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도 쏱아지던 비도 아버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게 날씨도 좋았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될지 모르겠지만 무더위에 고생 많이 하셨고, 무거운 마음, 슬픈 마음, 추스려서 건강 챙기면서
밝은 모습으로 고향에 계신 민초(군민)을 위해 공무에 임하시길 소원합니다.
기라성님 덕분에 오랫만에 모교에 가서 은사님도 뵙게 되었고, 덟게 보이던 운동장에서 월요일 교련 조회땐 열병과 분열을
목청껏 구령을 했던 곳에 한 참 동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답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고 조금 불편하다고 했답니다.
우리집안도 6.25 전후에 여순 반란사건때 아버지 형제 두분이 돌아가셨고, 선친도 죽창에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깊은 두메 산골인 하한에서 태어나 압록까지 국민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9살에 입학, 곡성으로 중학교 진학도 어렵게 했고,
광주 대동고등학교 배구부에 진학이 결정되었는데 가정형편과 배구부 해체로 그만 두게 되었으며 곡성종고 농과에 19살에
입학, 두살 동생들과 또는 후배들과 함께 하한에서 3년간 곡성까지 통학을 하면서 일요일엔 종일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와 퇴비를
옮겨야 했고 월요일 아침에 등교하면 어깨와 등에는 파스가 항시 붙어 있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네요.
나이가 있어서 고3때 징병검사를 받고 군입대라는 시기에 졸업은 해야 했기에 육군3사관학교에 합격 군대연기를 하고 나서
고등학교는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지요. 물론, 물심 양면으로 도와 주신 양학철 선생님의 덕분이었지만.....
군제대 후 27살에 대학에 진학 32살에 결혼 아들 두명을 두었지만, 내가 하고싶은 소원을 이루지 못해 3명의 조카들한테
대리 만족을 하면서 뒷바라지를 했는데 한명은 연세대를 나와 고시합격 경기도청에서 서기관으로, 한녀석은 배구선수로
국가대표를 8년간 하고 지금은 성균관대 배구부 감독으로, 또 한명은 서울대를 나와 현대그릅에서 간부로 훌륭하게 자랐답니다.
물좋고, 산좋고, 공기 좋은 하한에서 모두 태어난 덕택이 아닐까?
이젠 두 아들이 나의 반쪽 인생을 대리해서 훌륭하게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다행이도 군에간 큰녀석은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작은 녀석도 이번 특별 전형으로 우리나라의 최고 학부인 카이스트
제어공학부와 서울대 물리학부에 동시에 합격하여 아직 진로를 결정 못하고 있지만 본인 원하는대로 가야 되지 않을까?
어떻게 기라성님을 위로한다는게 넉두리만 했나 봅니다.
돈는 잃어도 다시 벌 수 있고 언제든지 재기 할 수 있지만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답니다.
항시 가족 모두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길 바라며, 님의 소원도 꼭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첫댓글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나 생존해 계신 어머님 역시 큰아들이 면서기라도 한 사실에 만족하신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0년이 넘는 공직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팀장(6급)도 못해보고 퇴직하는 후배들을 한명이라도 줄이기 위하여 앞당겨서 그만 둘 준비를 할려고 합니다.
지금은 아직 입니다... 막내까지 학교공부 다 시키고 나서 명퇴를 하여야지요?
30년 넘게 공직생활을 한 사람이 그만 두면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할려구.....
학자금까지 지원해 주는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인줄 알고 정년까지 버티시길...ㅋㅋㅋ
기라성님~
가장 아름다운 삶은 자기가 떠나야 할때 떠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행복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다들 정년 퇴직 후 재2의 삶을 개척합니다. 하지만 육신은 늙어 추진력이 없습니다.
슬픔으로 충동적인 후배양성이라면 잘못된 생각이겠지요.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다면 빠를수록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재수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