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대사
商나라
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이다.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에 은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탓에 '은'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 나라 이름을 칭할 때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으므로,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른다.
'상(商)'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 '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으므로, '은(殷)'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상나라 시조에 관한 의견은 분분한데, 기록에 의하면 전설상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한다. 탕왕은 夏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商나라를 개국하였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백성을 잔혹하게 다룬 30대 주왕(紂王)이며, 주(周)나라 시조인 서주 무왕(西周 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설상 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세기 초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면서 실재하는 왕조로 인정했다.
출토된 청동기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독해함으로써 선사 사회부터 역사시대로 옮겨진 은나라 사회의 실태가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창업 이전 전설상 상 왕조의 시조는 설로 되어 있다. 설은 유융씨의 딸이자 제곡 차비인 간적이 제비의 알을 먹었기 때문에 낳은 아이로 되어 있다. 설은 순 때에 우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상에 봉해져 자씨 성(子姓)을 받았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역대 치세 설로부터 13대째의 탕은 박(현재의 허난성 상추시)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탕은 현인 이윤의 도움을 빌려 하왕걸을 쓰러뜨리고 제후들에게 추천되어 왕이 되었다.
상나라 4대 왕인 태갑은 폭군이었기 때문에 이윤에게 추방되었다. 후에 태갑이 반성했고 이윤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태갑은 선정을 베풀어 태종(太宗)으로 칭해졌다.
옹기 때에 왕조는 잠시 쇠약해졌다. 옹기의 다음 왕인 태무는 현인 이척을 임용해 선정을 베푸려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태무의 공적을 칭송해 태무는 중종(中宗)으로 칭해졌다.
중종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조을은 현인 무현을 임용해 선정을 하려고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조을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반경은 은허로 천도했고 탕 때의 선정을 부활시켰다.
반경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무정은 현인 부열을 임용해 상 왕조의 중흥을 완수했다. 무정의 공적을 칭송해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칭해졌다.
상나라 고종 이후의 왕은 대체로 어리석은 폭군이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즉위 후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고, 백읍고가 아버지 희창을 위해 알현하고 원숭이를 바쳤는데 달기의 모함에 의해 주왕(紂王)에게 살해 당하고 부친은 사면을 위해 주왕(紂王)에게 살해 당한 백읍고의 육병을 먹은 뒤 귀가하고 먹은 육병을 토했고 임종 전에 상 왕조를 멸망할 대책을 세운 후 그의 아들인 희발(姬發)이 상나라의 여러 제후들을 모아서 주왕을 주살하고 상 왕조는 멸망했다.
멸망 후 주왕의 아들인 무경은 주의 무왕에 의해 상나라의 옛 땅에 봉해졌다. 무왕의 사후에 무경은 무왕의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해 주살 당했다. 그 후, 무경의 백부의 미자계(주왕의 형)가 송에 봉해져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했다.
상나라의 도읍지 상나라 도읍지 변천표 국왕 당시의 지명 현재의 지명
선상(先商) 시대
설(契) 박(亳) 일설로는 현재 랴오닝성 서부에 이르는 허베이성 동북부 일대,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뤄양시 옌스시 스샹거우 유적(尸鄕溝遺跡)
번(蕃) 일설로는 현재 베이징시, 허베이성 북부 지둥 평원(冀東平原) 일대
만상(晩商) 시대
반경(般庚) 순(旬) 은(殷) 현재 허난성 안양시 서북 은허 유적(殷墟遺址)
제신(帝辛) 수(受) 조가(朝歌) 현재 허난성 허비시 치현 차오거 진
역대 군주
상나라의 역대 국왕
사회와 문화
은대의 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에는 농업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촌락이 전개되어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은 농민을 지배하여 곡물을 조세로 징수해서 일족(一族) 및 예속되어 있는 가내노예나 각종 기술자들을 부양했다. 농민은 하나의 대가족 집단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마을의 경작지에서 영농을 하고 있었다. 이 혈연 촌락은 족장의 통솔 밑에 어느 정도의 자위조직(自衛組織)도 가지고 공동작업에 종사하여, 자율적인 생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을 장악하기보다는 족장들을 장악하고, 족장들을 통해서 촌락을 지배했다.
은나라 시대의 정치는 신권정치로서 제사·정벌·권농·목축 등 주요한 국사는 신의 뜻을 묻는 점(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회는 부권적(父權的) 씨족제로서 처음은 형제 상속이었으나 곧 부자상속으로 되었다. 귀족은 더없이 정교한 청동기·백도(白陶)·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있었다. 농민은 목제 농기구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보리·수수·기장 등을 재배하고, 양잠을 하였으며, 말·양·돼지·소 등을 사육했다. 인신공양 풍습 또한 존재하였다.
정치
상나라 사람들은 제(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 정치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은 상제의 의향을 묻기 위한 행위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제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상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나라 시기에 정교한 청동기가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청동기는 바로 신정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 권위는 쇠퇴하고 세속적 권위를 강화해 간 왕권이 성장하였다.
행정
상나라는 읍제(邑制)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읍이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성벽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읍은 대읍과 족읍, 소읍으로 나뉘는데, 대읍은 상나라 왕이, 족읍은 상나라 왕과 연합관계에 있던 씨족의 우두머리, 소읍은 씨족의 우두머리와 연합관계에 있던 동족집단의 우두머리가 각각 통치하였다. 이처럼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들 사이와 정치적 연합관계를 봉건(封建)관계라고 부른다.
유적과 유물 갑골문 귀갑(甲骨文 龟甲) 대표적인 유적으로 은허가 있다.
은허
19세기 말에는 허난성(河南省)에서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에서 갑골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은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의 사마천이 《사기》(史記) 속에 기술하였는데, 갑골문자 속에 나타난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가 《사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은허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에 의하여 은나라 왕의 존재가 인정되고, 특히 은허로 도읍을 옮긴 후, 반경의 동생인 왕 무정(武丁) 이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재가 확인되었다.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 중엽이다.[2]
갑골문자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존이 알려졌는데, '갑골'이란 거북의 뱃가죽뼈, 짐승의 뼈 혹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갑골문이란, 갑골의 안쪽 면에 불에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국부적인 균열이 생기는데, 그 균열의 상태를 보아 점을 치고 거기에 점친 날짜와 점쟁이의 이름, 점친 내용과 결과 등을 새겨 넣은 글을 말한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왕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었다.
연구 및 기타
상인(商人)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를 추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이 사건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 예전의 설로는 죽서기년에 무왕에서 유왕(서주의 마지막 왕)까지 257년이는 기술이 있어 유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의 일이므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27년이 된다. 또 한서에는 주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술이 있어 이것으로부터 기원전 1123년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
周나라
주(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는 상나라를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이며, 790년간 왕조를 이어갔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 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의 천자로서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주나라 청동기 문화권 영향력은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등 장강 유역까지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주나라 시기에 넓은 영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봉건제의 개념이 등장하였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였고, 농지 개척을 진척하였으며, 농기구는 목재나 석재로 만들었다.[1] 학계는 주나라 시기부터 중국에서 철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771년 견융이 주나라를 침략하여 유왕을 살해하여, 제후들이 그의 뒤를 이어 평왕을 옹립했고, 곧 이어 호경(鎬京, 현재의 시안시 부근)에서 부도(副都) 낙읍(洛邑, 현재의 뤄양 시)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년 ~ 기원전 256년)로 구분한다.[1]
봉건제도
주나라는 본격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2]무왕은 개국 초부터 자신의 친족들과 태공망 등의 개국공신들에게 영토를 나눠주고 봉지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고 주(周) 왕실을 지키게 했다. 봉건 제도의 기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앙에는 최고 통치자인 왕이 존재하고, 순서에 따라 공, 후, 백, 자, 남으로 이루어진 오등작을 유력 세력들과 왕 사이의 친밀도, 전략적인 중요성, 군공 등을 고려하여 왕이 직접 그들을 수순에 맞게 책봉했다. 이 중 후작이 가장 많았는데, 이 때문에 귀족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후들, 즉 제후(諸侯)라는 말이 통용되게 되었다. 이들은 국(國)을 수여받았다. 이후 제후들도 내부의 공신들을 책봉하였는데, 이들은 경(卿) 혹은 대부(大夫)로 불렸으며, 가(家)를 수여받았다. 다시 가 내부에서 공신 책봉이 이루어져서 사(士) 계층이 생겨났고(다만 사 계층은 최하위 계층이었던 만큼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형성되었다.), 이들은 단순하게 식읍 정도를 수여받았는데, 기본적으로 주 대에는 읍(邑)이 행정의 최소 단위였으므로 더 이상의 분봉은 없었다.
주나라의 분봉은 주왕실 일족(동성제후)가 약 56개 국, 그렇지 않은 귀족(이성제후)가 약 70여개국으로 추측된다. 각 제후국은 중심지인 도성을 거점으로 가까운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의 성읍 국가였으며 후대와 같은 영역 국가가 아니었다. 전체 제후국은 약 130~180개국이었다고 추산된다.
한편, '封建(봉건)'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는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 없이 오히려 실제를 오도시키는 경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양자 간의 어의적, 역사학적 유사성에 대해서 동질성보단 차이가 크므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함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지양하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번역할 때 'feudal'이라는 용어를 아예 피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이것이 제후의 영토가 제후국으로서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는 봉건체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봉건제 하에서 제후국의 제후들은 왕으로부터 분봉 받은 직할지를 다스리고, 분봉지를 동맹 세력이나 일족에게 세습하였다. 왕은 그에 대한 대가로 제후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과 공납을 받았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씨족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부계 혈통의 종족 구성에서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의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이는 곧 천자의 적장자만이 천자가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황제의 자식들은 대종이고 왕의 자식들은 소종이라 하여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원칙은 제후·대부·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전국적인 통치 제도에 이용되었다. 춘추 시대의 봉건 국가들은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하였고 그러한 틀안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다투었으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은 유명무실화되었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이 권위가 유명무실화 되고 전국 칠웅의 국가들이 스스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임을 내세우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황하 유역이 이 시한의 시초에 겨우 역사시대로 들어섰다(전설적인 여러 왕 가운데서 유명한 갑골문 복사에 의해서 동시대적으로 확증되는 것은 왕국의 후반기. 은허 천도 후의 8왕뿐임). 이후 서주(西周)를 거쳐 춘추시대의 중엽까지이다. 그 기간은 전형적인 청동기 문명이나, 조형의 예술성에서는 선행의 은시대의 것이 후속의 주시대보다 오히려 뛰어났다. 주의 역사는 은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전설적으로 후세의 여러 전적(典籍)에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실증적 사료(史料)는 거의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서주 사회가, 원시 씨족공동체인 강점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정된다.그러나 기원전 9세기 무렵부터 차츰 내부적 모순이 고조되어 쇠퇴했다. 기원전 8세기 후반에는 드디어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지 못하여 수도를 잃고 주나라 왕실은 동으로 달아나 겨우 명맥을 부지하였다(東周).
주 왕조
은 왕조에 이어 중국에 성립된 국가가 주 왕조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수이(渭水)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중원이란 황하(黃河) 중류의 남북 지역, 즉 허난(河南), 산둥(山東), 산시(山西)의 대부분과 허베이(河北), 산시(陝西)의 일부이다. 이 광대한 지배권을 유효하게 통치하는 조직이 봉건제도이다. 주 왕조는 일족 공신을 각지에 파견하고 제후의 벼슬을 주어 주(周) 왕실을 지키게 했다. 이와 같은 봉건적 관계는, 이미 은에서 왕과 백의 관계로 성립돼 있었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이 씨족적인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고 농지의 개척을 진척하였으나 농기구는 목제나 석제의 기구였다. 기원전 770년, 서방의 이민족 견융의 침공을 받아 수도 호경(鎬京)은 함락되고 부도(副都) 낙읍(洛邑, 洛陽)으로 동천하였다. 동천 이전을 서주(西周),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부른다.
춘추 시대
춘추 시대 (기원전 770~403)
주나라가 낙읍(洛邑)에 동천(東遷)하고 나서 진(秦)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제후가 대립 항쟁한 시대이지만, 그 전반기를 춘추시대(전 770 전 403)라 하고 후반기를 전국시대라 한다. 주나라가 본가인 봉건제도는 벌써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의 동천 후 강국은 근처의 소국을 병합하여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해 갔다. 서주(西周)말에 800 가까이나 되던 국가는 춘추시대 중기에는 수십 국으로 감소되었다. 춘추시대 초기에 진이나 초(楚)는 근처의 도시국가를 정복하면 부하에게 그 토지를 영지로 주지 않고 현이라 이름붙여 국왕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질서가 파탄된 가운데서 희미하게 주의 종주권으로서의 명목만을 지킨 것은 패자(覇者)의 힘이다. 패자는 회맹(會盟)을 주최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막고, 주 왕실을 존중하고 숭배하여 소위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목으로 중원을 통제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丘)의 회(전 651),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천토(踐土)의 회(전 632)가 그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초는 중원에 진출하여 진을 격파하고(전 597) 패업을 이룩했지만, 패자의 성격도 달라져서 주나라 왕실은 아주 무시되었다.초의 장(莊)왕은 주실의 왕위의 상징인 ‘큰솥의 무게를 묻는다’(이는 장왕이 주나라 천자 자리를 노리려는 의도의 표시였다고 한다)라고 한 말은 그 한 예이다.
춘추시대는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의 과도기였다. 또 춘추 중기에는 철제농구가 출현하여 심경제초(深耕除草)가 용이하게 되고 생산력은 증대해 갔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전국시대에 내려와야 되지만 씨족적인 질서를 분해하고 계급 분화를 촉진했다. 토지 소유는 공동체적 집단 경작으로부터 개별적 경영으로 이행하고, 세제도 영주 직영지라는 노동 지대(地代)의 형태로부터 자작농의 현물지대 수납으로 변화해 갔다.
전국 시대
전국 시대 말기의 전국 칠웅
강력한 제후는 왕을 칭하게 되어 이 때에 명실공히 주왕조의 권위가 떨어지고 주의 봉건제는 붕괴되었다. 춘추시대 초에 140여 개국이었던 도시국가의 거의 모두가 이 때에는 7개 강대국의 어느 한 영토에 편입되어 버렸다. 처음 강력했던 나라는 위나라였으며 문후(文侯)·혜왕(惠王)은 널리 인재를 구하여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지배한 지역을 군현화(郡縣化)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음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연(燕)이 강대해져서 비로소 진·초·연·제·한·위·조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그 중 진은 효공(孝公) 때 상앙의 변법에 의하여 크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성과를 올려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소위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제창된 것도, 4군(君)의 활약이 있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윽고 6국이 진(秦)에 굴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출현시키게 된 것이다.
요컨대 전국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전국시대가 되자, 사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인다. 그 임무는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의 전반을 총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대부 등과는 달라서 세습은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이 때까지는 대부가 세습적으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반하여 장군(將軍)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주에 의해서 장군이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군주권(君主權)이 강화되는 한편, 능력에 따른 관료군(官僚軍)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진에서는 다른 나라의 출신자까지도 적극적으로 관료로 채용했다.
춘추 말기에 나온 공자(孔子)는 노(魯)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군주에게 그 정치학설을 설(說)하고 다니면서 그 학설이 실현되도록 운동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하나하나의 나라를 초월하여 공통된 문화·사상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자기의 영지(領地)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던 대부 계층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농업 생산력이 이 변동기의 자극을 받아 상공업의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다.국경을 초월한 대상인의 활발한 교류로 국경을 넘어 몇몇 나라에 판로를 가진 대상인들은 사치품을 판매하여 큰돈을 벌었다. 서민의 필수품인 철기나 소금 등을 제조·판매하는 대상업 수공업자들의 재산은 때로는 왕후(王侯)와도 필적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일이 통관세(通關稅)를 필요로 하는 국경(國境)이라는 것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국경이 없는 중국의 통일을 이면에서 촉진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이와 같은 것은 대상인들이 전국을 유세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분립한 강국이 대립·항쟁하는 반면에 있어서는 문화, 경제의 면에서 이미 중국을 하나의 세계로서 성립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秦의 中國 統一
기원전 238년 진왕(秦王)은 즉위 후 10년 만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정치에 임하게 되었다. 진(秦)은 이미 효공(孝公) 이래의 부국강병책이 열매를 맺어, 전국(戰國)의 열강 7개국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다. 이 충실한 국력을 배경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동방으로 군대를 진군시켜, 적대하는 6국의 정복에 나섰다. 진은 강대한 군대와 교묘한 외교술(外交術)이나, 밀정에 의한 열국의 이간공작(離間工作) 등에 의해서 우선 기원전 230년에는 정면(正面)의 적인 동시에 중원(中原)의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韓)을 멸망시켜서 동방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어서 북으로 진격하여 조(趙), 연(燕)을 정복하고, 또한 동쪽의 위(魏), 남쪽의 초(楚)를 넘어뜨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강국 제(齊)를 기원전 221년에 멸망시켜 천하통일의 위업을 완성했다.
진왕은 이사(李斯)를 발탁하고 통일국가의 기초를 굳게 다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정책을 단행했다. 이사는 법가사상을 신봉하는 정치가였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법가의 정치는 상앙 이래의 진 나라의 전통이요, 이것은 또한 통일국가의 완성에 의해서 타고난 자신(自信)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고, 냉혹하게 천하를 지배하려고 한 진왕의 심정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왕이 이사를 발탁한 것은 신생의 통일국가 통치의 기본방침을 명확히 내세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진왕(秦王)은 왕의 칭호를 폐지, 황제(皇帝)라 자칭하고, 황제 전용어를 만들어서 군주의 권위를 높였다. 이 제(帝)라는 말은 본래는 하늘의 신으로서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최고신(最高神)을 의미하고 있었다. 또한 황(皇)은 ‘빛나다, 훌륭하다’는 뜻으로 지상의 왕인 진왕이 왕의 칭호를 고쳐서 황제라는 칭호를 쓴 것은 세계는 물론이요 전우주를 지배하는 유일한 절대자라는 강한 자부의 표명이요, 또한 군주(君主)라는 사람의 성격의 표명이었다. 진왕은 또한 지배자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군주의 사후에 업적에 비추어 호(號)가 추증되는 시(諡)의 제도를 폐지하고, 초대(初代)는 시황제(始皇帝)로 시작하고, 이하 2세도 황제(皇帝), 3세도 황제라 하여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영원히 전해 내려갈 것임을 선언했다. 이리하여 진왕은 초대의 황제가 되고, 사후에 시황제라고 일컫게 되었다.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으로서 종래와 같이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봉지(封地)를 내주어 자치(自治)를 인정하는, 이른바 봉건제(封建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하여,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이것을 지방 행정의 단위로 삼았다. 진(秦)에서는 상앙 이래 현제(縣制)를 시행하고, 또한 새로운 정복지에는 군(郡)을 두어 직할지로 삼고 있었지만, 전국 규모로 획일적 군현제가 시행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와 동시에 관제(官制)를 정비하여 우선 중앙에는 행정, 군사, 감찰의 최고 책임자로서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두고, 그 밑에는 사법(司法)의 정위(廷尉), 국가 재정을 맡는 치속내사(治粟內史), 제실(帝室)의 재정을 맡는 소부(少府), 궁전 경비를 맡는 낭중령(郎中令), 궁문 경비를 맡는 위위(衛尉), 외교를 맡는 전객(典客), 종실관계의 종백(宗伯), 종묘(宗廟)의 태상(太常), 거마(車馬)를 맡는 태복(太僕) 등의 9관(九官)을 배치하여 서무(庶務)를 통할했다.
한편, 지방의 군(郡)에서도 중앙을 본따 장관(長官)에는 수(守), 부(副)에는 승(丞), 군사에는 위(尉), 감찰관으로는 감(監), 현에는 장관으로서 영(令), 부(副)에는 승(丞), 군사에는 위(尉)가 각각 중앙에서 파견되어 통치에 임했다. 이리하여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정연한 행정조직을 만들어, 황제의 명령이 그대로 지방의 말단에까지 이르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던 것이다. 이 진 나라의 행정조직은 다음의 한(漢)나라에 계승되어 나중에는 많은 변화가 가해졌지만, 중국에 있어서의 통치의 기본적인 조직으로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오랫동안 천하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戰國)의 각국에서는 고유의 문화가 발달하고, 저마다 독자적인 문자나 계량의 단위, 화폐 등이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운영의 필요성에 의한 군현제의 전국 실시에 따라 각종의 통일이 시행되었다. 문자(文字)는 이사(李斯)가 고안했다고 하는 소전(小篆)으로 통일되고, 도량형의 단위를 일정하게 정하며, 화폐는 포전(布錢)이나 도전(刀錢) 등을 폐지하고 진(秦)의 원형방공(圓形方孔)의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했다.
또한 도로망(道路網)의 전국적인 정비를 시행하여 마차의 수레바퀴의 폭까지 동일규격으로 고쳤다. 역시 이 도로망은 치도(馳道)라고 불리면서 시황제의 순행용(巡幸用)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지방과의 연락용 외에 비상시에는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키는 군용 도로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사상의 통제도 엄격하여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자(儒者)를 생매장하였고, 정치에 유해하다고 인정된 서적을 불태워버렸다. 이것이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대외적으로는 북쪽의 흉노를 치고 춘추 이래의 만리장성을 보수하여 북변의 방비를 강화하고 남쪽은 화남(華南)에서부터 지금의 베트남 북부까지를 영유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빈번한 원정과 장성(長城), 궁전, 능의 수축 등 대규모 토목사업은 백성을 괴롭혔으며, 또한 개혁도 급격했기 때문에 백성의 불만은 차츰 높아졌다. 기원전 210년 순행(巡幸) 도중 황제가 급사하자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진나라는 통일 후 불과 15년에 멸망했다.
漢 성립
진나라의 급격한 통일 정책이나 일반 농민의 과중한 요역은 시황제의 죽음과 함께 각지에 반란을 유발시켜 드디어 기원전 206년 옛 6국 중의 초나라 귀족인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타도했다. 이후 항우와 그의 협력자였던 유방(劉邦)과의 5년간에 걸친 사투(死鬪)가 벌어졌다. 항우는 진에 의해서 비롯된 중앙집권체제를 부정하고, 중국 전토에 여러 장수들을 봉건(封建)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구질서를 부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즉 회왕(懷王)을 받들어 의제(義帝)라 일컫고 침성(郴城)에 옮긴 후에 이를 죽인 후, 자신은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일컫고, 팽성(彭珹)에 도읍을 장하여 쟝쑤(江蘇), 안후이(安徽) 등 9군(郡)을 지배했다. 그리고 여러 장수에 대해서는 군공(軍功)과 협력의 정도에 의거하여 각지에 분봉(分封)했다. 유방에게는 파촉(巴蜀), 한중(漢中)의 땅을 떼어 주어 한왕(漢王)이라 하고, 기원전 206년 4월에는 군대를 해산하여 각각 봉국(封國)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항우가 실시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많은 불만을 남겼다. 특히 회왕(懷王)의 약속에 위반하여 벽지(僻地)의 한왕에 봉해진 유방은 가장 불만이 큰 사람이었다.그해 8월, 유방은 관중(關中)을 공격하러 나섰다. 순식간에 관중 일대를 정복하여 역양에 도읍을 정한 유방은 이듬해 3월에는 의제(義弟)의 복수를 주장하고 반초(反楚) 세력을 결집하여 항우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후 약 2년여에 걸쳐 항우와 유방은 잉양(滎陽) 부근을 끼고서 동서에 대치하여 격투를 계속했다. 그동안, 유방은 싸움이라는 싸움에서는 모두 다 항우에게 패했으나, 진평(陳平) 등의 반간계략(反間計略)을 써서 교묘하게 항우의 여러 장수들을 이반시키는 한편, 한신(韓信)을 제왕(帝王)에 봉하여 배후에서 항우를 겨누게 했다. 또한 팽월(彭越)에게 명하여 초나라의 양도(糧道)를 끊게 하는 등, 서서히 항우를 괴롭혔다.
기원전 203년 8월에 일단 화의(和議)가 성립됐으나, 유방은 이를 어기고 항우를 추격하여, 그해 12월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자살하고, 초·한의 싸움은 한나라의 승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유방(한나라의 高祖)은 중류 농민 출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옛 귀족들을 물리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춘추·전국시대에 있어서의 사회의 대변동을 예측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유방은 기본적으로는 진나라의 지배제도를 계승했으나 봉건과 군현 두 제도의 병용(郡國制) 등 교묘한 정책에 의해서 한제국의 기초를 굳혔다.
한 고조 사후 황태후 여씨(呂氏) 일족의 전횡(專橫)에 따른 일시적인 위기는 있었으나 경제(景帝) 때에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고 무제(武帝)의 치세가 되자 한나라는 극성기(極盛期)를 맞았다.무제는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함과 동시에 외정(外政)에도 적극책을 써서 영역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빈번한 정벌은 국가 재정의 궁핍을 초래했기 때문에 그러한 그의 치정(治政)도 만년에는 파탄의 빛이 짙어졌다. 다음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는 무제 말년의 실정을 만회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올릴 수가 있었으나 한편 이즈음부터 대토지 소유자로서 호족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차츰 황제의 권력에 의한 통일적 행정을 문란케 했다. 여기에다 원제(元帝) 이후 궁정 내에서는 외척(外戚)인 왕씨(王氏)가 세력을 휘두르게 되어 기원후 8년 드디어 전한(前漢)은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중국
왕망(王莽) 말년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한실(漢室)의 혈통을 이은 남양(南陽:허난성 남부)의 호족 유수(劉秀)는 남양과 하북의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적미(赤眉) 등의 농민 반란군이나 다른 호족군을 진압하고 25년 뤄양에 도읍을 정하여 제위에 올라, 광무제(光武帝), 한제국(漢帝國)의 부활을 선언했다. 광무제는 전한의 여러 제도를 규범으로 하여 내정의 정비에 힘을 기울여 정국의 안정을 회복했다. 남(南)흉노를 예속시키고, 동북의 오환(烏桓)·선비(鮮卑)에 대한 방위를 굳히고, 남쪽의 여러 민족을 평정하였으며, 서쪽의 강(羌)족을 쳤다.후한은 4대 화제(和帝) 때까지는 국력이 충실하여 흉노를 격퇴하고 서역을 복종시켜서 동서의 교통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2세기에 들어서 유약(幼弱)한 황제가 계속된 것이 원인이 되어 조정에서의 환관(宦官)·외척(外戚)의 힘이 강해졌고, 특히 유가적 교양을 갖춘 청류기절(淸流氣節)의 학자들이 이에 대항하는 등, 국가 중추부에 있어서의 통일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국가는 일반 농민들의 생활과 생산 활동을 보장하는 기능을 잃어갔다. 또한 각지의 호적들은 전한(前漢)에 비해 더욱 토지 겸병(兼倂)을 심하게 하여 일반 농민을 압박했다.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 농민들 사이에는 태평도(太平道), 오두미도(五斗米道) 등의 주술적(呪術的) 민간신앙이 침투하여 마침내 184년에는 이들 종교에 의해서 단결한 농민들에 의한 황건의 난이 일어났다.이 주류 세력은 그해 안에 평정되었지만, 이후 각지의 지방관리·호족들은 제각기 무장 자립하여, 후한제국은 와해의 징조를 더해 갔다. 이러한 때에 황건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조조(曹操)는 한실을 옹호하여 화북을 누르고 위왕(魏王)에 봉해져 위세를 떨쳤다. 그의 아들 조비(曹丕)는 220년에 헌제(獻帝)를 위협하여 선양(禪讓)을 받았고, 이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위(魏)·오(吳)·촉(蜀)이 정립(鼎立)하는 3국시대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