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우란은 정이천과 주희로 대표되는 정주리학을 옛 리(이)학으로 두고, 리학에 자신만의 색채를 가미하여 리학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신리학’이다. 여기서 풍우란과 송대 이학자들을 가르는 큰 차이는, 무엇보다 기(氣)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송대 이학자들은 기(氣)에 맑은 것과 탁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풍우란은 기(氣)를 어디까지나 아직 한정되지 않은 , 다시 말해 개별적 사물이라 할 수 없는 원초적 질료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풍우란에게 기(氣)는 맑은 것과 탁한 것으로 한정되기 이전의 원초적 질료 상태로 정의되고, 구체적 사물은 기(氣)가 아니라 기(器)로 정의된다. 그런데 풍우란과 송대 이학자들은 ‘리’에 대한 공통된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리’를 존재의 근거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기는 리를 실현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정의되었는데, 나는 이러한 관점에 반대하는 바이다.
현실은 시공간에 놓여져 있다는 점에서 시시각각 변화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변화를 초월한 불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근거’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이 투영된 결과일 뿐이다. 근거, 목적, 법칙, 원인 … 이러한 가치들은 모두 인간에게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치들을 사물들 속으로 투사하고, 투입함으로써 신화적으로 사고한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가치에 있어 스스로가 원인임을 망각하면 안 된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그 세계가 존재하는 ‘근거’가 있다는 것, 각 종류의 사물이 그렇게 있을 수 있는 ‘까닭’이 있다는 것, 이는 결국 근거와 까닭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믿음에 다름 아니다. 결국 보편이 있어서 특수한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이 있기 때문에 보편이 성립된다는 이야기다.
무엇인가가 ‘있다’고 할 때, ‘그 무엇’은 단지 ‘있을’ 뿐이다. 그 무엇이 ‘있다’라는 사실만이 존재한다. 그 무엇은 근거 없이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은 근거 없이 존재하는 그 무엇에 근거를 삽입하고 인간학적 믿음을 첨가하려고 한다. 세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스스로를 납득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각 종류의 사물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있을 수 있는가? 질문을 던지는 인간에 의해 대답으로서의 근거가 요청된다. 즉 근거는 질문 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만들어진다.
나는 리를 존재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근거가 있기 때문에 현실로서의 존재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있기에 존재의 근거가 성립된다. 근거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귀납적으로 추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연역적인 답을 도출해내었는가? 그들은 스스로를 원인으로서 제거해버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개념이라는 단어는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서 얻은 하나의 보편적인 관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즉 ‘보편적인 관념’은 다양한 관념 속에서 ‘종합’되어 얻어진다. 개념의 영어 단어 concept 역시 그 어원을 찾아보면 cápĭo 잡다, 손 아귀에 넣다, 사로잡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념은 결국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잡는’ 과정에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일어의 개념, Begriff 역시 ‘움켜잡는다’는 뜻의 동사 ‘greifen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편이 존재의 근거, 리로 성립될 수 있다는 관점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점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