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밥 집
박 상 분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필요한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필요 중에서 의, 식, 주로 구분을 지어 보는데 ‘식 주 의’라 하지 않고 ‘주 식 의’라고도 하지 않고 ‘의’를 맨 앞자리에 놓고 보통 ‘의 식 주’라 한다. 생각해 보니 오늘날처럼 식생활이 넉넉해지고 주생활이 윤택해지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의식주’라 말했다. 생활이 넉넉하지 않을 때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것일 텐데 말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그 어렵던 50년대 60년대에도 의생활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교사상이 오래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예의,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는 ‘의식주’라는 언어습관을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이 표현은 북한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식의주’라 말한단다. 전반적인 생활이 어려울 때엔 뭐니뭐니해도 밥이 우선일 것이니 그들의 언어생활이 이해가 되는 터다. 사회문화에 따라 어휘는 조금씩 순서를 달리하는 언어의 사회성을 발견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주억거리게 된다.
경제적으로 곤란할 때 건강이 좋지 않은 그가 위로의 말을 했다.
“돈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하면 가장 큰 재앙이다. 돈이 적은 건 모른다. 건강하지 못한 것은 대번에 알아차린다.”
그의 말에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건강하지 못한 그가 안쓰럽긴 했지만 반기를 들었었다. 물론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반을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라는 명언을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돈이 없는 것도 남들이 금세 알아차린다고 열을 올렸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광실에 사는 사람, 초가집에 사는 사람이 어찌 감춰지겠는가? 마을 앞 기와집에 사는지 골목 안 끄트머리 판잣집에 사는지를 다 알 수 없는 복잡한 대도시에서는 목적을 두고 적극적으로 감추려고 한다면 주생활이나 식생활은 웬만치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옷차림이야 어찌 감출 수 있을까 싶다. 나물 먹고 물을 마시고도 이쑤시개로 마무리 할 수 있겠다. 산동네 오두막에 살아도 비단 옷을 빌려 입고 나서면 그 누가 삼베옷을 입고 사는 형편인지 알 것인가? 그러니 그러하다. 옷을 앞에 내세워 ‘의식주’라 말하고 ‘옷이 날개’라고도 하고, 더구나 먹을 것이 넉넉하고 추위를 막아주고 더위를 식혀 주는 편리한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패션시장이 커지고 브랜드가 중요해 졌으니, 잘 차려 입고 현관문을 나설 일이다.
비단 옷 차려 입고 대문을 나섰으니, 산해진미는 이미 일상생활이 되었으니, 이제 옷과 밥은 어느 정도 해결 되었으니 집을 살필 일이다.
미라골에서 스물다섯 해를 살았다. 25년 전 새 아파트에 이사하던 날, 임금 되어 대궐에 드는 것 같았던 감격마저 가물가물하다. 병중이시던 어머니를 등에 업고 넓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장년의 아들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무리 ‘희끗희끗하다’ 우기고 싶어도 얼토당토않아서, 분명하게 파뿌리로 드러나서, 피시시 웃어넘긴다. 막둥이가 유치원 졸업할 무렵에 이사하고 며칠 후 초등학교에 입학했었다. 눈부시게 예뻤던 막둥이가 이 집에서 자라서 마침내 전서방의 지어비가 되었다. 준이 에미가 되었다. 둘째가 서울에서 대학을 하고 상하이로, 베이징으로, 밴쿠버로 유학을 떠날 때도 여기서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맏이가 쓰던 값나가는 바이올린, 덩치 큰 피아노, 기타도 오래오래 이 집에서 버티고 있었다. 아침이면 따사로운 햇살이 집 안을 가득 채웠고 동창 앞에 둔 벤자민 화분이 긴 그림자를 드리워 주어 멋진 풍경이 되기도 했다. 석양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 해도 무더운 한여름의 석양빛은 달갑지 않았다.
숲세권을 찾았지만 이런 저런 탓을 하며 결정하지 못하고 역세권에 마음을 두고 점을 찍었다. 안마당 같은 남향 베란다에 장을 담그고 쌍용역으로 달려가 서울 북촌으로, 강원도 춘천으로 쏘다니다가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보리라. 이제 옷, 밥, 집이 다소 재정리 되었다.
나지막이 날았다
코로나로 막혔던 하늘길이 열렸다. 그렇지만 해외로 가는 데는 아직도 조심스러워 우리 땅의 끄트머리 큰 섬 제주도로 가는 여객기는 만원이었다. 청주공항에서 제주공항까지, 티웨이 항공 여객기는 설레는 맘을 가득 채우고 날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제주에서 청주까지 대한항공 비행기도 아쉬운 맘으로 채우고 만석이었다.
하늘 높이 날려면 아주 넓은 활주로를 거쳐야 한다. 활주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비행기의 숙명이다. 나비가 꽃술에 앉듯이 사뿐히, 다른 꽃으로 옮겨 가듯 가뿐히 날갯짓을 할 수가 없다. 작은 버스로 이동하여 비행기에 올라 승무원과 인사를 나눈다. 그들은 마땅한 탑승인지 확인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거지만 승객은 즐거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마침내 비행기는 움찔하더니 걸어가듯이 천천히 활주로에서 움직인다. 드디어 먼 길을 향해 한걸음 내딛는 중이다. 덩치 큰 날틀의 움직임으로 소리 또한 육중한데 빠른 걸음으로 경보하는 듯하더니 금세 뛰기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활주로를 냅다 차고 올라 비상하게 된다. 이때에는 나도 모르게 발뒤꿈치를 슬쩍 들고는 남모르게 몰래 숨은 미소를 짓게 된다. 하늘로 높이 날기 위해서는 반드시 활주로에서의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 차분히 기다리기, 서서히 움직이기, 느리게 걷기, 빠르게 경보하기, 서둘러 뛰기, 숨차게 달리기, 냅다 차고 오르기의 과정이 있다. 우리네 세상살이를 종종 등산에 비유하는데 오늘 비행기의 비행 과정을 유심히 살피니 이 또한 인생길과 같다. 높이 날기 위해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꼭 감내해야하는 여러 고개를 힘껏, 기꺼이 넘어야 한다. 문득 육상경기 종목의 높이뛰기가 떠오른다. 가무스름하고 날렵한 몸매의 우상혁 선수의 모습이 겹친다.
우리 비행기는 청주공항까지 최고 고도 28,000피트(약 8400m)상공에서 시속 790Km 정도로 비행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비교적 단거리이니 올라갔다가 금세 내려와야 하니 그럴 것이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어린애마냥 창밖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해외여행 가는 비행보다는 나지막이 날기 때문이다. 더구나 왼쪽 날개 바로 앞좌석에 앉는 행운으로 우리 땅 우리 하늘이 훤히 펼쳐진 걸 볼 수 있게 되었다. 제주 공항에서 이륙 직후엔 해안선의 민낯이 그대로 보였고 곧바로 하늘과 바다 한가운데 나는 듯하더니 금세 바다에 평화로이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보여서 거대한 지도를 편 것 같았다. 섬의 해안에는 하얀 포말이 쓰다듬는 다정한 모습도 보였다. 완도일까, 목포일까 짐작하며 잔뜩 아래로 향한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간간이 카메라를 눌러댔다. 아주 큰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 눈에 띄었다. 분지로는 대구가 가장 유명하여 여름 더위가 기승이라는 걸 일기예보에서 자주 들었는데 이 높은 상공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분지형태의 광주시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구시는 훨씬 동편에 있으니 그리 짐작이 되었다. 달마산, 유달산, 두륜산, 무등산 등 이름을 다 알아차릴 수 없는 아주 많은 우리 땅의 높고 낮은 산들의 등줄기 골격은 초록 옷 속에서도 불쑥 솟아서 거대한 공룡의 몸통과 마주한 것 같았다. 힘찬 공룡 씨름 선수의 거친 포효로 드러난 갈비뼈를 보는 것 같았다.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줄기는 한반도의 대동맥이다.
‘저기가 목포시 이겠고 영산강과 만경강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흘러 서해로 들어가고, 저긴 금강 하구 일 것’이라 짐작이 됐다. 우리 곳간을 가득이 채워주는 김제평야는 긴네모 초록으로 타일을 깔았다. 산맥의 진초록보다 조금 옅은 초록 바둑판이 펼쳐져 있었다. 곧 가을이 올 것이고 거대한 초록빛 들녘은 한바탕 황금빛으로 탈바꿈 할 것이다. 수많은 길 위로 달리는 자동차는 맹꽁이들의 경주 같았고 기차나 KTX는 확인하지 못했다. 바다 위를 달리는 서해안 고속도로는 내 고향 예당호의 출렁다리인가 싶었다. 비행기가 아닌 드론을 타고 시찰하는 느낌이었다. 대통령이, 국토부 실무자가 헬기를 타고 살피며 효율적인 국토발전계획을 구상할 때 이렇게 했을 거란 추측이 되었다. 우리 국토 면적의 60% 이상이 산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한눈으로 확인 되었다. 마침 8월 말이고 초록이 가장 무성할 때라서 그럴까 비행기 날개 아래 우리 땅은 진초록의 산맥이 짙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전에 아파트 분양사무실에서 본 아파트 위치 모형도가 생각났다.
우리나라 산림비율은 OECD 중 핀란드, 일본, 스웨덴에 이어 4위란다. 1970년대 치산녹화사업이 결실을 보아 척박했던 산림이 지금은 푸른 나무로 빼빽한 현실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치산녹화사업으로 심은 나무가 잘 자라 임목축적(산림의 나무 총량)과 산림자원 가치가 높은 수령이 21~50년생 나무, 장령림 비중이 커졌다는 점을 종종 느꼈었다. 우리 동네 뒷산 월봉산에 가도 숲이 울창해서 ‘여기가 설악산인가, 속리산인가’ 싶을 정도로 숲이 우거진 걸 볼 수 있다.
청주공항이 가까워졌나 싶었다.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우리 동네 같았다. 저기 단국대학교 앞 호수, 천호지, 봉서산 속 깊숙이 자리 잡은 동일하이빌아파트, 우리 셋째가 사는 신불당동의 아파트 숲이 보였다. 정다운 우리 산하가 한눈에 보이니 감동이었다. 운전자들에게 ‘속도를 줄이면 사람이 보인다.’ 더니 낮게 날면 넓은 세상이 보였다. 일찍이 이렇게 하늘에서 한반도를 내려다 볼 수 있었더라면 여고시절에 지루했던 지리과목 수업시간은 고개 끄덕이며, 무릎을 치며 신나는 시간이었을 거다.
박 상 분
충남 예산 출생
방송대문학상 수상
천안문인협회 이사, 충남문인협회 이사
충남아동문학회 회원, 천안수필문학회 회장
논술 강사, 한국어 강사
동시집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수필집 『참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