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군대와의 만남, 외,
-여자가 군대라니, 시대가 바뀌어 요즘에는 많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직업이 되었지만
내가 군대에 입대했을 당시만 해도 여군이라고 하면 굉장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때였다. 무도를 익히고, 경호업무를 배우는 과정에서 영부인을 경호하는 멋진 환상에 빠져들었다. 여자 헌병 7명을 선발하는데 500명 가까운 지원자가 있었다.
당시에는 운이 좋아서 합격했다 생각했는데, 떨어졌다면? 지금은 늘 궁굼하다 -
1, 군대와의 만남
얼마 전 가상 군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에서 여자 연예인들이 독거미 부대에서 테러진압 훈련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자 지난 군 생활이 주마등같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레펠도 타고 공수를 하는 게 꿈이었던 나는 군 생활 내내 늘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었고,
차라리 헌병이 아닌 특전사를 지원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을 전역하는 날까지 버리지 못했다. 군인도 특기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입소를 하던 날은 5월의 어느 후덥지근했던 날이었다.
기초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입소 장소인 국방부로 가는 내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가족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묘한 기분과 함께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부모님께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입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본 헌병모집 포스터의 달콤한 유혹 때문이었다.
싸이카, 대 테러 업무, 등 호기심을 유발하는 항목이 많았는데, 그중에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청와대 근무였다.
순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청와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덜컥 지원을 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해 경찰특공대 1기를 뽑으니 이것도 같이 지원해 보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둘 중 먼저 합격하는 곳으로 가겠다는 생각으로 경찰특공대도 지원을 했다.
얼마 뒤 헌병 부사관은 최종 면접까지 합격이 되었다는 전화가 왔고,
그 다음 날 경찰특공대에서도 합격이 되었으니 면접을 받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까? 어디로 갈 것 인가를 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아마도 당시 헌병 모병관의 열성이 아니었다면 경찰특공대에 갔을 것이다.
모병관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관리를 하던지, 전화를 걸어 필기 공부 준비 방법을 알려주고 “넌 내가 볼 때 꼭 청와대에 갈 수 있으니 경찰에 가지 말고 헌병을 가라”는 깨알 같은 격려로 인해, 나는 청와대 헌병대에 합격해서 근무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33 헌병대라는 부대의 고유 명칭이 있으나 편의상 청와대 헌병대로 표기하겠다)
부모님은 경찰을 원하셨으나 난 “청와대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데 무슨 경찰이냐”며, 끝내 면접을 가지 않았다.
부모님들도 경찰 면접을 보면 좋겠다는 말씀은 하셨지만 크게 강요하진 않으셨다.
나중에 왜 그러셨냐고 여쭤보니, 가서 힘들고 잘못되면 원망을 들을까 싶어 강요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나는 여군학교 훈련 막바지에 청와대 경호를 하는 헌병대에 최종면접까지 올라갔지만 아쉽게도 최종 선발과정에 들지 못했다. 당연히 갈 줄 알았던 곳이었는데, 떨어졌다는 충격으로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처음으로 느껴본 좌절이었고 그 여파는 상당히 오랫동안 날 아프게 했다.
당시 나의 무도는 합이 10단이었지만 최종 선발된 동료 후보생은 태권도 초단이었다.
나는 내가 왜 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었고, 군대에 온 것을 후회하였다.
군대에 가서 많은 마음고생을 하며 생각하고 얻은 결론은, 어른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것 이었다.
군 복무 중 어느 날 그 모병관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경례를 했고 그 모병관은 나를 알아보았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원망하지 않니?”라고 물으셨다.
속으로는 백 번, 천 번 원망했었지만 최종 선택을 한 건 나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아닙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한 뒤 경례를 하고 생활관으로 올라갔다.
입대 계기를 얘기하다 보니 잠시 얘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다, 다시 입대 일로 돌아와,
나는 국방부에 가까워져 올 무렵 핸드폰 예약 메시지로 어머니에게 “몸 건강하게 잘 다녀오겠다고 사랑한다.” 는 메시지를 보내고, 대기 장소인 국방부 후문에 있는 우체국 앞에 도착하여 입소 안내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나와 함께 입소를 기다리는 후보생들이 가족들과 연인에게 이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시간이 가까워 오자 점점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족들과 헤어질 땐 눈물이 날 것 같아 큰 목소리로 웃으면서 "나 가요, 따라오지 말고 그냥 가세요, 면회할 때 봐요." 한 뒤 씩씩하게 대열을 따라갔다.
국방부 후문 위병소 앞에서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하라는 인솔자의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아 한동안 뒤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뒤돌아보았지만, 가족들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금은 섭섭하면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가족들에게 그 날의 얘기를 들어보니, 인솔간부를 따라가는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집에 가려는데, 아버지가 없어졌다고 한다. 어머니와 언니가 아버지를 찾았는데, 아버지는 우체국 트럭 뒤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고 한다.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에 한동안 눈물이 났다.
그렇게 5개월 과정의 기초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여군학교에 들어갔다,
엄격한 통제와 얼차려 속에 나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고, 친구라는 이름의 우정과는 또 다른 동기들과의 끈끈한 전우애를 쌓게 되었다. 강당에 쭈욱 늘어서서 보급품을 받고 앞으로의 주의사항을 들으며, 처음 접해보는 군대 밥이 입맛에 맞지 않아 일주일가량은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다. 그리고 전투화는 왜 그리도 불편하고 발이 아프던지.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잠자리에 누워 앞으로의 5개월을 잘 버틸 수 있을까, 라는 걱정으로 첫날밤을 뜬눈으로 하얗게 지새웠다. 그렇게 나는 8년간의 기나긴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무제 1
너와 나,
삶의 공간은 달랐지만
세월은 같이 흘렀다.
2014년 한줄시 공모전 은상 수상 작품
2, 별별 얼차려
난 부사관학교 기수가 아니라서 부사관 학교가 얼마나 힘든지 잘 모른다.
군 복무 중 장교시험을 봐서 사관후보생으로 3사관학교에서 다시 기초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군학교에서의 5개월은 부사관 학교보다 더 엄격하고 절도 있었을 것 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5개월 동안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고 느꼈다.
그때는 무섭기만 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우리를 아껴주었던 중대장이 생각난다. 물론 그녀가 우리에게 주었던 얼차려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 기수는 여군학교 시절 두 번이나 화장실에서 얼차려를 받았었다.
처음에 받았던 이유는 청소 후 화장실의 물기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았다는 이유였었는데,
입교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화장실 바닥 여기저기에 고여있던 물을 향해 앞, 뒤로 포복해야 했던 기억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던 그때 당시에도 반항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상당히 끔찍하고 싫은 경험이었다.
두 번째는 수료가 두 달인가 남았을 때인데,
어느 후보생이 물이 나오지 않을 때 쓰려고 받아놓은 드럼통에 걸레를 빨았다는 이유로 화장실에 집합을 했다.
화장실에서 호되게 얼차려를 당한 뒤로는 물청소 뒤에 항상 마른걸레로 물기를 닦아 물기를 거의 없앨 정도로 깨끗하게 청소를 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조금 축축한 바닥에서 포복을 하는가 싶었는데, 순간 걸레를 빨았다던 드럼통 물 2통을 포복하는 우리에게 부어버렸고, 우리는 물에 젖은 생쥐가 되어서 다시 한 번 화장실 바닥을 누볐다.
그 이후론 그 드럼통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범인은 잡지 못했고 얼차려만 받았던 그 날, 도대체 누가 그 드럼통에서 걸레를 빨았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별별 얼차려들이 다 있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칠면조라고 불렀던 얼차려인데, 왼쪽 발엔 모 양말에 군화를 오른쪽 발엔 맨발에 슬리퍼 하의는 츄리닝, 상의는 전투복을 입는다 등, 중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생활관으로 뛰어 들어가 하달된 명령대로 입고 선착순으로 뛰어나와야 했다.
관물 대를 최대한 각 잡힌 상태로 유지하면서 받아야 했던 얼차려로 처음엔 옷을 갈아입으면서 옆의 후보생을 보고 킥킥 웃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힘들었던 얼차려였다.
두 번째는 산타클로스라는 얼차려로, 의류 대에 보급 받은 모든 것을 챙겨 넣은 뒤 그 의류대를 메고 선착순으로 뺑뺑이를 도는 것이었다.
속옷 하나하나까지 센치와 각을 잡아야 했던 그 시절에, 모든 보급품의 각을 흐트러지지 않게 빠르게 넣었다가 빼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기에 이 얼차려 후엔 정리가 더 힘들었었던 것 같다.
이 얼차려는 우리가 자주 받았던 얼차려였는데,
어느 토요일 날 우리 기수는 평소처럼 단체로 의류 대를 메고 연병장을 돌고 있었다.
그날은 우리보다 먼저 입소한 사관 후보생들의 면회가 있는 날 이었는지, 면회객들이 여군학교 입구에 서서 우리를 지켜 보고 있었다. 처음엔 무심히 바라보던 부모님들이 한 바퀴, 두 바퀴 우리가 도는 것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에서 그들의 딸들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얼차려가 끝났고 면회가 끝날 때 까지 우리는 정비시간을 가지며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세 번째 얼차려는 2인 1조로 침대 매트리스 들고 선착순하기 였다.
여군학교 생활관은 싱글 형 개인 침대와 관물대가 생활관 별로 10개가량씩 들어가 있었고 2주 정도 마다 생활관을 바꿔서 모든 동기들과 한 번씩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번씩 매트리스를 햇볕에 말리기 위해 이동을 시킬 때도 있었지만, 얼차려로도 자주 매트리스를 들고 내렸었는데, 싱글 매트리스 였음에도 정말 무거웠었다.
3층에서 매트리스 들고 연병장으로 뛰어 내려가 앉았다 일어 났다를 몇 번 하고 선착순 두어 바퀴를 돌면 온몸의 힘이 다 빠졌던 기억이 난다.
네 번째 얼차려는 보급 받은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서 흘리지 말고 선착순 하기였는데,
이건 정말 어이없던 얼차려 였었다. 물 받는 것도 선착순으로 받아서 대야를 들고 3층에서 연병장으로 뛰어 내려가 연병장 한 바퀴를 돌아야 했는데, 절대 세숫대야의 물을 흘리면 안 되는 얼차려였다.
아무리 먼저 뛰어도 물을 흘렸기 때문에 다시 3층으로 올라가 물을 받고 내려와 연병장을 끝없이 돌았었다.
그렇게 지쳐갈 때쯤 대야의 남은 물을 머리 위로 끼얹는 것으로 일석점호가 끝이 났었고,
우리는 고된 몸을 이끌고 다시 샤워를 한 뒤 취침에 들었었다.
일석점호는 정말 공포의 시간이었다.
매일 샤워를 하고 점호에 임하면, 한 시간 이상 얼차려를 받고 땀 범벅이 되어 다시 샤워를 하고 불침번과 동초근무를 했었다.
정말 힘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재미있었던 시간이다. 카리스마 넘치던 중대장과 조용히 다독여 주던 소대장.
중대장은 내가 여군학교를 수료하고 2년 뒤 유방암이 재발하여 하늘나라로 떠났고,
소대장은 30년 명예 퇴역을 하셨다고 한다.
무서운 얼굴로 한 번씩 툭툭 내던지던 그녀의 유머를 우리는 웃지도 못하고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침묵했던 기억만 난다.
차가웠지만 누구보다 따뜻했던 그녀였다.
임관 후 잠시 찾아간 그녀는 내게 참 따뜻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었다.
그리고 내무생활에 묶여 지내다가 여유를 찾고 다시 그녀를 찾아가려 했지만, 시간은 그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자대에서 딱 한 번 여군학교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꿈속에서 중대장을 만나는 꿈 이었는데,
며칠 뒤 동기에게서 그녀가 죽고 첫 근무지였던 속초 앞바다에 유골이 뿌려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 돌아가셨냐고 묻자 희한하게도 그 꿈을 꾼 날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떠나면서도 많이 부족했던 부하가 마음에 걸렸는지 먼 길을 찾아와 인사를 해주었는데, 나는 장례식장에도 찾아가지 못했다는 슬픔과 죄책감에 괴로웠다.
그리고, 아직도 그녀가 그립다.
무슨 일이든지 때가 있는 것 같다.
조금 뒤에라고 미루는 순간 그 기회는 기다려 주지 않고 사라진다.
살아가면서 작고 큰 다수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 정말 후회하지 않도록 삶의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제 2
소중함은 이별의 끝, 시린 허망함 속에 파고 든다
3. 유격이야기 1, (특전사 유격장)
여군학교에 입교하고 3개월이 거의 다 되었을 때로 기억한다.
매일 석식 이후 조금씩 늘려갔던 뜀걸음(구보)은 어느덧 20바퀴가 넘었고(여군학교 연병장은 작아서 한 바퀴가 300m 정도였다.)
일석 점호시 받았던 얼차려는 앉았다 일어 났다를 300개 정도는 해야 이제 점호가 끝났구나 싶었을 정도로, 중대장의 철저한 계획 속에 우리의 체력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솔직히 그땐 유격훈련이 무엇인지 몰랐다. 요즘은 TV를 켜면 연예인들이 나와 친절하게 가상 군 체험을 하는 프로도 있지만, 당시에는 유격이라는 걸 여군학교에 들어가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올해는 관할 유격장의 협조를 받지 못해 특전교육단으로 유격을 떠날 것이라고 중대장이 전했다.
설렘과 두려움 속에 완전군장을 꾸리고, 어떤 훈련일까? 하는 기대 속에 드디어 날이 밝았다. 버스에 차례대로 탑승하고 국방부 정문을 나서자마자 중대장의 탈모라는 구호와 함께
덧붙인 말은 “절대! 버스에서 잠들지 말 것” 이었다. “유격장에 도착하면 너희가 많이 힘들 것”이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하나 둘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느덧 훈련장에 도착했는지 버스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하이 바를 착용하고 눈을 비비며 여기가 어디쯤인가를 둘러보았지만, 훈련장답지 않게 황량한 벌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오와 열을 맞춰서는 그때, 빨간 모자를 쓴 조교와 교관들이 어느 사이엔가 우리 앞에 서 있었고, 왜 잠을 자면 안 된다고 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 끝날까, 끝없는 선착순과 포복에 지쳐갈 때쯤 얼차려가 끝났고 얼이 빠진 상태에서 입소 행군을 시작했다.
특전 교육단은 지금의 내 기억으로도 참 멋진 곳이었다. 특전사들이 불렀던 군가는 아직도 기억이 남는데, 라이라이라이라이 차차차 어쩌고 하는 노래였다. 시누크 헬기가 날아다니고 몹시 거칠어 보이는 남녀 부사관들이 소총을 들고 훈련을 받는 모습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우리가 머물게 된 막사는 생활관마다 이 층 침대 몇 개가 들어가 있는 형태로 되어있는 매우 낡은 막사였다.
군장을 풀고 중식을 하러 가자 특전사 선배 부사관들은 여군 부사관 후보생들을 희한한 듯 구경하며 나름 귀여워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런 우호적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창 장마철이라, 낮에 폭우가 쏟아지고 밤엔 비가 그치길 기원했으나 현실은 반대로 아침이 되면 비가 그치고 모든 일과가 끝나면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최악의 훈련 조건이었다. 진흙탕을 기어 다니고 구르던 우리는 일과가 끝나면 마치 진흙 속에서 건져낸 듯한 몰골로 변했다. 그러다 보니 지급받은 두벌의 유격 복 중 한 벌은 고이 모셔두고 항상 진흙 범벅에 물에 대충 헹궈 널어놓은 옷을 입었는데, 우리가 그 유격 복을 입고 식사를 하러 들어가면 식사를 하던 선배 부사관들은 투덜거리며 식판을 들고 다른 자리로 이동하곤 했다.
냄새 때문에 우리 주변은 텅 비어 버리고, 선배 부사관들의 매서운 눈초리만 우리를 따끔히 맞이하여 주었다.
그래도 유격기간 중 식사시간이 우리에겐 가장 편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도 그렇거니와 식사 자체의 질이 높고 맛 또한 좋았다. 햄버거도 여군학교에서는 샐러드와 딸기잼 그리고 삶은 계란이 나왔지만 특전교육단에서는 계란 후라이가 나왔다. 그것도 무제한으로 가져다 먹을 수 있었으니 배고프고 고된 후보생들에게 이런 천국이 또 어디 있었을까 싶었다.
뭐든 새로운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뒤돌아 생각하면 도전하길 잘했다는 뿌듯함을 갖게 해준다. 나를 완성해 가는 퍼즐 조각처럼 말이다.
4. 유격이야기 2, (달콤한 휴식)
유격장애물 코스는 산을 하나 빙 둘러 올라가야 나왔다. 매일 아침마다 그 산을 뛰어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전 내내 유격체조에 장애물에 시달린 후 중식을 하기 위해 걸어 내려가고 오후가 되면 또 뛰어 올라가야 했다.
처음엔 밥맛이 좋아 많이 먹었지만, 격한 훈련 중에 토하지 않기 위해 참아야 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마름에 고통스러웠다.
장애물을 타기 전 유격체조를 해야 하는데, 이게 정말 만만치 않았다. 반복구호라도 몇 번 나오는 날이면 땅 바닥을 앞 뒤로 기어 다녀야 했고 듣도 보도 못했던 기합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매일 샤워 후엔 오늘은 어디에 피멍이 생겼나 관찰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처럼 되었다.
하지만 하지 말라는 반복구호는 항상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고, 그럴 때마다 더욱 호된 기합이 기다렸다.
얼차려 중에 기억나는 게 몇 개 있는데, 첫 번째는 앞번호 열명이 횡대로 서면(키가 큰 순으로 1번부터 나갔기 때문에)그 뒤로 각 번호의 후보생들이 선다. 그리고 맨 앞의 후보생을 뒤쪽 후보생들이 한쪽 어깨에 통나무처럼 메고 선착순을 하는 것이다.
이건 위에 올라가는 사람도 괴롭고, 메고 뛰는 사람도 힘이드는 얼차려였다.
두 번째는 일명 떴다떴다 비행기로 하이바를 벗어서 놓은 다음 그 하이바 위에 배를 대고 팔다리를 든 채로 떴다떴다 비행기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이건 별로 힘들지 않고 재미가 있어 자주 시켜주길 기다렸던 얼차려였다.
아마 교관들도 후보생들의 고달픔을 헤아려 쉬게 해주려고 이 얼차려를 시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또 기억나는 얼차려로 오른팔 혹은 왼팔로 어깨동무를 한채 남은 한팔로 엎드려 뻗쳐를 하면 양옆에 서있던 교관이나 조교들이 맨 끝의 후보생을 밀어서 도미노처럼 넘어지게 했었고, 하이바를 놓고 양 옆으로 깡충깡충 쪼그려 뛰는 것을 시키기도 했었다.
많은 기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8번 온몸 비틀기를 한번에 100회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설마 몇 십 개 하면 그만 시키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기 시작했지만 50회가 넘어가면서 정신이 혼미해 질 만큼 힘이 들었다.
배와 온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내 머리가 무거운 건지 하이바가 무거운 건지 고개를 버티고 있기도 힘겨웠다.
그래도 100회를 버틸 수 있었던 건 당시의 정신력(군대 용어로 악)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유격훈련 마지막 날 그 교관이 100번을 시키고 중간에 그만 시키려고 했는데 잊어버려서 미안하다고 했을 땐 정말 허탈하고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얼차려를 받고 지쳐있던 우리를 본 중대장이 쉬는 시간에 모두 하이바를 벗어서 베고 땅바닥에 누우라고 하였다.
황량하게 헐벗은 누런 산과, 산들바람에 휘날리는 깃발들을 바라보며 울컥하고 눈물이 흘렀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갑자기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왠지 모를 자긍심과 애국심이 울컥하고 솓아오르고는 이내 마음이 편안해졌었다.
그 잠깐 동안의 휴식과 평온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빠르게 또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게 그런 휴식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바쁜 일상에 지치면 잠시 눈을 감고 예전의 평온했던 그때의 휴식을 생각해 본다. 짧았지만 평온했던 휴식을
5. 유격이야기 3, (화생방 훈련)
유격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는 화생방 훈련이다.
유격훈련은 알게 되었어도 화생방은 또 무엇인지, cs탄은 또 뭐지? 하는 궁금함과 불안함이 교차하였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또다시 선착순을 반복하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거릴 때 쯤 방독면을 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맨 왼쪽 줄부터 차례로 가스실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건 또 뭔가 싶을 때 조그만 건물의 문이 열리고 하얀 연기 같은 게 나왔다. (화생방이 끝나고 교관이 말하길 cs탄을 5개나 터트렸다고 하였다)
전날 저녁 여군 특전부사관 선배들이 위문 와서 했던 말 중에 “화생방 훈련 때 난 재수없어서 제일 먼저 들어가고 제일 늦게 나왔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이미 난 맨 첫 번째 줄 세 번째로 가스실에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좀 따가운 느낌과 함께 최루가스 같은 게 방독면을 통해 느껴졌다. 이거 별거 아닌데 뭘 그렇게 겁을 주었는가 하며 자신만만하게 서 있었다.
전 인원이 들어오자 문이 닫혔고 방독면을 벗으라는 명령에 이까짓 거라는 생각으로 방독면을 벗었다.
그리고 잠시 선체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내 손을 탁탁 치며 뭔가를 자꾸 쥐어주는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리기까지 잠시 동안이 기억이 없었다(방독면을 벗는 순간 그대로 떨어트렸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 열어 달라고 울부짖으며 문을 치는 후보생들과 사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후보생들의 절규가 딱 독가스실에 끌려온 유태인들 같단 생각도 잠시, 난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난 소리 내기도 힘든데 다른 후보생들은 어떻게 그렇게 울부짖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괴로워하고 있는 순간에도 앉아, 일어서라는 명령은 계속 됐고, 군가를 제창시켰다.
아무도 부르지 못하고 컥컥 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특전부사관 후보생 중 한 명이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내가 따라 부르자 다들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군가를 내리 세곡을 부르고 나니 뒤로 돌으라고 했다.
지옥 같았던 시간이 끝나고 뒤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맨 끝에 들어왔던 줄부터 나가기 시작했다.
중대장은 절대 만지지 말고 양손을 벌리고 뛰어나가 라고 했지만 차마 코끝에 길게 달고 있는 콧물을 그대로 달고 다니기가 창피하였던 난 슬쩍 콧물을 털어내 버렸다. 그리고 아주 한참 동안 코끝이 고약하게 따갑고 타들어가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일주일간의 유격훈련이 끝났고 42키로 완전군장 전술행군을 끝마치고 여군학교에 돌아왔을 땐, 이보다 더 힘든 그 무엇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성취감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가슴 벅차게 무엇인가를 이뤘다는 기쁨은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
그 낡은 막사 화장실 벽에 엉망으로 도배된 낙서 중에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있는 말이 있었다. -가장 어두울 때가 곧 해가 떠오를 때이다- 젊음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모두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언젠가 찬란한 해가 떠오를 것이라고 말이다-
무상(無常)
힘겹다 한탄하던 찰나의 삶도
윤회 속에 돌고 돌아 고운 추억이 된다.
2015년 한줄시 공모전 동상 수상 작품
6. 돌격 앞으로
5개월간의 여군학교 기초 군사 훈련 중 거의 끝 부분에 배정되어 있던 분대전투는 유격훈련과 마찬가지로 기초 군사 훈련 과정에서 정말 중요하고 힘든 훈련 이었다.
일주일간의 분대전투 훈련을 받기 위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솜씨로 군장을 꾸리고, 학군교의 한 훈련장 으로 갔다.
훈련 전 미리 공격명령문과 방어명령문을 외우라고 교관님께서 과제를 주셨었는데, 이게 방어명령문은 그럭저럭 짤막하니 외우겠는데 공격명령문은 도무지 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책장을 넘겨보다 그 분량에 지례 질려, "나하나 안 외웠다고 훈련이 안 되는건 아니겠지 뭐, 그깟 벌점 좀 받고 끝내자!"라는 생각으로 과감히 교관님의 명령을 어기고 훈련에 임하였다. (분대전투는 여군학교 수료기간에 거의 임박해서 맞이했기에, 더욱 군기가 빠져서 그랬던 것도 싶다)
키카 큰 후보생부터 1번이었으므로 앞 번호대 후보생들 10명(10명으로 기억되나 인원은 잘 기억이 안 난다)을 끊어서 한 팀이 되었고, 책에 나온 대로 분대장, 부분대장, K-201 유탄발사기, K-3 기관총, 소총수로 나뉘어서 분대장의 공격명령문 낭독에 따라 산을 약진(뛰어가다 땅에 엎드렸다 다시 뛰어가는 것)하며 정상까지 돌진하는 체제였는데...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설마 나 말고 또 외우지 않은 후보생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아무 걱정 없이 오늘 하루 대충 넘기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번도, 2번도, 3번도... 결국 7번인 내 차례는 시작하자 마자 왔고 맨 끝번까지 돌았지만, 아무도 외워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교관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훈련장엔 냉랭함이 맴돌았다, 오후 일과 시작 전 까지 마지막 기회를 줄 터이니 다 외우라고 하셨지만, 나부터 시작해 그 누구도 갑자기 찾아온 이 꿀맛 같은 휴식시간을 공격명령문이나 외우며 허비하고픈 후보생은 없었던 듯 싶었다. 다들 외우는척 꾸벅꾸벅 졸다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고 식사를 마치고 오후 일과가 시작되었다.
13시 정각이 되자마자 찾아온 교관이 한 명씩 낭독해 보라고 하셨지만. 다들 벙어리 마냥 눈만 깜빡일 뿐 정적만이 흘렀다. 한동한의 침묵이 흐른 뒤 교관은 결국 모두에게 과락을 통보하였고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중대장의 부탁으로 다시 한번의 기회를 얻었으나 그 당시 저승사자 보다 더 무서웠던 중대장의 표정에 아... 우린 이제 죽었구나 싶어 눈 앞이 캄캄하였었다.
암기는 일석점호 이후 명령문을 다 외울때까지 잘 수 없으며, 날이 밝을때까지 못 외운 후보생은 과락을 시키기로 한뒤 분대전투 교관과 중대장이 함께하며 공격명령을 내리는데로 우리는 죽어라고 약진한며 산을 뛰어 올라갔고, 쉴세 없이 산을 세 번 뛰어 올라갔다 내려오니 오후 일과가 종료되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번호상 공격때는 k-201 유탄발사기만 들고 산을 탔다는 것이다.
만약 k-3(기관총)였으면 총에 딸려 다니지 않았을까 싶었다.(나는 운이 좋게도 방어 때 k-3를 맡았다)
석식을 먹고 청소를 하고, 점호를 취하고(훈련장에 나와서는 기본적인 점호만 하고 얼차려는 생략되었었다)나니, 드디어 피하고 싶었던 공격명령문을 외워야 할 시간이 되었다.교관은 다 외우면 순번없이 들어와 검사를 받으라고 하였고, 우린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공격명령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후보생은 들어갔다 퇴짜맞고 다시 외우길 몇시간이 지나고, 새벽 두시경이 다 되자 도저히 졸려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죽자살자 집중해서 교관실에 들어갔다. “썩 만족하진 못하겠지만 외우긴 외웠으니 가서 자도 좋다”는 합격을 받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 다음날은 모두들 자신있게 공격명령문을 외치며 산속을 달렸던 기억이 난다.(거기엔 나도 포함된다)
첫날의 여파 때문인지 다음날 새벽 불침번 근무때는 너무나 졸려워 같이 근무서던 후보생에게 딱 10분만 화장실에서 자고 올테니 무슨일이 있으면 빨리 알려달라고 하고는 화장실 변기위에서 잠을 청했는데, 그만 깊이 잠이 들었었는지 물벼락을 맞고서야 잠에서 깨었다.
나와서 시간을 보니 30분가량이 지났고, 중대장실에서 움직이는 소리는 나는데 나는 나오지 않고, 조그많게 이름을 불러도 대답 대신 코만 열심히 골기에 어쩔 수 없이 물세례를 부었다는 내 동기.
분대전투에서의 재밌는 추억은 여기까지 이다. 나머진 너무나 열심히 교과서대로 했기에.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나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니 이젠 조금은 가물가물한 기억 탓에 야간 공격 훈련 때인지 각개전투 야간 훈련 때인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두운 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 봤던 도시의 야경과 산바람이 너무나 상쾌하고 아름다워 행복했었던 기억이 난다.
특별할 것 없었던 도시의 야경이 행복 이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자유롭고 하고 싶은 것은 모든지 할 수 있는 지금 나는 왜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매사가 불만이고 불평뿐인지 다시 한 번 반성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잊지 말자고...
k-201 유탄발사기 : k-2 소총에 장착하여 유탄을 발사하는 장치. 수류탄의 비거리, 정확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총류탄의 업그레이드 버전
7. 니들이 화장실에서 숨어 먹는 과자 맛을 알아?
프로그램을 마치고 돌아온 사무실 동료 한 명이 대상자 간식으로 가져갔던 과자가 남았다며, 빅파이를 하나씩 돌렸다.
참 오랜만에 본다. 작은 과자봉지를 들고 내려다보고 있자니 옛 생각이 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여군들이 기본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서는 5개월간 여군학교라는 곳에 입소해야 했었는데 그 훈련소에 입소했을 당시의 추억이다.
그 시절엔 여군 중대장이 후보생들에게 한 번씩 돈을 걷어 PX에서 과자를 사와 정해진 시간 동안 과자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는데, 일정 시간이 지나면 먹고 남은 과자는 모두 버리도록 하였다.
처음엔 겁이나 무조건 버리던 과자를 어느 날부터 너도나도 하나 둘 전투복 주머니에 몰래 숨겨오더니 결국은 일석 점호때 숨겨놓은 과자를 들키는 일이 빈번해져 과자를 숨겨 들어오기가 점점 어려워졌었다.
물론 그 덕에 단체 얼차려도 호되게 받았다.
그래도 꾸준히 과자를 숨겨오는 이들이 있었는데, 필자도 그중의 하나였었다.
제일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새벽 불침번 전이나 동초 근무 교대 전에 다른 동기들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근무 준비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서 몰래 숨겨놓은 과자를 먹고 나오는 방법이었다.
불침번은 과자만 먹을 수 있었으나, 동초는 1층에 위치한 커피 자판기에서 미적지근한 냉커피를 뽑아 같이 먹을 수 있었기에 난 동초근무를 선호했다.
아마 동기들 중에 몰래 자판기까지 이용했던 후보생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어나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근무에 투입되는 동기들에겐 먼저 내려가서 화장실 다녀온다고 하고, 불침번 근무자들에게는 근무교대하러 내려간다고 말한 뒤 재빠르게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간다.
2층 중대장실엔 새벽 내내 불이 켜져 있어 항상 조마조마했었다.
1층에 내려가서는 기간병을 위한 당직사관이나 근무자들을 마주치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며 자판기 앞으로 간다.
그리고 주변을 다시 둘러본 뒤 냉커피를 뽑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느꼈던 공포감과 초조함은 아직도 내게 그 이상의 스릴감을 맛보게 해주지 못했다.
기계에 동전 들어가는 소리, 커피를 내리던 자판기 소리는 왜 그리도 크고 커피는 더디 나오는지, 심장을 졸이며 기다리다가 커피가 나오면 잽싸게 들고 1층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화장실 맨 끝 칸에서 커피와 함께 먹었던 국화샌드와 빅파이의 맛이 얼마나 좋았던지 모른다.
다 먹고 난 뒤 화장실에 쓰레기를 버리면 들키기 때문에 잘 접어서 부피를 최대한 줄인 뒤 가지고 있다가 종교 행사장에 가서 몰래 버리고 오면 이번에도 들키지 않고 잘 먹었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참 좋았었다.
그 기분 좋음은 아마 과자를 맛있게 먹어서이기도 했겠지만,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들키지 않았고, 너희는 상상도 못 하는 간 큰 행동을 난 할 수 있다는 못난 자만심 때문이었으리라.
자대 배치를 받으면서부터 사 먹어본 적 없었던 빅파이를 들고 한동안 추억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과자를 먹지 않고 책상 서랍에 잘 넣어 두었다. 먹어버리면 추억이 날아가 버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책상을 열어 과자를 볼 때마다 생각하리라 그때의 그 배고픔과 감사함을. 그리고 결실을 맺기 위한 인내의 시간들을
8. 추억의 사발면
얼마 전 시골집에 가니 컵라면 두 박스가 눈에 띄었다. 먹 거리가 흔해진 요즘에도 라면을 보면 쫄깃한 라면 발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곤 하게 된다.
시장기가 돌던 차라 라면을 하나 먹을 요량으로 꺼내려다 보니, 한 박스는 새로 나온 라면인데 한 박스는 아주 오래전에 나온 사발면이었다. 라면도 신상품이 계속 나오는 통에 어쩌다 슈퍼에라도 들리면, 뭘 선택할까 망설이게 된다.
사발면, 오랜 옛 벗을 만난 듯 반갑다. 문득 사발면에 얽힌 옛 추억이 떠올랐다.
군 생활을 겪은 추억 중 눈물의 사발면에 얽힌 얘기를 하려고 한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아 본대에 들어간 지 2일째 되던 날이다.
군대에 가면 외울 것들이 엄청나게 많다. 여군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고참 으로부터 암기 사항을 잔뜩 받았는데 고참 들의 서열부터 전화번호, 근무지 관련 사항 등, 암튼 뭐가 많았다.
동기들과 생활관에 모여 앉아 암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시끄럽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고 긴장이 살짝 풀리니 문득,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자대배치의 긴장으로 아침 식사를 제대로 못 한 탓이었다. 부대 안에 매점(PX)이 있긴 하지만 신입은 출입의 제한을 엄격히 받았다.
2주가 지나기 전 까지는 일과 후 허락을 받고 고참의 인솔 하에만 갈 수가 있었으니 아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뭐라도 있을까, 생활관 안을 둘러보다 보니 한쪽에 사발면이 쌓여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너무 반가워서 동기들에게 제안했다.
“야 너희 배 안 고파? 우리 저 사발면 하나 부숴서 나눠 먹자,” 동기들을 보니 겁을 잔뜩 먹은 눈으로 쳐다볼 뿐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나도 슬그머니 주저앉아 다시 암기에 열중하려 했으나, 사발면이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야 저거 먹자, 후딱 먹어치우면 몇 개 있었는지 어떻게 알겠어?” 선동을 한 뒤 라면 두 개를 얼른 가져다 부숴서 동기들과 나눠 먹었다. 그것도 무릎 밑에 숨겨놓고, 너무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의 라면 맛은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 갑자기 내무반 문이 열리더니 고참 한 명이 들어왔다. 우린 당황하고 놀라서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다행히 고참은 물건 하나를 꺼내고는 힐끗 우리를 쳐다보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나가 버렸다.
눈치 못 챘구나, 우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먹으라고 둔 라면인데, 설마 안다 한들 별일이야 있을까,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찜찜한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구나 하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전 근무가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온 고참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우리를 불러 모았다.
고참들에게 혼날 때는 표정관리도 잘해야 한다. 최대한 잘못했습니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적당히 숙인 뒤 시선은 바닥도 정면도 아닌 곳에 두고 부동자세로 있어야 한다. 이게 별거 아니라 생각이 될지도 모르지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 자세를 유지 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자대배치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호된 깨스(고참들의 기합)에 우리 신입들은 얼이 빠져 버렸다.
그런 기합은 일과 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고참들은 돌아가며 우리를 몰아세웠다.
아마도 처음부터 신입인 우리들의 기를 꺽고 군기를 잡으려는 의도라고 생각이 된다. 덕분에 고참 무서운 것을 확실하게 깨닫긴 했다.
배가 고파서 먹은 사발면 두 개,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밤중에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울었다.
불과 몇백 원에 불과한 라면 때문에 호된 모멸을 당한 것이 너무도 서러워서 계속 눈물이 흘렀다.
지금은 사발면을 먹을 일도 거의 없다. 시골집에서 사발면을 보니 문득 부숴서 무릎 밑에 숨겨서 먹던 그때의 그 맛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사발면을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눈물 젖은 사발면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격동의 봄
춘설이 휘날려 검은 물결 울렁이는 바다를 보았다
파릇이 돋은 새싹위로 덮힌 하이얀 눈
인생무상이라 우지마라
훈풍에 햇살이 비춰오면
더욱 더 단단한 생명력 꽃피우리니...
9. 낭만의 눈? 무서운 눈!
나는 삼척에서 1년 가량 복무를 한 적이 있다.
짧은 1년 동안 복무하면서 겪은 사건 중, 평생 잊을 수 없을만한 큰 사건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총기피탈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110cm의 폭설 이었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내리는 눈을 보며, 이러다가 곧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발이 거세어지더니, 제설작업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어딜 가나 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제설작업에 한숨을 쉬며 나갔는데, 분명 치우고 또 치웠건만 뒤 돌아서면 그대로인 눈 때문에 그날 퇴근할 때까지 몇 시간을 제설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몸살 기운이 있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니 열이 나고 어지러워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 금요일이라 주임원사에게 몸이 아파서 출근을 할 수가 없음을 얘기하고 하루 휴가를 내어 온종일 끙끙 앓으며 잠을 잤다.
하루종일 잠을 자서인지 그 다음 날은 개운치는 않으나 몸을 가누고 일어설 수 있을 만큼
체력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숙소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는데, 전날도 먹은 것이 없어서
매우 허기가 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주차장에 주차된 차도 눈에 파묻혀 볼록한
형태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망연자실, 어쩌면 좋지? 난감한 상황이 곤혹스러웠다. 마침 이때 아래층에 사는 친한 여군이 놀러 왔다.
본인도 배가 고파서 숙소에 앉아 있다가 시내에 나가 얼큰한 순댓국을 사 먹자고 하려고 왔다고 한다.
시내에 나가려면, 사단 후문을 통과해 정문으로 나가야 하는데 다들 제설작업을 하고 있을 텐데 우리가 사복을 입고 나가도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우선은 먹어야 산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숙소문을 나서니 사람이 겨우 걸어갈 수 있을 만큼의 좁은 통로가 나 있다. 양옆의 눈 벽을 보니 허벅지를 다 가릴 만큼 눈이 쌓여있었다.
사단 후문을 들어서니 다들 제설작업을 하느냐고 난리가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사단 정문을 나섰다. 버스가 다닐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멍해졌다.
빙판 같은 도로 위엔 차가 단 한 대도 없었고, 버스 정류장은 눈에 뒤덮여 있었다.
돌아가야 하나를 망설이는데, 동행한 여군이 패기롭게 시내까지 걸어가자고 하였다.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가서 밥을 먹으면 분명 시내에는 차가 있어 돌아올 수 있을 거란 말에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는데 봉고차 한 대가 우리를 부른다. 밖에 나와 처음 보는 차였다.
어딜 가냐고 물은 뒤 친절하게도 시내까지 태워다 주었다. 차장 밖의 풍경은 더욱 놀라웠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은 슬래브 지붕의 집들이 이어졌다.
시내에 도착해 둘러보니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식당의 문은 열려 있어서 허겁지겁 뜨거운 국밥을 들이마시듯 먹고 근처 슈퍼에서 비상식량도 구매하였다.
시간이 지나서인지 다행히도 시내에는 한 대 두 대 차들이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숙소 근처에 내려 무사히 나들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부대원들은 아직도 눈을 치우고 있을 텐데, 라는 미안한 마음과 휴가를 냈으니 쉬어도 된다는 마음이 싸우고 있을 무렵 대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 00시까지 부대 앞으로 오라고 하신다.
시간에 맞춰 출근하니 소대장과 후임 부사관들도 와 있었다. 왜 모이라고 했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무렵 대장님이 왔다.
기혼간부들은 쉬어야 하고 미혼 간부들은 눈도 많이 내리는데 치운다고 고생했으니, 촛대바위까지 걸어갔다가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후진 해수욕장에서 바닷길을 따라 촛대바위까지 걸어가면서, 우리들은 강아지 마냥 신나서 뛰어다녔다.
촛대바위에서 맥주를 걸고 눈 멀리 던지기 게임도 하고 눈 속에 뛰어들어가 허우적거리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회 한 점에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110cm의 기록적인 폭설을 기념하여
저녁이 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비록 눈을 치우다가 몸살이 나서 제설작업을 함께하진 못했지만, 눈으로 인해 힘들었고 또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들이 생겼다.
제설작업을 하도 많이 해서 그런지 지금도 눈이 내리면 회사 사람들이 눈 치우는 기계라는 별명으로 부를 만큼 삽질을 제법 한다. 눈을 팔심 만으로 치우면 힘들고 금방 지치지만, 허리 반동을 이용해 눈을 떠서 던지면 한 시간은 족히 쉬지 않고 할 수 있다.
또다시 그런 폭설을 경험해야 한다면 매우 끔찍할 테지만, 폭설로 인한 추억은 정말 재미있었다. 그때 함께했던 그 친구들은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10, 제발 살려줘
삼척에서 복무할 당시 폭설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던 총기 피탈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사단은 간부가 적어 당직근무가 뒤 돌아서면 돌아오곤 했는데, 그 날도 여느 날처럼 평범했던 당직근무 날이었었다.
매번 그랬듯 저녁 식사를 컵라면으로 때우고 걸어서 다 돌아봐도 10분도 걸리지 않을 영내 순찰을 마치고 당직 근무자와 농담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일석점호를 마치고 대장님께 드릴 상황보고도 마친 뒤, 무료하게 당직대를 지키고 있을 무렵 사단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민간인이 칼로 근무자를 위협하고 총을 빼앗았다는 내용이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바로 대장님께 보고를 하니 잠에 취한 듯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는다. 그러던 중 또 전화가 온다. 대장님께 보고를 드렸는지 물어보고 재차 보고를 드리라고 한다. 아마도 헌병대에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재촉 전화가 온 듯하였다.
다시 대장님에게 보고를 드리니 잠꼬대를 하듯 알았다고만 한다.
사단에 전입온지 몇 달 돼지도 않은 데다, 본부에서만 근무를 했던지라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애가 탔다.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이는 동안 시간이 한 시간 가량 흘렀다.
답답한 마음에 재차 대창님께 보고하니 그제야 잠이 깨셨는지 놀라서 당직사관이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빨리 전 간부 소집을 하라는 말에 그제야 급하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전화를 받자마자 전 간부가 부대로 왔고, 선배들의 꾸지람도 이어졌다. 주임원사를 보자마자 당황하고 놀란 마음에 눈물이 났다. 당직사관으로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마음에 더욱 서러움이 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화에 아침이 밝을 때까지 정신이 없었다.
아침이 밝자 우선 눈을 붙이고 13시까지 다시 부대로 오라는 말에 숙소로 가서 샤워를 하고 잠시 취침을 했다.
부대에 가니 타 부대에서 온 수사관들이 영내에 텐트를 치고 수사본부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소대장과 부사관들은 총과 실탄을 받고 병사들과 같이 임시 검문소 구축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하필이면 휴가철이라, 임시검문소 구축 업무로 부대 밖을 오갈 때마다 보이는 관광객들을 보면서 다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즐거운데 우리는 뭔가 싶어 마음이 싱숭생숭하였다.
나는 3일간 가량 투입되었던 임시검문소 업무에서 당직근무로 바뀌었는데, 당직근무 후 4시간가량의 휴식시간만 보장된 근무를 퐁당퐁당 근무로 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름가량이 지나니 간부들도 병사들도 모두 지쳐서 생기를 잃어갔다.
생활관은 어두컴컴하게 커튼을 쳐놓고 근무교대를 들어온 아이들은 잠을 자기 바빴다. 간부들도 다들 추욱 쳐져서 온 부대원들이 좀비 같은 상태로 변했다.
모두들 범인이 빨리 잡혀야 우리가 산다며, 범인이 잡히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답답하고 피곤한 마음에, 막사 휴게실에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휴게실에 앉아 있으면 바다와 촛대바위가 보여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환호성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당직대로 뛰어가니 범인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너무 기쁜 마음에 뛰어나가 아이들에게 범인이 잡혔다고 소리를 질렀다.
생활관에서 쉬던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뛰어나와 재차 물었다.
범인이 잡혔다고 신나는 마음에 또 소리를 지르니 위병근무를 하던 아이들까지 소리를 지르고, 서로 손을 잡고 겅충겅충 뛰며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참 짧은 듯 길었던 보름이다.
나는 총기 피탈 사건시 당직근무자 였다는 이유로 수고가 많았다며, 동해경찰청장 상을 받았다.
상을 받은 건 기분 좋았지만, 그 날의 기억이 살아나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앞으로 내가 살며 이보다 큰 사건이 다시 생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힘들고 지루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