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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옥씨인물편...근.현대 | |
1. 옥대호 | 옥대호(大鎬/1925. 9. 19~2008. 11. 12) 의 독립운동 -출생 - 24세손. 교리공파. 원적은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1108번지이며 본적은 전남 목포시 남교동 62번지였다. 독립운동 당시의 주소지는 광주시 서석동42번지였다.
1941. 4 ~ 1946. 1 : 광주사범학교 심상과 5년 졸업 1941.9 ~1944.9:무안군 향우회 조직. 비밀 무등 독서회 조직. 광주사범학교 학도대 편성. 애국지사 임정요원 독립운동 홍보. 일제 징용, 징병, 공출 반대 저항운동전개 등 고향마을 계도. 국군훈련, 전학년 구보 데모. 화와이 임시정부 방송 청취. 옥대호, 허종철, 곽이섭, 자취방 모의. 등 독립활동. 1944. 10~ 1945. 8 : 전남 경찰부 고등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 구속. 전남 경찰부로 이감. 광주사범. 전주사범. 순창농림 학도대 연합조직으로 검거구속. 순창농림 학도대 전주 검사국 송치. 옥대호. 허종철. 곽이섭 자취방 동지 장성서로 이감. 무등독서회학도대 동지 10명 광주서로 이감. 1945. 8. 16 : 방면석방(만 11개월 옥고)
< 옥 대호의 독립운동 활동 개요 > 1942년 10월 광주 서석동 42번지에서 광주사범 무등 독서회를 조직하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항일 운동을 주도한 조직의 대표였으며, 연합군의본국 상륙 에 행동대원 봉기결의를 선도하였으며 홍완표 동지와 같이 광주사범, 순창농림, 전주북중과 연합학도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한 항거에 앞장섰다. 또한 독서회 동지 확산과 임정밀명실천, 홍보, 계도에 전념하였다. 만주 봉천의 임정연락원 중 형택 방문 망명계획을 세웠으나 검거 구속으로 좌절 되었다. 허종철 곽이섭과 자취방 모의로 임정연락원 임무수행에 전력하였으며 그토록 삼엄하였던 총동원 체제하에서 560명 학생독립운동단체 회원 동지들은 구국의 일념으로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궐기 하였고 매 학기 광주사범의 방학우의 모임에는 비밀규약준수를 다짐하면서도 각자 자기 학교의 조직과 활약에는 엄밀히 비밀에 부쳐 졌으며 옥 대호가 주도하는 광주사범독서회 학도대는 일체 고발이나 발설이 없었다.나라의 명운을 걸고 궐기해 쟁취한 독립운동이었다.
특히 일제의 전시체제하에서 학교와 격리하기 위한 징병응소를 기피하면서 마을사람들의 계도와 임정의 활동사항을 홍보하였고 매 학기 방학때의 우의모임에는 조 형길 대표. 이상호 대표와 옥 대호의 합석하에 당시의 임정활동사항을 반드시 전달하였으며 상호정보교환을 통해 560명 회원들에게 단체 홍보토록 조치하여 임정의 밀령을 실천하는데 힘썼으며 독서회 회장, 학도대 대표직을 맡으면서 연락책을 통해 전국의 사범학교와 연대하여 일제타도, 국권회복,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 구속수감 내역 > 1944년 10월 2일 새벽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 지서장에 의해 연행되어목포서에서 구류 3일 후 전남 경찰부에 압송되어 황국신민교육반역. 군형법 치안 유지법 위반, 국족 죄 등의 죄명으로 수감되어 복역 중 광주사범내 옥대호의 조직원인 전국사범연락원 홍완표 동지의 구속 수감으로 무등독서회. 학도대 편성 및 전, 남북 연맹편성(광주사범. 전주사범.전주북중. 순창농림. 전주농업) 과 대구사범 본부, 대구상업지부, 전주사범지부, 지하결사연합 7개학교 학도대 등 항일 전국 학생연합이 발각되어 연계사실 취조차 전남, 북 경찰부를 오가며 온갖 고문을 받았다. 1945년 7월에는 2회에 걸처 사상범에 대한 조선 총독의 총살지령을 받은바 있으며 일제의 영계취조가 진행중인 관계로 실형이 선고되지 않은 채 사상범 미결수로 11개월 18일간 장기 복역을 하던 중 일제의 패전으로 인하여 8.15해방을 옥중에서 맞이하고 익일 하오 7시에 전남 경찰부에서 방면 석방되었으며 석방 후 1주일간 광주지역 치안업무 수행 후 귀가하여 가족 상봉 함.
-독립운동 당시의 조직 활동 : 무안 향우회 회장.무등 독서회 회장. 광주사범 학도대 대표. -광복 후 독립운동 관련 조직활동 : 광복회 대전 충남 연합지부 대의원 역임(2008~별세시 까지) -2001. 7. 30 : 국가유공자 자격취득 -증부제20-7079호. 보훈번호 44-00029 -2008. 11. 12 : 별세하여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제1119호) (*옥 대호 독립유공자는 해방후 교직에 투신하여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교직관련 경력은 ‘제5부 현대 인 명부 제2장 학계 교육계 편’에 따로 싣는다.) |
2. 옥관빈 | 옥관빈(觀彬) - (1890~1933). 22세손. 학생공파. 경술국치 전후 서간도 및 상해를 중심하여 김구(金九) 김도희(金道熙) 양기택(梁基澤) 권태선(權泰善) 등 이른바 16인중 1인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조국광복의 독립투사로 활동하였다. |
3.옥영준, 옥상목 | 옥 영준(永俊) 옥 상목(相牧) 의 3. 1독립운동.일본이 한일 합방이란 명목으로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고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사상과 이론)라는 미명아래 우리 민족정신마저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애국지사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 독립을 위한 구국의 독립운동을 벌렸다. 그 여파는 전국 방방곡곡에 이르기 까지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 이것이 삼일독립운동이다.-
옥 영준은 1892년 2월 17일 거제시 장승포읍 능포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57년 4월 10일 65세로 별세하였다. 옥영준(永俊)은 대한독립단 계열로 1919년 음력 3월 3일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례하고 돌아온 12사람과 함께 주축이 되어 거제시 장승포읍 아주리 당등산에서 첫 모임을 갖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거제에서의 3. 1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훗날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단체의 집결체인 대한독립단에 가담, 평안북도 일대에서 지단조직과 군자금 모금 투쟁을 전개하여 오다가 1920년 체포되어 1921년 1월 31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23년 2월 9일 경성형무소에서 출옥 하였다. 1990년 12월 26일 국민훈장 애족장을 수여 받았다.(둔덕면지 등) 옥상목(相牧)은 연초면 천곡리 출신으로 거제 각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였다.(거제시지 및 연초면지) *다음은 1998년 8월 15일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거제 시민신문의 서종철 차장이 옥영준 독립투사의 미망인 남 순이(80세)할머니를 찾아 인터뷰 한 기사 중 발췌한 내용이다. -할아버지는 몇 달동안 얼굴보기도 힘든 때가 많았고 집에는 쌀이 끓는지 죽이끓는지 모르고 한 번씩 올 때 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많이 했어. -남 순이 할머니는 17살 때 경남 의령에서 장승포로 시집와 전덕원 애국지사의 대한 독립단 재정부 단원으로 독립군 군 자금을 모금하려 다니던 옥 영준지사를 따라 만주 봉천과 길림을 오가며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해방이 되고 장승포에 다시 들어 왔는데 할아버지는 죽을 때 까지 5평 단간집에서 남의 밭을 붙여 먹다 돌아 가셨어. -할아버지가 죽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능포동에다 묻어 놓고 나는 구로식 량으로 목숨을 부지했지. -지금은 엄청 좋아 졌지. 집도 읍에서 지어 줬어. 남 할머니의 사위 윤의술씨와 거제 문화원 등의 노력으로 정부는 지난 82년 옥 지사에게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하고 85년에 묘지 정화사업을 마쳤으며 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공식적으로 옥지사의 독립운동을 인정했다.」 -딸이 셋이었는데 하나는 죽고 하나는 어디 갔는지 몰라. 큰 딸과 사위가 앞집에 살면서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 -할아버지가 총각일 때 신의주에서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돈을 모았다고 들었지.장승포에 들어와 살 때는 양식이 떨어져도 아쉬운 소리를 못하게 해 원망도 많이 했지. 나라에 대한 서운한 마은 이제는 없어. 할아버지 산소도 좋아졌고 공무원들이 자주 찾아 와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물어. 만주에서 같이 일하던 할아버지 친구들 가족들도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
옥 상목은 3. 1운동 당시 천곡마을 청년책임자로 아주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고 일본경찰의 수배를 받아 숨어 지내며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상목은 인물이 비범하고 바른말을 잘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후일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활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 귀국하였으며 장승포읍 마전동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다 별세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활동기록을 찾지 못하여 정부의 독립운동 유공자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거제의 아주장터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고종의 국장에 참여 하면서 3.1독립만세 운동에 다녀 온 대표들의 주도로 1919년 5월 2일 당시 거제의 중심지였던 아양리 당등산에서 출발하여 아주 장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아주 장터에 일본군 헌병대가 달려 왔지만 소나기가 내려 화약이 빗물에 젖고 성난 군중들의 기세에 눌러 철수 함으로써 희생자는 없었다.그러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선각자들은 일본군에 체포돼 옥고를 치룬 독립운동이다. 거제시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2011년 5월 1일 5.2독립만세운동 92주년을 맞아 「제1회 아주 5.2독립만세 운동 재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옥 상목은 옥 산 등과 함께 1922년경에 창립된 연초청년회와 연초면 체육회의 중심인물로 주민계몽을 위한 순회강연. 소년 회 창립. 풍수해 등 재해구제활동. 거제향교수리비 강제징수 반대. 거제청년연맹. 경남도 연맹. 사회단체 중앙 협의회 활동 등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을 이끌어 온선각자 였다. 이러한 활동 또한 우리민족의 독립을 저변에 두고 한 활동인 것으로 판단된다.
옥 상목은 필자(23세손/별시위공파/제11대 대종회 회장/ 옥형길)의 가까운 집안 조부로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필자가 어린 시절 옆에서 여러번들은 적이 있다. 옥 상목의 독립운동에 대하여는 그 활동사항을 입증할 자료의 실전으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옥상목의 독립운동과 애국애족의 활동이 매우 컸지만 정부의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하였음은 후손된 도리로 매우 안타깝고 선조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기 위 하여는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 있어야 하나 지금에 와서 활동의 기록을 찾을 길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환국 후 거제시 장승포읍 마전동의 초가삼간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고 자손들도 그렇게 번창하지 못하였음도 마음 아픈 일이다. |
4. 옥상목 | 옥 상목(相牧/1897. 7. 2~1974. 1. 19)과 보명강습소
옥 상목은 1897년 거제시 연초면 천곡리 출생으로 1919년 해방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로 이 주목, 정 규호 등과 함께 연초면 천곡리 하천 부락의 갓안골에 서당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집을 지어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름을 보명강습소(普明講習所)라 하고 3.1운동이후 현대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민중계몽과 신문화교육을 하였다. 이곳 보명강습소에서 삼진농민동맹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 금주, 금연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거제도 내의 독립운동이 이 보명강습소에서 시작되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방학에는 학생들로 농민계몽을 위한 신파연극단을 꾸며 거제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공연을 하면서 문화혁신의 계몽사업과 독립사상의 고취 등 거제 문화발달의 일대 전환기를 가져왔다. 신파극은 ‘이수일과 심순애. ’춘향전‘ ’심청전’ 등이었으며 신파연극단의 단장이 옥 상목이었다. 그 여파는 필자가 중학생이었던 1950년대 후반에도 우리 마을에서는 청 년들이 연극을 꾸며서 공연을 하였으며 인근 이목마을에 까지 가서 공연을 한 기억이 있는데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담요와 이불 호청으로 커텐을 만들어 진행자가 갱과리를 치면 단원2명이 손으로 당겨서 막을 열곤 하였다. 그때 필자는 왜 우리 마을 청년들은 연극을 꾸며서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오늘 이 자료를 정리하면서 그 뿌리를 알게 되어내 고향 천곡에 대한 자부심을 다시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옥 상목의 신파극단 활동은 어디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어디에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일까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의 현대 문학 중 희곡분야의 선구자로 한국 근대 희곡의 새로운 장을 연 사람은 초대국립극장장을 역임한 동랑 유치진(柳致鎭1905~1974) 이다. 동랑은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에서 태어나 1918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 도요야마 중학을 거쳐 닛쿄대 영문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 귀국하여 1931년 해외문학파 동인들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신극운동을 벌이는 등 한국 근대 희곡의 새로운 장을 연 한국 예술계의 거목이다. 동랑의 출생지가 둔덕면 방하리 인데 방하리의 옛 이름은 버드레 였다. 버들 유(柳)자 유 씨가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유 씨 보다는 옥(玉 )씨가 더 많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의 지도자로 마을 사람에 앞장서 일제의 압정에 항거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활동을 하였던 옥 석(石)과 옥 산(山)도 이 마을 사람이었다.
또한 옥 씨가 많이 사는 마을인데다 뜻을 같이 하는 종친들이 있으니 옥 상목 도 이 마을에 자주 출입 하였다.아마도 이런데서 거의 같은 시대에 살며 활동 하였던 동랑의 신극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다만 동랑은 일본에 까지 유학하며 대학교육으로 최고학부에 까지 다니 현대 문학과 예술에 대하여 체계 있게 배운 선구자였으나 옥 상목은 체계적인 신문학 교육을 받지 못한 처지로 신파극단을 만들어 계몽극으로 농민계몽에 앞장섰으며 몽매한 주민들에게 신문화를 일깨웠으니 앞으로 옥 상목의 예술에 대하여도 거시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보명강습소는 1925년 다시 천곡 강습소로 개칭되었으며 천곡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옆에 강습소와 운동장을 확보하였다. 연초면은 물론 인근 면의 청소년 100여명이 모여 수학함으로써 거제 문화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았다. 천곡 강습소는 거제도내의 강습소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 받았다. 1942년 1월 13일에는 옥 상목의 주재로 보명강습소에서 연초면 청년위원회 제4회 정기총회를 열고 경남연맹 참여에 대한 결의를 하기도 하였다. 보명강습소는 1932년 연초면 이목리로 옮겨졌으며 해방과 동시에 이목국민학교로 발전되었다. 1970년대 이후 거제 조선소의 설치와 함께 이 목댐이 조성되면서 국민학교는 명동초등학교 천곡분교로 바뀌어졌고 현재는 송정국민학교가 되어 송정에서 천곡으로 오는 주령재 밑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 학교의 전신이 천곡 보명강습소인 것이다. 지금도 연초면 천곡리 하천부락에는 마을 입구에 정자나무(옛날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무지하게 큰 팽나무가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태풍에 쓰러지고 지금은 대체목(代替木)으로 심은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음) 가 있고 그 아래에 타작마당(옛날에는 집집마다 그곳에서 보리타작을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넓은 마당이 있는데 그것이 보명강습소와 운동장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도로 확장에 들어가고 남은 것은 그리 넓지 않다. |
5. 삼진농민동맹 | 삼진농민동맹과 옥 상동(相東) 옥 상은(相殷), 옥 상목(相牧) 옥 명환(明煥)의 활약 삼진농민동맹은 1924년 5월 30일 거제시 연초면 이목리에서 이목, 천곡, 명동 3개리를 중심으로 농민대회를 개최하고 삼진농민동맹이란 회를 창립한 것이다. 연초면 천곡출신의 옥 명환이 설립위원의 대표로 활약하여 취지를 설명하고 집행위원으로 옥 상동은 서무. 옥상은은 조사. 옥 상목은 교육담당의 상무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삼진농민동맹은 농업개량과 농민상식 보급기관 신설. 소작자가 부담하고 있는 조세와 공과금을 소작인이 부담하지 않고 토지 소유자가 부담하도록 하는 등의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1925년 8월 15일에는 하청면 유계리 에서도 이와 같은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
6.거제청년연맹 | 거제 청년연맹과 옥 상목(相牧) 옥 상동(相東)의 활약 일제 강점기에도 조국과 민족의 단합과 개혁을 위한 청년운동은 각 지역에서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1924년 2월 11일 거제군의 각 면. 리에 분립되어 있던 7개의 청년단체대표 20여명이 모여 거제 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여기에 11명의 대표 중 연초면 대표로는 연초면 천곡리 출신의 옥 상목 (相牧)과 옥 상동(相東)이 참여하였다. 거제 청년연맹의 결성은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이전의 일로 거제지역 청년운동의 선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무실은 이운청년회관(현 아주부락) 안에 있었으며 이운청년회와 함께 조선. 동아일보 거제지국을 경영하였다. 1925년 10월 18일 제3회 정기대회에서 개정된 거제 청년연맹의 행동강령은 1. 필연적으로 전개할 사회운동에 공헌 하시를 기함. 2. 모든 해방운동에 선구가 되기를 기함 3. 우리 운동선 통일을 기함으로 하였으며 같은 해 7월 25일 거제청년 지방연합회에서는 거제 전 지역에 대한 하계 순회강연을 하였는데 옥 상목은 장목면의 장목. 관포. 구영. 하청면의 덕곡. 하청. 유계. 연초면의 한내. 죽토. 이목 지역의 강연회의 강사를 맡아 했다. 그 밖에도 회보발간. 전 거제 웅변대회개최. 거제 체육연맹결성. 노동야학. 부인야학. 소년회의 조직육성. 문고의 설치. 기관단체의 부당행 위에 대한 경고. 항의 등등의 사회 정화와 계몽활동을 하였다. 이후 옥 상동은 초대 천곡리 이장(里長)과 향리인 이목국민학교의 사친회 회장을 지내는 등 후손들의 교육과 지역사회의 지도자로 크게 활약하였다. |
7.거제체육연맹(옥상목) | 1925년 12월 22일 옥상목은 거제 지역의 체육단체를 연맹체제로 바꾸기로 하고 이의 통일을 위하여 연초면 천곡리의 보명강습소에서 옥상목의 주도로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창립대회는 1926년 4월 5일 거제군 이운면(현 장승포읍) 이운청년회관(아주리 소재)에서 개최하여 거제체육연맹을 결성하였다. 옥상목은 규약제정위원에 선출되어 제정한 거제지역체육연맹의 강령을 보면. 1. 대중해방 전선의 요소인 체적(體的-육체적)훈련을 목표로 항상 전위(前衛-앞장서다)가 되기를 기함. 2. 각종 기능을 장려하며 진취적 기상과 협조적 정신을 함양함 3. 정의를 좋아하며 반동세력을 박멸함 이었다. 이러한 강령으로 보아 옥 상목이 이끄는 거제 체육연맹은 독립운동의 성격을 띤 단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옥 상목은 거제 체육단체의 통일을 주도 하였을 뿐 아니라 옥 상목이 이끄는 거제시 연초면 천곡리의 축구단 오월군(五月軍)은 거제에서 가장 강한 축구단이었다. |
8.신간회 (옥산) | 옥 산(山)과 신간회(新幹會) 6.10만세 운동은 우리 민족의 투쟁대상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것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따라서 민족의 당연한 임무는 오직 일본제국주의를 타도 함으로써 한 민족의 독립을 성취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1927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문필가 및 교육관계자를 총 망라한 신간회가 창립되고 광범위한 독립전선을 결성하였다. |
9.옥치환의 독립운동 | 옥 기환(基煥)과 아들 치만(致萬)의 독립활동 옥기환(1875~1953)은 마산의 갑부로 1907년 한국 최초의 노동야학인 마산 노동야학교를 설립하여 공장근로자. 고용원. 도시 빈민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기르게 하였다.(현 마산의 중앙중학교와 마산공고의 전신) 1912년에는 마산공립 상업학교를 인가 받았으며 성호초등학교 학부모 회장들을 맡아 독립에 대비한 조국의 인재양성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마산 어시장의 상권유지와 마산 최초의 법인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우리 민족의 경제기반을 굳건히 하였으며 장날이면 지역의 빈민들과 걸인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어 민족사랑을 보였다. 또한 독립자금을 해외에 보내 독립운동을 도왔다. 아들 옥 치만도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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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독립운동 | 옥 치장. 옥 치위. 옥 치영의 독립활동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의 옥치장(致章/당시 38세)옥치위(致位/당시35 세) 옥치영(致英/당시32세)은 1919년 3. 1운동 당시 지역 주민들과 함께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11월 16일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징역 4월에 처해 졌으나 1920년 12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옥치영 옥치위는 무죄석방. 옥치장은 징역 4월에 처해 졌다. 그러나 검찰의 기소내용은 전염병이 창궐함에 따른 환자 격리수용을 요구하는 의장과 순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달려들었다는 단순 내용이었다. 이 사건으로 거림리 주민들의 항거는 강폭한 일제 경찰과 행정에 대한 저항으로 번져 전 면민들의 항일의식을 심어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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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경북의성 | 경북 의성 옥 문석(文錫)의 독립활동 경북 의성 출신의 옥 문석은 1940년(당시26세) 일본의 동지사대학신학과 2학년 재학 중 4명의 동지들과 함께 우리 조선인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거생사(巨生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기독교인과 제일 조선인에게 독립쟁취와 민족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
12. 신흥청년회 | 12. 거제 신흥청년회와 옥 산(山). 옥 석(石)의 활동 1926년 8월 12일 거제도내의 신흥청년회가 창립되었는데 주요 간부의 일원으로 둔덕의 옥 산(山)과 옥 석(石)이 참여하여 사회활동의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거제 신흥청년회는 거제 청년 연맹(聯盟)에 이어 조직된 또 하나의 청년단체로 1926년 10월 9일 오후 1시 이운 청년회관에서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하고 사회단체 중앙협의회 참여. 거제청년연맹에 대표출석. 청년교양. 사상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소년운동. 문맹퇴치. 미신타파. 회원 상부상조. 거제향교의 횡포 저지 등을 주요활동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27년 10월 26일 제3회 정기대회에서 스스로 거제 청년동맹(同盟)으로 개칭하였으며 그 다음 날인 27일에는 거제 청년연맹도 제8회 정기대회를 개최하고 해체와 동시에 군 단일의 청년동맹으로 확대 결성하였다. |
13. 신간회 | 신간회 거제 지회와 옥 산의 활약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의 기독청년회관에서 창립된 새시대 운동모임으로 농민교양. 경작권확보와 외래이민 방지. 조선인 본위의 교양확보.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 확보. 협동조합운동 지지 및 지도. 염색옷의 착요. 단발의 이행. 흰옷과 망건폐지. 등을 추진하는 단체였다. 거제에서도 1927년 5월 17일에 이운회관에서 지역 발기인회가 개최되었는데 옥 산(山)이 모집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8월 2일 정식 설립과 함께 총무부 총간사를 맡아 활동하였으며 본부대회 대표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해산으로 막을 내렸다. |
14. 옥치상 독립운동/교육가 | 14. 하전(何田) 옥치상의 독립활동(玉致祥 獨立活動) 하전 옥치상의 독립 활동에 대하여는 그가 남긴「하전 자서록」에서 발췌하여 적는다. 1929년 대구사범의 현준혁 선생님(경성제대졸업/ 영어담당)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다. 현선생은 당시 조선일보사가 출간한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한글 보급판을 구하여 교재로 나누어 주며 “우리 민족은 문맹자가 많으니 한글이라고 보급하여 신문 잡지라도 읽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며 방학동안 한 사람당 50명씩 깨우쳐 주라고 하였다. 민족혼을 일깨워 독립하여야 한다는 은밀한 가르침이었다. 그해 3월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다. 기미년 3. 1독립만세 이후 10년 만의 대 사건이었다. 광주에서는 당시 광주사범의 옥 대호(大鎬)가 대표였며 주동이었다. 그는 11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그 10년 동안 상해 임시 정부가 수립되고 국내에서는 신간회(新幹會)를 위시한 비밀 독립단체가 생겨났으며 각 급 학교에서도 비밀 독서회와 여러 종류의 모임들이 일경의 눈을 피해 수 없이 생겨났다. 표면상 각 단체들의 조직이념은 달라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지향한다는 목적을 동일 하였다. 그런 가운데 터진 광주 학생사건은 그 기세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대구 사범의 심상과 학생들도 대구고보와 대구농림 학생들의 시위대열 이 학교 앞을 통과 할 때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시위는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1931년 2학년 2학기 때는 옥 치상은 현준혁 선생님의 지도로 결성된 비밀독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항일비밀독서회가 발각이 되었다. 1932년 3월 말에 옥 치상은 몇 몇 학생들과 함께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4월이 되어 4학년으로써 등교하자마자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후 14년이 지난 해방 다음해인 1946년 2월 1일 대구 사범을 추인 졸업 하였다. 그로 인하여 옥 치상의 교육계 진출은 당시 졸업한 동기생들 보다는 많이 늦어 졌다고 그의 자서록(自敍錄)에서 회고하고 있다.
o.옥치상(致祥/1911~2002)-23세손.별시위공파.거제도론문중.호하전(何田). 거제시 연초면 오비리에서 출생. 대구사범을 졸업한 교육자로서 평생동안 2세교육에 헌신 하였다. 거제 오비 초등학교을 창건하여 초대, 5대 교장 (1947~1955) 제11대 거제시 옥포초등학교 교장(1955~1957). 제8대 계룡초등학교교장(1964~1968) 교장 등을 역임하였고 제1대 거제시 초등교육회 회장(1962~1967)을 역임한 후 삼천포시 교육장과 거제시 교육장(1969~1976)을 역임, 제6대 고현중 학교교장 및 거제 중앙고등학교 교장(1976~1977)역임, 제1대 (1985~1990)거제시 교육삼락회 분회장 역임. 제4회(1992)거제군민대상 수상. 거제 옥포 대첩 기념탑 이설 추진위원역임(1973) |
15.체육인 (옥정빈) | o. 옥 정빈(貞彬) - 축구인. 일제시대 와 광복직후 경평전(서울 과 평양)에서 활약했던 한국축구 여명기의 대표적인 수비수. 함흥축구단의 일원으로 1939년 과 1940년 전조선(전국) 도시 대항전에서 우승한 뒤 당시 일본의 전국체전에 해당하는 명치신궁대회에서 일본 대표를 꺾고 2연패(連覇)하며 민족의 기상을 높였다. 광복 후 1952년 헬싱키올림픽 한국대표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1970년 공군 감독을 맡는 등 한국의 축구 발전에 기여하였다. 2004년 12월 25일 향년 90세로 별세. (2004. 12. 25일자 조선일보 보도내용 임) |
16. 경찰 | * 옥 기진(岐鎭/1930~2004) - 25세손. 감사공파. 호는 우암(遇菴). 합천군 삼가면 금리에서 출생. 부산동아대학교를 졸업. 국방대학원 수료. 서울대학교 최고 경영자 과정 수료. 경찰공무원. 중앙경찰학교장. 부산시 경찰청장. 경상남도 경찰청장. 경찰청 경무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치안감으로 정년퇴임. 내무부장관 표창 3회. 대통령 면려포장. 대통령표창. 녹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등을 수훈하였다. |
17법조인 (옥항남) | * 옥 황남(璜南/1910~ ) - 23세손. 학생공파. 서울지방법원판사. 개성지원장.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 부위원장.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혁명재판소 심판관. 변호사 역임. 재경종회 고문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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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종교계 (옥한음목사) | o 옥 한흠(1939~2010) 목사 24세손(별시위공파). 거제 삼거문중. 거제시 신현읍 삼거리 출생. 12 세조 신변의 장남 진성(振成)의 5남 상규(相圭)의 후손이다. 서울 사랑의 교회 담임 목사. 원로목사로 개신교계의 거목이었다. 보수교단의 지도자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교회 연합과 갱신 운동을 이끈 개신교계의 거인으로 큰 지도자였으며, 2만여 목사. 선교사. 제자와 수만 신도들에게 그는 영적인 아버지와 같았다. 2007년 「한국교회 대 부흥회 100주년 기념대회」 대표설교를 맡는등, 교회의 부흥을 이끈 거인은 집에서는 없는 존재나 다름없었고 어제나 교회와 성도를 위했다. 1972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78년 서울의 서초동에서 사랑의 교회를 개척 했다. 그가 주도한 평신도 교육 프로그램 ‘제자훈련’은 ‘제2의 종교개혁’으로 불리며 교계전반에 확산되었다. 대형 교회들이 세습논란을 빚던 2003년 정년을 5년 남기고 신도수 5만에 달하는 서울 강남의 대형 교회 중 하나인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직을 후임 목사에게 물러 주고 만 65세에 조기 은퇴함으로써 투명한 교회 승계는 기독교 안팎에서 큰 화제가 되었으며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2010년 10월 별세. |
19. 옥현진주교 | 옥 현진(賢鎭/1968~ ) 주교25세손. 교리공 8세 고(沽)의 후예로 17세 미로공(薇露公) 세진(世振)의 7세손 군호(君鎬(현 광주. 전남 지구 종회장. 대종회 고문)의 차남이다. 1968년 3월 5일 전남 무안에서 출생 1986년 ~1992년 광주 가톨릭대학교 졸업 (학사) 1992년 ~1994년 광주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졸업 (석사) 1994년 1월 26일 사제 수품 1994년 2월 ~1995년 2월 농성동 성당 보좌 1995년 2월 ~1996년 1월 북동 성당 보좌, 1996년 ~2000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석사(교회역사학) 2000년 ~2004년 교황청립 그레고리고 대학교 박사(교회역사학) 2004년 12월 ~2006년 8월 운남동 성당 주임 2005년 9월 ~2010년 9월 교회사 연구소장 2006년 8월 ~현재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 2007년 ~2010년 광주 가톨릭대학교 제1영성관장, 지도신부 2007년 ~현재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2011년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제2영성관장 2011년 5월 12일 광주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됨에 따라 각 언론은 그의 최연소 주교 서품을 일제히 보도하였다.
(천주교 홍보지 보도내용)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인 옥현진 시몬 신부(44세, 1994년 사제서품)를 천주교 광주대교구 보좌주교와 페데로디아나 명의 주교로 임명하였다.이 결정은 2011년 5월 12일 저녁 7시 (로마시각 낮 12시)교황청 기관지 세르바토레 로마노」에 공식 발표됐다. 신임 옥 주교는 1968년 전남 무안 출신으로 1994년 1월 26일 사제서품을 받고 광주 대교구 농성동성당, 북동성당 보좌신부로 사목했다.1996년 로마로 유학 간 옥 주교는 2004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교회역사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운남동성당 주임과 교회사 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06년 8월부터 현재까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 현재까지는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 대교구 사제로서 주교로 임명된 경우는 현 교구장인 김희중 대주교에 이어 두 번째 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옥 주교의 임명으로 34명의 주교(추기경1명. 대주교 5명. 주교 28명)를 갖게 되었다. 현직 주교는 23명(추기경1명. 대주교 2명. 주교 20명)이며 은퇴주교는 11명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6개 교구로 되어 있으며 서울, 대구, 광주는 대교구이며 대주교가 교구장을 맡는다. |
20. 군인 (옥만호) | 옥 만호(滿鎬/ ~2011) - 24세손, 감사공파.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에서 출생. < 학력> -1944. 7. 30 일본 육군 비행학교 졸업 -1950. 4. 25 공군사관학교(소집2기)졸업 -1955. 4. 28 미 공군기지 F-86조종교육 수료 -1958. 1. 10 미 공군대학 FOC과정 수료 -1965. 8, 2 국방대학졸업 -1966.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1972. 경희대학교 졸업 < 군경력 > -1950 : 공군비행단 배속. 공군정찰비행전대 -1951~‘52 : 제1전투비행단 제10전대 중대장. 제15전대 중대장. -1953~‘55 : 제10전투비행단 작전과장. 대대장. 작전처장. -1956~‘58 : 제10전투비행단 제10기지 전대장 제5혼성 비행단 전대장. -1958~‘59 : 공군본부 작전국 차장. 제11전투비행단 부단장 -1960~‘63 : 주 중국 대사관 무관 -1963~‘66 : 제10전투비행단장. 공군대학 총장 -1966~‘69 : 공군본부 행정참모부장. 공군사관학교 교장. -1971~‘74 : 공군 참모차장. 제12대 공군참모총장(대장). 예편. <사회경력 > -주 콜롬비아대사. 주 자유중국 대사. -보라매회(공군예비역 장성모임)회장 역임. -공군참전군인회 회장. -대한민국항공협회 회장. -제13대 국회의원역임. -재경의령옥씨 종친회 고문역임. <수상경력> -1951 : 충무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공비토벌기장. 6.25종군기장. 대통령 수장. -1952 : 수훈비행 십자훈장. 금성충무무공훈장. 은성충무무공훈장 -1953 : 비국비행훈장(제1. 제2) -1954 : 유엔 종군 기장. 대통령 수장. -1964 : 3등 근무 공로훈장. -1974 : 보국훈장 통일장. 옥 만호 대장은 1950년 공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해 공군 제10전투비행 단장. 공군대학 총장. 공군사관학교 교장. 공군참모차장. 제12대 공군참모총장. 등 공군의 요직을 모두 역임하였다. 1974년 공군대장으로 예편한 후에는 주 콜롬비아대사와 주 대만 총영사관 대사에 이어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국전쟁(6. 25)때는 100회 이상(134회) 출격한 조종사로 유명하며 많은 전투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특히 역사에 남을 전공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미 공군이 적의 핵심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여러 차례 출격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 2편대장으로 나서 성공을 주도하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승호리 철교(평안남도 강동군 소재)는 당시 중공군의 유일한 보급로로서 이의 폭파는 전략적 의미가 큰 것이었다. 그래서 미 공군이 수차례에 걸쳐 폭파작전을 시도했으나 산세가 워낙 험하고 협곡인지라 실패를 거듭하였는데 옥 만호 대장이 대위시절 편대장(1개 편대는 전투기 4대로 편성됨)의 임무를 띠고 작전을 수행하여 큰 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로써 옥 만호 장군은 빨간 머플러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공군 참모총장 때는 정찰 전투기 RF-5A와 초등 훈련기 T-41을 도입하고 공군 교육사령부와 15전투 비행단을 창설하는 등 공군발전에 크게기여하였다. 이런 공로로 을지무공훈장과 보국훈장 통일장 등 20여개의 훈장을 받았다. 부인은 한용호 여사이며 슬하에 2남 3여를 두었다.
옥만호 대장은 군인으로서 군 생활이나 국회의원으로서 의정활동 모두 청렴하였으며 평생모운 재산 16억원을 송두리째 고향을 위하여 쾌척하였다. 재산은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잠시 가지고 있다가 세상 떠나는 것이라면 미리 사회에 환원 시킬 때 재산의 가치가 진정 빛나는 것이다. 이는 장군이 청렴하고 깨끗한 삶을 영위 하겠다는 신념이었다. 이렇게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신은 무주택 상태에서 연금으로 근근히 생활하다 일생을 마쳤다.
장남 철 은 H.I.S고문이며 차남 열 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2011년 5월 13일 오후 2시 30분 향년 87세로 별세하였으며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에 차려졌고 영결식은 5월 16일 7시 공군장(空軍葬)으로 엄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에 안장되었다.
【호담 항공우주 전시관 개관 관련 신문기사 - 조선일보 1998. 4. 23일자】 -전남 무안에 국내 첫 항공우주전시관- 국내 최초의 항공우주전시관이 22일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에 문을 열었다. 무안 출신인 옥 만호(玉滿鎬.73) 전 공군 참모총장이 13억원의 사재를 들여 4천여평의 부지에 지난 96년 착공 이날 완공한 전시관은 250여평의 실내 전시장에 미국 항공우주박물관과 항공우주국(NASA)에서 수집한 자료와 모형 항공기 45점 등 진귀한 항공 관련자료 등이 망라 돼 항공우주발달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 졌다. (金性鉉기자) *기사와 함게 전시장 전경의 사진이 실렸으며 사진 설명으로 「22일 문을 연 국재 최초의 항공우주전시관. 옥 만호 전 공군참모총장의 아호를 따 <호담(호담)우주항공 전시관>으로 명명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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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