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상순(10수)
하루시조335
12 01
달아 밝은 달아
무명씨(無名氏) 지음
달아 밝은 달아 님의 동창(東窓) 비친 달아
님 홀로 누웠더냐 어느 친구(親舊) 모셨더냐
명월(明月)아 본대로 일러라 사생결단(死生決斷)
사생결단(死生決斷) - 죽고 삶을 돌보지 않고 끝장을 냄.
달에게 심부름을 부탁하면서 자신과 떨어져 있는 님의 동향을 물어보는 노래입니다. 달은 높이 떠서 어느 집 창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님의 동창도 들여야 볼 수 있습니다.
중장의 ‘친구(親舊) 모셨더냐’는 동성이 아닌 ‘낭자를 품었더냐’로 풀어야 할 것인데, 종장의 위협적인 표현과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창법에 따른 것으로 ‘내리라’ 정도로 읽힙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36
12 02
사랑도 하였노라
무명씨(無名氏) 지음
사랑(思郞)도 하였노라 이별(離別)도 하였노라
설월사창(雪月紗窓)에 기다려도 보았노라
전전(前前)에 괴던 사랑(思郞)이 어위(語僞)런가 하노라
설월사창(雪月紗窓) - 눈빛 달빛 어우러진 비단 바른 창문.
전전(前前) - 이전(以前)의 이전(以前).
어위(語僞) - 말이 거짓됨. 진실되지 않음.
사랑의 반대말이 이별입니다. 아니, 동전의 양면(兩面)이죠. 사랑이 이별이요, 이별이 사랑입니다. 한 몸이거늘 어디를 보느냐의 문제이죠. 기다림은 양면을 잇는 테두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시간이 적당히 흐르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 때의 사랑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답니다.
그대는 지금 연애중인가요? 어위(語違)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릅니다. 길게 죽도록 사랑하기를 빌어 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37
12 03
산외에 유산하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산외(山外)에 유산(有山)하니 넘도록 뫼이로다
노중(路中) 다로(多路)하니 예도록 길이로다
산부진(山不盡) 노무궁(路無窮)하니 옐 길 몰라 하노라
산외(山外) - 산의 바깥.
넘도록 – 넘을수록.
노중(路中) - 길의 가운데. 여러 길 중에.
예도록 – 갈수록. 예다는 ‘가다’의 옛말.
산부진(山不盡) - 산은 다하지 않고.
노무궁(路無窮) - 길은 다함이 없고.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고 하지요. 학문하는 어려움을 읊은 작품일까요. 산첩첩 물겹겹 자연 속의 인간은 얼마나 미약하고 무력한지요. 산들의 날갯짓이 그려지는 작품인데, 내용은 어떤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38
12 04
산중에 책력 없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산중(山中)에 책력(冊曆) 없어 절(節) 가는 줄 모를로다
꽃 피면 봄이요 잎 지면 가을이라
아이들 헌옷 찾으면 겨울인가 하노라
산중(山中) - 산속.
책력(冊曆) - 일 년 동안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절기, 특별한 기상 변동 따위를 날의 순서에 따라 적은 책.
절(節) - 시절(時節). 절기(節氣). 때.
찾으면 – 어디 두었더라 기억하고 뒤져 찾아내면.
세월 가는 줄 모른다. 어찌 보면 제일 편안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도 24절기는 알아야 하고 설날이며 단오며 한가위며 등등 명절도 챙겨야지요. 산중에 살다보면 그 또한 의미가 없노라 한다면야 더 붙일 말은 없겠지요.
아무리 없이 살아도, 궁벽한 한촌에 살아도 책력 하나쯤은 새로 장만하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뒷장의 토정비결(土亭秘訣) 조견표 배우던 시절도 생각나고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39
12 05
생년이 백 못하되
무명씨(無名氏) 지음
생년(生年)이 백(百) 못하되 천세우(千歲憂)를 다 품느니
밤 길고 낮 짧으니 병촉야유(秉燭夜遊) 하올지라
어찌ㅎ다 내자(來者)를 기다려 즐거움을 잊느니
생년(生年) - 태어난 해. 여기서는 살아 있는 해.
천세우(千歲憂) - 천년의 근심. 오랜 세월에 대한 걱정. 부질없는 생각.
병촉야유(秉燭夜遊) - 촛불 켜서 들고 밤 놀이 함.
내자(來者) - 오는 사람. 온다고 한 사람.
걱정도 팔자라. 쓸데없는 걱정 다 물리치고 촛불놀이 밤마실이나 다니세. 너무 즉흥적(卽興的)으로 살아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끌어다가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일은 정말 비생산적인 일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40
12 06
석가여래 심은 남게
무명씨(無名氏) 지음
석가여래(釋迦如來) 심은 남게 출광여래(出光如來) 물을 주어
문수(文殊) 뻗은 가지(柯枝) 보현(普賢)꽃이 피었는데
그 끝에 오백나한(五百羅漢)이 줄줄이 열렸더라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를 신성하게 이르는 말.
석가모니(釋迦牟尼) - 불교의 개조. 과거칠불의 일곱째 부처로,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이다. 기원전 624년에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바스투성에서 슈도다나와 마야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9세 때에 출가하여 35세에 득도하였다. 그 후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를 교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성립하였다. 45년 동안 인도 각지를 다니며 포교하다가 80세에 입적하였다. 능인적묵, 모니, 박가범, 불씨, 석가, 석가문, 석씨.
여래(如來) - 여래 십호의 하나.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부처 - 불도를 깨달은 성인.
남게 – 나무에.
출광여래(出光如來) - 출광부처.
문수(文殊) - 석가모니여래의 왼쪽에 있는 보살. 사보살의 하나이다. 제불(諸佛)의 지혜를 맡은 보살로, 오른쪽에 있는 보현보살과 함께 삼존불(三尊佛)을 이룬다. 그 모양이 가지각색이나 보통 사자를 타고 오른손에 지검(智劍),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다. 길상금강, 묘길상, 묘덕, 문수보살, 문수사리.
뻗다 - 가지나 덩굴, 뿌리 따위가 길게 자라나다. 또는 그렇게 하다. ‘벋다’보다 센 느낌을 준다.
보현(普賢) - 보현보살(普賢菩薩). 사보살(四菩薩)의 하나. 석가모니여래의 오른쪽에 있는 보살로, 형상은 크게 흰 코끼리를 탄 모양과 연화대에 앉은 모양 두 가지가 있다.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맡았으며, 왼쪽의 문수보살과 함께 모든 보살의 으뜸이 되어 언제나 여래의 중생 제도를 돕는다.
오백나한(五百羅漢) - 석가모니가 남긴 교리를 결집하기 위하여 모였던 오백 명의 아라한. 오백 아라한, 오백 응진(應眞).
나한 - 생사를 이미 초월하여 배울 만한 법도가 없게 된 경지의 부처. 아라한(阿羅漢).
평시조 한 수에 불교의 교리 뼈대가 거의 담겼습니다. 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가지가 벋고 꽃이 피고 열매가 주렁주렁. 비유가 아주 쉽네요. 말은 쉽지만 하나하나의 행위는 정성과 시간을 필요로 하겠습니다.
출광여래에 대한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41
12 07
설월은 전조색이요
무명씨(無名氏) 지음
설월(雪月)은 전조색(前朝色)이요 한종(寒鍾)은 고국성(故國聲)을
남루(南樓)에 홀로 서서 옛일을 생각할 제
잔곽(殘郭)에 모연생(暮煙生)하니 그를 슬허하노라
설월(雪月) - 눈 위에 비치는 달빛.
전조색(前朝色) - 바로 전대의 왕조와 같은 색.
한종(寒鍾) - 춥게 들리는 종소리. 시적(詩的)인 비유임.
고국성(故國聲) - 이미 망하여 없어진 나라에서 듣던 소리.
남루(南樓) - 남쪽 누대(樓臺).
잔곽(殘郭) - 허물어진 성곽.
모연생(暮煙生) - 저녁연기 피어나니. 시적인 표현임.
타국에서 망해버린 고국의 향수(鄕愁)를 적은 시조입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고려 신하들 감정 같기도 하고, 중국의 역사에 빗대어 자신의 고향생각을 읊은 듯하기도 합니다. 한시풍으로 어휘를 만들어 쓴 부분이 많아 식자의 작품이지 싶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42
12 08
설월이 만창한데
무명씨(無名氏) 지음
설월(雪月)이 만창(滿窓)한데 바람아 불지 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을 판연(判然)히 알건마는
그립고 아쉬운 적이면 행여 긘가 하노라
설월(雪月) - 눈과 달빛.
만창(滿窓) - 창문에 가득 들어참.
예리성(曳履聲) 신발 끄는 소리.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 시어(詩語).
판연(判然)히 – 확실히.
행여 - 어쩌다가 혹시.
창문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한겨울임을 웅변(雄辯)하는 달밤에, 정작으로 마음은 그리운 사람에게로 가 있습니다. 그리운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말해주고 싶은데, 아직 젊은 그는 이런 조언에 도저히 이해가 안 갈 수도 있겠습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을 찾은 기쁨이 있습니다. ‘예리성’의 어휘는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음을 확인했고요, 삶은 ‘행여’의 연속임을 문득 깨닫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43
12 09
술 먹고 비틀걸음 칠 제
무명씨(無名氏) 지음
술 먹고 비틀걸음 칠 제 술 먹지 말자 맹세(盟誓)하였더니
술 보고 안주 보니 맹세(盟誓)도 허사로다
아이야 술 가득 부어라 맹세풀이 하자
맹세(盟誓) - 일정한 약속이나 목표를 꼭 실천하겠다고 다짐함. ‘서(誓)’로 쓰고 ‘세’로 읽습니다.
안주(按酒) - 술안주. 술을 마실 때에 곁들여 먹는 음식.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금주(禁酒) 맹세에도 적용되나 봅니다. 제 스스로 맹세하여 묶은 일을 제 스스로 푸니 말입니다. ‘맹세풀이’라는 말을 젠즉 알았더라면 핑계대기 쉬웠을 것을, 늦게야 알고 보니 그저 무릎을 탁 지며 놀랄 수밖에요. 술꾼들, 숙취(宿醉) 후 속 풀고, 실수(失手) 후 맹세 또한 풀고.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44
12 10
술 붓다가 잔 곯게
무명씨(無名氏) 지음
술 붓다가 잔(盞) 곯게 붓는 첩(妾)과 색(色)한다고 새움 심히 하는 안애
한 배에 모두 실어다가 띄우리라 한바다에
광풍(狂風)에 놀라 깨닫거든 즉시 데려 오리라
잔(盞) - 술잔. 술을 따라 마시는 그릇. 유리ㆍ사기ㆍ쇠붙이 따위로 만들며, 크기와 모양은 여러 가지이다.
곯다 - 속이 물크러져 상하다. 여기서는 다 못 채우다.
새움 – 샘. 남의 처지나 물건을 탐내거나, 자기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나 적수를 미워함. 또는 그런 마음.
한바다 - 매우 깊고 넓은 바다.
광풍(狂風) - 미친 듯이 휘몰아치며 사납게 부는 바람.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떵떵거리며 잘사는 양반네 시조입니다. 첩은 곁에서 술친구를 하는군요. 주인에게 대작(對酌)하면서 잔을 조금 덜 채워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내 정실(正室)은 사내가 음사(淫事)가 과해 몸을 상할까 걱정이군요.
작가는 둘 다 맘에 아니 드나 봅니다. 싸잡아서 한바다로 내친답니다. 그런데 종장에 인간미가 있습니다. 깨달으면 곧 즉시 데려 오겠답니다.
초장이 긴 장형시조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무명씨 옛시조를 통해 작자의 면모를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여러 요소들이 그 상상의 기초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