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코로나 환자들 속에서
3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귀로 듣는 것을, 지붕위에 올라가서 다른 귀들을 위해 선포하라.
결국 아무도 등불을 밝혀 바구니 밑에 넣지 않고 또 숨기지 않는지라. 오히려 오가는 모든 이들이 그 빛을 볼 수 있도록 내어 거는니라."
코로나19(COVID-19) 사태는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전염병으로,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어 2020년 초부터 국제적인 보건 위기로 발전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SARS-CoV-2(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 2)에 의해 발생하며, 인간 간의 밀접 접촉을 통해 전파됩니다. 코로나19의 주요 증상으로는 발열, 기침, 호흡 곤란 등이 있으며, 심한 경우 폐렴, 급성 호흡기 증후군, 신장 실패, 심지어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원래가 건강 염려증이 있던 터라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과 극단적으로 사망에 이르는 뉴스를 접했을 때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저도 걸릴 까봐 마스크를 쓰고 손도 씻고 최대한 타인과 접촉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부업으로 맛사지를 하고 있었는데 피부 접촉을 해야 하는 일이라 손님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백신의 부작용과 영구 장애를 입은 피해자들의 뉴스를 접했습니다. 백신에 대한 불신과 정부의 무책임한 대처와 산재처리를 안 해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저는 코로나 백신 접종을 거부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자가 격리자처럼 직원들과 같이 밥 먹지도 않고, 백신 접종을 하라는 회사 지시를 거부하는 등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신에 강박적으로 외출도 하지 않고 친구를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같이 만약 밥을 먹으면 따로 앉아서 먹었습니다.곳곳에 자동 온도 체크기와 주소를 적는 명부와 접종을 안 한 사람을 휴대폰으로 인증을 하면 경보가 울리도록 하는 바람에 그 흔한 짜장면을 아주 오랫동안 못 먹었습니다.
어느정도 로 심했냐고 묻는다면, 집사람 친구의 캠핑카로 놀러갔습니다. 집사람 친구부부는 고기도 구워 오고, 밥도 주고 원두 커피까지 뽑아서 주었는데 저는 감염될 까봐 삶은 감자 하나만 먹었습니다. 집사람과 따로 자는 것은 물론이고 밥도 따로 먹었습니다. 개인주의의 극치였습니다. 환자 한 명이 감염이 되면 즉시 병동 전체가 격리되는 터라 각별히 조심했지만 환자가 발생하면 전원 귀가조치에 소수의 직원만 병원에서 숙식하며 근무해야 했습니다.
저는 비접종자라 10일동안 집에서 자가 격리되었습니다. 당연히 무급이었고 정부 지원금을 가까스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방 접종을 3차까지 맞은 집사람이 감염되자 저도 감염 되었고 다시 1주일간 격리가 되었습니다.처음 이틀은 증상이 없다가 열이 나고 기침이 본격적으로 3일째 시작되면서 열이 나고 특히 귀가 빨개졌습니다.타이레놀 과 진해 거담제를 정말 많이 먹었습니다.그리고 전신이 아픈 몸살과 설사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습니다.
당시 정부는 코로나와 감기을 구분하기 위해 감기약을 먹지 않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초동 대처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증상이 악화되어야 치료를 했기 때문에 많은 피해자가 생겼습니다. 어차피 백신을 맞은 사람이나 안 맞은 사람이나 걸리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바탕 코로나 열풍이 저의 가정에서 지나간 후 이제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폐쇄병동에서 코로나 환자가 집단 발병한 것입니다. 처음 한 두명으로 시작한 코로나 환자가 어느새 40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방호복을 입고 쉴드를 착용하고 고무장갑을 끼고 근무했습니다.게다가 감염 우려 때문에 식기 대신 1회용 도시락이 지급 되었고 잔반 처리는 직원들이 맡게 되었습니다.병동안에 환자들이 열이 뜨고 기침을 하고 왔다갔다하는 상황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수간호사님은 우리에게 지침을 주었습니다.
열이 나거나 기침이 나면 약을 먹을 것.
일주일에 한번 하는 pcr 검사는 얕게 찌를 것.
코로나 걸려도 어차피 환자 모두가 환자이니 그냥 근무할 것.
말로만 듣고 영화나 드라마로 보던 사태를 직접 겪은 것입니다. 그토록 안 걸리려고 조심하던 제가 이제 코로나 환자들이 우글거리는 코호트 격리 병동안에서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가장 인기 있는 시리즈였던 ‘가짜 사나이’ 유튜브 프로그램을 보면 이근 대위라는 전직 udt 장교 출신이 진행하는 ‘무샤트’ 군사 훈련이 유행이었습니다.
특수 부대하면 영화에서나 보았지 실제로 그런 극한의 고통스러운 훈련을 받는지 몰랐습니다. 유튜브가 좋아서 그런 군사 기밀에 속하는 훈련과정을 가정에서 편안하게 휴대폰으로 시청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전 기수련을 하면서 마라톤도 해보고 극한의 산행과 기도도 해보았지만 udt 훈련에 비하면 약과였습니다. 교육생들은 훈련이 힘들면 ‘악’이라고 소리치라고 배웁니다. 고통을 극복하고 강렬한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
극진 공수도에서 ‘오쓰’ 라고 외치는 것과 udt 에서 ‘악’ 이라고 소리치는 것은 마치 선불교에서 말하는 할 (喝)과도 같았습니다.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코로나바이러스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저는 한단계 성장한 것입니다.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직원들이 나오면서 그들은 1주일 자가격리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휴일도 없이 ‘떠블 근무’을 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병동에 환자들이 격리기간이 끝나고 알게 도니 사실입니다. 코호트 격리기간동안 제가2번 쉬었는데 그것도 ‘떠블 근무’ 하고 다음날 쉰 것이었습니다. 남들이 피하려고만 고난을 정면으로 극복한 경험은 말할 수 없이 소중했습니다. 하나님이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나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너희 귀로 듣는 것을, 지붕위에 올라가서 다른 귀들을 위해 선포하라.”
과거 우리들은 이 구절을 보고 밖으로 나가 책상을 하나 펴놓고 커피를 끓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책자와 음료를 제공하는 것을 길거리 전도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지금도 명덕 네거리 지하철역이나 반월당 역에서는 성도들이 교회 책자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이것은 필요한 일이고 고마운 봉사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밖으로 나가 봉사를 하고 전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있는 곳 직장이든 가정이든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수녀님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은 오스트리아에서 인스부룩 간호학교를 졸업(1955)후 소록도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에 20대 후반, 소록도에 들어왔습니다. 이후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위해 39~43년 동안 자원 봉사하시던 중 2005년 11월 22일.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 해져 소록도에 불편을 주기 싫어 떠난다는 편지 두 장만 남기고 조용히 출국하셨습니다.
두 분은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절망한 한센인 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어머니가 되어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한센인들을 위한 결핵병동, 맹인병동, 목욕탕 등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지원을 요청하여 주요 시설을 지어주고, 완치된 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정착금을 주어 재활을 도우셨습니다.
한센인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대하며 떠나실 때도 자신들이 한 일은 특별한 것 하나도 없다며 소록도에 있었던 시간들이 행복 했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과대평가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두 분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저희 병원에 두번째 간호사가 있습니다. 나이가 40대인데 결혼도 하셨고 아이도 있습니다.그러나 남편의 변변찮은 벌이로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 하십니다.그러나 급성기 환자들의 막무가내 행동과 ‘액팅아웃’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담력의 소유자입니다.게다가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새 옷을 사 입을 형편도 안되어 자신의 딸의 옷이라면서 입고 다니십니다.
그녀의 신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의 수녀님이 밤에 몰래 소록도를 빠져나가시고 그들의 방에 남은거라곤 조그마한 십자가와 책상이 전부였습니다. 신학대학원 시절에 저도 가난하지만 학과장 신부님의 신발과 성당 수녀님의 가방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20년간 신었다는 구두와 낡은 가방은 그분들의 삶이 어떠함을 잘 나타내 줍니다.
결국 아무도 등불을 밝혀 바구니 밑에 넣지 않고 또 숨기지 않는지라.
표면적인 말씀의 의미는 밖으로 나가 전도하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미 종교적 자유는 허용되었고, 독재나 절대 빈곤은 물리쳐 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지나친 열성이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몇몇 목사님들의 6.25때 하시던 신학 논조 그대로 정부를 비판하고 ‘빨갱이’ 운운하시면서 민중의 정치 참여와 진보적인 정당을 비판하십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감동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건 당시 승객들을 선박에 남겨둔 채 먼저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여러 법적 책임을 지게 되었고, 이후 재판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선장의 행동은 재난 상황에서의 책임감과 윤리에 대한 중요한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반면 승무원이었던 박지영은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며 탈출을 도우며, 배에 끝까지 남아 있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존자인 학생의 인터뷰에 따르면 “배가 기울면서 3층에서 난간을 붙잡고 있었는데, 승무원 누나가 뛰어내리라고 해 바다로 뛰어내려 목숨을 구했습니다. 당시 10명이 함께 있었는데 구명조끼가 모자라 승무원 누나가 학생들에게 조끼를 양보했습니다.”
또 그는 “누나는 왜 조끼를 입지 않느냐.”고 묻자 “너희들 다 구하고 나도 따라 갈게”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그녀와 함께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너희 귀로 듣는 것을, 지붕위에 올라가서 다른 귀들을 위해 선포하라.
예수님에게 들은 것은 박지영 승무원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아가페’였습니다.
결국 아무도 등불을 밝혀 바구니 밑에 넣지 않고 또 숨기지 않는지라.
자신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는 빛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돌아가신 간호 조무사 선생님은 환자들을 가족같이, 서로 싸우는 직원들 마저도 화해시키는 크신 사랑의 소유자였습니다. 보기에도 혐오스러운 조현병 환자들의 말라 비틀어지고 냄새나는 발톱과 손톱을 깎아주고, 머리와 목욕을 시켜주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소유자였습니다.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제가 간호회비가 없어서 못 낼 때 자신이 대신 내주면서 제가 꼭 갚겠다고 하자 ‘안 갚아도 돼’ 라고 말씀하시면 퇴근하셨지만 그 뒤로 다시 보지 못하는 길로 가셨습니다. 그것은 지붕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백 마디 말보다 이런 작은 실천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립니다.
오히려 오가는 모든 이들이 그 빛을 볼 수 있도록 내어 거는니라."
그것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널리 퍼집니다. 사람이 라면 이래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나 자신의 이기적인 생존 의지 때문에 우리는 이익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소중합니다. 도마복음은 일관되게 말씀하십니다. 폭력보다는 ‘사랑’을 율법보다는 ‘지혜’을 보다 인간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사는 것 그것이 33장의 진정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