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청와대에서 용산까지
필연과 우연이 얽혔다…靑과 용산집무실 관통한 이 선의 비밀
▷ 북한산 꼭대기인 백운대와 관악산 꼭대기인 연주대를 선으로 연결해보면, 그 선상에 청와대-경복궁-덕수궁-용산 대통령집무실이 놓여있고, 서울시청, 서울역, 용산역, 동작동 서울현충원도 들어온다.
▶ 수도를 옮기는 이유
▷ 역사 속의 수도이전의 주된 이유는 왕조 교체다.
⇒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개경(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며 왕조교체의 혼란상을 한방에 잠재웠다.
▷ 현대에서 수도이전의 이유는 경제와 안보다.
⇒ 브라질 수도 이전(리우데자네이루 → 브라질리아/1960년) : 국토 한가운데로 수도를 옮겨 내륙개발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전략이었다.
⇒ 파키스탄 수도 이전(카라치 → 이슬라마바드/1960년) : 표면상 이유는 과밀해소, 실제로는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의 권력안보 목적이었다.
⇒ 인도네시아의 수도 이전 계획 발표 : 자카르타(자바섬) → 북동쪽으로 1000여 km 떨어진 동칼리만탄(보루네오섬).. 자카르타는 인구집중과 과밀개발로 도시 지반 침하가 심각하다. & 동부 개발로 국토균형발전을 도모한다.
1. 조선시대 하륜이 한양 도읍으로 천거한 무악(연세대 일대). 2. 청와대. 3. 용산 대통령 집무실
▶ 조선의 한양 천도 배경은 풍수도참사상이다
▷ 본래 태조는 계룡시에 도읍지를 정하고 공사를 시작했었다.
▷ 개국공신 하륜이 도읍은 중앙에 있어야 한다며 연세대학교 자리인 무악 일대를 명당으로 찍었다.
▷ 무학대사 등이 무악이 산세가 약하고 터가 좁다고 반대하여 백악산 아래에 궁궐을 짓기로 했다.
▷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배경으로 좌청룡(백악산)과 우백호(남산)를 삼자고 했다.
▷ 정도전은 성공한 중국 황제들이 남면하고 다스렸다며 백악산을 등지고 좌청룡(낙산)과 우백호(인왕산)을 두자고 주장했고, 태조는 정도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다른 주장은 조선 개국초 유교와 불교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해석되고 있다.
▶ 대한민국의 수도 이전 추진은 두번이었다.
▷ 첫 시도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공주시 장기면(현 세종시 장군면)일대에 임시행정수도 만들려던 계획이었으나 1979년 서거하며 없던 일이 됐다.
▷ 두번째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충청권에 신행정수도를 만들려고 했으나, 헌법재판소가 위헌판결을 내려 계획을 축소했다.
▶ 서울 곳곳에 스며있는 풍수논리
▷ 보현봉과 백악산 사이에 있는 보토소(補土所) : 백두대간에서 북한산 보현봉을 거쳐 백악산으로 내려올 때 형제봉을 지나며 급하게 떨어지는데, 평창동과 정릉을 있는 북악터널 위쪽이다. 왕실에서는 이곳의 지형이 낮고 잘록해 맥이 약하다고 보고 도성과 궁궐의 지맥을 북돋고자 보토(補土 흙을 채워 메움)를 하고 여기에 총융청 관할 보토소(補土所)를 두었다. 형제봉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심곡암과 영불사 중간쯤에 있는 ‘보토고개’가 그 흔적이다. 김정호의 ‘수선전도’에는 보현봉과 백악 사이에 ‘보토소’가 나온다고 한다.
▷ 광화문 해태상과 숭례문 세로 현판 : 관악산 화기를 막고자 함이다.
▷ 흥인문 현판에 지(之)를 더해 흥인지문으로 : 좌청룡의 허약한 산세를 보완하기 위함이다.
▶ 일제의 풍수침략 행위는 사실일까?
▷ “…풍수가 적어도 십 수 세기 오랜 기간 한국 민속신앙 체계에서 그 지위를 점해 왔고, 고려를 거쳐 이조에서도 반도 어디를 가나 믿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일반에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므로 타문화에 비해 그 지지의 강함과 폭이 넓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조선의 풍수/ 1931년/ 조선총독부 촉탁 무라야마 지준著)
▷ 전국의 명당자리에 있던 태실(왕손의 태를 묻은 자리)를 파괴하고 고양시 서삼릉에 모아놓고, 비석 뒤에 일본의 연호를 새겨 넣기도 했다. ⇒ 왕실의 전통과 맥을 끊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졌다.
▷ 경복궁 정북쪽에 있는 백악산 촛대바위는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메운 돌이라고 한다.
▷ 속리산, 추풍령, 북한산 등 한반도 어디에나 일제가 혈에 말뚝을 박고, 길을 내며 지맥을 잘라 인재 배출을 막았다는 얘기는 흔하다.
▷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1995년(광복 50주년)에 전국에서 119개의 쇠말뚝을 뽑아냈고, 이제야 역사를 바로세우게 됐다는 환호 한쪽에서..
▷ 의문도 나왔다. 풍수침략용 쇠말뚝이라면 극비로 진행했어도 단서는 남기 마련인데 기록이 없기 때문이었다. 말뚝이 박힌 자리도 혈처라고 보기에는 엉뚱한 곳이 많았다.
▷ “일제 당국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지도 해도를 작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들은 지도 작성의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어느 일본인 개인의 짓이거나 풍수쟁이들이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이이화/ 1999년)
▷ “민족정기 말살 목적으로 일제가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분노의 증언도 있다. 그러나 주요지점에 물리적 기준점을 설정하는 것은 기본사안이다. 측량을 모르던 백성들에게 그것이 주술적 만행으로 보였을 수 있다.” (건축가 서현/ 2019년)
▷ 이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현장을 확인하지 않은 책방 서생의 편견이다, 측량 삼각점이 아닌 곳에 박힌 말뚝은 뭔가, 위치표시용 말뚝을 1m 이상 박을 필요가 있나, 측량에 80kg 짜리 쇠말뚝이 왜 필요한가, 표지용으로 쇠말뚝을 쓰지 않는다…등등.. 논란의 와중에 독립기념관에 전시하던 쇠말뚝은 사라졌다고 한다.
▶ 대일본(大日本) 논란
▷ 옛 조선총독부청사(중앙청-국립박물관)철거 때와 서울시청 신청사 공사할 때 하늘에서 광화문 일대를 내려다보면 ‘大日本’ 글자가 드러난다는 얘기가 돌았다. 백악산이 大, 조선총독부 건물이 日, 옛 서울시청 건물(태평관)이 本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서울시는 2009년 새로 짓는 청사 뒤쪽 태평홀을 헐어내어 本자를 지우겠다고 발표했고, 일부를 뜯어내고 새청사를 지었다.
▷ 조선총독부 건물 설계에 참여한 사사 게이이치가 1926년 〈조선과 건축〉에 쓴 글에는, “평면도는 부지의 경계에 붙여서 궁형(弓形)으로 하고 … 의장(태평홀)은 중앙 뒤쪽에 따로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本이 아니라 弓이라고 생각했다고 것이다.
▶ 청와대에서 용산 대통령집무실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 북한산에서 용산까지 흐르는 산 능선.
▷ 청와대와 용산 대통령집무실은 능선으로 이어져있다. 백악산~인왕산~사직터널~서울시교육청~경향신문사~서소문~숭례문~남산 백범광장~남산 능선~하얏트호텔~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녹사평역~둔지산 능선의 남쪽 끝에 대통령집무실이 위치한다.
▷ 백악산에서 한양 도성을 시계반대방향으로 절반을 돌아서 내려간 자리로 능선은 서울이 확장하며 깎여 낮아진 곳이 있고 고층 빌딩이 들어선 곳도 있다.
▶ 용산 이야기
▷ 고려 숙종 때 천도를 계획하며 서울 일대를 돌아본 조사단이 용산은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했다. 코앞에 한강이 흘러 지형상 외적이 강을 거슬러 공격해오면 방어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 본래 한강은 모래사장과 습지가 많아 홍수가 나면 자주 물길이 바뀌었다. 만초천을 역류한 물이 삼각지와 서울역을 거쳐 숭례문 근처까지 들어온 기록도 있다. 만초천 지류 하나가 삼각지 전쟁기념관 뒤로 흐르니 용산일대는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 1940년대 미군 지도. 이촌역과 서빙고역 앞쪽으로는 모두 모래사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양옆으로 둔지산에서 나오는 개울이 보이고, 한강의 흐름도 지금과 많이 다르다.
▷ 1940년대 미군이 작성한 지도를 보면 경원선(지금의 경의중앙선) 밖으로는 모래사장 밖에 없다가 한강치수 사업에 따라 1972년에 강변북로, 1986년에 올림픽대로가 뚫리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동부이촌동 신동아 아파트가 1984년에 들어섰으니 그때까지 이렇다 할 시설도 없었다.
▷ 남산은 청와대의 백악산처럼 든든한 배경이 되지 않는다. 과거 논리라면 집무실 이전은 생각지도 못할 조건이지만 그간 서울이 발전하며 땅의 모양이 달라졌다.
▶ 청와대 자리는 흉지인가? 길지인가?
▷ 흉지다 ⇒ “…청와대 자리가 서울 임자 되는 산의 중턱에 자리 잡음으로서 풍수가 금기시하는 성역을 차지하게 되어 살아있는 사람이 터전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신적 권위를 가진 자리가 되었고 또한 적어도 청와대는 풍수상 죽은 사람 혹은 신 같은 존재만이 살 수 있는 땅이므로 옮겨가야 한다 …”(동아일보 1992년 7월 29일자 칼럼/ 최장조 교수)
▷ 흉지다 ⇒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2019년/ 유홍준 교수)
▷ 길지다 ⇒ “(논란이 많지만)청와대 일대는 길지라고 보는 것이 맞다. 청와대에 들어서면서 받은 첫 느낌이 포근함인데, 이는 좋은 땅의 기본 조건이다. 청와대 터를 완전한 길지라고 보기도 어렵겠지만, 천년 동안 각 시대마다 한 국가의 근간으로 삼으려 했던 점만 봐도 흉지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지기가 쇠했다는 말도 있지만 땅이 기운을 잃었다면 이렇게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겠나. 꾸준히 청와대 터 바위 지형의 단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생각보다 청와대 경내에 흙으로 이뤄진 지형들이 많이 있다. 와서 보니 중출맥을 따라 내려오는 곳은 대부분 흙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는 굽이쳐 내려오는 용맥이 걸림돌(바위) 없이 순탄하게 내려왔다는 의미다” (매경LUXMEN 2022.6 /풍수전문가 김두규 교수)
▷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청와대는 모두의 공간이 됐고, 청와대 경복궁 일대는 유동인구가 늘어 활기가 넘친다. 용산은 또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고, 용산미군기지 반환은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두 동네 모두 손실보다는 이익이 많다는 평가다.
▶ 서울의 핵심 유산과 시설들이 북한산과 관악산 사이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이유
▷ 백악산~관악산 축은 한양 건설 때 중심축이었다. 백악산 남쪽으로 경복궁 덕수궁 숭례문이 자리를 잡고 그 인근에 부대시설이 들어섰다.
▷ 일제강점기에 서울 도시구조가 크게 바뀐다. 한강이남에서 서울중심부로 들어오려면 관악산을 돌아서 들어와야 하는데 관악산 동쪽 남태령이나 양재 쪽은 크고 작은 산들이 많다. 그래서 일제는 지형이 평탄한 관악산 서쪽으로 대로와 철도를 냈다. 안양~영등포~노량진~용산~서울역 노선이다.
▷ 교통축을 따라 용산역, 서울역, 시청이 들어섰다. 용산은 오랜 기간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지였기 때문에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서울 안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옮겨갈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 동작동 서울현충원은 조선조부터 풍수와 연관이 깊다
서울 현충원 안에 있는 창빈 안씨 묘역.
▷ 현충원 묘역의 원조는 1550년에 생긴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 묘역이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경기도 장흥에서 이장을 해왔던 것이다.
▷ 그 뒤 손자인 선조가 왕위에 올랐는데 후궁의 자손으로는 처음이었고, 이후 조선의 임금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다.
▷ 이 자리에 1955년 7월 국군묘지가 들어섰다. 일대가 조선조부터 국가 소유였기에 조성이 쉬웠다.
▷ 1965년에는 국립묘지로 승격되며 군인 아닌 국가유공자들도 안장하게 됐다.
▷ 명당의 기를 받고자 했는지 창빈 안씨 묘역 주위에 역대 대통령들이 묻혀있다. 뒤에 박정희, 옆에 김대중, 앞에 이승만, 건너편에 김영삼. 이제는 빈자리가 없다.
[출처] 「청와대 백과사전」 .. 중앙일보 기획 기사 정리|작성자 One Charles 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