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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마유치환과 통영 *
글/사진 김경식
인간은 사랑과 증오의 역사를 만들며 살아 왔다.
장구한 인류역사 속에서 사랑이란 말처럼 구구한 해석이 많은 단어도 드물다.
사랑의 종류도 많고 조건도 있음직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역설적인 시를 쓴 시인의 인간적 사연은 아름답고 순결하다.
사랑의 의미들이 마구 흔들리고 있는 이 때, 이 십년간 사랑하던 이에게 수천통의 편지를 썼던
시인을 찾아 떠나는 일은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기행이다.
온라인으로 편지가 오고 가고 핸드폰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원색적인 사랑의 상투적인 언어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란 시 한편을 읽어보자.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디지털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저마다 최신형의 각종 디지털기구들을 소유하고 사용방법을 익히느라 인간적인 사랑의 감정조차 잊어가고 있다.
밤새 사랑하는 연인에게 편지를 써놓고 아침에 읽어보면 내용이 비현실적이고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하여 차마 부칠 수 없는 편지를 매만져 본 사람들은 알리라. 전자메일을 보내고 하루만 늦게 답장을 하여도 변심하지 않았는가를 체크하는 이즈막의 세태로 어찌 이 한편의 시를 이해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랑에 절망하고 짝사랑이라도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 자신의 의지대로 가슴에 품고 살아도 행복하다고 쓴 청마의 시를 읽는 마음은 아름답고 인간적이지 않은가.
청마 유치환 생가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청마 유치환 시인의 문학적 인식은 아무래도 의지와 생명파의 시인이었다. 성인이 되고 통영을 방문하여 생가터와 문학관을 돌아보면 그의 삶속에는
사랑과 그리움이 녹아 있음을 알게 된다. 통영의 바닷가를 거닐게 되면 그의 시어에 관련한 바다를 이해하게 된다.
당시에도 그는 유교와 현실적인 법률에 박제되어 있는 판박이 형식의 시대에 생명파와 의지적인 시인이 아니라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애달픔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남정네였다.
그의 시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관용을 주는 것은 설교적인 것이 아니라 희생의 십자가가
번득이기 때문이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파의 시인으로 의지적이며 대단히 윤리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의 시 <바위>와 <깃발>이라는 시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연시에는 관용과 희생적인 사랑의 언어들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의 사랑에는 이기와 소유의 욕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한없는 기다림과 갈망은 존재하지만 섭섭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 깊이 사랑하면서도 고독감과 고통의 뜨거운 갈망들을 청마는 통영의
푸르른 시어들로 식히면서 아름다운 언어로 승화하였다.
이런 이유가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시인으로 현재까지 살아 있는 것이리라.
전자메일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사랑하는 이에게 20년간 편지를 썼던 시인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은, 유년의 어느 여름날 무지개를 잡으러 떠나는 만큼 상큼하며 가슴 설레는 일이다. 더워질수록 우리나라의 산과 들의 녹음은 짙어간다.
이즈음 푸른 그리움이 산과 들에 넘실거리면 어디든 떠나고 싶어진다.
사람들은 경제가 어렵다며 대통령을 탓하고 정치가를 원망하면서 부질없는 세상사를 통탄한다. 피서 철이 되면 부자들은 해외여행을 떠나고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한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생존문제를 걱정한다.
이런 가운데 계층을 망라하여 문학은 소외되고 있다.
소비에 주눅 든 사람들은 마음의 안식을 잃고 부자들의 삶의 형식들을 답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파트 평수에 인생을 걸고 자녀교육에 허리가 휜다.
이 땅에는 언제부터인가 가난한 자와 부자를 겉모습으로는 평가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내면보다는 외면이 중시하는 사회풍조 속에서 내면을 중시하는 문학은 죽어가는 듯하다. 가슴이 아리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문학적인 부활의 조짐들이 일기 시작했다.
지방자치 단체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문화유산과 문학을 포함하는 예술이 얼마든지 간접적인 돈 벌이도 겸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어인일인가. 작금에 현란하게 득세를 시작한 정보화시대가 지나고 나면, 곧 바로 다가오는 시대가 문화산업의 시대라고 한다.
예술적인 콘텐츠가 없는 문화산업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얼마 전 청마 유치환 시인을 경남 통영시와 거제시가 자기네 동네 출신이라며 분쟁을 하더니 급기야 법원에서 통영시의 손을 들어
준일이 있다.
비록 사회 문화적인 자본에 종속되었지만 문학가들도 어느 정도 대우란 것을 받게 된 것이다. 통영으로 떠나기 전에 지도를 펼친다. 멀다. 한반도의 끝자락 사천(삼천포)에서도 더 내려가야 한다. 서울에서는 천리 길이 아닌가. 통영시의 옛 이름은 <충무시>이다.
통영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기 때문에 유례 한다.
‘삼도수군통제영’을 두자로 줄여서 <통영>이라고 하였다가 훗날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와 충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1995년에 충무시가 통영군과 통합하여 통영시로 동네 이름을 바꾸었다.
이런 통영에 관해 몇 줄로 설명은 아무래도 이 고장 출신 소설가 박경리의 글이 제격이다.
통영 미륵도 소설가 박경리 묘소에서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라고 통영이 고향인
소설가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통영시의 자료에 의하면 통영은 13만 인구를 가진 소도시다, 북쪽으로는 고성군에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내량해협 수로를 끼고 거제시와 닿아 있다. 서쪽으로는 남해군과 마주하며,
남쪽으로는 다도해가 펼쳐진다. 지형은 고성반도 남부와, 한산도, 미륵도 및 다른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 500~700m의 노년기 산지가 고성반도를 이루고, 이곳에서 뻗어 내린 산등성이가 바다와 연결되어 반도와 섬을 형성하고 있다. 해안에 약간의 평지가 있을 뿐이어서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지역이다. 리아스식 해안으로 41개의 유인도와 109개의 무인도가 흩어져 있으며, 다도해는 거의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된다.
역사적으로 통영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소가야국의 일부인 독로국에 속했다. 신라통일 이후인 747년(경덕왕6년)에 고성군이 되었다가 이후 거제현에 병합되기도 하였다. 1900년 (고종37년) 진남군이 되었다가1910년 통영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1931년에는 읍으로 1955년에는 충무시로 승격된다.
시로 승격하기 이전부터 해양 지리적 환경이 외부와 쉽게 결합되어 통영은 멋이 있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향의 도시가 되었다. 광주, 전주, 남원등이 전라도의 예향이라면 진주, 통영은 경상도의 예향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리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대전에서 통영까지 고속도로가 완공되어 먼 거리감의 정서를 완화시켜주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찾아가기는 녹녹한 곳이 아니다.
대전과 통영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주변은 산과 들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이 일품이다. 육심령을 터널로 지나치고 함양, 산청을 지나다 보면 아스라이 지리산 천황봉이 오른쪽으로 보일락 말락 하지만 형체를 알아 볼 수는 없다. 남명 조식 선생을 선양하는 덕천서원 가는 이정표를 지나노라니 차츰 가슴이 두근거린다. 조식선생이 지리산 밑 산자락에 산천재(山天齋)를 세우기 위해 터를 닦을 때 심정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는 조선중기 무능한 명종과 대비 문정왕후를 준엄하게 비판하며 모든 벼슬을 거부하고 산천재에서 후학을 양성한다.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조국을 찾기 위해 붓 대신 칼을 들고 왜적을 물리친 사람들이다. 나라의 백성과 산야를 뜨겁게 사랑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리산은 그의 사상이 깃들어 있는 산이다.
통영을 찾아 가는 길에 나는 간혹 음악가 윤이상 작곡의 곡 중에 지리산의 역사성과 풍경들이 담겨 있음을 느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윤이상의 고향을 통영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본래 산청군 덕산면 산천재가 있는 옆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리산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기에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으리라. 4살 때 이곳을 떠나 통영으로 이주 했기에 그를 모두 통영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의 태생에 관한 이야기는 오해를 받게 될지 모른다.
특히 통영 사람들에게 서운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기에 원전을 밝힌다.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 여사는 자신이 펴낸 < 내 남편 윤이상 > (창작과비평 )에서 "남편은 1917년 9월 17일 산청 덕산에서 선비 출신 부친 윤기현과 농가 출신 모친 김순달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기록해 놓았다. 윤이상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남명 조식과 산청>에서 할 예정이다.
통영 미륵산에서 바라본 전경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 언 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뇨.
--유치환 시인 시 <그리움>
지금도 ‘그리움’이란 제목의 이 시를 읽으면 80년대의 어느 봄날로 돌아간다. 그 화사한 봄날 푸르른 하늘은 통영의 청남색 앞바다와 어울려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하였던가. 그 때 남망산에 올라 통영시를 바라보면서 전설처럼 떠돌던 재독 음악가 '윤이상'이란 사람을 알고 있던 내 자신이 고독 그 자체였다.
한국의 나폴리, 옛 충무기행은 과거의 고독과 우울을 날려버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난 일들은 모든 사연들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오는 옛 충무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청마의 발자취를 향해 떠나고 있다.
언제부턴가 봄이 사라졌다고 사람들은 걱정한다. 그렇다. 5월이 지나면 6월은 거의 여름으로 치달아 가는 것이다. 이런 계절의 변화들은 여름을 두려워하는 6월이 오면 절정이 된다. 어차피 7월과 8월은 여름이라고 인정하여 어느 정도의 인내력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러나 6월은 아직 사람들이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라고 하여 무더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황망한 계절의 변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것은 자연이다. 우리의 숲들은 해가 갈수록 더욱 울창해진다.
고성공룡나라휴게소는 다른 곳과 다르게 조용하다.
휴게소 주차장 뒤편에는 태양열집열판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미래에 석유와 석탄이 고갈되면 아마도 태양에너지에서 해법을 찾아 갈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이런 노력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자연은 단지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때 미래의 삶을 보장할 것이다.
통영에 당도하여 승용차에서 내리니 하늘이 탁하다. 문학의 거리 주변의 식당을 찾아 나섰지만 그리 수월하지가 않다.
통영은 한국의 나폴리라고도 하지만 다양한 예술장르의 대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소설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와 시조시인 김상옥, 화가 전혁림,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사람이 통영의 큰 인물이 되었다. 좋은 환경이 큰 인물을 키운다는 말을 통영에 와서 다시 의미 있게 되새긴다.
충렬사 입구 경사진 골목에는 소설가 박경리가 살았던 집터가 있는 데 찾기가 쉽지 않다. 혹 찾는다고 해도 고증을 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김약국의 딸>의 배경의 골목길은 소설과 닮아 있다. 그만큼 변한 것이 없는 듯 궁색하고 골목길이 좁다.
세병관과 이어지는 좁고 복잡한 번잡한 거리가 문학의 거리다. 청마가 편지를 보내던 통영중앙우체국이 보인다. 김상옥 시인이 살았던 골목. 충무교회는 유치환이 살았던 집터라고 하지만 고증이 불분명하다. 우체국 바로 앞에 있는 가게 '시선집중'은 바로 이영도 시인이 경영했던 수예점이다. 그러나 이 거리는 문학적인 낭만의 서정적인 장소가 아니라 시장골목이라 좀 실망이다. 그러나 이곳은 청마 유치환과 소설가 박경리 김상옥시인이 태어난 동네다. 문학의 거리로 이곳보다 더 진수는 없는 곳이다.
청마문학관은 바다가 인접한 정량동863-1번지의 언덕에 만들어져 있다. 5년 전처럼 길 찾기는 수월했다, 갈색바탕에 흰색글씨로 <청마문학관>이란 간판을 거리 곳곳에 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통영시민들이 선생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이정표가 대신 알려주고 있는 듯 했다. 문학관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운다.
언덕의 긴 계단의 중간쯤 왼쪽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문학관이 올려다 보인다. 그 계단 끝에는 통영기상대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니 자동방송이 흘러나온다. 청마선생의 일대기다. 청마선생의 흉상이 서 있고 뒤로는 20대의 미소년이 된 청마선생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진이 커다랗게 보이며 나를 응시한다. 문학관은 50평쯤 되었고, 전시품으로 유품100여점, 문헌자료350점을 분류하여 <청마의생애> <작품세계> <청마관련서적> <청마의 연대별 발자취> <시감상 코너>로 꾸며져 있다. 문학관을 관람하면 그의 일대기를 일독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특히 눈에 들어 온 것은 육필원고였다. 문학관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가는 17평 규모로 본채와 생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본채는 약방, 안방, 부엌, 마루로 되어있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광 측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생가는 본래 이 장소가 아니고 태평동 552 번지다. 지금은 그곳이 상가지역이 되어 생가 복원이 어렵기 때문에 통영시에서 부득이 장소를 옮겨 생가를 신축하였다.
문학관에서 내려다보이는 먼 바다는 남망산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문학관 아래 바다가 펼쳐진 모습은 기막힌 절경이다.
청마 유치환(柳致環,1908-1967)은 통영시 태평동552번지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유준수, 어머니 박우수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중학교에 입학한다. 1926년 도요야마중학교를 마치고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한다.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지만 일 년 후에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학원에 다니다가 다음해 10월 권재순과 결혼한다. 1930년 귀국하여 통영에서 <소재부>라는 회람지를 발간하고 1931년 드디어 문예월간 제2호에 ‘정적’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다. 1939년 유명한 ‘깃발’이란 제목의 시가 실린 첫시집<청마시초>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 안의중학교장, 경주고등학교장. 대구여자고등학교장등을 거치면서도 끊임없이 시를 발표하였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엮임 하기도 한 청마는 1967년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타계한다.
청마시비가 있는 ‘남망산공원’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에 있는 승용차 시동을 건다. 좁은 해안도로를 따라 남망산주차장에 도착하여 차를 놓고 산을 오른다. 한산도가 멀리 보인다.
바다는 섬이 많아서 큰 호수 같다. 청명하고 맑은 날씨에 하늘빛과 바다가 어우러져 환상이다. 통영시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서서 서성여 본다. 그리고 다시 한산도를 바라본다.
남망산 중턱에 서 있는 청마의 시비는 숲에 가려서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없다. 담뱃대모양의 검정색 자연석을 조각하여 만든 시비에 새겨진 시 ‘깃발’을 읽는다.
청마문학관
청마문학관 내부
청마시비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시 <깃발> 전문
깃발은 바람에 의해 펄럭거리지만 깃대에 매여 있어 날아갈 수는 없다. 깃대에서 벗어난다면 단지 천조각에 불과한 것이리라. 청마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갈망과 그곳에 결코 도달 할 수 없는 한계와 좌절, 절망의 마음을 상징한다. 푯대에 속박된 운명을 애수로써 상징한 인간사를 깃발로 표현한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흔들린다. 깃발처럼.
푸른 하늘을 향해 펄럭이고 있는 깃발의 모습에서 시인은 현실을 극복하려는 생명과 의지를 보인다. 그렇지만 '애수',와 '애달픈 마음'에 관심을 두면 이상의 세계로 가는 목적지에 끝내는 가지 못하는 허무 의식이 들게 된다.
보통 시에서는 추상적 관념을 구상화 시키는 것이 비유를 활용하였는데 시 깃발에서는, 반대로 구체적 사물을 관념화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장벽은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푸른색과 흰색을 대조하면서 이 한계의 벽을 표현하였다. 희망과 이상향을 향한 의지는 푸른색이며,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비애는 흰색으로 표현하였다.
청마는 부친으로 부터는 강직한 성품을 이어받고 어머니로부터는 포근한 덕성을 물려받는다. 청마 유치환 시인의 성격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로 대표되는 양면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그를 알게 된다, 그래서 '의지와 사랑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보조관념을 활용한 것은 깃발이라는 원관념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이 표현은 물론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다.
해원이란 시어는 바다를 뜻하는 일본식 한자어인데 청마는 이 단어 사용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청마는 '바다'와 '벌판'의 이미지를 겹쳐 망망대해의 모습을 강조하려고 했을 것이다.
유치환 시<행복>시비
다시 통영시내 태평동에 있는 청마거리를 찾아 나선다. 청마의 생가터가 있으며 통영중앙우체국과 문화유치원이 그대로 있어서 청마를 사랑하는 통영시가 청마거리를 만들었다. 도로가 비좁아 차량이 다니기에는 불편하다.
통영중앙우체국 정문 왼쪽에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책 모형물에는 청마의 대표시
<행복>의 전문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청마는 자신이 사랑했던 시조시인 이영도선생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냈다. 청마 유치환은 문화유치원을 나와 늘 <이문당서점>에서 수예점을 운영하던 이영도 시인에게 연서를 썼다. 그리고 바로 옆 우체국 우편함에 넣었다. 이곳은 통영문학기행의 가장 큰 상징적인 거리가 될지 모른다.
그가 편지를 썼던 이문당서점은 5년 전에 왔을 때 보다 오히려 확장을 하여 골목에서는 가장 눈에 띄는 명소가 되어있다. 오히려 우체국은 더욱 초라해진 느낌이다.
이곳에서 행복이란 그의 시를 읽는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련한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시인 ‘행복’ 전문
통영중앙동우체국
이 시는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플라토닉 사랑을 알아야 이해한다.
청마가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는
일찍이 결혼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었다.
당시 정운(이영도)는 교양을 가진 미인이었다.
미망인이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해 온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이영도)은 가슴속 그리움의 여인이 되고 만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38세의 청마는 29세의 청상 이영도를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아 오르게 된다.
이영도는 당시에 딸 하나를 키우고 있었는데,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낸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시 <그리움>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 않는" 이영도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 사랑은
시작된다. 그러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어색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다. 이영도 시인은 이 편지를 모두 보관한다.
청마와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여 세상에 나온다.
이 소식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날이 후덥지근하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로 시작하는 청마의 시
첫줄을 흥얼거린다. 충무김밥과 나전칠기로 유명한 통영의 거리를 걷는다. 청마 부인이 경영하였던 문화유치원은 여전히 이름이 바뀌지 않고 청마거리를 찾아온 사람들의 문학적인 호기심을 유발한다.
청마 생가터에 세워진 충무교회
5년 전에 찾아와 이문서점에 들렸었다. 그때 서점주인을 만나 청마 유치환 선생에 대해 몇가지 묻기도 했다. 주인과 청마 유치환 선생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그는 청마 유치환에 관해 너무 연애사건에만 관심이 있다고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유치환 시인이 이영도 시인에게 오랫동안 연서를 보냈다고 해서 그의 의식을 삭감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정의감에 불타던 교장이었다.
55년부터 59년까지는 자유당 정권이 독재의 칼날을 휘둘러 될 때이다. 그는 경주중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이 시기 그는 자유당 정치와 그 불의를 단죄하는 투사였다.
당시 교장의 신분으로 그가 한 행동은 오늘날의 시대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운 결단이었으리라. 결국 청마는 59년 9월 10일 정부의 강요에 의해 퇴직 당한다.
청마 유치환은 이후 2년간 심한 신경통을 앓으며 낭인 같은 생활을 했다.
1960년 3월13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양심적인 삶을 살려하였는지 알게 된다.
통영시 전경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유치환 시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전문―
문학거리에서 우리는 통영이 낳은 또 한 문인을 기억해야 한다.
김상옥(1920~2004) 시인이다.
시조라는 장르로 영롱하고 생명감 있는 한글을 더욱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의 호는 초정(草汀)이며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1939년 시조〈봉선화〉가〈문장〉에 추천받아 등단하지만 이내 항일운동에 관계하여 몇 차례 투옥된 독립운동가 였다.
등단작인 시조 <봉선화>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가 웃으실가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보듯 힘줄만이 서노나.
---- 김상옥 시 ‘봉선화’ 전문
문학기행 답사 때 식사한 음식점 <정원>
문학의 거리 근처에 있는 세병관(洗兵館)을 오른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이름은 두보의 시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왔다. 곧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다”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큰 집이다. 그러나 대대적인 보수공사중이다.
5년 전에 통영을 탐방할 때 나는 향토역사관을 둘러보고 부지런히 통영여자고등학교 교정을 찾았었다.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의 교가를 확인하고 정서라도 느껴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청마거리를 나와 해저터널 방향으로 가다가 우회전하면 윤이상 거리가 나오고 이내 <통영여중고>이다.
구식건물은 없고 모두 신식교정이다. 실망했었다. 교정에는 여고생들이 재잘거리고 있었으며 아무학생이나 붙잡고 물었다. “너희 학교 교가 작사자가 누군지 아니?” “유치환 선생이요” “작곡자는 누구야?” “윤이상 선생님이요.” 이 두 분은 학생들에게 각인 된 이름인 것이다. 물론 청마유치환과 윤이상 선생은 통영여고에서 함께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던 사이기도 했지만 해방직후 통영문화협회 일을 함께한 인연도 있다.
당시 나는 통영여중고 교가탑 밑 정원벤치에 앉아서 청마선생을 생각했다. 11권의 시집과 2권의 수필집을 출간하며 왕성한 집필을 하였던 청마는 젊은 시절 한때 만주 흥안령 일대를 떠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생활고를 이기기 위한 한 방편으로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했었다. 또한 그는 이런 가운데 국토의 이곳저곳을 여행하기를 좋아했던 여행가였다.
흥안령이 달리는 만주 땅의 바람 사나운 광활한 광야에서 그는 자신의 곧고 굳은 의지를 체득하였는지도 모르리라. 당시에 나는 섬들 사이로 붉은 낙조가 내릴 때 통영공설운동장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거제도로 향하지 않았던가.
그의 묘소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번 기행에서는 가지 않기로 했다. 당시에 나는 거제대교에 당도하고 오른쪽 해안선을 따라 달렸었다. 한산도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며, 노을 진 하늘이 묘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다가서기도 했었다. 황혼 빛을 받으며 거제도에서 주장하는 둔덕면 청마의 생가는 공을 들인 모습이 역력했다.
그곳에서 산길로 난 길을 승용차로 조심성 있게 접근하기를 10분 만에 청마의 묘지에 도착했었다. 석양빛을 받아 청마의 흉상이 빛났지만 몇 년 전 양산에서 옮겨온 청마의 묘지는 아직 잔디도 없었다. 그러나 장소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평생 반려자였던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도 함께 묻혀있는 그곳에서 나는 순전히 작가로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먼 길이었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얼마 후 해는 이미 바닷속에 빠져 버리고 산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 부디 청마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산길을 내려왔다. 어둠 속 풀섶 길을 걸으며 3번째 이전하여 이곳에 영면한 묘소를 몇 번이나 쳐다보기도 했었다.
그의 묘소가 있는 거제도 둔덕골은 청마문학관에서 가까운 <이순신공원>에 앉아서 보면 아스라이 보인다.
한산대첩 격전지가 내려다보이는 망일봉 자락 "이순신 공원"에서 앉아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쏘인다. 황홀한 아름다움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듯하다. 저 바다와 섬들의 멋진 모습들을 눈에 담아 가슴으로 옮긴다. 그러나 저 곳은 한산대첩의 격전지다.
거제대교가 놓인 내량해협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4km 이다. 그러나 이곳의 넓이는 600m를 넘지 않는 좁은 해협이라 전투하기에 매우 좁았다, 암초가 많아 싸움판을 벌이기에는 어렵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배 3척으로 한산도 근방으로 왜적의 배 70여 척을 유인한다.
이곳은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도 없다,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다.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1592년 음력 7월 7일 이곳에서는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0 여척의 배를 박살내고 임진왜란 최초로 그들의 기를 꺽은 곳이 아닌가.
한산도
이순신 장군의 명언인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 “죽고자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목소리가 한산도에서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하다.
통영시의 바닷가와 골목길은 먼 거리에서 보면 고요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시끄럽고 불결하다. 아마도 항구도시여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전혁림미술관>이 있는 봉평동은 조용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마을이다. 이 골목 초입에는 <정원>이라는 아름다운 식당이 있다. 이 집 마당이 온통 정원이기 때문에 식당 이름도 <정원>이다. 비빔밥이 정갈하며 향긋하다. 친절하며 교양이 풍기는 주인아주머니의 인상도 정갈한 정원과 닮아 있다.
‘전혁림미술관’을 지키고 있는 전혁림 화가의 며느님과도 잘 알고 있다는 식당 주인은 진주의 J시인이 자신의 고등학교 은사라며, 문학적인 분위기도 가진 분이다.
식당<정원>에서 미륵산 용화사 가는 길목의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다 첫골목에서 우회전한 후 50m 쯤에 미술관이 있다. 흰색과 푸른색을 주조로, 다양한 타일들로 건물 외관을 꾸민 건축물이기 때문에 단박에 발견된다.
다분히 이국적인 건축물과 소박한 화단에는 야생화가 지천이다.
전시장 1층에 들어서니 피카소 풍에 푸른 색감의 그림들이 더위를 식혀준다. 전시장 왼쪽 작업실에는 미완성의 작품들이 보인다. 노구에 아직도 작업을 이곳에서 하고 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였던 화가라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혁림미술관
2007년인가 청와대에서 전혁림 화가의 1000호 짜리 대작 <통영>을 1억5천 만원에 구입하기도 했었다. 2억3천 만원에 흥정이 다 끝났는데 전혁림 화백이 대통령 체면을 생각하여 깍아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전혁림은 1916년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수산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이내 독학 화가가 된 사람이다. 그는 그림을 남에게 배우는 것을 거부한 사람이다.
평생 동안 우리나라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그림을 그려온 화가다.
평생을 통영에 살면서 피카소나 마티스처럼 강렬하고 혁신적인 색체와 감각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푸른 통영의 바다와 코발트색의 하늘을 닮아서인지 94세의 연세에도 창작에 임하는 모습이 놀랍지 않은가. 그와 오랜 지인이었던 김춘수 시인이 자신이 세상 떠나기 전에 <全爀林 畵佰 에게>라는 시를 썼다.
全畵佰,
당신 얼굴에는
웃니만 하나 남고
당신 부인께서는
胃壁이 하루하루 헐리고 있었지만
Cobalt blue,
이승의 더없이 살찐
여름 하늘이 당신네 지붕 위에 있었네.
김춘수 시인 시 <전혁림 화백에게>
미술관은 아들과 며느리가 관리 운영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전혁림미술관은 외관이 코발트빛으로 표현해냈는데 미술관 난간이며 계단은 역시 푸른빛으로 칠해져 있다.
최근 그는 그림에 써넣던 서명을 바꿨다. 혁(爀)자와 함께 쓰던 영어 ‘CHUN’을 ‘JEON’으로 바꾼 것이다. 혁(爀)은 자신의 중간자다. 미륵산 북쪽 자락에 자리 잡은 이 미술관은 자신의 집을 개조한 것이다. 이 집 옥상에 올라가면 통영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물론 통영항과 바다가 보인다. 전망이 좋다. 뒤로는 미륵산이 떡 버티고 서 있다.
그는 간혹 미륵산이 자신을 살렸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미륵산이 버티고 서 있어서 어디로
도망을 가지 못한 것이 이유다. 그는 미륵산과 통영바다를 자신의 작품의 원천으로 삼아 왔다.
김춘수 시인은
‘전혁림 편모’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화가 전혁림의 집 언저리의 자연환경은 너무도 밝고 화려했다. 하늘은 쾌청이라 더없이 푸르고, 저 건너 내다뵈는 바다 또한 짙은 쪽빛이다. 빛깔은 화가의 사상이란 말이 있지만 그에게는 한때 청색시대가 있었다. 그 무렵 그의 화폭을 진하게 물들인 그 청색은 내가 본 통영의 그 하늘빛이요, 특히 그 물빛이다. 화가로서의 그의 뇌리에는 늘 통영 앞바다의 물빛이 그득 괴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처음에 전혁림은 문학을 하고 싶어했다. 통영문화협회에 문인이 많아 화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결국 그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좁은 길을 걷게 되어 오늘의 성공한 화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입버릇처럼 ‘예술은 교육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 증거라고 말하며 미술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고 여전히 말한다.
그런 그였지만 학창시절에는 미술학교가 있던 일본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가지 못했다. 진남금융조합에 취직한 뒤 독학으로 수채화와 유화 그리기를 정진한다. 48년 극작가 유치진, 시인 유치환·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작곡가 윤이상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한다. 49년 제1회 국전(國展) 서양화부에 ‘정물’이 입선하며 경남 지역의 신진 서양화가로 주목을 받는다.
전혁림미술관
화가 전혁림이 1975년에야 중앙 화단에 본격 소개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로 뽑힌 해가 2002년이다. 대기만성이란 말은 아마도 전혁림 화백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김 화백 보다 6년 선배 되지만 절친하게 지낸 김춘수 시인의 생가는 남망산공원 입구에 있다.
김춘수는 1922년 통영 남망산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부유했다. 유치원에도 다닐 수 있는 정도였다. 유년시절 그의 삶들은 대체적으로 그의 자전소설 <처용>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이런 어린 시절의 생활이 장년이나 노년이 된 현실적응이 떨어지는 삶을 살게 하였는지 모른다.
2001년 겨울에 나는 김춘수 시인의 육필원고를 한 매 받기 위해 그분이 살고 있는 분당의 아파트를 몇 번이나 찾아갔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결코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추천자가 없으면 아파트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다행히 나에게는 아파트 문을 열어주었지만 육필원고를 받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P교수에게 부탁을 하여 어렵게 육필원고를 받아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약해 보이는 체구지만 양복 윗도리를 매일 갈아입는 멋쟁이였으며, 미식가였다.
그는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학년 때 자퇴한다. 1940년 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하였으나 42년 12월 사상 혐의로 퇴학처분 당한다. 이후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7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1947년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했다. 이 무렵 그는 통영중학교 교사였다. 49년에는 마산중학 교사로 근무하며 제2시집 <늪>, 제3시집 <旗>, 제4시집 <隣人>을 차례로 출간한다. 그는 결벽성이 강한 시인이 이었다.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쓰고 다녔으며 모자를 써야 했다. 마르고 가냘픈 체구와 흰 손으로 대변되던 그의 외양은 그의 시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인간의 내면의 심성이 오롯이 담겨 있다. 사물을 직시하며 그곳에 내용을 삽입하려고 했던 시인의 작품들은 정갈하며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그 대표적인 시가 그의 시 <꽃>이 될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 전문
김춘수 유품전시관
1952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이 시는 의미가 쉽고 암송하기도 쉬어 청소년 사이의 애송시가 되어 왔다.
그러나 김춘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주로 썼던 시인이다. 은유가 매우 강한 시를 쓰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공언하기도 했던 시인이다. 결국 그의 시는 매우 난해하다. 그의 대표시 <꽃을 위한 서시>를 읽어본다.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위한 서시> 전문
사색적이며 열정적 어조의 이 시의 특징은 깊은 의미를 지닌 단순한 산문체의 시 같지만
난해하다.
꽃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녹아있다 .릴케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초현실주의적 경향이 보인다.
김춘수 시인의 생가를 나와 바닷가를 휘돌아 나오면 이내 윤이상(1917~1995) 선생이 살았던
동네이다.
그는 1967년 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이라 불리는 동베를린 간첩 사건에 연루돼 2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전 세계 음악가들의 압력을 받은 박정희 정부는 그를 풀어주어야 했다. 이후 그는 1971년 독일로 귀화했고 죽는 날까지 그토록 그리던 통영 땅을 밟지 못했다.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에 윤이상은 빨갱이였다. 그의 이름을 거론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전음악에 관심이 있는 모든 세계인이 인정한 그는 조국 땅에서는 잊혀진 이름이 되어야 했다. 독일 베를린 공동묘지에 있는 선생의 묘에는‘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 쓰인 묘비가 서 있다. “어떤 환경에 처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향상 깨끗하다”이다.
그의 육신은 언젠가는 통영으로 돌아오던지 산청의 지리산 자락에 묻혀야 하리라.
이제 박경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
남해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 미륵산의 남향 자락에 1000평에 펼쳐진 묘역은 그 자체가
서정적인 문학적 풍경이다.
양지농원을 경영하는 정대곤 씨가 자신의 농원 땅 2천700여㎡를 기증하였기 때문에
이곳이 묘역으로 정해졌다.
소설가 박경리 묘소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 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 ‘ 옛날의 그 집’ 전문
2007년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한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 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마지막 행이 묘소입구에서
묘소 참배객을 맞이한다. 이 글을 읽으니 가슴이 울컥한다. 사람살이란 것이 모두 버리고 갈 것에 매달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그가 유독 마지막까지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물품이 3가지 있었다고 한다.
재봉틀과 국어사전, 통영 소목장(小木匠;목재로 만든 세간)이다.
재봉틀은 그의 생활이었으며 국어사전은 그의 문학이었다. 소목장은 그의 예술적 발로였다. 재봉틀은 작가가 되기 전에 어려웠던 생계를 책임졌던 도구였다. 국어사전은 그가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지식의 원천이었다.
소설가 박경리는 고난이 없었다면 '토지' 같은 대작품은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2008년5월5일 폐암 등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였다. 오랫동안 고혈압과 당뇨 등을 앓던 그는 폐암에 걸렸지만 끝내 항암 치료를 거부했다.
경남 통영에서 1926년 태어난 소설가 박경리는 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토지> <김약국의 딸들> <파시> 등을 발표하며
한국 소설사에 큰 획을 그었다.
1969년부터 94년까지 26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토지>는 우리 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는 명작이 되었다. 원고지 분량만 3만여 장에 이른 대작이 TV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로도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경리의 묘소는 죽음의 장소가 아니다.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묻는 장소이다.
박경리공원
그의 묘소는 참배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먼 바다를 바라보며 미륵산의 품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장소 같다. 결국 이곳은 침묵의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남아있을 자신의 생물학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슴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이다.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운 이곳의 풍경을 담아 그의 묘역을 내려온다. 산양일주도로를 휘돌아 통영 시내로 돌아온다.
'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이 길을 나 살아생전에 몇 번이나 오고 갈 수 있을까.
삶이 유한함을 깨닫을 수 있기에 주변의 경치가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지
모른다.
문학거리로 다시 나와 통영 시내를 걷는다. 다시 청마를 생각한다.
청마 유치환은 생명파 시인이었다. 그의 생명에 대한 애정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의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 하였다. 이런 생명에 대한 관심이 시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바탕에 동양적인 허무의 세계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런 그의 허무는 이를 극복하려는 열정의 의지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의지와 애련을 한 몸에 지니며 청마는 바위가 되려고 하였다. 시 보다도 인간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기도 하였다. 부자 보다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섰으며, 권력과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지사적 풍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청마는 인간탐구를 지향하고 생명의식을 설파했던 생명파의 거목이다.
이번 기행에는 그의 시중에 깃발, 바위, 행복이란 시를 읽으면서 사랑의 이야기와 인연에 관해
탐방해 보았다. 그리고 통영 출신의 예술가의 삶의 궤적을 찾아 보았다.
이제 통영을 떠나야 한다.
청마 그의 시에는 가슴을 서늘하게도 하고 뜨겁게 하는 이중적인 모습도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푸른 청년의 의지걱인 정신을 가지고 있기에 생명력이 넘쳐 난다.
의지와 생명의 기운들이 파닥거리는 사랑의 연민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 된다.
청마 유치환의 삶과 문학은 언제까지나 우리의 가슴을 흔들며,뜨겁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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