각 지방 수령들의 능력을 판단하는 제도를 만들어 향교설치를 중요시하였다.
전국 8도에 360주 가운데 모두 328개의 향교가 세워졌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천 개의 서원중
47개만 남았을 때,향교 역시 서원과 함께 위기를 맞았고 1894년 호남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해에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와
함께 향교의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만 올리는 문묘 기능만 남는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6대 광역시, 75개시(市), 82개군(郡)에 약 234개의 향교가 남아있다.
공자를 신처럼 받들지 않아 모두 다 가보지는 못하겠지만 걸어가는 길에 향교가 있으면 가볼 생각인데...
향교 이야기보다 비 오는 날 어디 가서 쉬었다 가면 좋으련만 가는 길에 주막은 보이지 않고
경남 산청땅은 농사지을 땅은 얼마 되지 않으니 산을 제(除) 하고 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북쪽으로는 용의 둥지라는 뜻의 소룡산, 동쪽에 철쭉나라 황매산 서쪽에는 국립공원 지리산이 자리하고
그 가운데 북쪽에서 남강이 흐르는데 동쪽에서는 양천, 서쪽으로는 임천이 흘러드는 곳이다.
산청군 부리마을을 지나는데
비 오는 날 걷기 딱 좋은 곳이고
푸른 보리밭이 곁에 있고
남강은 맑게 흐르는데
오래전에 래프팅 할 때 몇 번 와본 곳으로 급류 난이도가 낮아 초보자들이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이다.
젊을때 전국 여기저기 래프팅을 즐겨 봤지만 가장 강력한곳은 지리산 추성리 용유담 인근의 통발꼬리란곳인데
최고로 짜릿한곳이다.
산청군 신안면 개고개를 지나며
UN참전공원에서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산청군 출신 1,297명에 대한 호국 영령들에 대한 기념탑이다. 잠시 묵념하고
이곳은 대부분 그냥 지나가는 코스이나 걸어서 가면 꼭 들러야 할 자리인데 행여나 이곳을 지난다면 꼭 찾아보시기 바라고
날카로운 면도날 위로 기어가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는 이팽달님
비 오는 날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더듬이 두쪽을 안테나처럼 세워 언놈, 녹은 놈 가리지 않고 내 곁을 지나가지 말라며 지나는데
자전거라도 쌩하고 달려오면 작은 집은 순식간에 아짝 날 것 같다.
가끔 자전거가 지나가니 이녀석 잡아 길가 풀섶에 놓아두고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저 팽달이 같은 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며 오늘은 또 어디 가서 먹고 하룻밤 보내나
무슨 비석이 보이긴 하는데 풀섶을 내려갔다 올라 올려니...
백마산 자락에 자리 잡은 산청 문익점 신도비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이셨던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신도비에서 도로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문익점 선생의 묘가 나온다
문익점 선생 묘
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붓통속에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오신 분으로 유명한데
가지고 온 목화씨는 장인어른에게 주어 재배케 했지만 처음에는 재배 기술을 알지 못해 한그루만 살렸고 이후에 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을 뽑는 방법을 몰랐는데 장인어른집에 머물고 있던 중국에서 온 승려로부터 씨를 빼고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그래서 우리도 따뜻한 목화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묘소 주위에는 상석과 비(碑)가 서있고
좌, 우에 문인석과 망주석 가운데 석등이 자리하는 걸 볼 수 있다.
가운데 아담하게 자리 잡은 석등이 보이고 비석이 크게 자리하는 문익점 선생 묘
따신 이불 감사하다며 두 번 절하고 일어나
아래에는 누구 묘인지 모르겠으나 집안 문중분인 듯하다.
묘소에서 내려와 붉은 홍살문 안으로 들어가면
도천서원 신안사재가 반긴다.
조선시대 서원은 학문을 연구하고 선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가르침을 배우는 곳인데
이곳은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담장은 높은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에 까치발로 서고 두 팔을 들어 올려 겨우 한 장 담고
다시 왔던 길로 돌아나가 왁대 고개를 지나면 산청군 신안면 (원지)이 코앞이다.
이곳에도 이순신 장군님의 백의종군길 표시석이 있고
적벽산 아래로 진행해서
일찍 원지에 도착해서 비도 오고 배터리 충전 겸 주막집을 찾아 들어가 배낭이 시원찮은지
여기저기 빗물이 들어와 옷종류는 모두 축축해 널어놓고 잠을 청한다.
오늘은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걸었고
그동안 수많은 길을 걸었음에도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방구석 한 귀퉁이만 조금 헤매다 멈춘 정도이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길을 걸으며
원지 버스 터미널 앞으로 이어가며
새벽인데 렌턴 불빛 속에 보이는 작은 미세 먼지들
뭔!~먼지가 이렇게 많은지 온 세상이 먼지 투성이다
비는 그치고 달이 구름을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고
소쩍새 울음소리는 오늘도 이어진다.
전북 임실에서 이곳까지 따라왔나 새벽이면 옆에서 처량하게 소쩍소쩍 신세한탄이니
진주시에 들어와
진주하면 남강이고 남강하면 논개의 고장
조선시대 3대 도시 경북 상주, 충남 공주 그리고 경남 진주
상주는 조선시대 때 대도시였고
공주는 충청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진주는 서부 경남의 모든 교통이 진주로 모여들었던 곳이다.
진주는 촉석루(읍성)를 중심으로 남강이 그 아래 있고 국립공원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있으나
정작 지리에서는 조금 멀고 인근의 월아산과 6,25 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의 미군이 방어하며 치열하게 지켜냈던 방어산이 서쪽을 지키며 서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역이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온 영천강이나 남강 따라 들판이 넓어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의 눈동자인가?
남강댐 상류의 오미마을 앞 버스 승강장에서 잠시 쉬었다가
용산고개로 향한다.
이른 새벽이라 포장마차는 어둠속에 그대로 자리 잡았고
고개 넘으면 진주시 명석면이다.
날이 밝아 도착한 진주시 명석면
간밤에 소쩍새 울음소리를 벗 삼아 왔더니 처량한 마음은 오갈 곳 없고
면소재지에 들렀으나 지나가는 이는 없고 세상 조용하기만 하다
지나온 길
지나온 길
진주시에 들어와 진주성 아래로 진행하며 본 진주성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선조 25년 10월 임진왜란 왜군 2만 명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천8백여 명의 군사와 백성들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를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고, 그 이듬해 6월에 2차 침입 때는 10만의 왜병이 침략해 민관군 7만이 모두 희생된 곳이다.
공북문을 통해서 입장은 했으나 이른 아침이라 관람료가 없는 대신에 촉석루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김시민 장군 동상
진주가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를 찾으라면 그 첫 번째가 1차 진주대첩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을 쓰고 간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충남. 천안 병천 지평리 김충갑의 아들로 태어나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며 훈련원, 군기시,판관을 거쳐 1591년에 진주 판관이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 모사가 병으로 죽자 그 직책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그 아래 해자(垓字:작은 못)를 만들고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계를 갖추어 사천, 고성, 진해 지례, 금산 등지에서
승전고를 울리며 목사로 승진되어 같은 해 10월에 침공한 적 2만 대군을 3,800여 병력으로 6일간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바로진주대첩이다. 이후에 김시민 장군은 39살에 병사한다
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20일부터 27일까지 진주성에서 벌어진 전투
진주성 1차 싸움에서 패한 일본은 2차 진주성 많큼은 꼭 공격해서 이겨야 했으며
일본군 측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주성 1차전 패배의 보복전 심리로 조선 측에 승산이 전혀 없으니 잠시만 성을 비워
놓으면 일본군이 임시 점령 했다가 남해로 물러갈 것이라 하며 진주성만큼은 꼭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공격하기 전에 민간인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내라 권고한다.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기에 진주성만 공격하고 물러난다는 일본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명군과 일본군의 권고를 거부
2차 진주성 싸움은 일본군 10만명과 선박 800척으로 진주성 한 곳만 집중 공격 진주성내에는 민관군 모두 6만
*진주 인근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明君)은 진주성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했으며.
조선군 곽재우.선거이 홍계남은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이 많았으나 곽재우는 진주성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한다.
"내가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경험이 풍부한 나의 휘하 병력이 이런데서 개죽음당하게 할 수 없소!"하고
선거이,홍계남은 곽재우와 함께 가버리면서 충청 부사 황진을 만나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곽재우:진주는 고립된 성이기 때문에 지킬 수 없고 더구나 공(황진)은 충청도의 절도사이니 진주성을 지키다 죽는 곳은
공의 올바른 직분이 아닌듯하오
황진:비록 그렇다 하나 김천일에게 이미 약속을 했으니 죽는다 해도 약속을 깨트릴 수는 없오"하며 진주성에 남는다.
고립무원의 진주성에서 싸워서 이기던지 죽던지 둘중에 하나
*창의사 김천일 군사 3백명
*충청병사 황진 7백명(황희 정승의 5대손이며 활을 잘 쐇다고 한다.)
*경상 우병사 최경회 5백명 (논개 남편)
*의병 복수장 고종후 4백명 의병장 고경명의 장남
*부장 장윤 3백명
*의병장 이계련 1백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3백명
*의병장 민여운 2백명
...
의병 2천8백과 진주 목사 서예원과 김민준.이종인 등 진주 주둔중인 조선 정예군 3천은 진주성을 지킨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6천 명의 조선군이 왜군 10만 명을 상대로 8일을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조선군,명나라.의병 어느 부대도 고립무원의 진주성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기록에는 진주성안에 있던 피난민과 6만명이 전멸했으며 성안에 개 한 마리 남겨 두지 않고 도살해 버렸다고 한다.
일본군은 고니시가 말했던 대로 전라도를 공격하지 않고 남해로 내려가 버렸다.
이날 전투로 일본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후 왜군은 부산성에 들어가 전쟁은 몇 년간 소강상태를 이룬다.
진주성 2차 전투에서 곽재우의 현실성과 황진의 용감성 두 분 중 누가 더 뛰어난 분인가 개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죽음을 알면서도 진주성으로 말을 달려 들어간 황진장군을 택할 것 같다.
진주성의 촉석루
2차 진주성 싸움 결정적 요인
충청 병사 황진이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
성안의 유일한 베테랑 관군이었던 황진의 죽음은 이미 절망적이던 전투의 승패를 완전히 결정이었고
전사한 황진을 대신해서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자 경상 우병사 논개의 남편 최경회가 경비대장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전사한다.
오후에 내린 비로 인해 동문이 무너지자 일본군 성안으로 들어와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
이때 여러 장수들 남강으로 투신하면서 진주성은 함락된다.
서예원.최경회 머리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침으로써 진주성 전투 승전을 선언한다.
예전 진주성과 촉석루 모습
논개 영정
논개는 주씨 성으로 전북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이 고향이고
지금의 대곡 저수지 그곳에서 태어나 삼촌이 김풍헌의 집 민며느리로 팔아 버리자 어머니와 함께 도망을 가게 되고
얼마 후 장수현감에 붙잡혀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고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된다.
누명을 벗었으나 갈 곳이 없게 된걸 안 장수 현감(최경회)은 자기 부인의 병시중 드는(침방관비) 일을 맡게 되고
이후 현감 부인이 지병으로 죽게 되자 주논개는 현감의 2번째 첩이 된다.
현감의 첩이 되었으니 기생이라는 전설은 아니다.
그의 남편 병마절도사로 제수된 최병회는 1593년 2차 진주성 싸움에서 10만 왜구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되자 몇몇 장수 3명
과 함께 남강물이 흐르는 진주성 아래 의암에서 투신한다
주논개는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왜군의 잔칫날 음력 6월 29일 ( 7월 7일) 기녀로 꾸며 참석하여
왜장 가토 부장인 "게아무라 로구스케"를 안고 남강에 투신하면서 10일간의 치열했던 진주성 싸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촉석루에는 장수를 뜻하는 수(帥)가 길게 쓰여있고
하늘도 우울한 듯
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까지 내려앉은 모습이다.
촉석루야 잘 있어라
매년 10월이면 진주 남강에는 가족의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 유등 축제를 하고 있으며
국내 하천 중 아름다운 하천으로 꼭 들어가는 역사가 살아있는 남강이다.
뭐임!~ 볼래
아주 깜놀하는 모습인데
딱밤이라도 한대 주고 가야 하나
경상 국립대학교 정문을 지나
남해고속도로 위를 지나
고성이나 사천 방향으로 진행
갓길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으니 확인하시고
진주땅을 지나 경남 사천땅 축동면에 들어와
오늘은 공룡나라 고성땅까지 가야 하니 점심은 생략하고
중산포천이 흐르고 그위로 안경다리가 보인다
사천 향교를 찾아서
다른 향교와 다르게 멋지게 터 잡은 곳이다.
좌측에 풍속과 교화를 뜻하는 풍화루가 보이고 그 뒤에 명륜당 맨뒤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인듯하다.
군자의 도를 가르치는 명륜당과 가운데 작은 돌탁자는 성생단으로 향고에서 제물을 올릴 때 검사하던 곳이다
우측에 치성재가 보이고, 참고로 향교에서 제를 지낼 때는 익히지 않은 생것을 쓰는 걸 기본으로 한다
가운데 내삼문을 지나면 공자의 위패를 모신곳이 나온다.
대성천
공자의 위패를 모신곳인데 5성, 송조 2현, 우리나라 18 헌의 위패를 함께 모신곳이다.
5성(五聖)은 공자, 안자 , 증자,맹자, 자사자를 뜻하고
대성전 문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볼까 하다가 자칫 도둑이라는 누명이라도 쓴다면 그것도 할 짓이 못되어
다음 갈길로 이어간다.
사천땅에서 고성으로 이어지는 33번 도로 따라가며
정동면 사무소를 지날 때
이 녀석이 주인과 함께 간식으로 먹을 소시지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물고 온다.
기특하고 대견해서 칭찬을 해주었더니 주인아주머니께서 개가 물고 있는 비닐봉지 속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주시자
이 녀석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어린아이 표정이다.
아주머니께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댕댕아 ㅎㅎㅎ 잘 가라....
개가 먹을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더위를 이겨본다.
아 맛나... 좋다
개가 간식으로 먹을 아이스크림 뺏어 먹는 느낌
사천만으로 흘러드는 사천강길 따라 걸음 하며 지난날 걸었던 그 하천이라서 생각이 난다
비 오고 난 뒤라 그런지 수량이 많고 맑은 물이 흘러내 리니 뛰어들어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산이 정기 넘치는 힘이라면 물은 평온함과 무서움을 지녔고 세상을 살리는 명분을 지녔다
고려 현종은 팔만대장경이 있기 전에 동아시아 최고의 전투 민족인 거란 2차 침입 때 나주로 피난중에 초조대장경을 만들게 했던 분이죠
이후 고종 때 몽고의 1232년에 침입으로 팔공산 부인사에 모셔져 있던 초조대장경은 불타 버렸다
고려 현종 부자 상봉길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이 지금의 사천 사남면으로 귀양을 살았다
욱은 고려 5대 왕 경종의 왕비 황보 씨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어미는 아들을 낳고 숨을 거두었고
아비인 욱은 사남으로 귀양을 온 것이다.
왕족인 아이는 보모의 손에 길러졌는데 어느 날 6대 임금인 성종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성종이 아버지(욱)를 그리워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아이를 아버지가 있는 사천 땅에 보냈다.
그러나 귀양 간 아버지와 살지 못하도록 하여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의 대방사에서 거주하게 된다.
귀양 온 욱은 세상을 떠나는데 아들에게 금한 주머니를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고을 성황당 남녘 구룡동에 매장하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라고 하였다.
아들 순은 사천당에 4년을 살다가 개성으로 돌아가 1009년에 왕위에 오르니 고려 8대 왕 현종 임금이다.
훗날 현종은 어린 시절을 보낸 사천 땅을 은혜를 베푼 땅이라 하여 진주목에 속해있던 사수현을 사주(泗州)로 승격시킨다
당시 전국에는 12개의 주 9州)만 있었으니 가히 파격적이라 할만하다
고자정에 가서 낮잠이라도 좀 자고 가면 좋겠는데
큰일날일이라 생각되어 이곳 간판 아래서 잠시 꾸벅꾸벅 졸다가 일어선다
그늘도 없고 덥다 더워
사천땅을 벗어나 경남 고성땅에 들어와
휴게소에 들어 얼음물 몇 병 사서 뜨끈한 발바닥 열기 좀 식혀보고
도로가로 갓길이 있어 진행
공룡나라에 온 걸 환영한다며 쥐라기 파크에서 몇 마리 마중 나와있다.
내일 아침에 도착할 통영땅까지 37km
고성땅은 지녁이면 도착할 것 같고
고성군 상리면을 지나며
지맥 마루금인 감티재를 넘어가며
사천 향교에서 점심 무렵에 출발해서 23km 정도의 도로길 저녁 무렵에 도착했으니
길고 지루한 길이다
고성에 들어오니 대독누리길이 보이고
고성 중학교 앞을 지나며
경남항고 고등학교 앞을 지나
인근에 자리 잡은 고성향교에 들릴까 하다가 고성 송학동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제된 소가야 왕들의 무덤 7기가 자리하는 고분군으로 이동한다.
고성군 북쪽에 자리하는 고분군은 낮은 무기산 구릉 지대에 7기의 무덤들이다.
마을 분들이 운동삼아 자주 다니시는듯하고
왕들의 무덤 서쪽에는 드넓은 밭에 유채가 꽃피울 준비를 하고
다시 돌아나가 고성 읍성을 찾았으나 해는 넘어가고 이 집 저 집 남의 집 담장이 될 수도 있을 성벽을 찾는 건 포기하고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성 읍성은 둘레가 3,524척,높이 15척에 이르며 성 안으로 우물 14곳과 연못 1개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민가가 대부분인 곳에서 옛 흔적은 찾을 수 없어 주막에 들러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한다.
멀리서 벗이 찾아와 주셨고
전국구님께 감사드리며 늘 건강한 발걸음 기원드리겠습니다.
휴대폰 충전 시켜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다가 새벽 01시에 배낭은 주막에 두고 밖으로 나와 통영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간다.
통영시 도산면으로 들어와
어디서 부는 바람인가
왜 이리 추운가 했더니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진다
비가 오니 도로 갓길 무논에는 개구리들이 신이 났는 입큰 개구리 나라가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개굴개굴!~~~~
바다 휴게소를 지나고
도산면 도선리 마을 앞
개구리 소리가 얼마나 많이 들리는지 그 소리가 파이팅 넘친다
어디 얼굴 한번 보자며 발소리를 죽이고 몰래 무논 가까이 가서 순식간에 번쩍하고 한 장 담는다.
점같이 보이는 건 모두 개구리들인데... 갑자기 들이닥치니 아주 뚱한 표정이며
사람이 있건 말건 짝짓기 한다고 야단이다.
학섬 휴게소를 지나고
수군 통제영이 있던 세병관까지 9km
고성에서 왕복 44km 길인데 주막집에 두고 온 봇따리 비워줘야 할 시간이 10시 30분이라니
부지런하게 움직여본다.
통영 세병관으로 가기 전에 통영 향교에 들릴까 하다가 오는 길에 들리 기로하고
통영시 주전동에 들어와 본 바다모습
길을 걷다가 도로가에서 할머니 한분이 부른다.
총각 우리 집에 잠시 가잔다??? 뭔 일이시죠 하니
자세한 말씀은 모르겠는데 대문옆에 나무를 밟고 담장을 넘어가라는듯하다.
할매집앞에 도착하고 보니 옹기토기에 나무가 한그루 있고 그걸 밟고 담장을 넘어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열어달라는 듯
할매 진짜 할매 집 맞아요 몇 번 더 확인하니 급하게 집을 나오다 보니 대문열쇠를 두고 나오셨단다
제 전공이 오르고 내리는 거라며 월장을 해서 집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열어 드리며
할매 밖에 얼마나 계셨습니까? 하니 사람이 지나가길 한잠 지났단다
건강하시라 인사하고 돌아서니 몇 번이나 고맙다며 말씀하신다
꿀빵인데
맛보고 할 시간이 없어
통제영이 있던 세병관에서 전반전 전북 전주에서 통영구간 마치니 이곳까지 233km다
통영 삼도 수군 통제영인 세병관
조선후기 하삼도(下三道) 충청 전라, 충청의 수군을 통제하던 해상 방어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선조 26년 1,593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셨던 이순신 장군께서 첫 삼도 수군통제사라는 벼슬을 하셨죠
장군은 한산도에 수군 통제영을 두셨고
이곳은 그 이후에 만든 곳인데 선조 36년 1600년대 초에 만든 것으로 일제 강점기 때 세병관을 제외한 대부분 의 건물은 사라졌으나 이후에 다시 건립하였다
통제사의 명칭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을 총괄하는 총사령관 자리다.
1대 이순신 장군이셨고
2대 원균으로 이어져 고종 때 폐영 될 때까지 303년간 209대 제임 14명으로 195명의 통제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세병관을 끝으로 전반전에서 후반전으로 이어가며
이제 후반전으로 고성-마산진동-함안-낙동강 창녕-대구현풍-고령-성주-김천-상주 시청까지 250km 길
대부분 아는 길이라 지도 없이도 갈길이니 마음은 한결 편안하다
전반전 끝 이제 후반전 시작합니다.
통영시 광도면 죽림리 통영 향교를 찾아가는 길에 개구리 소리는 끝없이 들리고
이 녀석들이 새벽부터 요란하다 했더니 핑크 핑크한 짝짓기 한다고 이러고 있다.
물속으로는 온통 개구리 알인데...
입큰 개구리 초상권으로 인해 얼굴 공개를 비원칙으로 해야 함에도 모두가 비슷하니...
풍화루
풍속과 교화를 뜻하는데 경남지역 향교에 많이 보이는 글이다.
대문은 닫혀있고 담장은 높고
양반 체면에 어디 밟고 올라서기도 그렇고
통영향교 글 읽어 보시고 참고하십시오
향교에서 유교경전 13경(사서삼경) (춘추좌전,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을 춘추삼전(三傳)이라 하고, 춘추시대의 역사는 서주 275년 , 동주 294년을 말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에 비하면 좀 짧은 감이 든다)
삼례(參禮)라 부르는 (주례, 의례, 예기)을 공부할 때 무논에서 개구리 짝짓기 소리가 들린다면
공부하다 말고 주막집으로 뛰쳐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외우는 건 머리 아픈 일이니 대충 외우고 과거 보러 가서 합격하면 장땡 아닌가 생각이 든다
첫댓글 방장님 덕에 좁은 우리나라 땅이 넓은 땅 마냥 보입니다. 50년 넘게 살아 온 땅이지만 밟아 보지 않은 땅이 많네요.
통영 논 안에 개구리가 저 같네요. 논 밖으로 뛰쳐 나갈 날을 기약하며 응원합니다.
멀리 걷는건 좋으나 후기 남기는게 더 힘드니
미리 공부를 하고 가지만 찾아야 할 것들이 많아 일부는 놓치기 일쑤입니다.
꼼꼼하게 써야 함에도 대충쓴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글 감사합니다.
천리길 걸음보다
후기글 나열하기가 더 힘든것 같습니다
이것 저것 빈틈없이 논문 나열하시느랴 수고 마니 하셨습니다
모든것 내려놓고 비우시고 담여정 응원합니다
수행자는 기록을 남기다가 죽을 것 같습니다
언제쯤 글에서 자유로워질수 있을지
글 감사합니다.
진주성2차싸움...
개 한마리 남김없이 씨를 말렸다고 들었는데...
논개는 어찌 살아서 왜장을 끌어안고 죽었을까요?
이뻤는가?
뭐든 살아있어야 기약할 수 있는 법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아야 강한 법
우리들 각자의 이야기는 쭈~~욱~~~ 계속되어야 겠지요.
삼남대로길의 완성을 이루는 통영대로길까지 이어가셨네요.
절에 이은 향교를 들여다보며 걷는 길
이번 걸음, 후기글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긇죠
삼남대로 안성 길이라 부르죠
영남대로 역시 그렇구요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야 알아가니...
글 감사합니다.
20여년전 형 군대면회 갔다가 가본 진주성 촉석루 그후에도 한 번 더 간 기억이 납니다. 확실히 남해쪽 역사는 임진왜란의 흔적과 기억을 잘 살려 놓은 것 같습니다. ㅎㅎ
편하게 잘 보고 갑니다. 방장님~
남해쪽의 역사는 거의 다 왜놈들과 연관성이 있죠
이제 상주로 올라가는길인데 낙동강을 두번 건너게 됩니다.
글 감사드립니다
모두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길이고
그 길들을 다 가보았지만 그 길을
걸어서 가본 사람은 없을듯 합니다.
지나가는 지역의 특색과 역사를
요약해 주시니 가만히 앉아서
구경을 하는것 같습니다.
그 수고로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글 감사드립니다.
대간 길을 한번 더 갔으면 좋았을 텐데 사흘이 멀다 하고 비가 오니
비 오는 날 창밖을 보며 그래도 갔으면 하는 바램도 들게 됩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