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환선생님의 관덕정이라는 우물에 돌을 하나 던지면서 우리 A조는 많은 고민없이 각자의 주제를 생각하고 살떨리는 6분의 시연 준비를 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누군가 리더를 잘 만나면 일이 술술 잘 풀린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줄서기를 잘 해야 되나 보다.
8시 아이들을 각자의 학교로 보내고 5.16도로를 넘어 오는 길
푸릇푸릇한 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상쾌한 공기가 느껴지지 않고,
라디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머리에 밤새도록 들여놓은 시연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약속장소로 가기전 한번 더 오늘 시연 주제인 산천단을 둘러 보고 마음의 위안을 삼아보고 9:30분 관덕정에서 선생님들을 만난다.
김시환선생님께서 아래 시연에 대한 총괄 설명을 해 주시고 발표자 설명을 해 주신다.
// 주제 제주의
장소 관덕정과 제주관아
소주제 1. 제주 600년 역사의 증인, 관덕정 / 최병철
2.제주인의 삶을 살핀 이약동 목사와 산천단 / 허애선
3. 신앙의 향기, 정난주 마리아 / 이보경
4. 제주 최고의 기록물, 이형상목사와 탐라순력도 / 김시환
5. 유배자로서의 삶, 광해군 / 심혜숙 //
교수님께서 근사한 세미나의 주제와 같아서 책을 펴도 좋을 듯 하다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으 시고 편안하게 앉아 들어 보겠다고 하신다.
1. 제주 600년 역사의 증인, 관덕정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의 단층 목조건물에, 앞면5칸, 옆면4칸 규모로,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26개의 둥근 기둥이 커다란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듯 시원스럽게 뻗은 지붕 선이 웅장한 멋을 드러낸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제주의 지역적 특성상 처마 길이가 다른 지역의 것보다 더 길게 만들어 졌다.
현존하는 제주의 오래된 건축물이자 제주의 가장 중요한 문화재(보물 제322호) 중 하나로 꼽히는 관덕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관덕정은 조선 시대의 관아 건물의 하나로 이름의 유래는 예기 사예편에 나오는 "활쏘기란 그의 높은 덕을 살펴보는것(사자소이관성덕야 射者所以觀盛德也)"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으며 관덕당(觀德堂)이라고도 불렀으며, 관덕정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미 고려 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처음으로 지방의 관아마다 활쏘기가 포함된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세워지면서 관덕정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시대의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방 관아에 설치된 관덕정의 경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아 건물들과 함께 헐려 나갔으며 건물 자체가 온존한 것은 제주도에 있는 관적정이 유밀하며, 관덕정이라는 건물로서도 제주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고 설명해 주셨다.
관덕정이라는 이름이 활터에 붙는 이름으로 창경궁에도 왕이 활을 쏘던 관적정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남아 있고, 대구관덕정은 천주교 순교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 (교수님의 추가적인 설명으로 관덕정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꼭 지방명칭을 붙여 줄 것을 알려 주셨다. 제주관덕정, 대구관덕정 등)
제주관덕정은 1448년(세종 30)에 제주목사 신숙청이 처음 지었으며, 처음에는 3칸 건물이었지만, 이후 열 번 중수와 개축과정을 거쳐 정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으로 처마가 길고 건물 높이가 낮은 제주도 건추그이 특칭을 갖추었다.
당시 지어질 때 현판의 글씨는 제주판관 고득종이 안평대군에게 부탁해 안평대군이 써 주었으나 불타 없어져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의 글씨는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이산해의 글씨임을 알려 주셨다. 한편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는데, 이는 조선에서 제주도는 호남(전라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제주의 모습을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통해 관덕정에서 이뤄진 각종행사 활쏘기대회, 목사가 임금에게 진상하는 말들을 점검하는 모습, 선비들의 과거를 보는 모습 등이 담겨'이 있다고 찬찬히 설명해 주셨다. 또한 관덕정 앞마당은 민(民), 관(官), 무(巫)가 하나 돼 풍년과 무사안녕을 비는 '입춘굿'이 펼쳐지는 장소이고, 1641년 제주에 유배됐다 유명을 달리한 광해군의 관이 관덕정으로 옮겨졌고, 빈소가 마련되어져 있음을 설명 해 주셨다.
1901년 신축항장의 현장, 이재수가 천주교인 300여명을 처단한 장소, 해방 후 경찰이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나오는 군중을 향해 총를 쏘아 4.3사건의 시발점이 된 곳,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십자형 틀에 묶인 채 내걸린 제주 역사를 담은 관덕정 앞 광장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다.
또한 제주4.3특별법 개정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있었고, 학생,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집회 장소가 되고 각종 거리 행진을 하는 마지막 종착지가 되어 제주 역사의 중심지, 제주의 심장같은 공간, 하지만 번영의 역사보다 오히려 세찬 바닷바람에 상처입은 섬사람들의 역사를 보아온 관덕정임을 설명해 주셨다.
최병철 선생님은 애정가득한 시선으로 관덕정이 제주에서 갖는 역사적, 공간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2.제주인의 삶을 살핀 이약동 목사와 산천단
노천 이약동(1416-93)
제주목사의 부임기간은 1470년 10월~1473년 8월이다. 제주목사 재임 중 관리이속들의 부정을 단속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주는 등 제주도민의 삶을 배려했던 목사의 선정과 청렴함에 대해서 "괘편암과 투갑연" 일화를 들어 설명을 하였다.
1470년(성종1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직후 매년 2월에 열리는 한라산 백록담의 산신제로 인해 제주도민들이 동사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제단을 산 아래로 옮기게 하여 지금의 산천단 제사터가 생기가 되었다. 산천단에는 한라산신에게 제를 올리던 오래된 제단과 비석이 남아 있으며 산천단 제사터의 표지석에는 '이곳 산천단(山川檀)은 옛부터 산천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1470년(성종1년) 목사 이약동(李約東)이 세운 한라산신묘를 비롯하여 농사의 재해예방을 기원하는 포신묘가 있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올리던 터이기도 했다. 또 이 일대 소림천(小林泉) 소림화원 소림사와 함계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어 이름높은 명소"라고 쓰여 있다.
한라산신제가 탐라국 시대부터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서 지내던 행사를 목사 이약동이 부임 후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고충을 헤아려 소산봉 아래 제단을 만들게 되었음을 설명하였다. 또한 산천단이 목사 이약동의 치적과 더불어 한라산을 신성시한 제주도 사람들의 전통 신앙의식이 있었던 곳이며 일제시대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1908년 금지되면 폐지 되었다가 2009년부터 제주시 아라동 주최로 한라산신제를 올리고 있고 2011년도에 한라산신고선비3기와 제단2식이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음을 설명하였다.
산천단 안에는 이약동이 건립한 한라산신고선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1997년 홍정표가 발굴하여 세운 것으로 "목사 이약동선생 한라산신단기적비"(현대적으로 좀 과한)도 세워져 있다고 설명하였다.
산천단 제사터 주위에는 수령 600년이 넘는 곰솔 8그루(6그루는 출입불가지역, 2그루는 주차장쪽)가 있다. "무속행위 금지 안내문" 으로 봐서 산신제외에 다른 주술적인 행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곰솔은 높이가 19-22M로 우리나라 곰솔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거목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8그루가 존재하며 수령은 500-600년으로 추정되어 보존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에 1964년 1월 31일에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문화재돌봄사업으로 매월 곰솔을 관리하고 있다.
관광객이 찾는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나 제주도하면 한라산을 먼저 기억하듯, 그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산천단에 한번 방문해서 정기를 받아 보는 건 어떨까하는 마음을 전하면서 설명을 마쳤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와중 교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 [신언서판 : 身言書判] 으로 발표자의 자세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다. [신(身)] 용모가 아닌 자세, 태도, 손의 위치, 시선의 처리, [ 언(言) ] 말을 어떻게 하면 정갈하고 짜임새 있게 전달하느냐? 하고자 하는 얘기를 얼마나 요약하여 전하는냐? [ 서(書) ] 글의 내용이 그 사람의 온전한 철학이 담겨 있는 것. [ 판(判) ] 판단, 결정력,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처리하느냐? 노인 한명이 사망했을 때 박물관 하나가 없어져 버린다고 하셨다.
주마등처럼 지나간 내 시연상황을 돌아보고 부끄러워 진다.
3. 신앙의 향기, 정난주 마리아
유배의 땅이라 불리는 제주도 유배자들중 정난주 마리아 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다.
정난주 마리아는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조선조 최고의 천재 선비학자와 혼인하여 부족함 없이 살다 '천주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제주도로 귀양와 37년동안 노비로 살았다고 설명해 주셨다.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용의 형 정약현의 장녀이며 한국 천주교 성조로 추앙받는 이벽의 질녀라고 설명하였다. 그려는 조선시대 최고의 사대부 가문 황사영과 혼인하였는데 황사영은 17세에 진사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고 조선조 500년 역사로 진사시에 장원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김시습, 성삼문, 맹사성, 황사영이라고 하였다.
명문대가 출신과 큰 벼슬로 장래가 보장된 황사영은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다가 '알렉시오' 세례명으로 입교하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조선 천주교회의 구권을 요청하는 '황사영 백서'를 썼다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대정현에 관비로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
정난주의 두살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유배되었는데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는 평생 노비로 살아야 하는 아들이 너무나 안타까워 뱃길에 사공들과 잘 타협하여 추자도 바닷가 갯바위에 아기를 내려놓고 가게 되고 어린아이의 슬픈 울음소리가 주민에 들려 추자도의 오씨 집안에서 자라나 황사영의 대를 이어갈 수 있게 됨을 차분하고 안타까운 어조로 설명해 주셨다. 황경한의 묘역앞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작은샘이 있는데 추자도 사람들은 이물을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애끓은 마음에 탄복하여 내리는 물, '황경한의 눈물'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이 내용을 내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4월 추자도 방문 할 때 자세히 더 살펴보았을 것이라는 후회를 한다.)
정난주 마리아는 척박한 땅 제주도 모슬포땅에서 37년동안 신앙을 지키며 살다가 66세가 되는 1838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로지 신앙 때문에 제주에 유배된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의 첫 카톨릭 신자였다. 당시에는 노비가 죽으면 묘지를 만들어 주지 않았는데 정난주 마리아는 "한양 할머니"라고 불리며 동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돌아가시자 온 동네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양지 바른 곳에 묘지를 만들고 후손들에게 편지를 남겨 잘 관리해 주도록 하였다고 한다.
지금 정난주 묘역에서 추사 적거지를 거쳐 모슬포 성당에 이르는 총 7KM의 순례길을 조성하여 빛의 길 '정난주길'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하였다. 37년동안 노비로 살면서 신앙의 향기를 잃지 않았던 정난주 마리아님이 계셔서 제주도의 천주교 신자가 75,000명 가량이고 제주도민 전체 인구의 12% 상당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정난주 마리아는 여자로써 일직이 남편을 여의고 어린 아들과도 생이별하고 너무나 가슴 아픈삶을 사셨지만 신앙이 있어 꿋꿋하게 견디셨을 것 같다고 담담하고 애잔한 어조로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고난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자신만이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신앙이 있으신분은 순례길도 걸어보시길 추천 한다고 하셨다.
교수님의 추가적인 설명으로 그당시 모여서 숨어서 예배를 했으며 "노비가 없는 세상, 남자와가 여자가 평등한 세상 " 을 추구하는 이념으로 젊은 선비들에게 먹혀들었던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받아 졌다고 말씀해 주셨다. 신부도 없었고 신부수업을 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던 사람으로 김대건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서울 할머니" 이야기는 그 당시 천주교를 설파한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고 진정한 교화 활동을 해서 존경받았다고 전해 주셨다.
김시환선생님 덧붙이는 말로 아들이 추자도 오씨집안에서 키워 졌는데 세월이 흘러서 황씨 집안이라는 사실이 밝혀 져서 추자도에서는 오씨 집안과 황씨 집안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또한 올레길 코스로 조성되어 있음도 알려 주셨다.
4. 제주 최고의 기록물, 이형상목사와 탐라순력도
제주도에는 9개의 보물 중 하나인 탐라순력도와 이를 제작한 이형상 목사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이형상목사는 태종 이방원의 차남인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인천에서 태어나 28세에 급제하여 중앙관리로 출발하였으나 34세때 금산군수를 시작으로 성주목사, 경주부윤 등 9개 지역의 지방관 역임 등 대부분 지방관리를 역임하던 중 50세 되던 해인 1702년 3월 역대 제주목사(286명) 중 156번째 제주목사로 부임하게된다.
이형상목사는 왕가의 일원으로써 그리고 유교주의적 실학자로의 자부심이 컸으며, 부임 후 제주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 동성혼과 남녀혼욕, 부녀자 노출 및 일부다처제 금지 등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으며, 제주를 떠날 때에는 거문고 하나가 전부일 만큼 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했다 하였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제주민들은 고마운 관리로만 기억하지 않았다. 제주민들의 마음을 헤아리지않고 무속신앙을 단순한 미개함의 상징으로 여겨 그들의 신당(129개소) 및 사찰(5개소)을 불태우고 무속인(285명)을 귀농시켰다. 이에 대한 내용은 탐라순력도 중 건포배은에 기록할 정도로 자신의 치적으로 여겼다.
조선시대 지방관들의 임무 중 하나가 관할 고을을 순시하여 군사점검 및 조련, 향읍의 풍속과 민생의 고락을 살피고 도정을 위한 행사로 봄,가을 년2회 순력을 실시하였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목사가 부임 후 1702.10.29부터 11.19까지 제주도 동쪽에서 시작하여 정의현, 대정현을 거쳐 제주목으로 돌아오기까지의 21일간의 순력행사를 제주도 화공인 김남길이 그리고 본인이 주석을 달아 제작한 국내 유일의 기록화첩이다.
탐라순력도는 현존 제주도 제일 오래된 지도인 한라장촉을 시작으로 순력행사 장면 28면, 평상시 행사장면 11면 그리고 파면 후 육지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호연금서를 끝으로 된 서문2면과 그림 41면을 합친 총 43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물 652-6호로 지정되어있다. 이형상목사는 탐라순력도를 그린 이유를 서문에 밝히는데 본인은 임금의 은혜에 의해 절제사가되었고 그 은혜를 보답하기위해 제주에 만연한 음사를 타파하고 제주민들을 유교적으로 교화시켰다고 하였다.
탐라순력도는 당시 대정현 위리안치 유배자인 이조참판을 지낸 오시복이 순력을 그림으로 남겨보라는 조언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했으며 오시복과의 관계는 보름에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두터웠으나 오시복을 향정에 데려온 것이 화근이되어 이듬해 1703년 6월에 파면된다.
오시복과의 관계에 대해서 개인적인 소견으로, 탐라순력도에는 순력행사내용과 과참(지나침), 유(머무름), 숙박까지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11월6일 대정현에서 숙박하고 10일에 산방굴사를 방문했다고만 기록 되어있고 7~9일까지 3일간 행적이 빠져있어 대정현에서 오시복과의 해후가 있었지 않나 추측된다. (김시환선생님의 지적인 폭과 깊이 말씀은 여유가 철철 넘쳐 흐른다. 이 시연에서 유독 3일간의 기록되지 않은 행적 발견이 "아 내가 뭔가 하나를 해 냈구나"하는 성취감을 얼굴 가득 미소로 보여 주셨다.)
또한 탐라순력도에는 제주읍성 관아 건물들이 상세하게 그려져있어 일제시대 때 훼철되었던 관아복원에 활용되기도 했으며, 김남길의 그림은 중앙과는 다른 화풍을 가져 미술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한다.
이후 이형상목사는 파직된 후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않고 경북 영천의 호연정에서 30여년간 저술활동 및 후학 양성에 정진하였으며 총 10종 15책을 남겼으며 1733년(영조 9)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의 후손에 보관되어 있다가 현재는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제주도는 이런 탐라순력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 국보문화재로 인정받기 위해 지난 문화재청에 국보 승격 신청을 했지만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미흡하다 하여 2022.11에도 좌절되었지만 탐라순력도가 국민에게 사랑받는 국보 문화재로 인정받기를 손꼽아 기다려본다
참고) 제주도에 있는 보물(9종)
제주 관덕정(322호), 김정희 종가 유물일괄 (547-2호), 이형상수고본 탐라순력도(652-6호), 불탑사 오층석탑(1187호), 제주향교 대성전(1902호), 이익태 지영록(2002호), 안중근의사 유묵, 최익현초상, 동여비고
교수님께서 시연에 대한 내용이나 설명이 바로 강의를 하셔도 될 듯 하다고 칭찬일색이셨다. 저 역시 내용 수정이 어려워.....
5. 유배자로서의 삶, 광해군
조선시대 15대 임금 광해군은 젊어서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갈때, 남쪽(전라도)지방 군수 통치권을 맡게 되어 군사와 의병을 모아 임진왜란을 크게 물리친다. 1608년 왕위에 오르고 명,청나라가 교체되는 국제 정세속에 중립외교를 펼쳤으나 시류에 역항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인조반정(1623.3.13)으로 왕위를 뺏긴다. 광해군은 폐모살제(인목대비 폐위, 영창대군 죽임), 무리한 궁궐 증축이 이유였다.
강화도 유배를 시작으로 태안, 강화 교동도를 거쳐 15년 병자호란 1년뒤 1637년 6월 제주도 어등포(현재 행원)포구로 유배된다.
대부분 유배 지역을 미리 알지 못한 채 오는 경우가 많은데 마중나온 목사사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배안에서 자기편이 모두 적으로 돌변 할 수도 있다)는 "사기"책에 나온 글을 아느냐? 는 물음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제주읍성 서문 적소지에(위리안치)하고 자물쇠로 잠그며 30명이 돌아가며 지키고 늙은 관비도 "영감"이라고 부르며 천대 받았다고 한다. 1640년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시방(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에서 남한산성 사건으로 유배되었다 사면되어 제주목사로 부임)은 광해군을 왕으로 대접해 주었다.
제주에 유배온지 4년 1641년(인조19년) 음력 7월 1일에 67세를 일기로 병사를 했다. 목사 이시방은 제주 목관아에서 장례준비, 관덕정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 8월 18일 화북포구에서 출항하여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 곂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으로 남양주 진건읍에 안장된다. 권력다툼에서 광해군때 죽임을 당한 친형 임해군의 묘도 여기에 있다.
광해군이 죽은 1641년 가뭄이 극심했고 장례후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음력 7.1일 전후해 내리는 비를 "광해우"라 한다.
그날이 되면
// 칠월 초하루날이여 칠월 초하루날이여
대왕 붕어 하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오람서라 //
라고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에 올 때 처절한 자신의 심경을 남긴 7언시가 전해진다고 한다.
// 바람이 불고 비 뿌리는 성문 옆을 지나치는데
습하고 역한 공기가 높은 누각에 가득 차 있다
너른 바다 성난 파도에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푸른 산 슬픈 기운이 맑은 가을 둘러싸는구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왕손의 뜰을 또 보노니
나그네 꿈속에는 임금의 도시가 어른거리누나!
고국의 존망이 어떠한지 소식 끊긴지 오래고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만 누워 있구나! //
광해군의 재위 15년 2개월 동안 군주로서 소신과 안목을 갖춘 정책을 추진했으며 명,청나라 교체기의 중립외교 대동법시행 동의보감 책 간행, 왕권강화를 위한 궁궐짓기 등 개혁군주로서 재조명 받아도 되지 않는가 하는 말씀을 해 주셨다. 당리당략에 의해 영창대군죽임과 인목대비 폐위만을 강조하여 폭군으로만 기억되는 불운의 왕이 되어 적소터라고 낮추어 부르는 것에 안타까움을 더하셨다. 광해군의 유배문화, 컨텐츠 개발등을 통해 유배길을 조성하고 화합하는 유배정신을 이어 나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교수님의 총평 : 각자 주제에 제목을 근사하게 잘 잡아서 접근하였다. 해설이든 강의든 얘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것과 니가 아는 것을 충분히 잘 전달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지각과 자각을 잘 받아 들여서 그걸 넘어서 재미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굉장히 잘 이루어졌다. 광범위한 주제와 자료 속에 깊이 있는 논의 들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간의 노력에 푹 빠졌던, 광해를 사랑하고 약동이를 사랑하고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시간이 된 것이었으면 한다. 덧붙임 우리 시연 A팀은 그렇게 가벼운 마음을 안고 제기차기도 기쁘고 투호도 기쁘고 밥도 맛나게 커피도 맛나게 먹었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두서가 없어도 이해를 해 주세요..
분명 금요일에 시작했는데 토요일로 넘어 와 버렸네요...ㅠㅠㅠ 5시간..
아이구… 고생하셨습니다.
시연 준비하시랴 후기 쓰시랴
일주일이 참 길었을것 같아요.
대단한 선생님의 열정 응원합니다.
네 선생님
두루두루 긴 한주였어요.
그래도 마무리되어서
활짝 웃고 삽니다.^^
매끄러운 요약 정리에 다시 한번 읽어 봅니다 수고 많으셨네요
부끄럽습니다. 숙제 ㅎ ㅎ
선생님
금주 뵈요~~~
자세하게 잘 정리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수녀님'은 뺏어야 되는데 처음 쓴 자료를 보내 드린거라 죄송해요.시연 준비도 후기도 정성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 해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천주교신자가 아니었음을
쉿! 비밀^^
정난주 사망 1838
김정희 유배 1840년
두사람이 만날 가능성?
없었네요 ㅎㅎㅎ
역사가 재미있는 이유는
드라마같은 삶을 살며 세상을 풍미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수고하셨어요~^^
맞아요 교수님
그리고 우리가 살아 내는 삶이
또 새로운 역사가 되겠죠^^
그래서 오늘 하루도 부지런히 살아 보겠습니다.....
그냥 요약 정리만으로도 충분할것을...
생방송 수준으로 옮기셨네요.
수고하셨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분 한분
정성을 다 담아 내고 싶었어요.
좀 부족하지만~~
채우면서 사는게 삶이겠지요
시연 준비 하면서 같은 지역이라 김정희와 정난주가 마주쳤다면 서로에 대해 어떤 마음이였을까? 살짝 궁금했었는데 만날 수 없었군요.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제주에 들어온 인물들이 제주를 변화시키는데 한 몫을 한 건 부정할 수 없는거 같아요. 시연이 아니였으면 몰랐을 이야기들이였는데... 감사합니다. .이 많은걸 정리도 잘하셨네요^^
서로다른 인물들이
가족을 데리고 들어왔다면
제주의 식문화가 달라졌을 수 있겠다.라는 상상^^
액션님~ 모든 자료를 꼼꼼히 잘 올리셨네요~ 그 자리에서 놓쳤던 부분도 다시 알게 되었어요 수고하셨어요~~^^
네 선생님
후기까지 쓰고 나니 다음주 수요일이
더 기다려 집니다.^^
방대하고 소상하게 정리한 시연자료를 통하여 새론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들!
시연준비와 후기를 작성하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몸은 세종에 머물고 있지만 제주민의 희노애락이 담겨진 관덕정에 일시나마 함께 자리할 수 있어 감사를 드립니다.
제주에서 내려 오신 날
두분 선생님
다시 뵐수 있겠죠?
시연을 통해 많은것을 배움니다 후기 잘읽었습니다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