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비나무에게 외 9편
조 명
당신
아직도 울어요?
아직
당신도 울어요?
가문비나무들
당신들 아직도 우냐고 말 걸고 싶었다
아직 당신들도 우냐고 말 붙이고 싶었다
검은비나무들이 가문비나무들 되었다지
죽은 아이들이 사막을 숲이라 부른다지
가문비나무숲
진초록 가문비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수북한 것들 푹푹 있었다
수북한 것은 낙엽 삭정이 목숨 덜어내던 기도
자식 살리려 떨군 것들의 자리는 텅 빈 중심
수목한계선에 뿌리내린 늙은 숲의 울림통
어린 꼭지눈에 연초록 햇살 속살거리는 정오
보낼 수 없어 돌아올 수도 없는 아들이 보였다
가문비나무숲은 여태도 가문비나무숲이었다
우, 크러시!
가문비나무들이 우크레이니언 러시안 군인들 같다
검은비나무들 눈물 다 말라 가문비나무들 되었다지
불볕바람 불어와 진액을 말리는 여름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겨울이 있었다
우크레이니언 러시안 우크레이니언 러시안 우-크러시!
나는 등짝에 불이 붙어 벌떡 일어나는 잠을 겪었다
폭발한 태양인 듯 지구의 파편인 듯 하얗게 불타던 꿈
가문비나무들이 우크레이니언 러시안 아버지들 같다
천년의 사랑
그날
나는 보았습니다
밤새
흰 눈 내려와
대지에 눈꽃수의를 입히던
새벽,
땅속
아득한 곳에서
거대한 톱니바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들려올 때,
......
당신은
백 년 향나무 횃불로
허물어져가는 붉은 함석지붕집 뒤란에 서 있습니다
나는
꺼져가는 촛불로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습니다
당신이
징검돌을 놓듯
말합니다
—내가 끝까지 곁에 있어 줄게요
횃불 같은 사랑 진초록 잉걸불
촛불 같은 사랑 금다홍 잉걸불
(그대여, 우리 사랑은 몇 생이나 더 흘러야 속속들이 향기로운 아기 낳을까.)
당신은
마른 해일을 불러들여 대지를 흔들어 검은 멀칭비닐 같은 죽음의 망토를 찢어발겨 너덜너덜 까마귀떼 하늘을 뒤덮어 먼 길 돌아 달려와 어루만지는 목신의 위로마저 뿌리치는 내 사랑의 발광체...... 그대여,
우리 사랑, 슬픈 사랑, 끝 모를 사랑의 시뮬라르크!
나는
이 생의 당신 보고 또 보고파
오늘, 서울 갑니다
내 건너 고개 넘어 들판 달려 터널 저 편 향나무 병상
파린의 귓바퀴 속으로 다홍구름의 말
불어 넣을 겁니다
—내가 끝까지 곁에 있어 줄게요
그대에게 천국을 걸겠네
이것이
그것인 줄 알았네
저 새가
그 새인 줄 알았네
저 호수 위 백로의 꿈결 같은 구애가
그 호수 위 백로의 꿈결 같은 구애인 줄 알았네
이 화요일이
그 화요일인 줄
우리 사랑의 시크릿 다크초콜릿 키스가
그들 사랑의 씨크릿 다크초콜릿 키스인 줄 알았네
이 모으든 것들이 그 모오든 것들의
그림자놀이라고
저 호수명경은 보여주네
자명하네만
눈 먼 채
나는 내 사랑에게 천국을 걸겠네
그냥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내 고향집 옆집에 잘생긴 오빠가 살았댔지 그 오빠가 참 좋았어 서로 좋았던 거여 그 집 뒤울에는 집보다 크단 산돌배나무도 있어서 산돌배꽃 동산처럼 피는 밤엔 우리는 거진 밤마다 만났댔지 우리 아부지는 그집 절대로 안 됀다는 거여 가난타구 그래두 나는 그 오빠 아니면 죽어버릴 거라 곡기를 끊어서는 끝끝내 혼인했지 그래가지구는 거기 무릉도원리 살다가 너를 밴 거여 그러다가 예미학교 관사에서 널 낳았지 너도 알잖니 거기 운동장에 크
단 산돌배나무...거기...니 아부지? 내가... 그 오빠랑 결혼 안한 겨?...그야...나는 모르지! (미움이 영원하지 않다고도 말하지 마라)
폐허
아름다웠다
백골이 하얗게 잘 마르고 있었다
왕궁 마을 시장
폐허라는 이름의 도둑고양이 한 마리
없었다
사랑과 퇴폐와 상징
촉촉하고 향기롭고 축축하고 퀴퀴하던 것들 모두
부스러지는
무지개
죽은 엄마의 얼굴은 희고 깨끗하고
성스러웠다
내 속엔
금쪽같은 것들 애타게 금쪽같은 것들 아직 있어서
어쩌나
먼 데 신비로운 나라 옛 읍성에서
바람과 햇살이 되어 맴돌 때
내 뼈가 마르고 있었다
고허
환했다
석양 무렵
햇빛 비스듬히 야생의 풀섶 사이사이 밀고 들어가 그늘진 구석마다 빛의 조각들 아련히 밝혀 놓는 정경이 하도나 아늑하여 나는 잠시 없는 듯 발코니에 있어 반짝이는 그늘의 금종소리를 들으며 풀섶 너머 술샘강 윤슬의 속삭임도 소녀 시절 아침 햇빛이 들려주던 은종소리로 듣는 터에 뉘 집 흰 고양이 미야옹 기척도 없이 내 종아리에 기대어 나란히 있는데 나는 이 고양이가 늘 먼 데서 없는 듯 있는 당신이 보내온 가없는 미소인가 싶었다
하구에서
-금강시편
아!
저 소리가 바다의 음성인가!
아!
이 냄새가 바다의 향기인가!
당신은 출렁이는 마침표인가 파도치는 신세계인가!
아! 아!
그 혼돈의 자궁인가!
아!아!아!
당신 만나는 일이 내 평생의 환희이기를!
산문
수상한 시대와 순정한 사랑에 대하여
조 명
가문비나무를 생각하면 검은비나무가 생각나고 검은비나무를 생각하면 검은 눈물이 생각나고 검은 눈물을 생각하면 예버덩 마을에 살다가 지난여름 돌아가신 진규호 옹의 말씀이 떠오른다. 8년 전 일이다. 봄날 농사를 짓다가 허리를 펴고 저만치 떨어진 가문비나무숲을 바라보면 나무에서 거무스름한 것들이 아른아른 봄비처럼 쏟아진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검은비나무라고 불렀다고, 그런데 요즘은 모두들 가문비나무라고 부른다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아, 이것은 시다!’ 라고 직감했다. 거무스름한 비 같은 것이 내게는 ‘가문비나무의 검은 눈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그 후 지금까지 예버덩문학의집 곁에 있는 가문비나무 숲을 거의 날마다 보거나 찾아가지만 시가 태어나는 일은 늘 만만치 않아서 오래 간절히 사랑해야 이루어지는 일인 것 같다.
최근 수년 동안 우리들의 지구가 수상하다. 하수상한 시대를 우리들은 함께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겪어본 적 없는 불볕바람에 몸의 진액을 빨리는가 하면 새로운 역병이 몰려와 전 지구에서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중에 인간은 웬 전쟁까지 벌여 인간이 발포한 포탄이 밤하늘을 날아 인간의 터를 초토화시키고 있는지 원. ‘우, 크러시!’ 빌어먹을! 어리고 젊은 죽음들에 대한 고요한 애도의 겨를도 없이 내가 무너질 듯 허청이다가 급기야 지난여름엔 등짝에 불이 붙은 듯 뜨거워 벌떡 일어나는 새벽을 겪었다. 두려웠다. 나는 한 시인으로서 시인이라는 이름을 허명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라 훗날에라도, 나의 가문비나무로부터 작디작지만 위대한 시 한 편 얻어 수상한 이 시대를 다독여 보고 싶다.
사랑에 관하여는 부디, 제발,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말하지 말자. 미움이 영원하지 않다고도 말하지 말자. 99세 치매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듣다가 확연히 보았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다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랑이라니......, 사랑이 얼마나 튼실한지 미움이 얼마나 질긴지 또 그 핵심은 그 사랑 스스로가 얼마나 순정하고 아름다운지. 눈물겹다.
조명 대전 출생. 2003년 《시평》 등단. 시집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외. 매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