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 사천 이야기 29
퇴계 이황, 사천에 머문 흔적-사천
鵲島精舍 이야기
남해고속도로 곤양 IC를 지나 서포면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길가에
'퇴계이선생 장구소(退溪李先生 杖屨所)’라는 비석이 보입니다. 바로 옆 안쪽에는 이보다 더 오래된 작은 표지석도 있습니다.
장구소(杖屨所)라는 말은 ‘장구지소(杖屨之所)’ 성인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와서 자취를 남기고 간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지나간 길이 아니라 머물면서 가르침을 준 곳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표지석 뒤 언덕에 작은 기와집이 보입니다. 작도정사(鵲島精舍)라 이름 붙여진 건물입니다. 퇴계 선생께서 이곳에 오신 자취를 기리기 위해 이 지역 유림에서 지은 건물이라고 합니다.
안동이 고향인 퇴계선생께서 이 먼 곳까지 방문하셨다니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천시 자료와 초록창 언니의 도움으로 알게 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생각도 쪼매 보탰습니다.
1532년 당시 곤양군수인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년)을 초대했습니다.
중앙에서 대사간까지 지낸 63세 곤양군수 어득강이 30대 초반의 퇴계 선생의 명망을 듣고 꼭 한번 곤양으로 초대하겠다는 마음으로 퇴계 선생에게 초청장을 보냈다는 겁니다. 아직 벼슬길에도 오르지 않은 선비를 직접 초대한 것은 퇴계의 글재주와 덕망을 들은 관포가 나이를 초월해 친교를 맺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장유유서가 엄격하고 나이에 따른 예우가 남달랐던 그 시대에 31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관포 선생도 대단하신 분입니다.
퇴계 선생은 상주, 선산, 성주를 거쳐 의령 처가에 잠시 머물다가 진주를 지나 한 달여 만에 곤양 땅을 밟았다고 합니다. 지금 사천시 행정구역인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이 당시는 곤양군 소속이었습니다.
내륙에서 성장한 퇴계 선생께 바다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겁니다. 뱃놀이도 하고 섬 탐방도 하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낚시는 직접 아니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내륙에 사시는 분들이 바닷가에 오면 많이 좋아하시는데 퇴계 선생도 즐거워했을 것 같습니다.
퇴계는 어득강 군수와 함께 배에서 내려 까치섬(작도=鵲島)에 올라갔을 것 같습니다. 차일을 치고 생선회와 맑은 술로 삶과 자연의 이치를 논했겠지요.
멀리 푸른 바다와 산, 살아 숨쉬는 개벌 과 작은 섬, 학처럼 맑은 두 분 선비님의 모습과 주위 지역 유림 인사들의 모습
이 그려집니다. 존중과 배려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퇴계 선생과 고봉 선생이 생각납니다. 소나무 위에 까치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까치는 좋은 소식의 상징입니다.
훗날 이를 기리고자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 언덕배기에 작은 집을 지었습니다. 그때 그 섬의 이름이 작도였답니다. 아마 까치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육지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일제 말기인 1938년 일본 사람 야마타(山田)가 일대 갯벌을 간척해 논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작도정사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은 여물어 가는 나락들로 가득한 들녘입니다. 이곳이 1938년 이전에는 바다였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약 470년 전 퇴계 이황 선생이 다녀갔을 때도 이곳은 바다였고, 지금의 작도정사가 있는 곳도 바다 가운데 섬이었다는 사실을요.
작도정사 건물 벽면에는 1928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건립될 당시 정사 건립에 참여하신 유림들의 성명들이 정리가 잘 되어 빼곡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오랜 비바람에 견디지 못해 도괴된 것을 1954년 지방 유지들에 의해 다시 복원되어 지금은 곤양향교에서 매년 음력 4월 초정일에 춘제를 지내고 있다 합니다.
퇴계 선생께서는 곤양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요? 그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글을 퇴계 선생이 남겼습니다.
한문이 짧아 남이 번역해 놓은 것을 살짝 가져 왔습니다. '昆陽陪魚觀圃游鵲島是日論潮汐'의 글입니다. 풀이하면 ‘곤양에서 어관포를 모시고 까치섬에서 노닐면서 조수에 관해 이야기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은
‘까치섬은 곤양군 남쪽 십 리쯤에 있다. 섬 양쪽으로 두 개의 산이 대치하고 있어 문(門)과 같고, 조수가 이로부터 드나드니 섬을 고리하여 팔구 리를 돌면 바다가 되고, 조수가 물러가면 육지가 된다.
이날 어부들이 그물을 드리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은 정사인 세호와 이생원 분과 강생원 공저 및 황과 배를 타고 상류와 중류로부터 그물을 치고 있는 장소에 이르렀다.
선창에 내려서 보니 어부들이 출몰하고 큰 고기가 뛰어오르니 가히 즐길 만하더라. 조수가 물러날 때에 이르니 모두 배를 두고 섬으로 올랐다. 점심때가 지나서 배를 띄운 곳을 돌아보니 다 평지가 되고 까마득한 황무지가 주렴 그물에 가리어 은은할 따름이었다. 이에 조수의 이치를 이야기하면서 회를 쳐서 술을 마시다가 날이 저물어서 파하였다.’
이 글의 주된 배경이 바로 ‘까치섬’입니다. 이곳에서 넓은 갯벌 풍경을 즐겼으며,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관찰했던 셈입니다. 나아가 회도 즐겼습니다. 훗날 지역의 유림들은 이황 선생의 ‘까치섬’ 방문을 기념하고 싶었을 겁니다. 작도정사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작도정사를 둘러보고 인근 다솔사와 와인갤러리도 함께 탐방하면 의미있는 사천관광이 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있다면 비봉내마을 체험도 괜찮습니다.
비토섬 가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사천에는 퇴계 선생과 오래 교류했던 구암 이정선생도 있습니다. 작도정사를 답사하고 구계서원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22.9.7.
김상옥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