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악산에서 천안으로 가는 길 홍유릉이 있어 작정하고 들렀다
지난번 여정길에 넣었다가 처가 싫어해서 패스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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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은 제26대 고종(1852~1919)과 명성황후 민 씨(1851~1895)의 능이다. 고종의 능이 남다른 것은 명 태조의 효릉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홍유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이다. 그러므로 홍살문으로 들어가는 우측에 조선 왕릉 중 가장 큰 연지(蓮池)가 있다. 조선의 왕은 천원지방의 연못을 기본으로 했는데 이곳은 연못 전체도 원형이고 가운데 섬도 원형이다. 연못에는 부들과 연꽃 등 수생 식물이 자라며 원형의 섬에는 향나무, 소나무, 진달래 등이 식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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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으로 들어가는 길 두 그루의 향나무가 그 권위를 말해준다 하지만 대한 제국 황제였던 고종의 장례는 황제의 국장도 아닌 왕족의 장으로 치렀는데 그마저도 7개월도 아닌 3개월로 했다. 처음에는 조선의 국장제인 '상례보편제'를 따랐는데 갑작스럽게 일제가 개입해 장례위원회를 도쿄 국내성에 두고 조선 총독부가 칙령에 따라 일본식으로 치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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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방과 재실을 먼저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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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안쪽 좌측에는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이는 황제 능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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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고종을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 주체없이 끌려다닌 무능한 왕, 그로인해 조선을 망하게 한 왕으로 치부하는데 이는 조선후기 왕권을 능욕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 했던 서인 노론세력이 결국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은 후 호의호식을 하다 다시 세계정세 변혁으로 광복이 되어 대한민국이 들어선 후 역시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하고 친일정부를 세워 100여년 가까이 이 나라 이 백성을 가지고 놀다 제대로 된 깨인 선각자들에 의해 친일에 대한 비판을 받자 이를 물타기하려는 장본인들의 구설수에 불과한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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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전의 기단 아래 홍살문까지 참도가 깔려 있는데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좌우보다 한 단 높게 마련된 중앙 길은 황제와 황후의 영혼이 다니는 길이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 왕릉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한 단 낮은 삼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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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도 좌우로 석물이 도열하듯 서 있는데 침전 가까이부터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순서다. 이러한 배치는 기존의 왕릉과 크게 달라 참배객들로 하여금 이색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각기 좌우 1쌍인데 석마만 2쌍으로 다른 상에 비해 키가 작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다른 왕릉과는 다소 다르다. 문인석은 건릉, 수릉처럼 키가 크고(385센티미터) 머리에 금관을 썼는데 너무 매끈해 오히려 품격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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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도 변형되어 중국의 황제 능처럼 일자 모양의 침전을 세웠다. 침전은 고종의 신위를 봉안한 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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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주변은 석물이 침전 아래에 있어서인지 휑한 모습이다 현종 이후 보이지 않았던 12면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았고 혼유석 1좌 양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이를 3면의 곡장이 둘러싸고 있다. 혼유석 앞에 작은 대석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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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이다. 대한 고종태황제홍릉 이라며 대한(大韓)이란 표현이 이색적이다
이어 비각 뒤로 난 후문으로 나가 영원(영친왕 묘) 회인원(이구묘), 덕혜옹주묘, 의친왕 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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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의민황태자)은 이름은 은(垠).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비 엄씨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년(광무 4) 8월 영왕에, 1907년(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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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아들은 대군, 군으로 호칭되는데 황제의 아들이기에 왕의 호칭이 주어졌지만 묘의 이름은 대한제국 시절 황태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원으로 불려 영원(英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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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의 형식을 따르긴 했지만 정자각도 그렇고 미니어쳐 같다 상당히 아담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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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형인 순종에게 후사에 없음에서인지 일본은 이 영친왕을 1907년 황태자로 책봉하자마자 그 해 12월 강압으로 일본유학길을 떠나게해 조선황실 인질로 철저한 일본 주입식 교육을 시킨다 1920년 일본 왕족 나시모토 노미야 마사코와 정략 혼인을 시켜 이진, 이구 두 아들을 낳았으나 이진은 죽고 황세손 이구만 생존하게 된다 그의 묘가 옆에 있는 회인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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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은 1945년 광복 후 귀국을 원했으나 임시정부 등과 갈등으로 귀국이 무산되고 이구 황세손 또한 귀국이 무산되어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 입학 건축학을 전공한다
영친왕은 1963년 비로소 귀국하였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뜨고 황세손은 2005년 일본에서 죽게 된다
그래서인지 묘 주변 석물도 상석도 없이 봉분만 덩그러니 그 흔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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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나와 오른쪽으로 이어진 숲길을 따라 덕혜옹주 묘를 찾았다.
옹주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으며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에 걸렸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하다가, 1989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 덕혜옹주의 삶이 영화화되면서 더욱 인상이 깊어 묘를 찾게 되었다 묘까지 가는 길에 조선왕실과 덕혜옹주의 사진,설명 등을 담은 홍보판이 있어 더욱 의미있는 탐방을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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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의왕(義王)·의화군(義和君)이라고도 하는데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장씨(貴人張氏)이다. 1891년(고종 28) 12월에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년 9월 김사준(金思濬)의 딸과 결혼했다.
1919년 대동단의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과 모의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할 것을 결정했다. 이때 김가진(金嘉鎭)·전협 등과 함께 33인 명의로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강조한 선언서를 준비했다. 그해 11월 탈출을 감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에 도착했으나 일본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송환되었다.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 그뒤 일본 정부는 여러 차례 도일(渡日)을 강요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살면서도 배일정신(排日精神)을 고수했다.
다시 홍,유릉을 닫을 시간이 되어 후문으로 겨우 재입장하여 유릉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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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이 홍릉보다도 더 대단하였다. 재실은 홍릉과는 달리 좌우 동형의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황제 능답게 일반 왕릉에 비교해 매우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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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건물은 아예 뒤주(쌀 창고)와 부엌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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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閔氏)·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尹氏)를 모신 유일한 동봉 삼실 합장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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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났고 광무 1년(1897) 대한 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며 1907년 일제의 강요와 모략으로 고종이 물러나자 황제가 되었다.
순종은 일본의 꼭두각시로 변한 친일파들에 의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다가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의 주재로 열린 어전 회의에서 한일병합 조약 조인을 거쳤는데 문제는 황제인(옥쇄)의 날인이었다. 순정효황후 윤 씨(1894~1966)가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 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옥새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큰아버지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고 날인해 조선 왕조는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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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능묘는 현재도 많은 구설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릉이 명당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풍수지리상 매우 나쁜 자리에 있다고 한다. 일본이 흉지에 매장해 후손을 절손하고, 조선의 부흥을 꿈도 못 꾸게 하려는 일제의 음모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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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릉은 능침, 침전, 홍살문 등이 직선형으로 배치된 홍릉과 달리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의 축이 각기 다르게 배치되었다. 그러나 홍릉과 같은 황제 능으로 조성되었으므로 홍릉에 비해 능역의 규모가 다소 좁지만 석물은 홍릉에 비해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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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능역을 조성하는 산릉주감은 조선인이었지만 실무자는 도쿄대 교수이면서 메이지신궁 등을 지은 일본인 건축가 이토 주타였다. 일본인들은 유릉의 석조물을 일본식으로 조각하기를 고집했다.
문·무인석은 현대적인 조각법을 인지한 조각가가 제작한 듯 정교하고 세밀하기는 하나 근거 없는 유럽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표정도 없다. 문인석은 눈망울도 없다. 마치 앞 못 보는 사람을 표현한 것 같은 인상이다. 다른 것은 사실적으로 조각하면서 그렇게 조각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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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릉의 능역 내에는 두 기의 어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지만 금천 주변의 어정은 둘레석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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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선 민족의 삶을 대변하듯 질곡의 세월을 산 조선말기 왕족들의 파란만장한 삶들을 뒤로 하며 유릉을 탐방하고 릉 앞 전시홍보관을 잠깐 거쳐 중부고속도로를 따라 천안으로 내려왔다
중간 안성에서 저녁으로 먹은 장터국밥이 점점 겨울로 향하는 을씨년스럽고 싸늘하게 변하는 마음속 기운에 다시 따스함을 가져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