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4.07.24 09:06 32' / 수정 : 2004.07.24 09: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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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이버 까페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을 지날 때 수많은 인파에 놀랐다. 야간 시위는 아니었다. 광장 한 복판과 골목 어귀 여기저기서 음악이 들렸고, 사람들은 흐느적거리거나 헤드 뱅을 하면서, 혹은 서로 부둥켜 안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넓은 광장 전체가 연주가들의 무대이자 청중이 춤추며 맘껏 즐기는 장소가 되었다. 무슨 특별한 날일까. 그날은 6월 21일 하지부터 시작되어 7월14일 독립기념일까지 계속된 다름 아닌 프랑스음악 축제 기간 중 한 날이었다.
음악축제기간 동안 프랑스 전국은 음악과 춤의 무대가 된다. 전국의 주요 간선도로와 광장, 공원 또는 작은 길목에서 바이올린, 기타, 색소폰, 드럼 소리가 들린다. 클래식 음악에서부터 재즈, 록, 힙합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음악 연주가 펼쳐진다.
프랑스 혁명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바스티유 광장도 이러한 음악 잔치의 한마당이 되었다. 광장 한 모퉁이에는 정명훈씨가 지휘하던 신오페라 하우스가 세련된 위용을 뽐내며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뮤즈의 여신도 그날만큼은 고전음악이외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허용하며 대중과 함께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 프랑스 국민은 이렇게 신나는 음악의 향연으로 밤 10시가 넘어도 날이 훤한 길고 긴 여름밤의 더위를 잊는다.
프랑스의 음악축제는 198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 정권시절 문화성 장관을 지낸 자크 랑의 작품이다. 거리음악 연주에 제한을 주지 않고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각종 음악을 쉽게 접하고 춤을 추며 맘껏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뮤직 하우스에 갇힌 뮤즈의 여신을 거리로 모셔 시민들이 함께 놀자는 것이다.
이런 프랑스의 음악 축제는 20년 이상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런 축제 기획은 주변의 유럽국가 시민들에게도 강렬한 인상과 함께 좋은 평판을 받아 지금은 수십개 국가들에 퍼졌다. 이같은 프랑스의 탁월한 문화정책은 ‘문화의 민주화’의 개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일찍부터 대중을 위한 예술문화 정책을 고안해 내곤 하였다.
영국의 노동당은 무려 1950년대에 서민층을 위한 예술정책을 당 강령에 채택하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서는 서민층에게 쿠폰을 나누어 주어 문화 향수의 기회를 주는 정책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대중을 향한 문화의 보편화 정책으로 ‘문화 민주주의’의 길을 열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1990년대부터 ‘삶의 질 향상’이란 차원에서 문화에 관한 관심과 정책이 실시되어 왔다. ‘문화의 집’도 만들고 지역 문예회관 건립과 지역문화예술축제 기획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문화 향수의 기회를 갖지 못한 문화소외계층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의 민주화’ 개념보다는 ‘문화 복지’라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문화 복지’는 아직 학술적으로 정립된 용어는 아니지만, 이는 문화향수와 문화교육을 필요로 하는 서민, 노인 등 문화소외계층을 타겟으로 한다.
우리나라에는 문화산업정책만 있고 문화복지정책은 없다. 노무현 정권에서도 서민 등 문화소외계층을 위한 문화복지정책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문화관광부 장관자리에는 누가 앉든 그는 그저 언론 때려잡는 일에만 골몰하고 한 나라의 문화발전 비전이나 장기적 문화정책 따위는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다. 하기야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도 거덜날 판에 문화복지 운운은 좀 사치스런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관련 부서에서 이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나 중장기 정책 비전이 없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한정된 기간이지만 음악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프랑스의 음악축제, 그리고 파리시가 여름 바캉스철에 보름동안 실시하는 시네마 대바겐 세일 등은 서민의 문화향수 접근을 배려해주는 문화정책이다.
우리나라에도 각종 문화예술 행사들이 있지만은 누구를 위한 행사인지 그리고 문화소외계층을 위한 복지적 차원의 배려가 있는 행사들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관련부처의 장관이나 관료들이 문화복지적 마인드를 가져야만이 탁월한 문화정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문광부 장관은 프랑스의 자크 랑을 닮아보라. 문화관련 장관은 허구헌날 언론과 정치적 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한 국가의 문화발전의 비전을 제시하고 문화정책다운 정책 좀 제시해봐라. 그것이 어려우면 무덥고 끈적끈적한 한국의 열대야를 시원하게 보낼 문화 프로그램이라도 당장 제시해봐라.
교수 현택수 : 현택수 교수는 '형사 콜롬보' '장폴벨몽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한국형 신사. 그러나 각종 칼럼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는 교수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졌던 주제를 다루며 독설을 쏟아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화와 권력', '그래도 나는 벗기고 싶다', '일상 속의 대중문화 읽기', '예술과 문화의 사회학', '현대인의 사랑과 성', '너무한 당신 노무현' 등 활발한 집필 활동을 펴고 있는 소장 사회학자. '텔레비젼에 대하여' '강의에 대한 강의', '맞불' 등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서를 번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