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의 동지(同志), 오늘의 적(敵)
먼저 손견이 떠나가고 이어 조조와 공손찬이 떠나 버리자
남은 제후들의 의맹은 날로 문란해져 갔다.
그 중에서도 참으로 기막힌 일은
대의로 모인 제후들 간에 일기 시작한 싸움이었다.
아무도 없는 낙양에 오래 군사를 머물게 하다 보니
제후들에게 한결같이 걱정거리가 되는 것은 군량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가장 먼 저 군량이 떨어진 것은 연주자사 유대였다.
준비한 군량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온 탓이었다.
유대는 처음 군량과 마초의 수급을 맡은 원술에게 청해 보았으나
그 마당에 원술인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원술이 맡은 것은 싸움에서 노획한 군량이나
의군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서 거둔 군량을 모아 두었다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것이지.
제 군사 먹일 군량을 덜어내
다른 제후의 군량을 대라는 것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이에 유대는 제후들 중에
비교적 군량이 넉넉한 동군태수 교모에게 군량을 좀 꾸어 달라고 부탁했다.
교모는 같은 동맹군의 청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꾸어준다고는 하면서도 이런저런 구실로 얼른 꾸어 주지 않았다.
앞날을 알 수 없는 터에 별로 되돌려 받을 가망이 없는 곳 에
군량을 빌려주어 자기 군사를 먹일 곡식이 줄어드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성난 유대는 어느 날 밤
교모를 공격하여 군량을 빼앗는 것은 물론 교모를 죽이고
그 군사들까지 아울러 버렸다.
원래 교모가 군량이 넉넉했던 것은
가져온 곡식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이끈 군사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지척에 있던 유대의 대군이 기습해 오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제후들 사이는
이내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차차 대의보다는 실리가 앞서게 되고,
명분보다는 타산이 앞서게 되니 의맹인들 제대로 유지될 리가 없었다.
이에 원소도 허수아비 맹주 노릇을 그만두고 진채를 거두어
낙양을 떠나 버렸다.
용의 머리로 시작해 뱀의 꼬리로 끝나 버린 듯한 기의였다.
☆☆☆
그 무렵 형주에서는
형주자사 유표와 손견의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형주자사 유표는 자가 경승이요, 산양군 고평땅 사람이었다.
역사 한실의 종친으로 어려서부터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일곱 사람의 명사와 친했다.
자를 중린으로 쓰는 여남땅의 진상,
같은 땅의 자를 맹박으로 쓰는 범범강자가 세원인 노국의 공욱,
자가 중진인 발해땅의 범강,
자가 무우인 산양땅의단부,
자가 원절인 같은 군의 장검,
자가 공효인 남양땅의 잠경이 그들 일곱 명사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 일곱에다 유표까지 넣어 흔히 그들을 (강하팔준)으로 불렀다.
유표의 사람됨이 그러하다 보니 형주자사가 된 뒤에도
주위에 훌륭한 인재가 많아 형주땅은 다른 어느 곳보다 풍족하고 평온했다.
앞서 말한 일곱 사람 외에도
연평 사람 괴월과 괴량, 양양사람 채모 등의 장수가
그를 도와 형주를 지켜 준 덕분이었다.
산동에서 조조가 동탁을 치기 위한 의군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원래 유표도 군사를 일으켜 거기에 호응하려 했다.
그러나 미처 군사를 움직이기도 전에
손견의 배신을 알리는 원소의 밀서를 받게 되었다.
손견의 그 같은 행동은
유표로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유표는 괴월과 채모에게 군사 만 명을 내어주며 일렀다.
"손견이 참람된 뜻을 품고 옥새를 감추어 제 소혈로 달아나려 한다 하니
그대들 둘은 그 길을 끊고 그를 사로잡아 옥새를 빼앗도록 하라."
☆☆☆
주인으로부터 그 같은 엄명을 받은 괴월과 채모는
그날로 군사를 진발 시켜 손견이 지나갈 길목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기다린 지 오래지 않아 과연 손견이
그 수하 군사들과 함께 그리로 행군해 왔다.
괴월은 자기 군사들에게 싸울 채비를 갖추게 한 뒤
먼저 말 위에 올라 진문 앞에 나가 섰다.
손견이 그를 알아보고 큰 소리로 물었다.
"괴영탁(괴월의 후)은 어찌하여 군사를 이끌고 내가 가는 길을 막는가?"
"너 또한 한의 신하가 아니냐?
그런데 너야말로 어찌하여 사사로 이 나라의 보배인 옥새를 감추고 도망치는가?
어서 그걸 내놓아라. 그러면 너를 돌아가게 놓아주겠다."
괴월이 제 주인 유표에게 들은 대로 씩씩하게 대꾸했다.
그 말을 듣자 손견은 불같은 성미가 일었다.
대답 대신 곁에 있는 황개에게 영을 내렸다.
"황공복은 개처럼 짖어대는 저자의 목을 얻어 오라."
그러자 황개는 기다렸다는 듯이 쇠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나갔다.
괴월도 지지 않고 칼을 춤추며 마주쳐 왔다.
이어 둘은 불똥을 뛰기며 어우러졌지만, 싸움은 기대한 만큼 길지 못했다.
몇 합되기도 전에 황개의 쇠 채찍이
괴월의 호심경(가슴 부분을 가리는 갑주의 일 부)을 치며 쨍그랑 쇳소리를 냈다.
그러자 거기에 무슨 타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황개의 채찍 솜씨에 겁을 먹었는지
괴월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황개가 그런 괴월을 뒤쫓고
손견도 승세를 탄 군사를 휘몰아 유표의 군사들을 덮쳤다.
유표의 군사들은
변변히 대항조차 못하고 달아나는 저희 대장을 뒤쫓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손견의 군사가
형주병들에 의해 막혀 있던 길목을 거의 벗어났을 무렵이었다.
홀연히 산 뒤에서 북과 징소리가 울리며
유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임지가 서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유표가 워낙 인근에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라 손견도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싸우지 않고도 길을 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손견은
말 위에서나마 존경의 예를 보이며 유표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경승(유표)께서는
어찌 원소의 편지 한 장만 믿으시고 이웃 군을 이렇게 핍박하시오?"
그러나 유표의 표정은 엄하기만 했다.
"네가 전국의 옥새를 숨겨가니 장차 역적질이라도 하겠단 말이냐?"
그 말에 손견은 이미 낙양에서 한 차례 효험을 본 적이 있는 맹세를 되풀이했다.
"만약 내가 그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칼과 화살 아래 죽을 것이오!"
"그 말을 내게 믿게 하려면 너와 군사들의 몸과 짐을 뒤지도록 내게 맡겨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믿겠느냐?"
그 말에 손견은 다시 화가 치밀었다.
조금 전까지 공손한 태도를 버리고 불길이 이는 듯한 눈길로 유표를 노려보며 꾸짖었다.
"네가 무슨 대단한 힘이 있다고 감히 나를 깔보느냐?
굳이 길을 막는 다면 다만 네 목을 베고 지나갈 뿐이다."
그러고는 분연히 칼을 빼들고 똑바로 유표를 향해 말을 몰았다.
유표가 원래 무골이 아니라 손견과 대적할 까닭이 없었다.
얼른 군사들 속에 숨어 물러났다.
그러나 손견은
내친 김이라 그대로 군사를 몰아 유표에게 부딪쳐 갔다.
그때 산 양편에서 함성과 함께 미리 숨어 있던 유표의 군사들이
일시에 나타나 양쪽에서 손견의 군사를 덮쳤다.
거기다가 흩어진 줄 알았던 괴월과 채모의 군사도
기다렸다는 듯 손견의 등뒤를 좁혀 왔다.
아무리 손견이라지만 앞뒤 좌우에서 적을 맞게 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좌충우돌하는 사이에 유표의 군사들에게 겹겹이 에워싸이고 말았다.
그때 만약 정보와 황개 한당 등이 죽기로 싸워 그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이미 손견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끝맺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손견은
그들 세 장수의 분전에 힘입어 유표의 에움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반 넘어 꺾이고 상한대로 자기 군사들을 이끌고 무사히 근거지인 강동으로 돌아가니.
결국 유표는 옥새도 빼앗지 못하고 손견의 원한만 사게 된 셈이었다.
☆☆☆
근왕의 쪽에 섰던 제후들 간의 그 같은 분열과 대립은
거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기름지고 넓은 기주를 두고 다시 북방의 두 웅자가 원수를 맺게 됐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공손찬과 원소였다.
낙양에서 돌아온 원소는 하내에다 군사를 멈춘 채 다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원소 역시도 군량이 떨어져 걱정하고 있었다.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흩어 버리는 바람에
그곳에서 쌀 한 톨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명색 의군이어서 함부로 약탈할 수도 없으니 실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런데 기주목 한복이 어떻게 알았는지
원소에게 군량에 보태 쓰라고 곡식 수천 석을 보내왔다.
원소에게는 가뭄 끝의 단비나 다름없었으나
한복은 한복대로 깊이 생각한 나머지였다.
다름 아닌 북쪽의 공손찬 때문이었다.
동탁을 치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힘을 기르고 있지만
언제 남으로 내려와 기주를 덮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복은 그때에 대비해 미리 원소의 환심을 사 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복의 판단은 자못 옳았다.
사실 부근에서 공손찬에 대항할 만한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원소뿐이었다.
거기다가 원소는 4세 5공의 후예이니 만큼 불의하게 남의 땅을 삼키려 들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같은 믿음이
바로 한복의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을 가져올 줄이야.
☆☆☆
원소가 한복이 보낸 곡식을 반가워하고 있을 때
그의 모사 봉기가 가만히 원소에게 권했다.
"대장부가 천하를 종횡하면서
어찌 남이 보태주는 곡식을 구구하게 얻어먹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기주는 돈과 곡식이 넉넉한 땅 입니다.
그걸 취해 장차 주공의 큰 뜻을 펼 기반으로 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나를 생각해 이 많은 곡식을 보내왔는데 차마 그 기업을 빼앗을 수가 없구려.
만약 세상이 그걸 알면 이 원소의 불인 함에 모두 등을 돌릴 것이오. 좋은 계책이 아니외다."
원소가 자못 의로운 체 대답했다.
그러자 봉기가 한 꾀를 내었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먼저 몰래 공손찬에게 사람을 보내
우리가 협공을 할 것이니 기주로 군사를 내라 이르십시오.
북방의 오랑캐들을 평정한 뒤부터
줄곧 남쪽 기주에 눈독을 들여오던 공손찬이니 반드시 거기에 응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모가 부족한 한복은 놀라 주공께 도움을 청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때 틈을 보아 기주를 취하시고 그럴 듯한 핑계로 공손찬을 따돌려 버리시면 됩니다.
기주는 실로 손만 내밀면 얻을 수 있는 땅입니다."
말하자면 칼을 빌려 살인을 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계책이었다.
원소도 그 계책이 마음에 들었다.
그날로 글을 닦아 가만히 공손찬에게 보냈다.
(기주는 땅이 넓고 기름지며 백성이 많으나 한복은 능히 다스릴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외다.
먼저 공손태수께서 동북에서 기주로 군사를 내시면 저도 서남에서 협공을 하겠소이다.
기주를 차지한 뒤에 태수와 내가 나누어 다스린다면
그곳의 수백만 백성들에게도 복덕이 될 것이오)
그런 글을 받은 공손찬은 크게 기뻤다.
진작부터 노리던 땅이었지만 한때의 동지였던 한복이 그 주인이라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동맹군의 맹주였던 원소가 거들겠다니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욕을 먹어도 원소가 더 먹을 것이고,
한복의 원망을 들어도 원소가 더 들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공손찬은 원소의 속마음도 모르고
밀서를 받은 그날로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직 기주로 군사를 들이기도 전에 소문이 먼저 기 주목 한복의 귀에 들어갔다.
원소가 다시 몰래 사람을 보내 공손찬이 군사 일으킨 일을 한복에서 알려준 탓이었다.
짐작대로 한복은 크게 놀랐다.
곧 모사인 순심과 신평 두 사람을 불러 놓고 걱정을 늘어놓았다.
"걱정했던 대로 공손찬 그놈이 우리 기주를 취하려 한다고 원본초가 알려 왔소.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런 한복의 말에 순심이 나섰다.
"공손찬이 연과 대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면
지금 우리로서는 그 예봉을 당할 길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평원에서 힘을 기르고 있는 유비와 관 장 두 아우도 공손찬의 사람이니
그들까지 합세하면 더욱 막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원소에게 의지하는 수뿐입니다.
원소는 지혜롭고 용맹하기가 남다른 데다, 그 아래에는 뛰어난 장수들이 아주 많습니다.
장군께서 원소에게 함께 이 기주를 다스리자고 청하시면
원소는 반드시 달려와 장군을 도울 것입니다.
거기다가 원소는 덕망 있고. 또 장군께 군량까지 얻어 쓴 일이 있으니
장군을 대함에 결코 소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손찬 따위는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한복이 들으니 꼭 그럴 듯한 꾀였다.
곧바로 별가 관순을 뽑아 원소에게 도움을 청하게 했다.
"장군.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관순이 막 명을 받고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서서 크게 소리쳤다.
한복이 보니 장사로 있는 경무란 자였다.
이미 원소에게 의지하기로 마음먹은 한복은 못마땅한 눈길로 경무를 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원소로 말할 것 같으면 외로운 나그네요, 그 군사는 주리고 헐벗은 무리입니다.
우리만 바라보고 있는 처지이니, 비유컨대 품안의 어린것과 다름없습니다.
젖을 주지 않듯 군량만 대어 주지 않으면 절로 망할 그에게
무엇 때문에 우리 기주를 맡기려 하십니까?
그를 불러들이는 것이 양떼 속에 호랑이를 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아무쪼록 깊이 헤아려 행하십시오."
경무의 말은 간곡했다.
그러나 한복은 듣지 않았다.
"나는 원래 원씨 아래서 벼슬아치를 지낸 사람인 데다
재주와 힘이 아울러 원본초에게 미치지 못한다.
옛사람도 어진 이를 골라 그 자리를 내어주었으니 나도 그 예를 따르려 한다.
그대는 어찌 아녀자처럼 원본초를 질투하는가?"
꿈 같은 소리만 늘어놓으며
한복은 기어이 관순을 원소에게 보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