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점수 회장 조영석 총무 김 정춘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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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서후면 향우회 발자취
1990년 3월에 재경서후면 향우회 발기인 모임이 종로 3가 함흥냉면집에서 개최 되었다,
초대회장으로는 김규벽씨, 초대총무로는 류형훈씨로 내정 되었다,
총무는 바쁜 직장의 일과 중에도 각 동별 친목회와 화수회를 파악하여 명단을 작성하고 엽서를 보내서
창립총회를 홍보하고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제1회 재경안동 향우회 창립총회 겸 야유회가 우이동 그린파크호텔 야외수영장에서 개최 되었는데
서후면 에서는 150여명이 참여하는 등 성황리에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무리 하였다,
정기총회 겸 야유회
창립총회에서 서후면 향우회는 고문, 회장, 총무, 임원, 동별책임자를 선임하여 명실상부한 조직이 결성 되었다,
초대 김규혁회장, 제2대 조천기회장, 제3대 김홍섭회장, 제4대 조상영회장, 제6대 조석천회장, 제7대 류형훈회장이
연임하면서 현 김시현회장 으로 오늘에 이르고있다,
1995년 제10차 총회때 까지는 6년간 류형훈 총무는 서후면 향우회를 정착 시켰고 2대 조상영 총무는 조직을
활성화 시켰다. 지금은 이상규 총무가 수고하고 있다, 총회 겸 야유회는 1999년 제10차 총회때 까지는 우이동
그린파크호텔 야외 수영장 에서 열렸고 그 이후로는 매년 자리를 옮겨 6월에 정례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자랑스러운 고향에 자부와 긍지를 느낀다
서후면장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시민체전에서 2008년부터 연속 4연패 하였고 시민화합행사에서 2009년부터 2년 연속 최우수상을 받는 등 그 위상이 날로 격상되고 있다,
2011년 5월 29일 제21차 재경안동 향우회 총회 겸 체육대회가 국회의사당 대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신도흠 면장은
동물패를 데리고와서 신명나는 자리를 펼치어 타 향우회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게 하였다,
그 덕택에 서후면 향우회는 종합2위를 하였다.
고향발전을 위해서 대동단결하고 있다
재경서후면 향우회와 서후면은 유대를 강화해서 서후면을 발전 시키고 재경 향우회를 활성화 시키는데
합심협력하고 있다, 서후면과 출향인사들은 서후면행사와 재경향우회 총회에 서로 긴밀히 교류하면서
친목을 다지고 고향발전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할것을 제21차 정기총회에서 재차 다짐 하였다,
서후면이 아름답고 살기좋은 고장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을 확신한다.
<자료제공:재경안동 향우회 2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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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후면 세거지 소개-
서후면은 처음에는 삼한(三韓)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에 속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안동의 옛 이름인 길주(吉州)에 속하였다. 원래 안동부(安東府)의 서쪽에 있어 부서면(府西面)이라 하였다. 영가지에는 부의 서쪽 마을로 용산(龍山), 상계곡(上桂谷), 장가(長嘉), 하계곡(下桂谷), 회곡(檜谷), 수동(水東), 상단지(上丹地), 하단지(下丹地), 호골암(虎骨巖), 소야(所野), 금지(金地), 원동(院洞), 지북(旨北), 대도솔(大兜率), 창풍, 성곡(城谷), 속지(束知), 칠전(漆田), 추동(楸洞), 유점(鍮店), 고태장(古胎藏), 가야곡(佳野谷), 저전(苧田), 차산(次山), 우두산(牛頭山), 이송천(二松川), 양재(陽才), 거진(巨津), 상두곡(上杜谷), 하두곡(下杜谷), 율리(栗里) 등 31개 촌을 관할하였다. 그후 숙종(肅宗) 때에 서선면(西先面)과 서후면으로 분리되어 용산, 상계곡, 장가, 하계곡, 회곡, 수동, 상단지, 하단지, 호골암의 9개 촌은 서선면에 나머지 22개 촌은 서후면에 부속되었다. 그후 고종(高宗)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대두서(大豆西), 이송천, 경광(鏡光), 가야, 추산(楸山), 광평(廣坪), 내동(內洞), 자품(者品), 창풍, 이개(耳開), 보현(甫峴), 성곡(城谷), 옹곡(瓮谷), 능동(陵洞), 금상(金上), 금하(金下), 상태장(上胎庄), 하태장(下胎庄), 화원(花原), 명동(鳴洞), 증거(增巨), 송내(松內), 평촌(坪村), 대석(大石), 저전 등 25개 동리로 개편되었다. 1914년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서선면(西先面)의 토탄리와 북후면(北後面)의 소부동(小夫洞), 도진동(道津洞) 일부를 병합하여 현재에는 11개 법정동에 15개 행정동으로 개편하여 관할하고 있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풍산천(豊山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동쪽은 송야천(松野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면의 대부분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풍산천과 송야천 끼고 형성된 농경지에 벼농사를 짓고 특용작물로 산약, 딸기, 느타리버섯 등을 재배하며 한우 사육으로 인한 축산업이 흥하다. 전체 세대수는 1,508세대에 인구는 4,418명이다.
<광평리> 광평리는 북후면 도촌리와 경계하고 있다. 국도 5호선이 리의 동쪽을 가로질러 북후면으로 연결된다. 광평이란 지명은 천등산 자락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많아 너븐들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넓을 광(廣) 자에 평평할 평(坪) 자를 써서 광평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다. 자연마을 현황은 1리에 너븐들(광평), 추산 2개의 마을에 64세대 194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으며, 2리에는 진사리, 가야, 연등골, 안골(內洞) 등 4개의 마을에 68세대 172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 너븐들·너븐돌·광평(廣坪) 이 마을은 지금부터 500여 년 전인 조선 선조 30년 추씨(楸氏)라는 선비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때 마을 앞에 큰돌이 있어서 너븐돌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이 돌은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깨어 버려 찾을 길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 앞에 큰 들이 있다하여 너븐들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 가야리·추산동·내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평리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 독산(獨山):광평 중앙에 외따로 있는 산이라 해서 독산이라 한다. ◇ 명실골:독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이른다. ◇ 뱀박골:너븐들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뱀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새 터:너븐들 위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신기라고도 한다. ▶ 가래실·추동·추산(楸山) 예부터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가래나무 추(楸)자를 붙여 추동이라 하였으며 일명 가래실이라고도 한다. 조선 선조 때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이란 사람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로는 단오 명절이 되면 고려시대 때부터 마을 뒷산의 큰 소나무에 그네를 매고 동네 사람들이 추천( 韆)을 즐겼다 하여 추산(楸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 원당골·원당곡(院堂谷):추산(楸山)에서 북동쪽으로 1㎞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 원당사(院堂寺)라는 절이 있어 원당골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인가도 없다. ◇ 성주골:추산(楸山)에서 북동쪽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며 1700년경에 이 곳 주민들이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무당이 성주굿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은 인가는 없고 농토로 변하였다. ▶ 개실·가야(佳野) 시내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영주 방면으로 향하여 제비원미륵불을 지나면 저전리의 양지마이다. 이 마을에서 서후면 소재지인 성곡리와 봉정사로 진입하는 지방도로가 국도에서 갈라진다. 이 길을 따라 들어와 송야천을 건너면 오른편으로 갈라지는 시멘트포장 도로에 가야라고 적은 푯돌을 볼 수 있다. 이 푯돌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들어서서 1.5km정도 서북쪽으로 나아가면 천등산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 가야이다. 개목사는 이 마을에서 오른다. 너븐들의 서쪽 골짜기로 개목산성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초기에 맹사성(孟思誠)이 이곳을 지나가면서 천등산 자락에 펼쳐져 있는 들을 보고 '아름다운 들이구나'하고 크게 감탄하여 가야(佳野)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개실이라고도 한다. ◇ 못밑들:가야못 아래에 있는 들을 못 밑에 있다고 못밑들이라 한다. ◇ 가야들: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펼쳐져 있는 들이다. ◇ 송 골:개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송골이라 한다. ▶ 연등골·연등곡(蓮登谷) 가야마을 조금 못 미쳐 있는 가야못 앞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만날 수 있다. 마을을 이은 뒷산의 형국이 연꽃줄기같이 길게 이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봉수지(烽燧址):개실마을과 연등골을 경계로 나누는 능선에 있는 봉수지이다. ◇ 보우골:봉화를 올리던 봉수대가 있다고 해서 보우골이라 한다. ◇ 봉화못:연등골 마을 뒤편에 있는 못이다. ▶ 안골·내동(內洞) 저전리에서 가야마을로 접근하는 시멘트포장 도로의 초입에는 원뿔모양을 한 선돌이 2기 세워져 있다. 안골은 이곳에서 500m 정도 북쪽에 위치한다. 1700년경부터 진성(眞城) 이씨(李氏)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마을 앞이 거의 과수원으로 되었다. 마을이 골짜기 안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골 도는 내동(內洞)이라 부른다. ▶ 점마·옹기점·토점(土店) 1800년경부터 이 곳에 옹기를 굽는 굴을 만들고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라 하여 점마라 불려졌다 한다. 지금은 약초 재배와 밭농사를 주로 하며 옹기굴은 없어졌으나 마을의 어느 곳을 파보아도 붉은 흙과 옹기 조각이 나온다. ◇ 점마을골:옹기를 팔던 상점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긴발·진사리·장묘(長畝) 한국전쟁 이전에는 이 지역이 이랑이 길게 이어져 있는 들이었는데 그 후 차차 동리가 형성되어 지금은 20여 가구가 모여 살게 되었다. 이랑이 긴 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긴 장자에 이랑 무 자를 붙여 장무라 부르다가 장묘라 하였다. 이랑을 사래라 부르기도 하여 긴사래에서 진사리로 음이 변하였다. 마을 앞 논에 거북바위로 부르는 원뿔형의 입석이 있다. ◇ 고사골·모상골(帽上谷):저전리와 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계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산기슭에 삿갓을 쓴 듯한 바위가 있어서 모상골이라 한다.
<금계리>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속명은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옛날에 칭하기를 천년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사복정 배상지가 여기에 살았는데 백죽당이 있다. 용재 이종준, 판서 권예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 김성일이 임하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여염집이 가득하고 한 줄기 냇물이 중간을 가로질렀는데 70을 넘은 늙은이가 집을 잇대어 사니 온 고을에서 일컬어 노인촌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영가지의 기록을 보더라도 조선전기에 금계마을을 대표하는 성씨는 흥해 배씨와 안동 권씨였다면 조선 중·후기에는 의성 김씨인 학봉의 후손들이다. 학봉은 임하 천전에서 청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금계에 사는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1582년에 금계로 이주하였다. 학봉은 이 금계에서 실제 살았던 기간은 불과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자서절요]와 퇴계의 [자성록]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청성산 기슭에 석문정사를 지어 안동지역 학문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 선생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라 적었다.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로 유명한 곳인 금계리는 행정구역으로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주(原州) 변씨(邊氏), 의성(義城) 김씨(金氏), 안동(安東) 장씨(張氏)의 집성마을이다. 자연마을은 1리에 알실, 음지, 복당, 사망, 검제 등 5개의 마을에 116세대 306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리에는 미리미, 작장골, 마누이, 텃골, 경광 등 5개의 마을에 43세대 124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 500년 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 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여 천년불패지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 마을의 지형이 거문고 같다 하여 금지라 불렀다. ◇ 학봉종택(鶴峯宗宅, 風雷軒):학봉선생의 종택으로 원래 현 위치에 지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 가 자주 된다 하여 선생의 8세손인 광찬(光燦)이 그의 나이 27세이던 1762년에 현 위치에서 100m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 었다. 그러나 갑진년에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케 하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다. ◇ 소계서당(邵溪書堂):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던 학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선생의 강학지 소이다. 선생은 학봉의 11대 종손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퇴계학의 적전을 이었고 영남학파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 금계리 선돌:검제에서 금계 2리 미산마을로 들어가려면 금계천을 가로지르는 미산교를 건너 서 간다. 이 미산교에서 제방을 따라 80m 정도 서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 있다. 재질은 화강석 이며 크기는 길이 120cm 높이 70cm 정도이고 형상은 염소를 닮았다. 마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안동중학교에 근무하는 직원이 학가산에 갔다가 오는 길에 이곳에 있는 돌을 수레에 싣자 갑자기 코에서 코피가 났다고 한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직 원은 학교까지 이 돌을 운반한 후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동료 직원들이 환자를 급하 게 병원으로 옮겨 별별 치료를 다 하였지만 조금도 차도가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에 그 직원이 가지고 온 돌의 생김새가 신묘하여 이것 때문에 부정이 났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도로 제 자리에 갔다 놓았더니 병이 완쾌되었다고 전한다. ▶ 음막·을막골 서후면사무소를 지나 봉정사 방면으로 오르다가 오른편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로 사망마을에서 볼 때에는 서북쪽이다. 골짜기 안에 있어서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고 붙인 이름이다. ◇ 음막골: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이다. ◇ 불당재:올막 뒤에 있는 산이다. 불당이 있어서 불당재라 한다. ◇ 불당사: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부의 서쪽 15리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판서 권예가 선영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불타고 없어졌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석복산(石復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福)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福堂)이라 불렀다 한다. 단정(丹井)은 복당(福堂) 북동쪽에 있다. ◇ 구종가 터:학봉종가의 옛 터이다. ◇ 소복당(召福堂):소복산(召福山)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金氏) 종가(宗家)에 모여서 당유사(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金氏) 문중(門中)에서 1사람, 타성에서 1사람, 색장(色掌) 1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계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 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 동안 흉사에는 안가며 항상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 한다. ◇ 단정골:복당 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이다. ◇ 뒷 골:복당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마을 뒤에 있다는 뜻에서 뒷골이라 한다. ◇ 복병산(伏屛山):복당 앞에 있는 산으로 병풍을 둘러친 듯한 절벽이 있다. ◇ 빈솟골:뒷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김씨의 빈소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솔거리:복당 남쪽에 있는 마을 소나무가 많이 있어서 솔거리라 한다. ▶ 사망(仕望) 금계에서 단정을 지나 소복산 동편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조선시대 때에 이 마을에 사는 선비가 과거시험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매번 낙방한 나머지 자신의 소망을 담아서 마을 이름을 아예 벼슬 사(仕) 자에 바랄 망(望) 자를 써서 사망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알실·지곡(知谷) 행정구역으로는 금계 1리에 속하는 마을로 400여 년 전에 이 곳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그는 학문이 깊어 세상살이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고 전하며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미리 예언하였는데 대부분 적중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이 마을에 아는 것이 많은 선비가 살고 있다고 해서 알 지(知)자에 골 곡(谷)자를 써서 지곡이라 불렀다. 알실은 지곡을 우리말로 부른 것이다. 또한 알처럼 생긴 외딴 산이 있어서 알곡이라고도 한다. ▶ 미리미·미산(眉山) 금계의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금하리(金下里) 입구에 세 집이 살고 있었고 위에는 금상리라 하여 몇 집이 살았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탕건과 같이 생겼으며 눈썹 같다고 미산(眉山)이라 하였다. 또한 마을지형이 미르(용)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 경광(鏡光) 금계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경광서원이 있다.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음사(蔭仕)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사복시사에 오른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선생이 정국의 문란함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공조전서를 지낸 계씨(季氏) 상공(尙恭)공과 함께 안동으로 낙향하였는데 전서공은 풍천면 하회리에 정착하고 선생은 금계촌에 우거(寓居)하였다. 선생은 집 주위에 대나무와 잣나무를 심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나타내고 당호를 백죽당이라 하였다. 인조 때 사림의 발의로 금계동에 경광정사를 짓고 사당을 세워 선생의 절의를 기렸다. 숙종 때 병조판서의 증직이 내렸으며 경광정사가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지명은 경광서원이 있다고 해서 경광이라 한다. ◇ 배사골:옛날에 사간(司諫) 벼슬을 지낸 사람이 죽어서 묘를 쓴 곳이라 배사골이라 하였다. ◇ 작장골:부자가 살았다고 해서 작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효자문 건너에 있다. ◇ 멀미들:송야천이 휘감아 도는 머리에 있다고 멀미들이라 한다. ◇ 높은 절골:옛날 높은 곳에 절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한터들:송야천 변에 있는 넓은 들이라는 뜻에서 한터들이라 한다. ◇ 거너리:송야천을 사이에 두고 안동시 노하동과 마주하고 있다. 송야천이 좁은 폭을 이루어 흐르다가 이곳에서 폭이 넓어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만운(晩雲)·마릉(馬陵)·효자문(孝子門) 텃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효자 정문(旌門)이 있어 효자문(孝子門)이라 하였다. 지금은 변씨(邊氏)가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논농사를 많이 하며 집 주위에는 과수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 만운이들:만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들이다. ▶ 텃골·기곡(基谷)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있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윗쪽은 동무지라 하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서 사과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동무지:텃골 위에 있는 마을이다. ◇ 부루골:동무지 안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명리> 상산(上山)은 일명 상산(商山)이라고도 하는데 서후면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천등산에서 굽이쳐 서후면 성곡리로 뻗어 내린 두 봉우리가 수려하다. 전설에 의하면 이 상산에서 위용이 대단한 용마(龍馬)가 태어났는데 이개리(耳開里)에서 귀를 열고 이 곳에서 와서 울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말우리라 하였다고 전한다. 명동이란 지명은 바로 말우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증거리, 송내동, 교동 일부와 서선면의 토탄리 일부를 병합하여 명리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방골, 진걸, 안마골, 두솔원, 옹기마, 말우리, 북쪽골, 독점, 예배당못 등이며 174가구에 46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송내(松內)·증거리(增巨里) 말우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부터 300여 년 전에 송림(松林)이 우거져 있어 송내라 하였고, 지금은 징거리라 한다. 2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벼농사를 주로 한다. ◇ 진걸골:진걸마을이 있는 골짜기이다. ◇ 앞 들:마을 앞에 있는 들이라고 진걸앞들이라 부른다. ◇ 쑤능골·수능골(水陵谷):진골 동쪽 산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의 논 3000여 평은 날씨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 농사가 잘되어 쑤능골 또는 수능골이라 하였다. ◇ 송내지:송내에 있는 저수지로 1943년 3월 5일에 준공되었다. 유지 면적이 3,450평이고 몽리 면적은 약 300두락을 급수할 수 있는 규모이다. ◇ 안 마:진골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안마라 부른다. ◇ 양지마:진골에서 빛이 잘 드는 곳이라고 양지마라 한다. ◇ 음지마:진골에서 음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 진 골:진성(眞城) 이씨(李氏) 송안군(松安君)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궁골 이라 부르기도 했다. ▶ 예배당골(禮拜堂谷)·검박골·서여곡(西汝谷) 옹기마의 북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송내 증거리(增巨里) 서편에 자리잡은 골이라 하여 서여곡(西汝谷)이라 하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서양인(西洋人)이 이곳에 정착하여 예배당을 지었다하여 예배당골이라 한다. 지금 파평(坡坪) 윤씨(尹氏)가 동성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 검박골산:검박골 마을 뒤에 있는 나지막한 산으로 해발 177m이다. ◇ 검박골:검박산 줄기를 따라 형성된 골짜기이다. ◇ 구예배당골:예배당못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원래 이곳에 교회가 있었으나 현 위치로 옮겼다. ▶ 방골·방앗골·방곡(方谷) 송내 징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입구에 큰 바위가 많아서 방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송내못이 있으며 진성 이씨(李氏)가 동성마을을 이루고 있다. ▶ 말우리·명리(鳴里) 옛날 상산(商山)에 있는 용소(龍沼)에서 용마(龍馬)가 탄생하여 이개동(耳開洞)에서 귀를 열고 이 곳에 와서 말이 울었다 하여 말우리 또는 마명동(馬鳴洞)이라 했으나 지금은 명리로 부른다. ◇ 말우리들: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국도 34호선이 지난다. ◇ 매봉재:말우리 뒤에 있는 산이다. ◇ 목근대:말우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 북적골·부적골 보리골 북쪽에 있으며 옛날 이 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 하여 북적골 또는 부적골이라 부른다. ▶ 옹점·독점(獨店)·석잠(石岑) 옛날 이 곳을 석잠(石岑)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외딴 곳에 주점이 있었다 하여 독점(獨店)이라 칭하여 왔다. 또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이라고도 하며 마평동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안 골:독점 안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아랫마을들:독점 아랫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 독점못:독점 마을 앞에 있는 작은 못이다. ◇ 앞 골: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긴 골짜기이다. ▶ 두실원·두솔원(兜率院)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관원(官員)이나 선비들이 왕래하다가 일모(日暮)가 되면 숙식하도록 두솔원(兜率院)을 설치하였다고 마을의 이름을 두솔원이라 한다. 원은 공무로 지방에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시설로 역과 역 사이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했던 국가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여관이다. 안동 지역에는 안기역을 포함하여 7개의 역과 제비원을 비롯한 17개의 원이 설치되었다. 두솔원의 동쪽에는 높이가 2.3m 정도인 미륵불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직전에는 불상에서 간장같은 땀이 흐르고 배꼽에서는 샘처럼 솟아 국난을 미리 예견하기도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이 이 석불(石佛)을 통과할 때 말발굽이 붙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조령(鳥嶺)을 빨리 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후대에 와서 이 미륵불에 당을 지어 미륵당이라 불렀다. ▶ 못건대·못곤대 지금 있는 못 위에 작은 연못이 옛날부터 있었는데 이 못 부근의 마을이라 하여 못곤대라고 했다. ◇ 못대골:말우리와 예배당못 사이로 나있는 길을 따라 오르면 펼쳐져 있는 골짜기이다. 못이 있는 골짜기라 해서 못대골이라 한다. ◇ 못대골못:못대골에 있는 못이라는 뜻이다. ▶ 금당고개·옹기마〔瓮器里〕 두솔원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약 150년 전에 이 곳에서 옹기굴(瓮器窟)이 있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현재는 안동과학대학 앞에서 풍산방면으로 오르는 고개이다.
<이개리> 행정구역으로 이개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다. 자연마을은 이개 1리에 귀여실, 와우실, 상이개 등 3개이며 79가구에 19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2리에는 보현, 망두골, 관두들 등 3개이며 34가구에 80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 귀여리·이개(耳開) 연산군(燕山君) 때 권차룡(權次龍)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상산(商山)의 용소(龍沼)에서 용마(龍馬)가 나와 이 곳에 와서 귀를 열었다고 하여 귀여리라 하였고 음이 변하여 궬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이개리라 한다. 용우물·용천(龍泉):이 마을의 뒷산인 상산의 상봉(上峰) 아래에 있는 우물로 예전에는 명주실 1꾸리가 다 풀려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 우물에서 용마가 나서 울고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 벗개골:귀를 벗었다는 뜻으로 곧 귀여리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귀여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앞 들:귀여리 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 감나무골:앞들과 마주하는 골짜기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어서 감나무골이라 한다. ◇ 용정골:용정못이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약실골:감나무골에서 등을 넘어 있다. ◇ 청림골:약실골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퉁점골:일명 유점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유기점이 있었다고 전한다. ▶ 웃귀여리·웃마·상이개(上耳開) 이개리의 윗 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만 산이 없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 골매기들:마을을 지켜주는 골매기가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 차돌배기골:자품리와 경계가 되는 곳으로 웃귀여리의 서쪽 골이다. ◇ 뒷 골: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라고 붙인 이름이다. ◇ 짐 골:지게에 땔감을 한 짐 짊어지고 오려면 힘이 들어 짐골이라 한다. ▶ 와우실·와우곡(臥牛谷) 귀여리의 북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 큰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어서 와우실이라 한다. ◇ 와우실골: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골짜기를 와우실골이라 한다. ▶ 보연(普淵)·보현(普峴) 이개리 입구에 있는 마을로 동쪽이 틔이고 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옛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어 이 못을 주민들이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보현(普峴)이라 칭하였다. ▶ 관두둘·관두평(寬斗坪) 귀여리와 보현 사이에 있는 평평한 들을 끼고 있는 마을로서 의성 김씨와 안동 권씨가 살고 있다. ◇ 앞 들: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 큰 들:귀여리와 앞들 사이에 있는 넓고 평평한 들이 크다고 이름지었다. ◇ 논고개골:관두들 앞에 있는 골짜기로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계단식 논이 고개를 이루고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 하구 보현(普峴)의 아래 마을 입구에 있다고 하구라 한다. 경주 이씨와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이개리의 입구라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 도래골:하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떨어져 있기에 도랫골이라고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약초와 사과로써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 망두골 도랫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둘러 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고,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주로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이다.
<자품리> ▶ 재품·자품(者品) 구한말(舊韓末) 본 마을에 학림송(鶴林松)이란 사람이 16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정 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공(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마을에 까지 널리 알려져 이때부터 이 마을은 재곡의 품(品)을 받은 선비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재품(才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재(才)' 자를 '자(者)' 자로 바꾸어 자품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 광흥사(廣興寺):본 사찰은 행정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자품동 학가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거찰로서 전해오다가 1946년 큰 화재로 대웅전 6칸이 소실되었고, 1954년에는 극락전이, 1962년에는 학서루와 대방이 무너져 현재 응진전·명부전·응향각·산령각·요사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은행나무는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에 견줄 만 하다. 광흥사는 학가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그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으로 보이는데 이 절의 위치는 학이 날개를 공중으로 솟아오르려는 순간처럼 넓게 벌리고 있는 모양에 해당 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라 이름지었다. ▶ 느릇·천주(天柱) 자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학가산의 정상 바로 아래에 해당한다. 선암사가 이 마을에 있다. 지명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이 하늘 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느릇하다(느릿하다)’하여 느릇이라 불렀으며, 학가산의 정상으로 오르는 깍아 지른 절벽이 하늘을 받쳐주는 기둥과 같다고 해서 천주라 하였다. ◇ 뒷 골:천주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 선암사(구 애련사)로 오르는 길목이다. ▶ 월래·창풍(昌豊) 대두서리에서 풍산천을 따라 북쪽으로 오르면 개천들과 개천못을 따라 길게 자리잡은 마을이 창풍이다. 웃창풍과 아랫창풍 창풍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운중침월(雲中沈月)이라는 길지가 있어 월래(月來)라고 칭하다가 이 마을이 점차 번성하여 가자 창성할 창 자에 풍성할 풍 자를 써서 창풍(昌豊)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한다. ◇ 개 천 못:학가산 깊은 골에서 흘러오는 물줄기가 모여 만들어진 저수지이다. 주위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하늘을 연다는 뜻에서 개천지라 했다. ◇ 구억들·구먹들:개천지를 중심으로 주위에 넓은 들이 있어서 구억들이라 했다. ◇ 정 자 골:개천못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예전에 정자가 있었다고 정자골이라 한다. ◇ 물방아골:웃창풍에서 천주로 향하는 골짜기이다. 옛날 물레방아간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구헤티·백현(白峴) 학가산의 동쪽 기슭에서 천등산의 서쪽인 높은 지형에 위치한 마을로서 북후면 월전리와 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이 마을의 북쪽에 흰 운모석이 나는 광산이 있어서 운모를 실어 나르다가 흘려서 고개가 흰색을 보인다고 해서 백현(白峴)이라 부르며,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 상 백 현:백현 마을 중에 윗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 샛말·헤티·중백현(中白峴)·간리(間里):자품과 백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간리라고 부르며 백현 남쪽 1㎞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태장리> 고려 공민왕(恭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 구역 개편시 태장(台庄)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현재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다. 자연마을은 1리에 중태장, 하태장, 가라골 3개이며 2리에 상태장과 화원 2개이다. 가구수는 135가구에 344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 중마·중태장(中台庄) 태장의 중간부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중마·중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서후면 소재지에서 저전리로 통하는 지방도를 따라가다 봉정사로 진입하는 삼거리에서 저전리를 향하여 나아가면 도로 왼편에 김태사신도비각이 보인다. 안동김씨태장재사는 그곳에서 조금 더 안쪽에 있으며, 김태사단소는 재사 뒷편 산에 있다. ◇ 앞 들:중마 앞에 있는 논을 마을 앞에 있다고 해서 앞들이라 한다. ◇ 당 고 개:중마에서 성곡리로 향하는 고개에 예전에 당이 있었다고 한다. ◇ 당고개들:당고개 주위에 펼쳐져 있는 논밭을 당고개 이름을 따서 당고개들이라 한다. ◇ 태 장 들:신도비각 앞 개울 건너편에 있는 들을 태장들이라 부른다. ▶ 아랫태장·하태장(下台庄) 이 마을은 태장의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태장·하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유적으로는 김태사단소가 있는 마을의 입구을 가리켜주는 김태사단소동구각자(金太師壇所洞口刻字)라 적은 바위 글씨와 학천정(鶴天亭), 송은정(松隱亭)이 있다. ▶ 학천정(鶴天亭) 의성 김씨들이 조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당호는 학가산의 학자와 천등산의 천자를 따서 학천이라 지었다. ▶ 송은정(松隱亭) 양주 송씨들이 조상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이다. ▶ 김태사단소동구각자(金太師壇所洞口刻字) 이 바위 글씨는 학천정에서 동남쪽으로 30m 정도 아래 개울가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글씨이다. 김태사 단소 입구를 알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새긴 것이다. ▶ 가라골·가을골 ·추곡(秋谷)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에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추곡파(秋谷派) 김순귀(金順貴)란 선비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가을골이라 불리다가 추곡(秋谷) 또는 가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마을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 ▶ 가라골 느티나무 가라골에 있는 둘레가 네 아름 정도의 큰 느티나무인데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하여 뿌리를 좀 잘랐더니 별안간 마을에 푸른 불이 나기 시작하여 온 마을의 여기저기에서 잇달아 불이 일어나므로 도저히 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불을 끄기 위하여 무엇으로든지 불을 때리기만 하면 곧 꺼졌다가 다시 살아나므로 마을 사람들이 겁에 질려 이사가는 사람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의논을 모은 결과 신목의 뿌리를 자른 후부터 이 같은 일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을 알고 느티나무 앞에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큰굿을 하니 그 후부터는 이 불안스러운 불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한골·화언(花堰)·화원(花原)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 경발(慶發)이라는 효자(孝子)가 화원지(花原池)라는 못에 고기를 길러서 부모를 봉양하고 효도를 하였다 하여 방원(芳原)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어느 따뜻한 봄 날 고승(高僧)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천등산 천등굴에서 수도를 할 때에 밖을 내려다보니 봉정사 맞은편 산들이 모두 진달래꽃으로 덮여 있어 꽃의 언덕이란 뜻에서 화언(花堰)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 천등산(天燈山) 서후면(西後面) 태장리에 있는 산으로 대망산(大望山) 또는 개목산(開目山)이라고도 한다. 태백산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한 갈래 지맥이 봉화 서벽에서 옥석산을 일으키고, 다시 동으로 뻗어 문수산을 일으켰으며 그 줄기가 남으로 뻗어 내려 험한 곳이라고는 하나 없는 맑고 고운 토산(土山) 천등산을 이루었다. 이 산은 솔숲이 울창하고, 해발 576m의 나지막한 산이나 뒤로 백리 앞으로 2,3백리를 무릎 아래 깔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초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 「안동 땅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기운 때문」이라 하여 산 이름을 개목산으로 고쳐부르게 하였으며 동쪽에 있는 흥국사를 개목사(開目寺)로 고쳐부르게 했는데 과연 그 후로부터 소경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산은 안동의 명산으로 꼽혀 여러 군데 명소를 지니고 있다. 이 산 정상 조금 아래에는 의상 조사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능인대덕이 수도했다는 천등굴이 있고 동쪽엔 신라 고찰인 개목사가 있으며 남쪽엔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開目山城)이 있고 그 조금 아래 우리 나라에서 목조 건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가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도 있다. 천등산이란 이름은 고승 의상조사가 수도를 위해 대망산 큰 바위 밑에서 풍우한서(風雨寒暑)를 견디며 진리 탐구에 전념하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밤에 천녀(天女)가 나타나 말하기를 '소녀는 천국 상제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강림하였는데 귀랑(貴郞)의 벗이 되고자 하오니, 원컨대 동굴 함이 어떠하오'하니 의상은 대로하여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안위를 원하는 자가 아니고, 또 천명지위(天命之謂)는 부당지사(不當之事)니 즉시 귀가하라'하고 천녀의 유혹을 뿌리쳤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하늘에서 등불을 비추어 득도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등불을 비추어 공부를 마치고 득도에 이를 수 있게 하였다고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개칭하고 그 큰 바위굴을 천등굴(天燈窟)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옷태장·상태장(上台庄) 고려 공민왕(恭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 고태장촌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태장(台庄)이라 개칭하였는데 태장동(台庄洞)의 제일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웃태장·상태장(上台庄)이라 한다. ◇ 분처골:새못 위에 있는 골짜기이다. 돌부처가 있는 골짜기라 해서 분처골 또는 부처골이라 한다. ◇ 새못골:웃태장 북서쪽에 있다. 새로 생긴 못이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 태 봉:마을 앞에 있는 산이다. 고려 때 궁중에서 이곳에 태를 묻었다고 해서 태봉이라 한다.
<교리> 교리는 송야천을 경계로 하여 안동시 노하동과 마주하고 있다. 시내에서 솟밤다리를 건너 봉정사로 향하는 지방도로와 연접한 마을로 남쪽으로는 풍산읍 막곡리와 경계하고 있다. 교리라는 지명은 안동의 옛 지명인 복주 때에 이 지역에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향교골 또는 행겟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리와 대석동을 병합하여 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새마을, 평촌, 한석골, 시묘골, 운곡 등 5개 마을에 98세대 294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 새마을·새마·신촌(新村) 조선 성종(成宗)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진주(晋州) 하씨(河氏)가 선산으로 이거 할 때 한 사람은 선산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외가에서 피신하며 살았다. 안동 권씨 사정공(司正公)이 그 사람을 사위로 삼게 되어 이 곳에 살았다고 하여 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 소빰들:새마 앞에 있는 넓은 들이다. 솟밤다리와 연접해 있는 들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 큰골:새마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원당골:창렬서원 조금 못 미쳐 있는 골짜기로 서원이 인근에 있어서 원당골이라 한다. ▶ 평촌 본래는 가옥이 없었는데 산 밑 들 가운데에 터를 잡으니 평지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평촌이라 부른다. ◇ 평촌들:평촌 앞에 있는 넓은 들이다. ◇ 남우골:시밋골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한석골·대석동(大石洞) 마을 뒷산에 벼락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어 대석골, 한석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벼락바위는 사두(巳頭)재에서 한 석수장이가 돌을 깨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며 근처에 무덤이 있다고 전한다. 고려(高麗)예의판서(禮義判書) 권인(權靷)의 유허비가 있다. ◇ 대석지(大石池):마을 입구에 있는 못을 가리킨다. ◇ 한석골:평촌들에서 한석마을로 이어져 있는 긴 골짜기를 말한다. ▶ 시무골·시묘골(侍墓谷) 참봉을 지낸 권기(權紀)란 사람은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모친상을 당하자 이곳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여 시묘골, 시무골, 시밋골이라 부른다. ◇ 모방골:시묘골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새낙골:시묘골의 안산이라 할 수 있는 대표산의 북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시묘골의 남쪽이다. ▶ 권기(權紀) 선생의 효 선생은 조선 명종 때(1545년) 지금의 풍산읍 송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덕스럽고 행동이 매우 단정하였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어머니를 여의고 3년간 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음은 물론 어머니의 산소 곁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죽은 사람이 묻힌 산소를 지키며 살아있을 때처럼 문안을 드리고 지키는 것)를 하였다. 선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고서(古書)를 탐구하여 백가잡서(百家雜書 : 중국역대 사상가들이 지은 책과 그 외 여러 가지 책과 한문)에 막힘이 없었으나 자신의 깊은 학문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벼슬을 마다하고 오로지 학문을 닦기에만 힘썼다. 어느 해 아버지가 등창을 앓은 일이 있었는데 병세가 매우 위독하였다. 의원을 데려와 보이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르기를 "병세가 너무 지독하여 매우 어렵게 되었소. 단 한 가지 지렁이를 잡아 즙을 내어 곪은 데에 바르고 복용하면 차도가 있겠으나 때가 겨울이니 방법이 없소"하는 것이었다. 의원이 돌아간 후 선생은 위중한 아버지의 병세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날 낳아 주고 길러주신 단 한 분뿐인 아버님을 살려야 한다. 신령님! 도와주옵소서." 땅도 하늘도 꽁꽁 얼어붙은 엄동설한의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선생은 맨땅에 꿇어앉아 하늘에 빌고 빌며 수없이 절한 후에 앉았던 자리를 파내려 갔다. 한 줌을 파고 빌고 한 줌을 파내고 또 신께 빌었다. 선생의 절박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을 알았음일까 한 자쯤 파 내려가니 수 십 마리의 지렁이가 한꺼번에 머리를 쳐들고 나왔다. 선생은 눈물로 하늘에 감사하며 지렁이를 잡아 즙을 내어 먼저 맛을 보고 아버지께 올리니 그 즙을 드시고 병이 씻은듯이 낳았다.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였다. “효자 집안에 충신 난다”라는 말이 있듯 선생의 이런 효성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져 임진왜란 때는 안동의 서남을 맡아 싸워 큰공을 세웠으며 그 후 안동의 유래, 산천, 인물, 고사 등을 정리하여 완성한 영가지(永嘉誌)를 저술하여 우리 고장 안동의 선비정신의 맥을 잇는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 구름장골·운곡(雲谷) 선비 안동 권씨가 여기에 서당(書堂)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공부를 가리키게 되자 유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이 골짜기의 이름을 구름장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 향교골 고려 때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때 예의판서를 지낸 권인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 마련된 송파재사가 이곳에 있으며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의 종택과 정자인 관물당(觀物堂)이 있다. 권인 선생에 의해 이곳의 지명이 소야(所夜, 솟밤)에서 송파(松坡)로 바꾸어 불렀다고 전하는데 이는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를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대두서리> 신라 때 큰 사찰인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 한두실이라 하였으나 음이 변하여 대도솔, 대두실이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개목산성을 쌓고 이곳에 소(所)를 두었다고 대두소라 하였다. 그후 음이 변하여 대두서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동정을 병합하여 대두서리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한두실과 오동정 2개 마을에 120세대 350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 한두실·대두실·대두서(大豆西) 신라 때 큰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이라 하였으나 한두실, 대두서동으로 개칭되었다. 시내에서 서북으로 12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특수작물이나 과일농사 보다는 전통적인 벼와 보리농사를 주로 재배하며 안동포의 명산지로 예부터 유명하다. 이 마을에서는 한두실 행상소리가 전해지는데 마을을 가로지르는 풍산천을 경계로하여 주민이 동서(1·2구)로 나뉘어져 있으며, 행상 때의 행상꾼의 조직도 이에 따라 동·서반으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 풀밭밑·초전(草田):풍산천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한두실 2구에 속한다. 지금부터 약 200년전 이 곳을 개간할 때에는 황무지여서 풀숲이 우거져 논밭으로 개간하기 어려워 붙인 명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구억마:서후초등학교 대흥분교장 앞쪽이다. 한두실의 북동쪽 구석진 곳에 있다고 해서 구석마· 구억마로 부른다. ◇ 볼지궁:구억마 입구 산속에 있는 구멍으로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팠다고 전한다. ◇ 사악골:한두실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물통골:사악골의 옆 북쪽에 있는데 물이 풍부하여 붙인 이름이다. ◇ 굿 질:한두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데개골:굿질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아랫골:마을 아래에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 ◇ 샛 골:아랫골과 굿질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샛골이라 한다. ◇ 중 들:사악골과 한두실의 가운데에 있는 들이라고 중들이라 붙였다. ◇ 잿 마:한두실의 북쪽으로 연결된 마을로서 한두실로 통하는 재(고개) 밑에 있어서 잿마라 칭 하며, 한우 등 가축을 주로 사육하고 있다. ▶ 대두서리 선돌 한두실 마을 가기 전 100m 지점인 논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형제바위라 해서 2기가 있었으나 1기는 소실되고 현재 1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높이 100cm, 너비 56cm, 두께 25cm이다. ▶ 행상소리 이 마을에서 언제부터 행상소리가 전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에 상여집이 남아 있고 행상소리꾼들의 조직이 현재 생존하는 고로들의 출생 이전부터 있어 왔다는 사실로 보아 오랜 기간 마을의 구심체로써 기능을 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행상소리의 내용은 망자의 명복을 빌고, 생자의 복덕을 축원하며,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별의 슬픔을 달래고, 영생의 소망을 담은 사설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은 대도둠, 상여소리, 덜구질 등 3부로 나누어져 있다. 대도둠은 발인전날의 상여꾸미기와 행상꾼들이 마당을 돌면서 행상소리를 연습하는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상여소리는 상가에서 발인하여 장지에 이르기까지 운구과정에 부르는 장송곡이다. 덜구질은 무덤의 봉분을 축조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 오동정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 나무에서 기이한 새가 여러 해 동안 아름다운 소리로 울음을 계속했다고 가음곡이라고도 한다. 안동권씨복야공파 휘(諱) 안세(安世) 호(號) 오동정(梧桐亭)은 조선 세종 갑자년(1444)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 좌헌납(左獻納) 지제교(知製敎), 정묘년(丁卯,1447)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후 관직에서 물러나 이듬해 봄에 거문고와 서책을 정리하여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뜰에 오동나무를 심어 당호를 오동정이라 하고 자호(自號)하였다. 그 후 마을 이름을 정자 이름에 따라 오동정이라 하였다. 현재 정자와 재사는 화재로 소실되어 전하지 않으나 마을 이름은 아직도 오동정 또는 음이 변하여 오동징이라 부르고 있다.
<성곡리> 천등산 줄기인 상산이 뻗어 내려 이룬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재일 또는 성곡이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능골, 춘파, 재일, 독실, 덕거리 등 5개이며 118 가구에 356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 성곡(城谷)·재일(在日)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산이 마치 성을 이룬 듯 하여서 성곡이라 불렀다. 이러한 지세가 리의 지명이 되기도 하였다. 재일(在日)이라는 지명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지형이 상산(商山) 아래에 있는 긴 골짜기이지만 앞산이 낮아 일조량이 많아 오랫동안 햇빛이 머문다고 재일(在日)이라 부르게 되었다. ◇ 자라바우:춘파에서 경당고택으로 가는 길 옆 냇가에 있다. 재일 입구에 있는 자라모양의 바위이다. ◇ 상 골:재일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상산 골짜기라고 상골이라 한다. ◇ 고 삼:춘파 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삼골이라 한다. 웃고삼과 아랫고삼으로 나눈다. ◇ 노루실:춘파 남쪽에 있는 마을로 노루가 자주 나타난다고 노루골이라 한다. ▶ 덕거리 재일(在日)과 독실의 사이에 위치하며 춘파(春坡)와도 떨어져 있어서 덕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 삼막골:덕거리 뒤에 있는 마을이다. 삼을 많이 재배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독골·옹곡(瓮谷) 춘파에서 명리로 연결되는 도로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들어온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조선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박환소(朴還素)·박해립(朴海立) 두 종형제(從兄弟)가 피난지를 찾아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이 곳의 지형이 독같이 생겨 외부와 격리되어 몸을 숨기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마을을 개척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마을 지명은 독같이 생겼다고 해서 독실이라 불렀다. ◇ 독실골:독같이 생긴 골짜기라고 독실골이라 한다. ◇ 앞 들:독실 앞에 있는 들을 앞들이라 부른다. ◇ 뒷 골: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라고 뒷골이라 부른다. ▶ 능골·능곡(陵谷) 안동의 명산인 천등산의 지맥으로 둘러 싸여 있어 골이 깊고 명당자리가 많은 곳이다. 마을 뒷산에 안동 권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권태사(權太師) 묘가 있다하여 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권태사의 묘소는 대단한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비원의 미륵불의 머리 부분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조선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다. 이여송이 미륵불의 머리부분을 칼로 쳐서 떨어뜨렸기 때문인데 임진왜란 당시 원병으로 우리 나라에 온 이여송은 전란이 평정되자 우리 나라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훌륭한 인물이 날만한 지혈을 찾아 지맥을 끊고 쇠말뚝을 박았다.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제비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이 우뚝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이여송이 사방을 둘러보니 저 앞 제비원에 큰 미륵불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필경 저 미륵불의 조화 때문에 말이 못 움직인다고 생각한 이여송은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미륵의 목을 쳐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자 말발굽이 떨어져 길을 갈 수 있었다. 제비원 미륵불의 목 부분은 이때 칼로 내리쳐서 아직까지 가슴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남아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의 자국이 있다고 한다. 당시에 떨어진 목은 오래도록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떨어진 목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고, 횟가루로 붙인 부분을 바르면서 염주모양으로 불룩불룩 나오게 다듬어 놓았다. 이때 목과 머리를 이은 자리는 마치 염주를 목에 걸어 둔 것 같이 보인다. 그때 이여송이 서쪽을 바라보니 멀리 서후면 능골에 천하의 명당이 있으므로 부장에게 자신의 목을 쳐서 그곳에 묻으라고 일렀다. 그러자 그 부장이 그곳이 명당인 것은 틀림없으나 이미 다른 사람의 묘가 들어 있다면 공연히 목숨만 버리게 되니 그 장소에 가보고 난 후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일렀다. 이여송이 사람들과 그 장소에 가보니 권태사의 묘가 들어서 있었다. 이여송은 천하의 명당인데 나와는 인연이 없다고 탄식하며 물러갔다고 한다." ◇ 하마비(下馬碑):권태사신도비 아래 조그만 빗 돌에 하마비라 새겨져 있다.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새터·신기(新基) 독실골에 장태사(張太師) 묘(墓)를 쓴 뒤에 재사(齋舍)를 짓고 새로이 마을이 생겼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아담한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 봄파리·춘파(春坡) 서후면 소재지로 면사무소, 파출소, 농협, 우체국, 초등학교 등 각종 기관이 밀집되어 있는 중심지이다. 약 400여 년 전에 김인찬(金麟燦)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춘파라 칭하였으며 지금의 본 면 중심지 일대를 말한다.
<이송천리>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이 2개라고 해서 두시내, 두서천이라 하다가 변하여 이송천으로 되었다. 서후면에서 가장 많은 165가구에 63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은 미라골, 아래기, 까치개, 양지편, 주누골, 대장골, 제비원, 돈친골, 황사물, 웅골, 본마, 양지골, 거나리, 도촌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내가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이송천리로 되었다. ▶ 까치개·작포(鵲浦) 마을 한 가운데는 200년 이상 묵은 고목(古木)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까치개라 부른다. ◇ 오 미 교:마을 앞에 놓여 있는 다리이다. 송야천을 사이에 두고 까치개와 오미 마을을 이어 주는 교량이다. ▶ 거느리·거나리·거진(巨津) 이 마을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용(龍)이 있다하여 주민들이 바위와 돌을 불에 달구어 못 속에 집어넣었더니 용이 비를 내려 못의 흔적을 없앴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 곳에 살던 신씨(辛氏)들이 건너편 마을로 건너가 살았다 하여 거느리라고 했다 한다. ▶ 대장골·대장곡(大將谷) 이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으며 동민들이 이 바위를 대장바위라 부른데서 마을 이름이 대장골로 되었다 한다. ◇ 도 칭 골:옛날 석수장이들이 돌을 치는 곳이라고 하여 도청골, 또는 도칭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아랫말·아랫마 이 마을은 이송천리에서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동민들이 아랫말이라 불렀다. ▶ 미라골·미라곡(美羅谷) 옛날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하여 한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자 주위가 캄캄하여 이 마을 부근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산속에서 인가를 찾던 나그네는 불빛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그 곳으로 옮겼다. 초가집이 있어 주인을 찾으니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나그네는 길을 잃은 몸이니 하룻밤 신세를 지자고 했다. 그러나, 처녀는 혼자 사는 집이고, 방도 한 칸 뿐이니, 다른 데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인근에는 다른 집도 없으며 밤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사람 좀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처녀는 나그네의 사정이 딱함을 생각하며 우선 들어와 요기라도 좀 하도록 했다. 방으로 들어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처녀와 마주 하자 첫눈에 그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나그네는 처녀에게 혼인할 것을 간청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승낙을 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100일 뒤에 다시 돌아와 혼인식을 올릴 터이니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러나 나그네가 떠난 뒤 100일이 지나도 선비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소식조차 없었다. 처녀는 매일같이 선비의 무사 귀환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식음을 잊고 기도에만 전념하던 여인은 지쳐 쓰러졌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때 마침 과거에 급제한 나그네는 곧 그 초가집으로 돌아와 처녀를 찾았다. 그러나 한참만에 뒷산 바위 아래에서 처녀의 시신을 발견한 나그네는 시신을 부둥켜안고 회한과 슬픔으로 며칠을 울다가 죽고 말았다. 이들 시체는 세월이 흘러 바위로 화하였다 하며 지금도 삿갓바위란 이름의 우뚝한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처녀가 죽을 무렵 한 아들을 낳았다 하며, 그 아들이 자라서 애틋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의 넋을 위로하면서 근처 양지바른 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사는 갸륵한 마을이라 해서 미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 속 앗 골:미라골에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의하여 처녀가 속았다고 해서 속앗골이라 한다. ◇ 가지랭이골:미라골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양지마·양지곡(陽地谷) 이 마을은 전면은 남향이고 후면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서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서 바람이 없고 따뜻한 마을이라 하여 양지골이라 한다. 마을 앞에 큰들이 펼쳐져 있다. ◇ 큰 들:마을 앞에 있는 들이 크고 넓어서 큰들이라 한다. ▶ 우물골·웅곡 마을 한가운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항상 일정량의 샘물이 솟아 나는 샘이 있어 웅골이라 칭하고 있었다. ▶ 조랏·조라(鳥羅) 마을의 지형이 북쪽은 산이 높고 동쪽과 서쪽은 길쭉하게 뻗어 있어서 마치 쌀을 이는데 사용하는 조리와 닮았다고 조리라 했는데 이것이 음이 변하여 조라로 되었다. 또한 마을에 고목 느티나무가 많아서 참새들이 이 나무들을 놀이터 삼아 즐겁게 살았다 하여 새 조 자를 쓴 조랏이라고도 한다.
<저전리> 모시밭이 많다고 모시밭이라 불렀는데 한자 표기로 모시 저 자에 밭 전자를 써서 저전이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모시밭, 거리마, 정외, 조랏, 양지마, 삼거리, 무지랑 등 7개이며 206 가구에 61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모시밭·저전(苧田) 옛날 한양 조씨(趙氏) 후손들이 이곳에 살면서 마을 주위에 모시를 심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으므로 모시를 많이 짜내는 고장이라 해서 모시밭, 저전동(苧田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화상싸움놀이 화상싸움놀이는 서후면 저전동의 북서부에 위치한 학가산의 산정이 풍수가 나빠 마을에 화재가 자주 나면서부터 이를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놀이의 방법은 매년 단오절날 밤, 저전동이 서부가 되고, 타 마을이 동부가 되어 버드나무와 소나무의 썩은 뿌리를 캐어 말린 것을 살줄로 묶은 다음 뿌리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며 상대방의 살줄을 휘감아 빼앗은 일종의 횃불싸움이다. 놀이의 승부는 놀이 도중에 화상을 빼앗긴 사람은 도망을 가고 빼앗은 사람은 계속 싸워 빼앗은 화상의 수가 많은 쪽이 이기게 된다. 이때 지휘자는 자기편이 싸우는데 유리하도록 방향을 알려주며 온 마을이 적극적으로 놀이에 동참하여 응원한다. 싸움이 끝나면 해산했다가 다음날 다시 모여 부상자를 위로하기도 하며 싸움 도중의 있었던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사과하며 즐긴다. 이 놀이는 불꽃이 튀어 화상을 입을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를 용감하게 공격하는 과감성과 모험심을 길러주는 놀이로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소속감과 협동심으로 이끌도록 하는 놀이이다. ▶ 저전논메기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우리 조상들이 농경 생활에서 전해온 독특한 전승민요로서 오랜 전부터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에서 구전되어온 묵 신행중(新行中)인 신부가 베를 짜며 신행일자(新行日字)를 기다리고 있던 중 남편의 부음을 받고 시댁으로 달려간 색시는 남편의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며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한 내용이다. 논매기 노래의 후렴은 예천 통명농요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예천보다 변화음이 적다. 가창 방식은 어떤 노래이던 간에 처음에는 사설조로 길게 메인 다음 후반에 가서 자진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노래는 애벌논매기 노래 10연과 두불논매기 노래 2연으로 구성되었다. ▶ 양지마·양지(陽地) 동네의 지형이 삼태기 모양으로 되어 있고 정면이 정남향이어서 일년 내내 온화하고 아늑하여서 양지마을이라 부르며 30여 가구가 지금도 베틀로 삼베를 많이 짜고 있다. ▶ 동녘마·동역(東域) 한양 조씨 시조의 13세손인 적(積)이 봉화 연화산 산중에서 세상을 떠난 뒤 배위인 청송 심씨가 3형제를 데리고 이 마을에 입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이름은 조광조(趙光祖)의 난(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趙氏)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이 저전리의 음지마였는데 이 마을을 기준으로 동편에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동녘마, 동역마라 불렀다. ▶ 존경재(尊敬齋) 이 마을에 입향한 청송 심씨의 묘제와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마련한 재실이다. 매년 10월 10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후손들이 문중의 공론이나 화수의 의를 도모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재사는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서후면사무소와 주재소로 쓰이기도 했다. ▶ 성암정(星巖亭) 제비원석불에 새겨진‘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글씨를 썼다고 구전되는 한양인(漢陽人) 주사(主事) 조병태(趙秉泰) 공의 학덕을 기려서 후학들이 50여 년 동안 정성스럽게 모은 성금으로 1961년 4월에 칠성봉에 있는 선생의 묘소 아래에 세운 정자이다. ▶ 쌍계서재(雙溪書齋) 한양 조씨 시조의 13세손인 적의 증손자인 덕립, 예립 형제가 19세기 초에 아버지 사룡(師龍)공을 위해 정자를 지어 학문과 문중 자제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그후 일제 때에는 학남학술강습회가 개설되어 인재를 기르기도 했으며 그 맥은 다시 학남초등학교로 이어졌다. 쌍계라는 이름은 두 개울물이 합수되는 지점에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인 것이다. 쌍계서재는 칠성등에 자리잡고 있다. ◇ 칠 성 바 우:쌍계서재 뒤쪽 산등성이를 칠성등이라 부른다. 이는 산등성이에 큰 바위 7개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놓여 있어서 칠성바우가 있는 곳이란 뜻이다. 아기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점지할 수 있다고 전한다. ▶ 음지마 조광조(趙光祖)의 난(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趙氏)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이다. 남쪽에 높은 산이 있어서 일년 내내 산 그늘이 많이 든다고 하여 음지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 삼거리(三距里) 예고개를 넘어서 영주로 가는 길과 벌고개를 넘어서 제비원으로 가는 길, 봉정사(鳳停寺)로 가는 길 등 세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 생긴 마을이라고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삼베 짜는 공장이 있어 안동의 명산물인 삼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거릿마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모시밭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이 마을은 동네 어귀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를 드나드는 거리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거릿마라 부리게 되었다. ▶ 새터·정외(亭外) 옛날 거릿마 인근 산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亭子)에서 떨어진 지역에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 또는 정외(亭外)라고 하게 되었다. ▶ 소부골·무지랑 옛날 임금님의 행차가 이 곳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쉴 때, 아름다운 산천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하며, 어떠한 가뭄에도 풀이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흘러내려 무진장 많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무지랑이라고 했다. ◇ 걸 갓 들:무지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삼거리 남쪽에 있는 들인데 길가에 있는 들이라는 의미이다. ◇ 앞 물건너들:마을 앞에 있는 개울을 건너서 있는 들이다. ▶ 도장골 계곡의 생긴 모양이 위가 동그랗고 중간이 길쭉하며 아래가 넓은 모양이어서 꼭 도장과 같다고 하여 도장골이라고 하였다. ▶ 조랏·조라(鳥羅) 월성(月城) 이씨(李氏)가 처음 살기 시작하였으며 모시밭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가 많이 서식(棲息)해서 조라(鳥羅)라 하였다고 한다. ▶ 벌고개·버리고개·보리고개·맥현(麥峴) 산 모양이 마치 벌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과 같아서 벌고개라고 하며, 옛날에는 이곳에 보리를 재배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
첫댓글 김시현 회장님/ 여성총무님들 사진올려 주세요, 그리고 수정사항 있으면 연락주세요.
<카페지기:010-3288-0900>
반가운 고향~
서후면 소개를 상세하게 올려 주심에 감사합니다.
몰랐던것에 많이 공부하고 갑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내고향이지만 모르고 지낸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수고햇습니다 서후총무 김미순
장점수 회장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총무님들 변경사항은 없으신지요?
변경사항이나 전화번호 보내주시면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른면은 향우회 연혁이 있는데 서후면만 없습니다,
정리해서 보내주시면 업그래이드 하겠습니다, <회장님 께서는 서후면 몇대 회장님이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