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선도(仙道)와 태역상서론
【】선도의 대가들【】
까마득한 태초부터 전해지고 있는 선도(仙道)란,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원초적인 기류(氣流)를 이용하여 영술(靈術) · 둔신(遁身) · 무속(巫俗)의 신앙심을 나타내는 도(道)의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선인(仙人)이 되고자 공부하는 사람을 도사(道士)라 부르고, 도사를 가르치는 스승과 선배들을 영사(靈師) 혹은 천사(天師)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별한 비법만을 터득하여 기술적인 것만 가르치는 스승을 사부(師父)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속세적인 것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영적인 초월만을 추구하면서 은둔하고 있는 자를 도인 (道人) 또는 선인(仙人)이라는 경어로 불러 주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뜻을 품고 조직을 이끌어 우두머리가 될 경우에는 대가(大家)라고 칭호했다. 그들이 선도를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자신의 건강 문제였다. 실제로 사람이 자신의 생명에너지조차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고서는 참다운 도 (道)를 실천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래서 건강한 육체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건강한 정신에 신명(神明)이 깃든다고 했다. 그들은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며 양기(陽氣)를 강력하게 다지는 기공술로 자신의 심신을 단련하였고. 또한 명상하여 몸에 숨어 있는 음유물귀신(陰有物鬼神 : 陰氣)을 내쫓았다. 그 들은 천지 자연이 기(氣)라고 하는 정치(精緻) 한 것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예리한 직관력으로 간파한 후, 그것과의 조화로운 화합체를 이루어 선인(仙人) 이라고 불리우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녔고 또한 불로장수를 달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끝없는 수행을 한 후, 각자 자기 방식과 체계를 이루게 되면 세상에 나와 사회적인 책임을 지고 자신의 뜻을 펼쳐 나갔다. 그때 그들은 반드시 유파(流派)에 결탁하였는데, 그것은 고대부터 연면히 내려오는 도술(道術)과 사상(思想)에 따라서 특성을 살리고 서로 공동의 목표를 도모하여 오랜 역사 흐름 속에서 전통적인 파(派)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파를 하나의 통칭으로 묶어 둔 것을 단(丹 : 태역의 氣)이라 부르고 또한, 그들을 단학인(丹學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각 파들의 도술과 사상을 말할 것 같으면, ‘무공파’는 기류를 이용하여 초인적인 파워를 내는 것을 말한다. 권법과 태권 그리고 무술 등이다. ‘기공파’는 기류를 다져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술을 말한다. 침술과 의술 등등이다. 기공파는 좌도와 우도가 있고 각자 내단파와 외단파로 갈라져 있다. ‘부주파’란 기류를 조 절하여 귀신과 접신한 후,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복(福)을 상서받는 술을 말한다. 무당과 술사부적과 주문 창출 등이다. ‘현전파’는 기류를 깊이 감지하여 신의 마음 세계에 들어가 인간의 삶에 공덕을 쌓는 술을 말한다. 노자, 장자 둥이 현전술의 대가이다. ‘적선파’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행동으로 도덕심을 나타내는 술을 말한다. 광대, 품바 와 선비들로 이루어져 있다. 공자, 맹자가 적선파의 대가이다. ‘점험파’란 사주팔자 등 점과 예언을 하는 술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토정 이지함 선생이 대가를 이루어 내었다.
【】선도의 발전 과정【】
어쨌든 이렇게 각 파들은 사회에서 중요한 책임과 사명을 다하였고, 민중들의 인기도에 따라서 사회적인 지위를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능력이 중대성을 지닌 파는 나라의 통치권까지 부여받았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선도 세계에서는 각 파가 서로 공동 목표를 지향하여 협력하기도 하였으며, 또 반대로 기득권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사회정치 제도에 전반적으로 선도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치가들은 선도 사상을 이념으로 채택하여 백성을 다스렸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는 거의 대부분이 선도세계를 주축으로 삼고 문화와 정치, 경제를 이끌어 나가며 발전시켜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전통 문화는 모두 선도의 영향과 그 산물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고대 국가에서 선도 세계는 사실 고대 종교의 근본이었다. 고대인의 정신에 있어 샤머니즘은 선도가 낳은 정신 문화이다.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만 해도 선도의 부주파(符呪派)가 주도권을 잡았고、 나라 전체를 통치하는 최고 권좌에 올라서 자신들의 이념인 부도사상(符道思想)을 종교화했었다. 이념으로 백성을 규합하고 통치하였으나 끝내는 선도의 종교인들이 정치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를 유발시켰다. 도(道)를 구하려는 마음을 사람들이 이념으로 삼았을 경우에는 반드시 문제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도(道)는 아무런 짐도, 아무런 긴장도 없이 자유롭고 무심하여 자연 그 자체로 남아 있어야 한다. 분명히 『천부경』은 환웅을 통 하여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 사상을 이념으로 하여 소유하고자 서로 다투고 싸웠다. 그리하여 종교 집단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추구하면, 또한 자신의 지위와 권좌를 지탱할 수가 있기 때문에 더욱더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고대 시대에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했던 한민족은 여기저기 흩어져 찢어지고 말았다. 결국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패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치의 수단이 되는 이념이란, 백성들의 가치관과 의식 변화에 맞추어 발전하며 혁신되고 있는 생명체로서 진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이념이 일어나 과거 전통인, 환웅의 『천부경』의 선도 종교를 무력하게 해 버렸다. 그 후로 정치 이념은 새로 태어난 형식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전통적인 개념의 선도는 제도상의 수단으로 밀려나서 민족 문화 개념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그 방면으로 전문적인 사람들이 변절하여 왕권 주위에 몰려들었고 출세와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한편으로는 전통을 고수하는 각 파의 출신들은 정사(正史)에 참여하지 않고 야사(野史)에 남아 선도를 대중들 속에서 민간생활의 신앙으로 정착시키면서 끈질기게도 그 일에만 주력하고 몰두하였다.
선도의 자연관과 영혼관은 상서 개념(祥瑞槪念)에서 형성된 기복신앙을 사명 의식으로 하고 있다. 고대의 유산인 선도는 사실 샤머니즘이다. 그 선도의 본래적 이미지는 신(神)과 자연( 自然)과 인간(人間)의 삼극(三極) 세계에서 실존하고 있는 문제만을 중요시하는 신앙이었다. 오늘날에 존재하고 있는 인류의 것들은 모두 선도의 본래 이미지가 역사의 순환과 흐름을 거쳐오면서 축적된 것이고, 한편으로는 변형된 것들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에 일어난 사건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선도의 삼극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고대 유산인 선도의 상서 개념을 지금 인류적인 것들에서 찾아볼 때, 모든 것이 변형을 이루고 있기에 어디서도 야성적인 본래의 형태를 볼 수가 없다. 다행히도 지구상에 아직도 야성적이고 순수한 선도의 이미지를 역사의 흐름에서도 아무런 변형 없이 그대로 이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주가 개벽된 시점에서 지금까지 오직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그대로 보존하고 유지해 온 『천부경』의 상서(祥瑞) 사상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종교 혁명을 일으킨 하느님의 자손이었고, 또한 전 인류에 있어 최초의 문명국이었기 때문이다.
【】천부경과 도【】
초월적인 힘을 빌어서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 자세와 형식을 종교(宗敎)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종교는 모두 상서와 기복을 요구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그리고 또한 종교란, 믿음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구제하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모여서 조직을 만들고 있는 현상을 두고 말한다. 이때 교주는 신의 대리자로서 믿음을 선동하고 어렵게 신의 능력을 이해시켜야 한다. 여기에 종교 지도자가 설명하는 각 종파의 개념적 논리가 일반 신자의 믿음을 종속시키는 다양한 모순을 유발시키게 한다. 그 모순은 끊임없다. 그런 원인들이 새로운 사상을 낳게 한다. 그리하여 과거의 것과 새로운 것이 대립하고 분쟁하고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위대한 종교로 역사에 살아 남는다. 왜냐하면 종교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신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뜻을 선택받은 자가 나와서 대중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종교의 역사는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뜻은 하나이지만 인간이 신에게 바라는 욕구는 수만 가지이다. 그러한 인간을 신이 자신 앞으로 모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종교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인간을 내세워 종교와 지도자들의 목적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도록 해주고 또 자신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받도록 해 두었다. 하지만 야망을 가진 인간, 즉 스스로 신의 능력을 과시한 자들이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는 것만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자격을 주어 인간들 앞에 내세웠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자격도 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리들이 추앙했을 뿐이고, 신은 그 모습을 그냥 그대로 방치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나 석가도 죽음 앞에서는 다른 만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피조물로서 신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인간의 세계에서만 열렬히 추앙받고 있을 뿐이다. 신의 세계에 돌아온 그들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특별히 대우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인간의 현실 속에서 특별히 대우받을 수 있도록 엄연히 허락해 두었다. 그 사실만 보고 인간들이 그들을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생각하도록 해두었다. 그것은 그들을 별다른 뜻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부적(符籍)같이 상징적으로 사용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자신을 영원히 위대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해두기 위해서였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각자 나름대로 창조주를 이해하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신의 차원에서 창조주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을 뽑아 선택하여 위대한 종교 지도자를 만들어 낸 다. 그리고 그 선택은 강요된 것은 아니다. 다만 위대한 정신을 가진 자가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종교라는 조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영혼만을 위해 순수한 존재로 남아서 정진하려고 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창조주는 특별히 자신이 직접 나서서 지도자가 된다. 바로 그것이 『천부경』이다. 창조주는 『천부경』을 천부인으로 상징하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도사(道士)들에게 알리고 있다. 그러므로 『천부경』 부적을 읽고 바라보는 도사의 행위는, 마치 뱃속에서 자라는 아이가 탯줄로 생명을 얻고 어머니의 자궁에서 어머니 전체를 감지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그리하여 도사(道士)들은 죽음 후에 도달하게 될 천국의 나라(神仙界)에 태어날 본성인 영혼을 위해 직접 창조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능력을 지닌 도사가 바깥 세상으로 나가 자신들의 세계를 알리고 있다. 그것은 본바탕이, 종교를 통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창조주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는 우수한 영적 소유자들을 위해서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선도(仙道)라는 구도 방법을 먼저 수련시킨 후, 그들이 직접 창조주에게 지도 받을 수 있는 길을 안내한다. 이것이 대자연이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한민족만이 해온 전형적 인 선도 세계였다. 그 세계를 이해시키는 사상의 핵심은 역시 『천부경』이 밝히고 있는 기(氣)의 세계이다. 창조주는 그렇게 한반도 땅을 선도국으로 특별 히 선택했던 것이다. 『천부경』의 상서 사상은 창조주가 도사들만 모아 놓고 직접 가르치는 유일 한 경전이다. 그런 내용이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그 경전을 이해할 수가 없다. 창조주는 인류가 그 경전을 바르게 이해할 때 진정한 상서의 효험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리고 창조주가 직접 문자화한 부적(符籍)으로서 신성한 힘이 발생할 수 있도록 천부(天符)해 두었다. 대자연에 새로운 개벽신화가 열리는 날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쓰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는 거기에 인간이 자연과 먼저 일체를 이루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신의 증험이 일어날 수 있는 비방을 숨겨 두었다. 그 방법론은 역시 삼극(三極)의 효험에 있다. 그 효험이란, 태역점(太易占) ·태역무(太易巫) ·태역부(太易符)의 신명천기설(神明天氣說)이라는 비법과 비술이다. 그리고 그것의 최고 수준에서 낮은 단계로 수많은 비법의 모양과 형태를 낳았다. 이것들이 역사 속에서 그동안 나름대로 쓰임이 되어 왔다. 하 지만 지금 현대의 도사들은 과거 조상과 달리 정신적으로 인식의 세계가 넓어지고 창조주의 우주심을 이해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드디어 후천개벽 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와서는 선도의 세계도 창조주의 원초 적인 상태인 태역시대로 퇴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인류의 모든 사상들은 『천부경』의 원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천부경』의 원 본에서 최초로 나온 상서 비법을 채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인류의 정신은 내면적으로 완전히 퇴행하여야 한다. 신(神)은 앞으로 나가는 마음에서는, 어두운 밤바다에 항해하고 있는 산적(山積)한 배들의 등대 일 뿐이다. 더 나가게 되면 정박하는 항구이다. 그렇다. 신(神)이 실재하고 있는 장소는 등대도 아니고 항구도 아니다. 배들이 출발한 그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돌아가는 빈 마음만이 신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고 있는 장소로 돌아간 정신은 두 번 다시 덧없는 어두운 밤바다를 항 해하지 않는다.” 이것이 『천부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태역상서론이다. 신은 전능하다. 자 신에게 완전히 퇴행한 자에게만 신은 그 전능한 선물을 선사한다. 그 퇴행하는 길, 즉 도(道)는 자연의 마음(道義心)에 있다. 명심하라. 자연에 일치하는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구천 세계에서 떠돌고 있는 혼(塊)들이 모여 사람의 마음에 허기(虛氣)만을 가득 채우고 끝내는 모든 행복을 가로채 가 버릴 것이다. 이것이 한민족 민간 신앙의 전부이다.
【】역의 진리와 부도【】
먼 은하계 저편에서 인간이 지구에 처음으로 이주한 이래 오늘까지 약 2백 만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인간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역사의 변환기 때마다 독특한 문명 양식을 창출했다. 그런데 문명의 역사 앞에서 인류에게 왜?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항상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문명이 변환하고 난 뒤에는 언제나 과거의 것을 송두리째 상실해 버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과거의 진실성이 현대라는 시점에서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언어나 문자를 통하여, 혹은 문명의 유산에서 인류의 전 역사 속에 각 시대의 문명을 연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실은 과업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역사라는 긴 시간을 자신의 짧은 생애에 모두 간직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세계적인 대이변인 재난이나 대홍수 같은 것으로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하루아침에 주저앉아 완전히 패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끼리 전쟁을 하여 문명을 스스로 파괴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인류는 지속적으로 문명을 보존하지 못했다. 그래서 현대인은 과거 문명의 흔적 만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특히 고대의 문명은 현대인에게는 비록 수수께끼 같은 문명이지만, 오늘까지 남겨진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각종 경전과 신화는 고대문명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유산이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문명 발상지를 탐사한 결과 고대인의 기술과 학문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인류가 미래를 지향할 때마다 벽에 부딪치면 과거의 신화와 경전이 신뢰할 수 있는 합리적 참고가 된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자들이 태고사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리하여 정보를 얻어낸다. 결과적으로 그 정보들은 오랜 시간을 걸쳐 내려온 경전과 신화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입증하려 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인류의 전 역사를 하나의 인류적 사상으로 체계를 유지하는 에너지가 된다. ‘고대인의 정신’은 고대 문명의 상실과 달리 인류 역사 의식 속에서 한 번 도 떠난 적 없이 관통해 오고 있는 의식의 강물이다. 그러므로 사상은 인류의 역사를 연결하고 있는 내적인 에너지이다. 그리고 인류를 강하게 결합시키고 있는 운명이기도 하다. 다만 외적으로 남겨진 문명이 시간 속에서 퇴색하고 멸망했더라도 문명의 정신은 계속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어느 시대일지라도 문명을 낳게 한 그 정신만큼은 영구 불변한 진리로 계속 유지 되도록 해 왔다. 그 노력에서 볼 수 있는 것이 경전과 신화이다. 이로써 인류는 정신적으로 역사의 진리를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다고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로 살아간다” 고 예수가 광야에서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말한 뜻은 신앙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말한 것이다. 확실히 진리는 신앙적이다. 이유는, 진리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영원하도록 하는 힘이다. 그런 면에서 인류의 역사도 신앙의 한 부분이다. 만일 그것이 자연에 역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환상이나 미망에 불과하다. 설사 그러한 역사가 있다 해도 이미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진리는 인간의 역사를 자연 이치로 존재하게 한다. 진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연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진리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만물에 대한 운명을 제시한다. 그것은 ‘영원한 대화’ 의 우주 원리를 구축해서 나타내고자 한다. 그리고 드러난 것이 논리성을 지니지 못하면 미망에 빠진 것에 불과할 뿐 당장 인류 운명에 도움이 못 된다. “운명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진리이다.” 이것은 영원한 명제이다. 삶과 따로 분리된 운명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자연스러움을 잃고 있는 운명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는 자연의 이치를 그대로 있게 하거나, 그대로 보았다거나, 그대로 이용했다거나, 그대로의 것을 알려고 하는 인간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 생각을 운명으로 나타내는 현실이 실아 움직이지 못하면 진리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살아 있는 진리 속에 존재하려고 인간은 깊은 사색에 빠져본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탐구심 끝에 결국은 ‘신성한 진리’를 만나게 된다. 신성함이 없는 운명은 대자연의 전체 생명과 함께 존재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이며 또 우주가 무엇인지, 인생 자체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다. 평상심에서는 구체적인 의문을 느끼지 않고 있더라도 사실 사람의 잠재의식은 한시도 쉬지 않고 늘 묻고 있다. 인간의 마음에서 그 물음이 그치면 사 실 죽음이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완성하려는 욕망은 결국은 진리에 살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운명이라는 현실에서 자신의 진리가 합당한 것일까? 하고 그토록 불안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열정은 인류 역사로 볼 때 고대인들이 현대인보다 더 신중히 접근해 나갔다. 그 문제를 먼저 명확히 밝혀야만 인간은 역사를 창조할 수가 있다. 무엇이든지 하나로부터 시작하는 과정에는 먼저 목적 의식이 완벽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인류의 전 역사가 하나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진리를 애초에 구축한 국가는 문명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참다운 진리를 구축하지 못한 종족들은, 그들의 역사적 운명을 개척하지 못하고 다른 문명의 노예로 전락하거나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고대 국가는 진리에 대한 열정과 그들의 운명을 창조하는 투쟁의 역사였다.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진리가 태어난다. 이로써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생존한다는 자체가 진리를 신봉하는 일이 된다. 그런데 자연을 이용하고 도전하는 일은 시대마다 다르고. 혹은 종족의 통일된 목적론에 의하여 서로 달리 추구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연을 통하여 진리를 본다. 그러나 자연 그 자체는 진리가 아니다. 다만 자연을 주시하고 통찰하고 있는 인간에게 진리가 있을 뿐이다. 자연은 초월하고 있는 그 무엇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은 변화무쌍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문제를 인간에게 보여준다.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자연을 인간이. 조화하고 화해하면서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구축하는 가운데 인간과 자연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설정된다. 바로 설정할 수 있는 에너지가 진리의 힘이 된다. 진리가 어떤 모습으로 자연에서 보여지는가에 띠라서 진리의 힘이 시간 속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역(易)의 진리’가 그런데 서양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는 사실, 신(神)은 없다. 왜냐하면 신은 신봉자 마음속에 있는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일 신봉자가 없다면 신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신봉자가 없더라도 여기 자연은 그대로 우주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또 신(神)은 죽었다. 인간을 낳은 후 아버지로서 역할을 다 마친 후 수명이 다하여 병들어 죽었거나 늙어 죽었거나, 아니면 그들끼리 싸우다 모두 멸망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서양인의 사고방식에는 신의 존재가 인간의 의식으로 설명되어진다. 그러나, 부도(符道)에서 말하고 있는 신은, 신봉자의 신으로서 추앙받고 있지 않다. 그들은 신앙심을 의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이 곧 신이기 때문에 의식을 의식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다만 인간의 감정 세계다. 그래서 신에 대한 개념이 없다. 흔히 신을 느끼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초월의식으로 신을 설명한다고 한다. 이것은 요가나 불교에서 말하는 신의 의식이다. 그러나 선도에서는 본래 신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 단어보다 먼저 도(道)가 있었다. 그런데 도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에너지 작용을 귀신이라고 했다. 즉, 그것이 신의 의식이다. 그래서 부도인 들은 신(神)과 기(氣)를 같은 뜻으로 혼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의 개념으로 볼 때는 인격체의 신, 절대자의 신은 애초 우주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 모든 존재, 우주 만물은 곧 자연이므로 그 속에 포함하여 신(神)의 의식을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다 신이 된다. 우주 만물이 모두 하나로 신이라는 에너지 즉, 기(氣)로 되어 있다. 그것이 다만 나타난 모습에 따라 그 이름이 있다. 사실 부주사가 말하고 있는 신, 귀신은 기(氣)의 모습을 보고 지적하는 말에 불과하다. 모든 존재는 불행한 운명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면 불행은 어디서 오고 있으며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오고 있는 근원을 알면 불행을 막을 방도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가고 있는 근원을 알면 불행을 떨쳐 버릴 수가 있다. 그런데 자신의 불행이 오고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서구의 신을 믿게 된다. 반대인 사람은 동양의 신을 믿게 된다. 왜냐하면 소유 개념은 외부의 것을 얻는다는 것이고 존재의 개념은 내면의 것을 버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주 사들은 사람들이 어떤 신을 선택하든, 또는 자신의 불행을 어떤 근본으로 피하든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부주사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연인일 뿐이다. 종교와 신앙에 있어 종교는 신앙을 포장하고 있는 껍데기다. 신앙을 구하려고 시장에 나가보면, 그것을 멋지게 포장한 종교가 있다. 그 포장지를 뜯어보면, 그곳에 우주, 신, 운명, 하나님, 귀신, 구원 등의 알맹이가 들어 있다. 부주사는 바로 그 속 알맹이조차도 버리는 사람이다. 물론 그런 이름을 포장하고 있는 껍데기, 즉 종교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그리고 어떤 종교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는 다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부주 사들은 진리를 포장하고 있는 종교 껍데기들 그것이, 색채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이론이 다르며 설득시키는 행위가 다르다는 것을 놓고 따지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부주사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믿지 않고 있는 그 마음을 믿고 있다. 그 마음에는 충족과 환희만 있다. 그들은 순수한 자연 그대로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세인들은 그런 이름의 존재들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운명이 그 이름들에 의해 설명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딱하게 보고 도인은 자연의 조화를 부려서 도와주고 있다. 그 일은 단순히 자연을 이용한 물리적 힘이다. 그런데 도인은 그 물리적 힘을 구사하고 있는 의식을 귀신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부주사는 신(神)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귀신, 신, 기, 우주심이라고 하는 그 용어는 도(道)라는 그릇 안에 담겨 있는 물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는 행복을 구하는 애착이 없다. 그 대신 불행에 대한 것만 깊이 생각한다. 그들은 불행을 어떡하면 피할 수 있는가에 만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불행을 만들지 않고 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이 되는 마음의 모든 찌꺼기를 버린다. 다 비우고 나면 그 공간에 순수한 자연이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행복이 된다. 행복은 그렇게 찾아져야 한다. 무소유, 무집착이 그들의 마음이다. 집착이 없는 마음에는 불행이 존재할 수가 없다. 집착이 없으므로 그 마음에는 행복에 대한 기대심도 애초부터 없다. 그래야만 도를 얻을 수가 있다. 그래야 자연 그대로의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하나의 운명만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을 있는 그 대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그래서 부주사는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있다. 그 것이 그들의 도(道)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진리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려고 삶을 의문하고 있다. 이로써 의문의 대답을 듣고자 한다. 그것이 부주사의 구도다. 그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답은 언제나 스승으로부터 배운다. 그들의 마음속에 신 (神)같은 대상이 있다면 자신을 가르친 스승이다. 그들은 스승을 부를 때, 신이라는 이름을 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신이니까 그 가르침을 듣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그래서 귀신이 그들의 교주가 된다. 그리고 스승이 걸어간 길이 그들이 걸어가야 할 구도의 길이기에 스승만을 따르고 존경한다. 그들의 위대한 스승의 계보는, 위로는 천존이신 상제님이시며, 아래로 복희, 광성자, 신농, 황제 그리고 노자이다. 그리고 부주의 세계를 혁신했던 장천사(張天師 : 장도릉)를 존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을 직접 가르쳤던 백일승천한 스승을 가장 존경하고 있다. 이렇게 부도(符道)의 맥은 그들만이 추구하고 있는 세계를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주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종교에든 다 속할 수 가 있다. 마치 음식을 가리지 않는 건강한 사람처럼 자연법을 따르고 있는 모 든 종교를 인정하고 있다. 불교를 만나면 불교부주가 되고, 도교를 만나면 도교부주가 된다. 기독교를 만나면 기독교부주가 되고, 무속신앙을 만나면 그것이 되고, 구도자를 만나면 철학부주가 된다. 과학을 만나면 그것이 되고, 예술을 만나면 예술부주가 된다. 그리고 한 개인의 운명을 만나면 기습부주(氣習符呪)가 된다.
도를 만나면 도기부주(道氣符呪)가 된다. 진리를 만나면 부주는 문화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부주사가 사람들에게 행사하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이 있다. 자연의 본래 모습을 통각(統覺)한 정신과, 자연을 통하여 무한한 에너지를 이용할 줄 아는 초능력으로 시간적, 공간적 행위를 나타내 보여준다. 그리하여 천지 자연을 파괴하기도 하고 창조하기도 한다. 만물은 모두 기령(氣靈)에 의해 살고 죽는다. 기령은 곧 혼이다. 이 세상 모든 기령을 자유자재하게 다루는 능력을 부주 사들은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신성한 영적 기운으로 영원 회귀의 감회를 일으키면서, 우주적 지대에서 다른 곳으로, 땅에서 하늘로 그리고 저승에서 신의 영역으로 얼마든지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가 있다. ‘역의 진리’를 사상화하여 부도인은 귀신이나 보조령의 비밀 언어와 문자, 그리고 우주적 신교(神敎 : teachings of god)를 지시하는 도상부(圖像符 : icon)를 만들어 천지를 공사한다. 그리고 부도인은 과거에 이 세상을 위해 살다 간 숭고한 자들과 위대한 자들의 영혼을 불러내어 사람들에게, 마치 비타민이 결핍된 사람들에게 과학자들이 비타민 알약을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정제된 기운을 만들어 영적으로 병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런 사명을 완수해 야만이 궁극의 도를 얻기 때문에 부주사는 자신의 운명을 걸고 언제나 광채를 띤 영감의 세계에 자신을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영환도사들의 부도정신은 노자의 천도(天道) 사상에서 배우고 가르침을 따른다. ‘천도(天道)는 공(空)하여 무형하다’ 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그 무형한 공간에 기색이 모여들면 생명이 탄생한다. 이것을 노자(老子)가 몇 가지 은유를 써서 설명했다. 그는 종종 도(道)를 움푹한 계곡이나 혹은 영원히 비어 있는 그릇으로 비유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무한한 우주 의식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사실 노자가 말하고 있는 빈 것의 형태들은 우주 의식의 한 덩어리 공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대우주에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의미 깊은 노자의 메시지이다. 인간의 내부에 바로 노자가 말하고 있는 천도가 실재하고 있다. 그 공간은 날마다 공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공간을 평상시에는 모른다.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자신의 욕심만 알고 있다. 하지만 깊은 명상에 빠져 보면 알 수 있다. 그 공간이 답답하고 막히면 사람의 운명이 나빠진다. 막힌 공간에 더럽고 뻘 같은 온갖 잡동사니가 채워져 있다. 그것을 치워야 한다. 그것이 도(道)를 닦는 근본 이치이다.
【】자연의 진리와 태극진경【】
‘자연의 진리’ 란, 곧 역의 진리를 말한다. 태초에 복희가 “역이 곧 자연이다” 라고 천존의 말씀을 전파한 후, 그것을 노자가 ‘도’ 의 개념으로 학문적으로 정리한다. 그 후에 옛 성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도에 대한 말씀을 남긴다. 여기서 자연법을 해명하려 했던 부도(符道) 성인들이 말하기를 “도를 닦아서 진경(眞經: 태극)을 얻으면 운명의 고해를 벗어날 수가 있다” 고 했다. 이에 대한 철학을 구체화시킨 사람은 여동빈(呂洞濱)이라는 영사(靈師)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태극이 선(先)이며 원기의 조(祖)이며 만물의 천선불(天仙佛)의 근원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생겨나고 만물이 태어난다. 하늘도 태극에서 생기고 땅도 여기에서 생겨난다. 이 진경을 닦으면 조화를 부리고 귀신도 움직일 수 있으며 영(靈)도 신(神)도 여기에서 태어나게 되므로 태극이야말로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나 억지로 이름을 붙이니 도(道)라고 한다.” 한민족의 부도(符道)에서도 ‘역’의 진경을 태극으로 규명하여 『천부경(天符經)』에 우주묘법을 교학해 두었다. 그 논리의 요체는, 역의 진리로 기(氣)와 이(理)를 구분하여 도를 체득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학자들은 역의 철학을 중국으로부터 배웠다. 그런데 한민족의 『천부경』이 밝혔던 원시천존의 역을 복희가 태극으로 나타내 보여서 노자가 학문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후계자들이 도가의 파를 형성하고는 각자 자신들의 목적론에 입각해 발전시킨다. 이윽고 역의 진리가, 철학사에서 가장 주목할 시대인 송대에 와서는 성리학으로 정착된다. 이것을 다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이 거두어 동양사의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어쨌든, 역의 철학은 태극(太極)을 도설(圖說)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과거 도인들이 ‘역’에서 도를 얻고자 했던 다양한 사상을,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양분하여 추구해 오다가, 본격적으로 천명이나 혁명을 주장했던 성인들이 『주역』과 『춘추』에서 역의 변화론을 강조했다. 그 연유로 양분된 이론과 실천을 결부하여 전수하다가 송대에 와서는 성리학으로 새로운 해석을 낳게 했다. 그것을 한국의 유학자들이 연구하여 마지막으로 역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이것이 동양사에서 인정하고 있는 역의 철학사이다. 역학은 다양한 범위와 내용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부도는 역의 신앙적 차원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천, 지, 인의 자연관을 복서적(卜筮的)으로 철학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괘를 풀이한 점(占), 무(巫), 부(符)가 요체가 되어 인간과 자연을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도가와 선가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상수학(象數學), 의리학(義理學), 도서지학(圖書之學)으로 구분해 놓고 있다. 여동빈이 말하고 있는 진경(眞經)은, 선가와 도가의 모든 원전(原典)을 설명한 사상이다. 그는 “태극은 만사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진경의 도를 얻는 일만큼 중요한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 무한한 세계에 역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 있으며 앞으로 드러날 역도 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나타날 ‘역’이 인간의 운명과 관계할 때에는 언제나, 진경의 상수는 인간상의 점복을 구하는 데 나타나고, 진경의 의리는 인간상을 무속하는 데 나타나고, 진경의 도서는 인간상의 부를 얻는데 나타나고 있다. 부도의 핵심은 태극 진경으로부터 앞으로 인간상에 나타날 세 가지 역의 모습을 찾는 일에 있다. 그런데 고대의 도인 들은 복희의 역을 부호역(符號易)으로 보고 길흉을 판별하는 데 주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후대의 부도의 도인 들은 그것을 서술역(筮術易)이라 밝히고 비판하기를, “괘도에서만 역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괘(卦), 효(爻), 문자(文字)는 이미 형체를 갖추어 드러나 있는 역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형체를 갖추지 않고 드러나 있지 않은 역을 탐구해야 한다” 고 주장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도인들이 부호역을 다시 찾아내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하여 부도를 행하고 있는 부주 사들은 복희의 역(易)이 어떻게 작괘되었는지를 연구했다. 그리하여 『계사전』에서 복희의 태역작법을 설명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연구한 결과 복희는 사람의 몸에서 역을 취하여 자연의 이치를 팔괘로 나타낸 것이라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팔괘의 상이 ‘天, 地 雷, 風 水, 火, 山, 澤’의 자연 현상을 괘로 나타내고 있으므로, 그것에 합당한 이름을 붙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역’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팔괘 자체가 우주 만물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이법으로서, 그것은 철학으로 작괘되었다. 여기서 철학 이전에 복희의 역이 사람의 몸에서 나온 사실을 어떻게 도인들이 규명했는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선가의 학자들, 불가의 학자들, 도가의 학자들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구도자들은 태극이 ‘역’의 본원이 진경(眞經)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복희 팔괘가 어떻게 자연에서 추출되었는지는 탐색하지 않았다. 학자와 부주사는 우주 진리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개념적인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부주사는 표현적인 정신의 소유자다. 그들은 자연에 있는 사실 그대로 추구한다. 즉, 그들은 도(道)를 눈으로 보고 그대로 표현해 낸다. 그러나 학자는 표현한 그것을 보고 듣고 하여 그것을 언어로 정리하고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인의 말을 열심히 듣는 쪽에 서 있다. 그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를 가리기 위해 철저히 분석하는 사람들이 학자이다. 현미경 같은 눈과 안테나 같은 귀를 가지고 자연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도인이다. 그들은 마치 탄광의 광부와 같이 일을 해낸다. 그 광물을 분석하고 가려 내는 작업은 학자들의 일이다. 그런데 영사(靈師)는 보고 들었던 자연을 가공하여 사람들에게 바로 쓰임이 될 수 있도록 조화를 부리는 사람이다. 마치 광물을 가공하는 사람처럼, 또는 예술가와 같이, 그러나 예술가들은 인간의 감정 세계에서 자연을 발견한다. 부주사는 자연의 감정 세계에서 인간을 발견한다. 그것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행위는 같다. 영사들의 창조 세계도 각자 개성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행하고 있는 능력 중에서 부적을 최고로 꼽고 있다. 그래서 부적마다에 지닌 영험한 우주 기운은 영사 자신의 능력으로 평가된다. 그들은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기(氣)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직접 들을 수 있다. 그 능력으로 복희의 진경 부호 역인 팔괘(八卦)가 어디에서 추출된 것인지를 탐색한 끝에, 그것이 인간의 몸 안에서 돌고 있는 정기(精氣)의 실체였으며, 우주 공간에 편재하고 있는 천기(天氣)의 실체임을 보았다. 누구든지 도(道)를 닦으면 그것을 볼 수가 있다. 진경을 자연에서 직접 생생하게 볼 수 없는 사람은 아직 도(道)를 다 얻지 못한 사람이다. 능력자만이 복희의 괘로 우주에서 존재하고 있는 실재를 만지고 바라본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은 기색의 실체이다. 괘는 우주에너지이고, 동시에 기(氣)의 물질 상태이다. 그것을 부주사가 극명하게 ‘진경부법’으로 명쾌히 밝혀 자신의 수련에 쓰임이 되도록 물증법으로 과학화했다. 복희의 역을 진경이라 한다. 진경(眞經)이란 다른 말로 진리(眞理)라고 한다. 이것을 후대의 도인들이 기록하였는데, 노자의 도덕경을 비롯하여 장자와 공자 등 역대 도인들이 기술하였다. 그러나 부주 사들은 그것을 받아 구체적인 물증법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경문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말한다. 주로 천도(天道)를 닦은 부주사(符呪師)들이 우주 진리를 존재 과학으로 다듬어 놓은 것까지 진경이라 부른다. 그리고 내용은 부적과 주문으로 구성된 것을 말한다. 역의 진리 즉, 진경을 천도하여 경문한 것으로는 『천부경(天符經)과 『천도경(天圖經)』이 있으며 이것들이 부주 세계에서는 가장 먼저 나타났다. 현대 도인들이 천부경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오로지 81자의 경서에만 매달려 글자가 암시하고 있는 뜻만 풀이하고 있다. 본래 부주사의 경전은 서(書)와 도(圖)를 병용하여, 우주를 보고 들은 그대로 옮긴 것이다. 즉, 진경의 세계를 하도와 낙서로 규명했다. 그러나 노자의『도덕경』 같은 경전들은 우주에 대한 자연관을 철학적으로 성인들이 묘상(描象)한 독창적인 저술이다. 그러므로 문학과 철학 그리고 시학에 바탕을 둔 철학서이다. 그것은 학자들의 경전이다. 하지만 그 경문들은 부주 사들이 만든 진경(眞經)을 보고 듣고 하여 논리적으로 탐구한 것들이다. 진경은 천서(天書)와 천도(天圖)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천부경』과 같은 진경은 저작명(著作名)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어낸 것이 아니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실체를 득도한 도인이면 누구나 똑같이 우주 모습을 볼 수가 있기에 구태여 그를 지은 사람의 이름이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부주사가 바라본 그 세계를, 누구에 의해 듣고 보았는가 명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강증산 부주사가 기록한 『현무경(玄武經)』과 같은 진경이 그것이다. 『천부경』은 백두산 겨레가 처음 이 땅 위에 자리했을 때의 몫 대황조(大皇祖 : 한배검)께서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원시진인 천존께서 상서한 경전이다. 이는 한민족의 최대 경전으로서 고대 신앙의 천도사상을 물증한 것인데, 현재는 81자로 된 천서(呪)만 남아 있고 천도(符)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천부경에 본래 천도(符)가 있었는지 조차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천부경의 81자도 시대적으로 과연 고대인들이 남긴 것인지 아니면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조작인지 조차도 알 길이 없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태초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부주 사들은 그것을 태초에서부터 보아 왔다. 그리고 지금 보았다고 해도 그것은 태초부터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신라의 최치원은 당대에 세계적인 문장가였다. 대단한 학식과 사상을 겸비하고 있었던 그는 고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으로 과거 부도인들이 저술한 경이나 주문들을 정리하였다. 그런 작업 과정에 『천부경』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경외하여 오늘날 전해지는 81자의 한문으로 완역했다. 사실 최치원의 개인적인 취미는 진경을 통달하여 신통력을 연마하는 것이었는데, 그 경지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특히 그가 부적을 통하여 초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이를 본 중국의 황제는 최치원을 죽이려고 흉계를 꾸며놓고 중국으로 초청하였다. 그 시대에는 신통술을 경쟁하는 게임을 좋아했다. 이때 상대의 초능력을 제압하는 술법을 흑마술이라고 한다. 중국은 한국과 같은 소국의 명지(明智)를 사전에 꺾어 놓고자, 가혹한 계교로 타국을 유린하곤 했다. 그래서 역시 최치원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황제는 소국에서 대인이 나면 좋지 않다고 하여 당대의 흑마술사들을 불러 놓고 최치원과 경쟁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최치원의 몫이었다. 이때 그 유명한 오색부(五色符)가 등장한다. 오색부란 다섯 가지 색깔의 부적을 말하는 것으로 최치원이 중국 능원 땅에 이르니 어떤 여자가 길가에 섰다가 “황문에 들어갈 때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니 조심하라” 하면서 주머니에서 이 부적을 꺼내 주었다고 한다. 드디어 최치원이 황성에 이르러 의관을 정제하고 문 안에 들어서니 난데없는 악기 소리가 요란하므로 전날 오색부를 준 여인을 생각하고 먼저 푸른 부적을 꺼내 던지니 곧 소리가 조용해졌다. 둘째 문에 이르러서도 소리가 나므로 붉은 부적을 던지고, 셋째 문에서는 흰 부적을, 넷째 문에서는 검정 부적을 각각 던지니 조용해졌다. 마지막 다섯째 문에 이르니, 술 취한 코끼리가 미쳐 날뛰므로 황색 부적을 던지자 부적이 곧 수천 마리 구렁이가 되어 코끼리의 입과 코를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니 중국의 흑마술사들이 어찌하지 못했다. 이 말을 듣고 황제는 “과연 천신이로다” 하고 그를 맞아 칙사 대접을 했다고 한다. 이는 대국인 중국인의 계략을 최치원이 지혜와 신통으로서 설분한 통쾌한 모험담이지만,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이 부적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보아 최치원이 신출 기묘한 부주사였다는 사실이다. 그만한 능력의 소유자가 『천부경』을 해독해 놓고 자신도 그 뜻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최치원 선생은 한국의 도맥에서 지리산파의 거봉이다. 지리산을 거점으로 활약했던 부주 사들은 모두 최치원이 뿌린 부주술을 이어받은 사람들로서 남명선사〉 조식선사, 망우당 곽재우, 정기룡, 김덕령 장군 등이 바로 이 지리산파의 부주 사들이다. 지리산은 또한 도가와 선가의 좌도방의 본거지이자 한국남도 무속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필자도 지리산파의 부주술을 전승받았다. 그 사실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하고,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천부경』은 분명히 영환도사들의 경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에 보면, 환웅이 이 땅에 나라를 세울 뜻을 하늘님에게 밝히어 도움을 청하니 천부인 3개를 주었다고 한다. 이를 보아 환웅도 초능력을 겸비한 영환 도사로서 천도를 신명한 무인(巫人)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민족의 고대 경전인 『천부경』은 단군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말하자면, 자연의 진리는 곧 ‘역의 진리’이니 진리는 자연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역(易)의 이치가 자연법이다. 모든 만물은 자연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죽고 사는 것도 법이요 창조와 파괴도 법이요 선악(善惡)도 법이다. 그러므로 자연법은 존재이며, 그 존재는 기(氣)라고 하는 우주심의 생명력을 나타내고 있다. 기(氣)는 만물의 도(道)를 만드는 근원이다. 도(道)를 주관하고 계신, 하늘님 상제(上帝)께서 인간 세상을 상서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지상에 내려 주시니, 그가 단군이라고 불리는 부주사이다. 한민족의 초대 단군을 환웅이라 한다. 그는 상제로부터 천부인 3개를 얻어낸 후, 이것을 『천부경』에 담아자연법을 구체화시킨다. 이것이 한민족으로서는 최초에 나타난 진경(眞經)이다. 그것은 경문(부적)과 경서(주문)로 된 경전인데, 지금은 아쉽게도 경서만 남아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가 시작하여 1, 2, 3, 4의 역수의 효(爻)가 나오니 다음 50(0)의 역수에 중도하더라. 다시 시작하여 16, 27, 38, 49 순으로 역수의 효(爻)가 나오니 다음 100 에 중도하더라. 그 모든 효가 네 번(四象) 도상하더니, 태극의 팔괘가 정해지고 한 사람마다 천자숙명이 결정되더라. 사상이 팔괘로 생한 자리에 우주심이 있으니 그것은 우주 이치이니라. 그리하여 역수의 존재가 끝나면 우주심의 본바탕으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역의 진리’는 본래 우주의 본바탕인 진경(眞經)에서 나왔다. 진경이란, 무극에서 태극(太極), 태극에서 음양, 음양에서 팔괘, 팔괘에서 역수(易數)의 모든 효(爻)를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경은 천부(天符)와 신주(神呪)가 나온다. 그것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이다. 즉 하도는 부(符)로 설명되고, 낙서는 주(呪)로 설명된다. 진경에서 나온 동양의 최초 경전은 노자의 『도덕경』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철리(哲理)한 선도의 부주가 중국의 『천도경』이다. 그리고 그 『천도경』의 뿌리인 한국의 『천부경』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부주 경전이다. 그런데 최치원이 우리의 『천부경』을 한자(漢宇)로 해독하는 과정에서 어찌된 영문인지 천서(呪)만 남아 있고 천도(符)는 빠져 버렸다. 그러나 중국의 『천도경』은 온전히 남아 있어 중국 부주의 근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지리산 부주파의 마지막 전수자였던 김평수 도인이 아껴 오던 부도(符道) 비법서(秘法書)를 수제자인 필자에게 몇 권 전수해 주었는데 놀랍게도 그 책에서 『천부경』 81도(八十一圖) 천도의 부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인받을 수 있을 만큼 철저한 자료 분석이 끝나지 않아 아직은 발표할 때가 아니다. 『천부경』의 81도(圖)는 80개의 경문(부적)과 그 부적에 신력을 일으키는 일종의 명상(부도)로 되어 있다. 그것은 선도의 부주 사들의 도법수련용 학습서인 동시에 경전이다. 그것의 진경 암호를 해독해야만 천부의 상서를 징험하는 신통력 부적을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역(易)의 자연법을 찾아내는 데 유일무이한 지침서이다. 그리하여 고래로부터 전래된 비법으로 한 개인의 천부를 얻어내고자 고안된 천부경의 81개 부적을 ‘신명천기(神明天氣) 검색점무부(險色占巫符)’라고 한다.
[출처] 7. 선도(仙道)와 태역상서론|작성자 turtle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