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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의 재일조선인들은 왜 고향을 버리고 北으로 갔나?
거제역사 연구가...전갑생
“반세기를 넘어 대마도에 왔군요. 아버지의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인 2002년 8월 거제지역의 역사교사 모임의 교사들과 함께 거제와 쓰시마(對馬島)를 비교 연구하고자 답사를 떠난 일이 있었다. 그 때 다른 소개로 함께 갔던 이영순(70, 가명, 경남 거제시 거주)라는 분이 쓰시마(對馬島)의 북단에 위치한 하타카츠(比田勝) 항에 도착하자 조심스럽게 한 말이다.
“정말인가요. 오래전부터 거제도 사람들이 대마도에서 징용에 끌려갔다는 얘기만 들었는데...그럼 부친께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나요?”
이영순씨는 쓰시마 북단에서 남단으로 가는 1시간 넘는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멍하니 지나가는 친근한 풍경만 보고 있었다. 일행들을 태운 미니버스가 쓰시마의 중심지이자 재일조선인들이 대부분 거주한 이즈하라(嚴原)라는 마을에 도착했다.이때 반쇼인(萬松院)으로 들어가는 하찌만구(八幡宮) 신사 앞에서 홍기 띤 얼굴로 이영순씨는 필자에게 말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 했습니다. 북으로...”
여기서 필자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하찌만구 신사는 이즈하라 마을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에 이즈하라 경찰서, 검찰청, 재판소 등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다. 이영순씨의 부친과 같은 재일조선인들이 일본경찰과 대항하다가 체포되거나 투옥되었던 건물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영순씨의 부친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으로 쓰시마 목탄제조소에 끌려갔다. 그녀의 부친은 해방되자 고국인 거제도로 귀환하려고 했으나 현지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터라 쉽게 떠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쓰시마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일본 본토의 재일조선인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남한을 선택하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영순씨의 말에 따르면, 강제징용에 끌려온 사람들 중에 가족 전부를 데리고 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 역시 남한을 선택하지 않고 북한으로 갔다고 한다.
왜, 그들은 고향인 남한을 선택하지 않고 북으로 갔을까. 쓰시마에 거주한 재일조선인들은 일본경찰의 탄압을 받으면서 어떻게 살았을까.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나오는 의문점은 약 7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금씩 이해되고 있다. 최근 한 학회에서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한국전쟁기 남한에 거주한 한국인이 쓰시마를 거쳐 일본으로 밀항하다가 오무라(大村) 수용소에 수감된 사례를 담고 있다. 대부분 일본에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근데 쓰시마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조선인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상태였다. 원래 가까이 있는 곳은 잘 보지 않는 사람의 속성이라고 할까. 그래서 필자는 약 7년 전의 이영순씨의 말을 듣고 쓰시마에 거주했던 재일조선인에 대해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쓰시마, 경제 핵인 재일조선인
태평양전쟁 직후 대마도에 거주한 재일조선인은 6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며 대부분 목탄제조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 재일조선인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조선인, 부산 등지의 직업소개소에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무작정 섬으로 들어왔다. 종전 후 재일조선인들은 대부분 귀환하고 약 2천명만 남았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의 재일조선인 탄압정책에 따라 반강제적으로 쓰시마를 떠나야 했다.
그 법적 조치가 ‘외국인등록령’이다. 1947년 5월 2일 칙령 제207호에 의거,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외국인등록령’에 따라 외국인으로 취급되었다. 일본은 재일조선인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개인 재산까지 압수하려고 했다. 따라서 외국인등록에 따르지 않는 재일조선인들은 강제추방을 당해야 했다. 특히 일본 내에서 재일조선인의 권리와 인권신장을 외치던 재일본조선인연맹(이하 조련)을 비롯한 각종 단체에 가입된 간부와 인사들은 ‘요시찰인물’로 관리되었고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혀 수용소나 남한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1947년 8월 31일 조련 대마본부에서 조사한 결과 쓰시마 남단에 위치한 시모아카타군(下縣郡)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이즈하라(嚴原町) 166명, 쿠타촌(久田村) 120명, 쯔쯔촌(豆酘村) 57명, 사스촌(佐須村) 94명, 케지촌(雞知村) 337명, 후나코시촌(船越촌) 168명, 니이촌(仁位村) 186명, 누가다케촌(奴加岳村) 46명으로 1,174명이었다. 이들 재일조선인들은 90%가 조련 대마본부에 참여했다.
쓰시마는 일본 본토 큐슈(九州)와 132km 떨어진데 반해, 거제도와는 48km에 불과한 거리의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섬을 제외한 109개의 섬과 전체 80%의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섬의 산업은 수산업과 원시림을 이용한 목탄 산업뿐이다. 지금은 한국인들을 위한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쓰시마 경제를 살리고 있었던 것은 목탄이었다. 그 목탄을 생산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바로 재일조선인들이었다. 1946년도 목탄생산은 86만 6천톤이었으나, 재일조선인들이 대거 떠나면서 1946년도에 할당된 목표량 45만톤을 겨우 채우고 있었다. 대부분 목탄은 나가사키(長崎)·사세보(佐世保)·히로시마(福岡)로 팔려갔다.
1948년 6월 큐슈 각지의 조련 연맹 지부들은 쓰시마의 행정기관과 함께, 목탄 생산을 높여 달라는 호소를 들어주기도 했다. 또한 한국전쟁 3년 동안 쓰시마의 목탄 수출액은 약 1억원에 육박했다. 1953년 6월 현재 쓰시마의 목탄 연생산량은 목탄 25만톤(630만원), 땔나무 20만톤(5백만원), 삼나무 목재 30만톤(4천만원), 소나무 목재 5만톤(4천만원)이었다. 쓰시마는 한국전쟁 기간 중 한국에 수출하여 큰 이익을 남겼다. 재일조선인들의 노동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시마 사람들과 일본정부는 ‘쓰시마 경제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을 반공이데올로기 잣대로 탄압하거나 강제추방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한국전쟁 직전, 조련게 재일조선인의 활동
1945년 10월 15일 재일조선인들의 단일조직인 조련이 일본 각지에서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조선인의 귀국대책, 징용노동자의 귀국여비 및 식량대책,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의 숙청 등을 요구했다. 10월 결성된 조련 쓰시마본부는 중앙본부와 큐슈 지역의 지부와 연결되어 강력한 조직을 만들었다.
1948년 남한단독정부 수립 직전인 5월 30일 쓰시마의 중심지인 이즈하라마치(嚴原町) 이치리키(一力)에서 조선인연맹 큐슈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는 조선인의 생활권 옹호, 밀항방지책, 쓰시마 목탄 증산 등을 협의하고 지역 경찰서장과 우호친선을 다졌다. 조련의 결성에 놀란 일부 남한 출신자들은 1949년 1월 22일 대한민국거류민단 이즈하라지부를 결성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이즈라하 고토우여관(古藤旅館)에서 나가사키, 사가현 등의 민단 간부 수명과 함께 회원 10여 명이 모여 결성식을 치뤘다.
이날 조련 쓰시마본부는 하루 전날 이즈하라에 모여 이승만의 ‘대마도를 반환하라’는 요구에 동조하는 민단에 향해 ‘쓰시마 도민의 적’으로 간주하고 분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련계 조선인들은 하찌만구 신사 앞까지 거리행진을 벌이고 민단 결성을 반대하는 전단을 배부했다. 그러자, 쓰시마의 여러 경찰서에 있던 경찰관들이 총동원되어 조련계 조선인들을 감시하고 민단 결성식 장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하지만 이날 조련계 조선인들은 평화적 시위를 마치고 자진 해산했다.
이날 민단 쓰시마 이즈하라 지부는 수십 명의 회원과 나가사키 등지의 민단에서 파견한 30명과 평화롭게 결성식을 가졌다. 민단 단장인 권혁두(權爀斗, 28)는 “소문에 현혹되지 말고 남북통일을 위해 나아가자”고 말했다. 민단 쓰시마 지부의 결성 이후 조련 쓰시마본부는 1949년 2월 8일 쓰시마극장에서 ‘앞으로 정세에 대응하고 거류민단 반대전선을 강화하고자’ 조선인연맹 쓰시마남부지부 결성식을 개최했다. 이날 오후 1시부터 열린 결성식에는 남녀노소 150여 명이 참석하여 조선동포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간부에는 하 위원장과 박학효 부위원장을 선출했다.
또한 쓰시마에 있는 재일조선인들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인학교를 1948년 6월에 설립하여 자체적으로 운영했다. 1949년 6월 1일 창립 1주년을 맞아 기념축제를 열어 학생 42명이 참석하여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쓰시마 전역에 있는 조선인 초등학교는 이즈하라(嚴原)·케치(鷄知, 이즈하라)·미네(峰, 미네쵸)·니타(仁田, 카미아카타)·사스나(佐須奈, 카미아카타)·킨(琴, 카미아카타)·니이(仁位, 토요타마)·후나코시촌(船越村, 미쯔시마)· 요시가우라(芦ケ浦, 미쯔시마町)·사가(佐賀, 미네촌) 총 9곳이다. 각 학교에는 조선인 교사 2명씩 배치하고 조선어, 일본어, 산술 등을 가르쳤다.
남북의 분단과 이승만, ‘대마도 우리 땅’ 발언
앞에서도 짧게 언급했지만 쓰시마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들은 남북한으로 분단되면서 서로 갈등 아닌 갈등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쓰시마 조선인들이 북쪽 출신이라고 조련에 가입한 것은 아니다. 이영순의 부친과 같은 조선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해방 직후 남한은 식량사정도 원활하지 않았고 현지의 재산이나 가족들도 있으니 떠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보다 현지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가 더 큰 이유였다. 또한 조련이 재일조선인들을 위해 앞장서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쓰시마의 재일조선인들은 남한정부의 ‘쓰시마 반환’ 발언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1948년 1월 남조선과도입의원은 일본정부에게 “일본이 대륙 침략기지로서 점거하였던 만큼 쓰시마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은 “우리는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고 천명했다. 1949년 1월 7일 내외 기자단 회견에서 이승만은 “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350여 년 전 임진왜란시까지 소급하고도 싶으나 우선 최소한도 과거 40년간에 피해배상을 요구하겠고 대마도는 찾아야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재일조선인 사회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였다. 이승만이 얘기한 ‘쓰시마 반환’을 주장한다면 현지에서 고립되거나 생명과 재산을 버리고 가족들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조련계 재일조선인들은 1948년 8월 15일 조선인민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자치 통일정부수립, 미소 양군의 철수, 이승만 대통령 일당을 배격하고, 고베(神戶), 오사카(大阪)의 학교 소요사건의 관련자들을 석방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요구사항에 ‘쓰시마 반환’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으며, 또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한 대목도 여러 가지 정세를 감안한 고민이 엿보인다. 단지 ‘이승만 대통령 일당을 배격’한다고 말했다.
한편 쓰시마 현지는 격양되게 반응하고 있었다. 1948년 8월 24일 쓰시마 내의 주요 인사와 주민들은 나가사키현에 귀속되어 있는 쓰시마를 후쿠오카현으로 바꾸어달라는 요구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전 도민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인식하고 국회에 반대청원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도쿄변호사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쓰시마 출신 아비류(阿比留兼吉, 백제계통의 성씨)는 한발 더 나아가 “민족자결을 무시하고 무리한 요구이며 장래 지리적으로 우리 대마도를 공산주의 최초의 방파제로서 철저하게 지켜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전제하고 “언제 북한이 남한을 점령할지 모르니, 반공의 사상 아래 미영 연합국과 함께 대마도 반환 요구에 맞서야 한다”며 모든 도민들이 서명하여 탄원서를 미군 사령부에 제출하자고 선동했다. 심지어 아비류의 동생인 이즈하라중학교 교사는 1학년생 57명을 동원해 토론회를 개최하고 이승만의 발언을 놓고 정면 비판했다.
쓰시마 원주민들의 반대여론은 재일조선인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49년 이후 일본은 재일조선인에 대해 유화책에서 탄압책으로 전환하였다.
한국전쟁, 일본경찰의 재일조선인 탄압
남북한의 정부 수립 이후 일본인의 태도는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승만의 쓰시마 반환 요구에 더욱 궁지에 몰린 재일조선인들은 내우외환을 겪어야 했다. 1949년 9월 8일 일본정부는 조련과 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이하 민청)을 ‘폭력주의단체’로 지정하고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남한 정부는 한국국적을 가진 자를 제외한 재일조선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특히 이승만은 “재일조선인 대부분이 빨갱이이며 입국시 철저하게 조사” 또는 사상검증을 해야 한다고 반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러한 일본정부와 이승만의 태도는 쓰시마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남한 출신 목탄 노동자들은 한순간에 고향을 잃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949년 9월 12일 나가사키현(長崎縣) 지방과장과 법무부의 사무관이 무장경관 50명과 함께 조련쓰시마본부를 해산시키고자 도착했다. 다음날 13일 오전9시 케지촌(鷄知村)의 조선인연맹 대마본부를 방문하고 박 위원장, 윤 선전부장 이하 연맹간부 다수에게 지방과장이 “법무총재대리로 해산지령서를 전달한다”고 말하자, 조련 간부들은 “대마연맹은 결성 이래 일체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므로 해산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또한 박 위원장은 “현 당국이 50명의 무장경관을 데리고 와서 강제적으로 해산시키려는 태도가 바로 폭력주의다”라며 일본정부를 비판하고 해산을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정부 관계자 등은 조련 간부와 4시간 동안 토론을 벌인 끝에 오후 1시 조선인연맹측에서 조련의 재산과 하부조직들을 정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폭력사태 없이 철수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49년 9월 18일 쓰시마에 있는 조선인초등학교 9개교를 즉시 폐쇄할 것을 요구했다. 9월 20일 나가사키현 지방과 단체조사계 주임과 교육위원회 간부들이 이즈하라, 케지, 후나코시, 요시가우라의 조선인학교의 해산을 권고했다. 이들은 22·23일 양일간 사스나, 니타, 미네(三根), 사가에 소재한 조선인학교를 방문하여 해산권고와 건물을 접수했다. 조선인초등학교 아동 170명은 당장 교육 받을 곳이 사라졌다. 조선인들은 1949년 10월 29일 케지마치 조선인학교 운동장에서 조선인학교 학부모대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케지마치 의회에 전달했다. 이들은 ▲조선인교원의 채용 ▲교내외에 민족적 차별절대반대 ▲조선인과 일본인 아동의 충돌시 교원이나 교장이 전적으로 책임질 것 ▲ 교사의 아동에 대한 체벌 절대반대 ▲조선인 아동의 자치회를 인정할 것 ▲조선인 아동에 대하여 의복 등을 무상배급 등 6개항을 결의하고 31일부터 개회 중인 케지마치 의회에 요청했다.
케지마치 의회는 오후 본회의를 휴회하고 조선인 측과 협의회를 개최한 결과 6개항 요구에 대하여 여러 관계 방면에 전달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형식적인 답변을 했다. 당시 케지 조선인초등학교에는 1학년 18명, 2학년 9명, 3학년 20명, 4학년 11명, 학년 6명 총 65명이며, 조선인 교원은 2명이 있었다. 한국전쟁 직전 1950년 1월 16일부터 31일까지 모든 재일조선인들에게 다시 외국인으로 재등록하도록 압박했다. 해방 이후 급증하는 밀항하는 한국인들을 감시하고 관리하고자 추진된 일이다. 쓰시마 행정기관은 하루에도 수십 명의 밀항자들로 붐벼 더욱 강화된 조치를 실시했다. 우익단체에서는 지금과 같은 지문날인 제도를 먼저 시행하여 밀항자들을 색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즈하라에 있는 약 300명의 재일조선인들은 어쩔 수 없이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경찰은 해산된 조련계의 주요 인물들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이후 재일조선인들은 어떤 공식행사도 못하고 숨죽여 지냈다. 1950년 7월 5일 해방신문 케지지국에서 반전 내용을 담은 선전문이 발견되었다고 일본경찰이 급습했다. 이날 경찰은 지국원 방성근(方成根, 30), 유일만(柳一萬, 23) 두 명을 체포하고 선전문 7천 282매를 압수했다. 또 지국사무실에 나온 위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인등록증 9매 등을 수거하고 밀항과 관련되어 있는지 조사하기도 했다. 이날 경찰은 체포된 두 명과 쓰시마에 거주하는 일본공산당원 일본인의 가택을 수색하여 어떤 관련이 있는지 추가로 수사를 벌였다.
일본경찰은 토요키마치(豊崎町) 히타카츠(比田勝) 마을이 일본공산당과 북한공산군의 연락 거점지라고 내사하고 있다가, 1951년 4월 북한군 대위 경주지구합동위원장 정형진(鄭亨震)과 정동원(鄭東源, 40)을 밀입국한 것으로 판단하고 외국인등록령 위반 용의자로 체포했다. 경찰은 취조과정에서 킨촌(琴村)에서 어업을 하는 김봉말(金奉末, 41), 김숙자(金叔子, 23), 목탄제조업자 이질암(李質岩, 27) 등을 일본공산당 당원으로 간주하여 함께 체포했다.
정형진은 1949년 2월 한국정부에서 요주의인물로 관리하고 있던 인물로 조선공산당과 일본공산당 사이에서 활동했다고 지목됐다. 일제본경찰은 정형진을 쓰시마에서 활동하는 간첩으로 판단하고 나가사키와 교토 재일조선인들까지 확대하여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여러 사건들이 터져 나오자 숨죽여 있던 민단 쓰시마 이즈라 지부는 공세에 나섰다. 이즈하라에 거주하는 김영희(金英熙)는 1952년 8월 6일자『대마신문(對馬新聞)』에 기고하여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해 감정이 악화되어 유감스러운 일”이며 “모든 한국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보면 곤란하다”고 조련계에 대해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재일조선인, 쓰시마를 떠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쓰시마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은 1958년 12월 1일 현재 2천 525명이었다. 쓰시마 전체 인구 6만 7천 140명과 비교한다면 적은 숫자는 아니다. 지역별로 보면 이즈하라에 498명, 미쯔시마 384명, 토요타마 429명, 미에 218명, 카미아가타 202명, 카미쯔시마 794명 등이었다. 그러다가, 1962년 6월 토요타마에 5세대 18명 등 1,600명의 재일조선인들이 북한으로 귀국해 버렸다. 나머지 민단 소속의 일부 재일조선인만 남게 됐다. 이들이 떠나자 쓰시마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쓰시마의 주요 수출품목인 목탄 산업은 폐쇄되었고 경제적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부터 1962년까지 쓰시마에 뿌리내린 재일조선인들은 남북의 분단, 일본정부의 탄압, 조선인의 교육마저 무너진 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것이다. 2007년 기준으로 약 6만 5천명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섬으로 바뀐 쓰시마에는, 당시 재일조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최근 독도문제로 불거진 쓰시마 영토 분쟁으로 쓰시마 원주민들은 한국인을 반갑게 맞아 주지 않고 있다. 작년에는 쓰시마 이즈하라에서 일본 우익단체들의 한국인들을 규탄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61년 전과 다르지 않은 풍경은 쓰시마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 곳이 어떤 땅인지, 쫓겨 간 재일조선인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는지 등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 이글은 2010년 1월부터 민족21에 연재하고 있는 현대사 발굴 기사입니다(www.minjog21.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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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중한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