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대안교회 운동
김홍술(애빈교회 목사, 도시빈민사회복지선교회 대표)
반갑습니다. 오늘이 10월 31일, 이른바 루터가 491년 전 거사를 저지른 날이군요. 이런 날 뜻있는 만남을 주선해주신 ‘세계와 기독교변혁 연구소’에 감사를 드립니다. 진즉 ‘세계와 기독교변혁 연구소’(이하 세기모)의 소문과 활동에 대해 듣고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와보지 못하고, 이렇게 불러줘서야 오게 되어 죄송스럽고 또 한편 기쁨이기도 합니다. 부산바닥 거지동네에서 20여년 빌붙어 살아온 제가 새로운 기독교를 모색하고 준비하는 모임에서 무슨 나눌게 있겠는가 하고 자못 궁금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오늘 주어진 제목에 걸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주께서 이끄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해서 그냥 제 이야기만 할 겁니다. 하느님께서 여기 적은무리의 오늘모임과 인연에 역사적 어떤 점을 찍으실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경청해 주신다면 영광이 되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요즈음 기독교 주변의 지형이 참 특이하고 흥미롭습니다. 주류보수 기독교 다수는 기를 쓰고 악을 쓰면서 안간힘을 다해 영역을 지키려하고 있고, 또 세속적 어떤 세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징조도 보입니다. 한국 경제성장과 함께 불어난 엄청난 몸집이 자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원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선교는 역사적 경험에서 그러했듯이 그렇게 가는 가 봅니다. 한편 비주류보수 기독교의 소수는 애처로울 정도로 바로잡아 보겠노라고 갱신과 개혁을 위해 혼신의 힘을 붇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관객 중 도저히 참지 못하는 분들이 일어나 안티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박멸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른 한편 주류진보 기독교는 원래 세가 약했지만 내적 원동력과 외부(세계교회의 지원)의 ‘빽파우어’ 덕으로 한때 상당한 공적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지리멸렬입니다. 그 중심인 KNCC는 대형교단의 밥이 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비주류 진보의 움직임도 있습니다. 흩어진 힘을 찾아 나섰고 희망의 불쏘시개를 모아 지펴보자 동분서주 합니다.
공감이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상에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눠보았습니다. 헌데 이 다섯 가지 유형이 아닌 다른 하나의 유형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아니 보수도 되고 진보도 되지만 한국교회에 대한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도 그에 속하고 싶지 않는... 새로운 교회에 대한 갈망이 있으나 쉽게 용단이 안 생기는... 그런 유형이랄까요? 아니 정말 진실하고 아름다운 그것이 드러나면, 자신을 온전히 던져야 할 것이라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는 분들은 아닐까요? 정말 가능하고 또 실제 있는 유형인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펴는 말)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얼마 전까지 열심을 냈던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국에큐메니칼연합교회’라는 곳인데 2004년도에 준비모임이 시작되어 무려 2년 동안 준비모임 끝에 2006년 창립깃발을 내 걸었습니다. 작은 모임이지만 재미있고 희망을 그리면서 잘 가다가 2007년 말 즈음부터 가라앉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그 시작부터 중심적 자리에서 있었기에 실책에 대한 아픔이 있습니다. 뭐라고 변명도 못하고 유구무언인 채 지금껏 어찌할 수 없어 주저앉아 관망만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공개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곳 ‘세기모’의 실질적 섬김이로 일하는 정강길 님이 처음부터 함께했기에 그분도 아시고 느끼는 바도 있을 겁니다. 그 모임에서 처음부터 정강길 님의 대시는 견제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임에서 가장 젊은 피요 거침없이 펴나가야 할 패기와 의욕을 세워주지 못한 것입니다. 저의 무능함이 일조한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오히려 그 때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우리는 종종 사회운동에서나 공동체운동에서 보듯 의욕적으로 하다가 실패하면 깊은 패배주의가 엄습해 옵니다. 또 뛰던 주자들 스스로의 패배의식 뿐 아니라, 선한 세력이 될 만한 가까운 동지들과의 관계에서 냉소주의가 비집고 들어옵니다. 패배주의와 냉소주의는 점점 뜻있는 자들이 서로 세워나가야 하는 의욕을 깊은 구렁으로 빨아들이고 불신을 조장합니다. 서로서로가 신뢰의 눈을 거두고 맙니다. 불신하는 자신마저도 그 병에 걸려 외롭고도 쓰라린 고독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요즈음 이곳저곳 새로운 움이 돋고 있습니다. 조소하는 사탄의 계락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는 겁니다. 한분 한분의 씨알들이 다시 엮어지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옛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했지 않습니까? 좋고 훌륭한 구슬들이 구석구석 있건만 서로 구슬들이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서로 자신만이 구슬이라고 생각하고 상대는 구슬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 같아요. 서로 세워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세워주지는 못할망정 인정은 해 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 간 당기는 인력 에너지가 발생하고 신뢰와 협력이 구축될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 모임과 모임은 이렇게 서로 연결되고 협력해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간혹, 김홍술이란 인간과 지난 과거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 어느 누구도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우린 서로를 열고 더 순진하게 순박하게 만나야 합니다. 정말 그렇게 만날 수만 있다면 유무상통의 나눔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것 아닌 남의 사생활이나 개인사를 아는 일이란 매우 중요한 무기로 변하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모습을 보았기에 움츠리고 순박하게 열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두려움도 염려도 없이 서로 열고 만나는 만남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비록 뒤 돌아서 무기로 되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열정의 만남이 있다면... 진실한 만남이 있다면... 여한이 없으리라는 순수함이 그립습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회자되었듯이 소설 ‘김홍술’은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1956년 전북 정읍 출생, 8세에 땅 뙤기 집 한간 없어 먼 부산으로 떠나는 부모따라 부산정착, 초등시절 그림노래 소질, 중고시절 내리 6년 미술학도, 1971년 16세 때 부흥회에서 성령체험, 이후 5년간 광신적 신앙생활, 1972년 임종신 목사로부터 세례, 1975년 신학교 입학과 재학 중 크게 실망, 2학년 때 학업 중단하고 성 프랜시스 좇아 옷 벗고 맨발로 방랑시작, 2년간 한국교회 타락에 눈물로 전국 도보방랑, 1978년 군사재판에서 군무이탈 국방의무 모독으로 징역 5년 언도, 확정 3년, 육군교도소 거쳐 안양교도소 복역, 재소시절 행형법 위반 독방 및 대도 조세형 사귐, 1981년 만기출소 및 향토예비군법 위반 벌금형, 1982년 신학교 복학 및 1983년 1년간 신학교 비리관련 전교생 데모주도, 1984년 유일한 제적, 검찰청 고발 후 잠적, 서울 삼각산 입산과 계룡산 신도안과 전남 신안군 도덕도서 은둔생활, 삼각산 알콜걸인 6인과 공동생활 4개월 경험, 걸인 6명과 연예인교회 출입마찰, 1985년 리어카위에 집을 지어 끌고 부산까지 11일 만에 내려옴, 한울기독공동체 및 한국기독교문제연구소 실패, 1986년 경남 시골 도요교회 설립 및 열애시작, 소규모 기독교교육사업 실패, 1987년 기독교사회운동 시작, 결혼성공, 고 이승원 목사 제자로 성산교회 개척보좌, 막노동과 실내장식 건축사업, 1988년 목회신학원 졸업, 1989년 한울기독공동체(현 애빈교회) 시작,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가입, 기독교빈민선교협의회 활동시작, 1991년 목사안수와 부산빈민선교회 설립(현 도시빈민사회복지선교회), 부산빈민운동 및 시민사회운동 시작, 실내장식건축 신아개발 정리, 1993년 셋방에 모셨던 부랑인들과 전세방에서 공동생활(부활의집) 시작, 1996년 행려자무료급식소 개소, 1997년 사단법인 인가, 1998년 동남아신학대학원 졸업(Th.m) 및 한일장신대기독교사회복지대학원 입학, 1999년 고난주간 노숙수행 시작, 2003년 홈리스복지관 개관, 2004년 한국에큐메니칼연합교회 시작, 2005년 필리핀 딸락주립대학 졸업(B.A), 2007년 한일장신대기독교사회복지대학원 졸업(M.A), 예수살기운동 시작, 2008년 ‘한국교회에 고함’ 7일 금식,
소설 ‘김홍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일 뿐입니다. 더 치열한 후반부가 그려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홍술의 꺾어진 붓은 그 뒤로 자신의 자화상만 일평생 유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합시다.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교회? 뭐라든 좋습니다. 두 개념이 다르니 같니 할 게 아니라, 오늘의 이 모습 정말 ‘아닌 것 같다’ 아니 ‘이건 아니다’라는 공감대로부터 시작하도록 합니다. 뭐가 ‘아니다’는 걸까요? 크게 두 가지로 상정해 보겠습니다. 그 하나는 행동이나 행태를 말하지 않을까요? 쉬운 말로 ‘타락한 모습’이랄까 아니면 더 구체적으로, 돈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 등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르치는 이치나 미션 또는 교리나 이론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만의 언어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스스로 게토(ghetto)화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는 정말 종교로서의 정체성에 중요한 요채가 됩니다. 종교가 아닌 세속에 있는 자들은 자기들과 통할 수 있는 것과 통하면 안 되는 것을 이렇게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통하는 것은 언어사고요, 정작 통해서는 안 되는 것은 세속적 행동과 행태입니다. 욕심에서 나오는 온갖 추한 것들, 교활하고 사악한 것들, 포악하고 무자비한 것들, 호의호식 출세성공에 빠져 사는 모습, 이런 것들과 소통하며 사는 자신들을 견제해 주고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데, 오히려 그런 것들을 정당화한 미션과 소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에서 ‘타락’이란 말을 쓰지 않나 생각합니다. 반면, 교리나 이론에서는 오히려 소통되어야 할 것을 소통하려 않고 벽을 쌓는 겁니다. 자신들만 옳다, 진리다, 정당하다 하는 겁니다.
말은 시대의 언어이어야 합니다. 죽은 옛말이 언어가 될 수 없고 조작하여도 소통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그들끼리의 소통은 되나 하나가 되는 세계의 소통언어가 되지 못한다는 데 문제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예수는 신이다’라는 언어 사고를 가지고 소통하는 자들이, ‘예수는 신이 아니다’ 또는 ‘예수는 신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언어 사고를 가진 자와 대화에서, 상대방의 언어 사고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언어 사고만을 선언한다든가 강요하는 행태를 말합니다. 자신이나 서로 소통하는 사람끼리는 ‘예수는 신이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가 확신하고 인정하듯이, 상대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기에 대화가 안 되고 단절의 비극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교리나 신학이론 같은 언어 사고는 통해야 한다는 겁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갇힌 유대교가 열린 기독교로 됨에는 당시 시대언어인 헬레니즘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오늘에 언어는 과학 실증주의와 다원적 개별성이 존중되고 포괄되는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게 믿습니다.’ 하고, 이어 ‘당신의 생각과 믿음도 내 생각과 믿음처럼 존중하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소통이 되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게 못할까요?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이 자신이 없고 불안해서입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자신의 정당성이 확보되어야만 안정될 것이라는 지극히 초조하고 불안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자신이 있는 자는 모든 것을 양보하고 또 포기하고도 기쁘고 평온합니다.
그런 열리고도 소통되는 언어사고와 함께 지극히 정결하고 소박한 삶의 모습을 종교에 바라지 않을까요? 그런 종교에 배우려 귀의하려 하지 않을까요? 그런 기독교 그런 교회를 그려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잠시 얼마 전 세간에 알려진 ‘한국교회에 고함’ 7일 단식의 배경에 대해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지난 1월 제가 속한 복음교단 제 48차 총회에서였습니다. 거기서 폭탄선언을 한 게 복음교단을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온 겁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약칭 복음교단)는 아직도 ‘조선인 자신의 교회’란 깃발이 있기에, 아니 그 깃발아래 내가 스스로 ‘조선인 자신’이 되어야 하기에 현재 맞장을 뜨고 있는 겁니다. 그 뒤 임원회에 이어 73년 역사상 유례없는 징계위원회가 설치되고 5차에 걸쳐 진행되고 있습니다. 단두대 위에 목을 디밀었으나 웬일인지 내리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교회에 있어도 할 일이 있고, 죽여 시체로 내던져도 할 일이 남아 있기에 부활시켜 내리란 믿음이 있습니다.
조금은 궁금하리라 생각되어 그 내막의 흐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복음교회는 1935년 미국선교사 주도의 교회와 신학적 기반에 반기를 들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의 교회’를 기치로 내 걸고 ‘혁명가’(지금의 복음교회가)를 부르며 시작했습니다. 1968년 KNCC에 가입했고 한때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작은 교단이지만 역사적 소임을 감당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60주년이 되는 즈음 1995년경부터 내부에 뒤늦은 성장론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60주년 기념교회니, 100교회 운동이니, 자비량부흥회를 하겠다느니 등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군산에 자체 신학교를 두어야 한다만다 논쟁도 심했습니다. 그런 바람은 10여년 이상을 불었습니다. 작은 교단 내에도 안정적인 메인(main) 교회 담임 자리는 정치적으로 힘(?)있는 분들에 의해 나눠 먹기식으로 인사가 움직였고, 점차 구석진 곳의 힘없는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은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 군산 S교회의 사태가 터진 겁니다. 유망한 목사로 서열 몇 번째 안 되는 J 목사는(현직 총회장임) 부산의 조그만 교회에서 메인교회인 그 S교회에 낙하산으로 간 후 일어난 사건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불신은 결국 교회분열로 치달았으나 다시 어른(?)들이 그 J목사를 보호하는 차원서 ‘분립’을 유도해 일단 봉합은 했었습니다. 그 후 S교회는 자체적으로 S목사를 청빙하였는데 총회는 청빙한 목사를 인준하지 않는 대립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후 총회사상 유례없는 교인들의 총회농성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총회 석상에서는 화해가 곧 이뤄질 것으로 약속하고 헤어졌으나, 3년이 지나도록 총회는 이유를 달고 담임목사 승인을 해 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S목사가 사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당시 교단가입 절차를 미기한 가운데 부목사로 1년여 함께한 S목사 후배 L목사(감리교단 소속)를 중심으로 임시 교회를 유지하려 했으나, 교단 총회는 L목사는 자격이 없으니 총회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면서 파송 당회장을 통해 강력한 치리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이에 반발하는 교인대표들을 신천지 배후조종을 덮어씌우면서 19명의 교인대표를 출교 처리하는 최악의 치리권을 행사하고 말았습니다. 또 사건은 교회치리를 넘어 사회법정으로 비화되었습니다. 법원은 교회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양보 없는 지루한 싸움으로 교회도 총회도 모두 망하여가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중재를 노력 하였으나 지방회나 총회는 개인적으로 나서지 말라는 입장이었습니다. 2008년 1월 지난 총회가 같은 군산에 있는 서열 1인 군산복음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저는 작정을 하고 참석을 했고, 늘 그러듯 총회장 밖의 야당(?)세력 동지들에게 이 문제에 개입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총회가 끝나는 즈음 중대발언을 하게 된 겁니다.
그 요지는 이렇습니다. 우리 복음교회가 십 수 년 전부터 퇴로의 길을 달려왔다고 규정하고, 현하 S교회의 19명 출교처분이 정당한 절차도 무시되었을 뿐 아니라, 절차가 구비되었더라도 내용적으로 복음교회와 예수정신에 위배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따라서 40년 50년을 한결같이 교회를 지켜온 19명의 교인에 대해 복음교회의 역사상 처음인 출교처리는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만일 그럴 의사가 없는 복음교회라면 나도 함께 출교시켜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공개적으로 말씀드리건데 나는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하지 않으며 종교다원주의적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목사이니, 만일 복음교회가 복음교회이기를 거부한다면 마땅히 출교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총회는 즉시 술렁였고 뒤집어졌습니다.
총회 후 임원회는 즉각 제게 소명진술을 요청하였고 제출한 소명자료를 징계위원회를 설치해서 회부하였습니다. 복음교회는 사상 유례없는 징계위원회로 5차나 모여 저의 사도신경 부인과 종교다원주의 수용 발언에 대해 조사하려 한다면서, 변호인을 대동해 참석하라고 하였으나 저는 계속 거부하였습니다. 이러던 와중 제가 속한 남도지방회가 임시지방회를 개최하고 김홍술 목사의 사건에 대해 총회에 절차 문제를 제기하면서 나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침 그때 총회와 정면승부를 걸려고 총회 사무국이 있는 서울복음교회 앞에서 자리를 틀고 7일간 밤낮으로 단식하며 꼼작하지 않고 농성을 계획하였었는데 남도지방회의 공동대응에 간곡한 요청으로 표적을 한국교회로 돌리게 된 겁니다.
(나가는 말)
앞서 잠시 언급한대로 지난 8월 25일 오전 10시 경부터 8월 31일 오후 6시 경까지 서울 종로5가에 위치한 한국기독교회관 건물 앞에서, 비닐 돗자리를 펴고 촛불하나 밝힌 채 물 한 모금 허용 않고 7일 주야 노숙단식하며 ‘한국교회에 고함’이란 발원기도를 올린바 있습니다. 가장 초라한 방법으로 지성을 다해 의연함으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작은 몸부림이 조롱과 조소거리라고, 무슨 소용이 되겠냐고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계산에 앞서 내가 마음과 지성을 얼마나 다할 수 있겠는가에 나의 진정성을 던졌을 뿐입니다. 그래도 쓴 웃음 짓는 분에게는 도리가 없습니다만,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옛말을 성경처럼 귀히 모시며 하느님의 하시는 일을 겸허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한국에큐메니칼연합교회에 이어 예수살기운동, 최근 조용히 문을 연 ‘한국대안교회연합’ 인터넷 카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종비련, 세기연, 새기모 등도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무언가 꿈틀거리는 징조입니다. 이제 마음을 낮추고 손잡고 서로 세워주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단일 조직이나 하나의 깃발아래 의도적으로 모으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회칙 갖추고 회비내고 사무실과 실무자 두고 하는 지난 방식에 연연하지 말고, 이미 우리는 하나다는 의식과 함께 서로서로의 모임에 경계 없이 움직이는 겁니다. 한 개인이 독특한 자기만의 개성이 있듯이 개별 모임도 규모나 사업보다는 독특한 그 단체만의 무엇을 가져야 함이 좋을 듯합니다.
예전에 제가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교단이나 교회나 단체나 기관이 조직이 경직되고 관료화되며 운동력이 떨어졌다고 생각되면, 그 곳을 뛰쳐나와(에소더스) 다시 작은 무엇을 만들어 생명을 불어 넣자고... 하느님께서도 흙으로 빚어 만들고 생명을 불어 넣었는데, 그 자식들도 그래야 그 애비의 자식 아니겠냐고 요. 생명 없는 흙덩어리라도 정성껏 빚어 만들고 자신의 혼신을 불어넣으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니... 그곳을 뛰쳐나오든 쫓겨나오든 그냥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머물든,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복음교회를 창시한 최태용 초대감독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무용무용’이라고요, ‘無勇無用’ 말입니다. -용기가 없는 자는 쓸모도 없는 자다.- 주님께서 용기 있는 창조적 소수를 불러일으키시리라 믿음을 가집니다. 주저리주저리 한 말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8.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