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풍자한 김병연
강원도 영월군에는 독특한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하는 김삿갓면이 있다. 흔히 ‘김삿갓’으로 알려진 조선 후기의 유랑시인 김병연(金炳淵)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김병연 집안은 조부인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에 투항하여 몰락한다. 영월군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살던 김병연은 백일장에 나가 김익순을 비판하는 글로 장원을 하게 되는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인 사실을 알게 된 후 삿갓을 쓰고 세상을 유랑하며 풍자하는 시를 쓰게 되었다.
영월군 김삿갓면에 있는 김삿갓무덤
강원도 영월군에는 김삿갓면이 있다. 흔히 ‘김삿갓’이라 알려져 있는 조선 후기의 유랑시인 김병연(金炳淵)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영월군 하동면이었는데, 2009년에 명칭을 김삿갓면으로 바꾸었다. 지역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서다. 김삿갓면에는 김병연의 묘소를 중심으로 생가와 문학관, 공원, 시비 등이 ‘김삿갓계곡’과 잘 어울려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삿갓을 쓰게 된 김병연
김병연의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난고(蘭皐)이다. 그가 삿갓을 쓰고 다녔기에 ‘김삿갓’, ‘김립(金笠)’ 등으로도 부른다. 김병연의 고향은 경기도 양주이다. 그가 다섯 살 무렵 그의 할아버지인 김익순(金益淳)이 선천부사로 있었는데, 서북사람들을 차별했던 조선 조정에 불만을 품고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다. 당시 가산군수였던 정시는 저항하다가 죽고, 김병연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은 홍경래에게 투항하였다. 홍경래의 난이 실패로 끝나 후 김익순은 홍경래에게 투항하였던 것이 문제가 되어 처형 당했고, 김병연의 부친도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섯 살이었던 김병연은 집안 하인이었던 김성수가 자기 고향인 황해도 곡산에 데려가 숨어 살았다. 시간이 흘러 김익순의 죄가 본인에 한정되자, 김병연은 어머니에게로 돌아왔고, 어머니는 세상에서 머리를 들고 살 수 없다며, 산속 깊은 곳을 찾아 경기도 이천과 가평, 강원도 평창 등지를 옮겨 다니며 숨어살다가 영월군 삼옥리(三玉里)에 정착해 화전(火田)을 일구어 살았다.
당시 영월군은 도호부였으므로 동헌에서 백일장이 열렸다. 김병연은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백일장에서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가산군수 정공의 충절을 찬양하고, 항복한 김익순을 규탄하라(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는 시제에 대해서 할아버지의 죄를 나무라는 글을 써서 장원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김병연은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더 이상 삼옥리에 살 수 없어 지금의 김삿갓면 와석리 어둔으로 옮겨 살게 되었으며, 조상을 욕되게 하였다는 죄책감과 자기 삶에 대한 회의로 삿갓을 쓰고 방랑을 하며 벼슬길도 포기하였다. 김병연은 57세에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객사(客死)할 때까지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지친 몸으로 말년에 들른 동복면 구암리에 있는 ‘적벽(赤璧)’이 아름다워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객사하자 둘째 아들 김익균이 자신이 살고 있던 와석리 노루목으로 모시고 와 묘를 쓰게 되었다. 그 후 120여년이 지나서 세상에 잊혀졌던 것을 영월의 한 향토사학자가 찾아내어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풍자의 대표적 인물 김병연
영월에서 전해지는 김병연 관련 설화는 김병연이 삿갓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김병연은 할아버지를 욕되게 했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신분적 한계로 인해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기에 세상을 떠돌며 풍자하는 시와 일화들을 남겼다. 특히 당시의 어지러운 시대상으로 김병연을 흉내 내는 사람들까지 생기기도 하였다. 영월에서는 그의 문학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 ‘난고김삿갓문화제’를 20여 년째 개최하고 있다.
참고자료
단행본
영월군. 영월군지, 2002.
단행본
이창식. 김삿갓문학의 풍류와 야유.세명대학교 지역문화연구소, 2011.
지방문화원
영월문화원 GO
집필자
최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