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21) 1975년, ‘왜 불러’ㆍ‘고래사냥’과 금지곡 시대
림재호 편집위원
승인 2020.03.25 15:59
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21)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발효하며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시민들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1975년 봄, 중앙정보부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넘어서는 최악의 참사를 저지른다. 민청학련 배후 집단으로 인민혁명당(인혁당) 조직을 지목해 재판에 넘겨 그중 8명을 사형했다. 세상은 얼어붙었고, 정권에 대한 반대는 구속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매체들은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사실상 조지 오웰의 1인 전제정치라고 보도하고, 유신정권 치하를 북한과 구별하기 힘든 독재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등장한 지미 카터 민주당 정권은 박정희의 폭압에 대해 공공연히 경고했으며 이는 1979년 박정희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중음악계에서는 잇따른 금지곡 판정 사태와 ‘대마초 파동’이 불거져 이 땅의 대중음악계가 거의 고사 위기에 처하게 된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포스터.
영화 <바보들의 행진>
1975년 5월에 개봉해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최인호 원작에 송창식이 음악을 맡았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신체제로 경직된 사회상, 젊은이들의 방황과 고뇌를 그린 1970년대 청년영화 대표작이다. 장발 단속, 막걸리 마시기 대회, 청바지와 포크송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를 통해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풀어갔다. 영화 속에 나오는 장발 단속 모습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인권침해였지만 그때는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만큼 강력한 통제였다.
이 영화는 기존 배우를 거부하고 오디션을 통해 신인배우들을 기용하는 등 신선한 시도로 가득한 영화였다. 하지만 너무나 가혹한 검열 때문에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을 만큼 상처로 얼룩진 작품이기도 했다. 그런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하길종 감독은 다양한 발언을 행간에 은유적으로 심었다. 젊은 관객들도 장면 하나하나에서 시대의 가슴 아픈 표정을 발견했고 공감했다.
송창식, 한국 포크송의 대명사
송창식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도 가출해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서울예고(지휘자 금난새 등이 동문)를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대학 진학은커녕 고등학교마저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다. 통기타 하나를 메고 동가식서가숙하다가 1960년대 말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트윈폴리오’로 한국 통기타 문화의 새벽을 장식한다. 비록 번안곡들이었지만 당시 젊은 대중은 이 듀오의 싱그러운 하모니에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감지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불우한 2인자였다. 시인 윤동주 가문이고 명문대 의대생이며 소프라노적 미성을 지닌 윤형주가 어린 여성 팬들의 환호를 독차지했었다.
송창식은 솔로로 독립해 자작곡가수(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나면서 급격한 성장을 거듭한다. 1970년 <창밖에는 비오고요> 이래 셀 수 없는 명곡을 들려주었다. 1974년에는 <한번쯤>ㆍ<피리 부는 사나이>를 히트시키며 더 높은 곳으로 비상했다. 그리고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함께 그는 1970년대 청년문화가 낳은 젊은 거장으로 등극한다. 이 영화에서 <왜 불러>ㆍ<고래사냥>ㆍ<날이 갈수록> 등을 선보였고, 이 곡들은 영화의 흥행을 뛰어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1980년대에도 <가나다라>ㆍ<우리는>ㆍ<푸르른 날>ㆍ<담배가게 아가씨>를 발표했다. 그는 1970년부터 1986년까지 단순한 통기타 음악을 넘어 록과 국악, 클래식을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며 대가의 행보를 보였지만 1986년 이후에는 공연 외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 긴 침묵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둘다섯 <긴 머리 소녀>
남성 포크 듀오 둘다섯의 <긴 머리 소녀>는 여성들의 긴 머리를 유행시킨 국민애창곡이었다. 이 노래에는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애정이 담겨 있다. 작사자인 코미디언 손철은 구로공단의 여공들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긴 머리 소녀>는 당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상경해 공장에 취업했던 여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실제로 이 노래는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빈번히 열렸던 위문 공연에서 가장 애창된 노래이다.
▲가수 송창식.
금지곡 시대
사전검열만으로는 캠퍼스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음악 시장을 점령하고 있던 청년문화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전방위적인 ‘규제’를 시작했다. 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통해 ‘대중가요 재심의 원칙과 방향’이라는 제목의 ‘가요규제조치’를 선포했다. 440여 노래와 방송을 금지하는 탄압의 칼을 빼든 것이다. 금지 조치는 다분히 자의적이며 표적 사정이었다. 금지곡 기준은 특별히 없었고 금지곡 사유는 전 세계적으로도 진귀했다.
정권에 밉보였던 신중현의 노래 대부분은 소급 적용돼 금지곡이 됐다. 4년 전에 발표된 <거짓말이야>는 ‘사회 불신감 조장’이라는 딱지를 붙여 방송과 음반 시장에서 몰아냈다. <미인>은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를 대중들이 ‘한 번 하고 두 번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저속하게 바꿔 부름으로써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억지 춘향적인 죄목과 박정희 정권 연임을 향한 은밀한 야유를 대신했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행복의 나라로>(한대수)는 월북을 기도하는 노래처럼 들렸고, 가는 곳마다 ‘하면 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던 시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양희은)은 패배주의의 상징으로 퇴출당했다. 동해로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잡으러 가겠다던 젊은이들의 꿈을 담은 <고래사냥>도 국가시책에 호응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금지되었다. 배호의 <0시의 이별>은 통행금지위반을 부추긴다는 이유가 따라붙었다. <아침이슬>(김민기 작곡)은 이유 없이 그냥 금지했다. 김민기는 어느 날 보안대에 끌려간다. 기세등등한 보안대 수사관은 김민기를 이렇게 몰아 부쳤단다. “이 새끼야. ‘긴 밤 지새우고’의 긴 밤은 유신을 말하는 거지?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란 민족의 태양 김일성을 말하는 거고….” 이에 김민기는 “제가 이 노래를 지은 건 1971년이고 유신은 1972년입니다”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말 많으면 빨갱이인 세상에서. 1975년 노래 대부분이 금지곡이 되고 대마초 파동과 여러 이유로 대표 주자들이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암울한 시대에 벌어졌던 청년문화 논쟁도 소리 없이 끝났다.
애창곡을 빼앗긴 젊은이들에게 독재정권은 수백 곡의 ‘건전가요’를 들이밀었다. <유신찬가>나 <대통령찬가> 같은 노래에 심지어 <국민교육헌장 노래>까지 출현했다. 박정희가 손수 ‘콩나물대가리’를 다듬었다는 <나의 조국>이나 <새마을노래> 같은 일본 군가풍의 노래는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흥얼댈 만큼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반면 금지가요는 방송은 물론 어떤 형태의 공연이나 음반 판매 등도 일절 금지됐다. 1987년 8월 문화공보부가 가요금지곡 해금지침을 밝힌 이후, 월북작가의 작품이 아닌 노래 대부분이 대중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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