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산 직지사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직지사(直指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김천시 대항면 운수동 216번지 황악산(黃嶽山, 1,111m)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직지사는 오랜 역사와 황악산의 절경 등으로 인해 사시사철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 지역의 대표적 명찰이다. 사찰 경내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탑과 석불좌상 등의 오래된 성보 유산을 쉽게 만날 수 있으며, 비로전에서는 1,000위에 달하는 다양한 현세불의 상호를 접할 수 있다. 아울러 성보전시관에 전시된 다양한 유물과 만덕전(萬德殿)의 웅장한 모습을 통해 한국불교의 전통과 생동감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도량이기도 하다.
직지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적기 자료는 여러 종류가 전한다. 이들 자료는 대부분 1980년에 영인된 『직지사지』에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1681년 조종저(趙宗著)가 지은 「금산황악산직지사사적비명(金山黃岳山直指寺事蹟碑銘)」과 1776년 급고자(汲古子) 스님이 지은 「경상도금산군황악산직지사고선종대가람사적(慶尙道金山郡黃岳山直指寺古禪宗大伽藍事蹟)」이 대표적 자료라고 하겠다. 물론 이전에도 학조대사(學祖大師)가 편찬한 사적기와 율곡 이이(李珥)가 1577년에 편찬한 사적기가 있었으며, 편찬 연대를 알 수 없는 사적비도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소략하거나 전해지지 않고 있는 자료도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따라서 직지사의 역사는 대부분 위의 두 자료에 의존하여 설명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들 사적기 자료에는 직지사가 418년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아도화상이 구미의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할 때 이곳 직지사도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인데, 직지사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적기에서는 예외 없이 이 설을 밝히고 있다. 물론 현재 남아 있는 각종 사적기 자료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것들이며, 따라서 418년 창건설을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지역이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527년(법흥왕 14) 이전의 초기 전법지로 중시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직지사의 이러한 창건설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가람 형태는 비록 소규모였을지라도 고구려의 전법승들이 불교를 전하기 위해 이 지역 일대에 거처를 마련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다만 아도와 묵호자(墨胡子)에 관계된 자료를 종합해 본다면 아도의 사찰 창건은 빨라도 5세기 후반 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직지사의 창건과 관계된 내용 가운데 주목되는 또 하나의 사항은 ‘직지(直指)’라고 하는 절 이름의 유래이다. 직지는 보통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가의 용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직지사의 사찰명은 이러한 선종의 가르침을 표방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사적기 자료에는 사찰 이름과 관련한 또 다른 두 가지의 설이 소개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창건주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이후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만한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한 데서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다음 두 번째는 고려 초 능여(能如) 스님이 사찰을 중창할 때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의 손으로 땅을 재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찰명이 지어졌다는 설이다. 이들 설은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역시 직지사의 중심 사격(寺格)을 감안한다면 선종과의 연관성 속에서 사찰명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선종이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시기는 9세기 이후라고 보아야 하므로, 직지사라는 사찰 이름이 정착된 시기와 그 배경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할 것이다.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 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까지의 직지사
418년의 직지사 창건과 관계된 내용은 앞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다. 이 시기의 직지사는 신라불교 초전지(初傳地)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위상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더 이상의 내용은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고려시대 이전까지의 직지사 역사로는 자장 율사(645년)·천묵 화상(930년)의 중창 기록만 전하고 있을 뿐인데, 이들 기록 역시 조선시대 사적기에만 실려있어 역사적 사실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현재 직지사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조물들이 다수 남아있으므로, 직지사는 고려시대 이전까지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직지사는 고려가 건국되면서 제2의 중흥기를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 왕건과 능여대사(能如大師)와의 깊은 관계 때문인데, 사적기 자료에 의하면 태조의 지원에 의한 대규모의 직지사 중창이 936년에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조와 능여 스님의 관계는 일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능여 스님은 역사상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특히 능여암이라는 산내 암자가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능여 스님이 직지사 중창주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사례로 보아야할 것이다. 사적기에는 태조와 능여 스님의 관계가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태조 왕건은 927년 11월 팔공산 동화사 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인동(仁同) 지역까지 밀려난 전투에서도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휘하의 두 신하가,
“이 근처의 도를 얻은 고승을 만나 적을 이길 수 있는 방책을 묻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였다. 태조는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근처의 수행자를 물색하던 중 직지사의 능여 조사를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태조의 청을 받아들여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짚신 2,000여 켤레를 만들어 보내고, 또한 큰 신을 많이 만들어 사방의 중요한 길목에 흩어두었다. 아울러 적을 이길만한 시기를 미리 알려주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도록 하자, 태조가 감탄하여 밭 1천 결을 하사하였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능여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계속 전토와 재물을 하사하였으며, 942년에도 밭 10결을 하사하였다.'
능여조사는 이처럼 태조 왕건의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태조는 이러한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뜻에서 직지사에 많은 전답을 하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936년의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졌다고 사적기는 밝히고 있다. 물론 이 내용의 역사성 문제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팔공산 인근 지역의 많은 사찰에서 태조와 관계된 전승자료가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사적기의 이러한 내용은 단순한 설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직지사 역사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사항은 1185년 임민비(林民庇, ?∼1193)가 「대장당비(大藏堂碑)」를 찬술하고 그 비를 건립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비는 실물이 남아있지 않지만 일부 비편의 탁본 내용이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지사」조의, ‘고려 임민비가 지은 대장당기문이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16세기 전반까지 이 비가 실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930년 직지사를 중창하였던 천묵조사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에 헌상하였다는 사적기 내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일부에서는 1185년 대장당비를 세울 당시, 대장당 안에 이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앞으로 더 연구해 보아야할 과제로 생각된다. 직지사는 오랫동안 선종 사찰로서의 사격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러한 직지사에 대장경을 봉안하기 위한 별도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은 직지사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특성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기(基)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大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직지사의 전각
대웅전
신라시대 대웅전의 규모에 대해서는 미상이나 고려 이후 조선 초기,적어도 정종대까지는 2층 5간의 특수한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사적기에 대웅대 광명전이라 하였는데 명칭부터 특이하여 혹시 당시에는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을 동시에 봉안했는지 알 수 없다. 대웅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사승 인수,명례 등에 의하여 중창되었다. 현 건물은 이로부터 150여 년 후인 영조 11년(1735) 중건되었으며 당시 중건에는 주지 수변화상,전 주지 설운 종익 그리고 태감화상을 비롯하여 산중 대중의 협력과 시주로써 이룩 되었다. 그 관계자는 상대목 동래 운수사의 치백과 도목수 설인을 비롯하여 목수 20여 명과 야장,개와공,도감,그리고 화사,총찰도감,도와도감등 50여 명의 산중대중과 900여 명의 시주가 참가하고 있는데,이 명단은 중창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연목 교체 및 기와를 번와(1969.3.1~1970.11.30) 할 때 확인 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대웅전의 주위 석축 및 축대를 새로 조성 (1973.4.10~1975.6.20)하여 필역 하였다. 다시 녹원 화상에 의하여 재차 연목 및 기와가 번와(1979.10.25~1980.1.14)되었고, 1980년 8월에는 부분적으로 고색금단청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조선시대 후기 18세기에 지었다.경북유형문화재 제 215호였는데, 2008년 9월 3일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안에는 불단 중앙에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아미타여래를 봉안한 삼불상을 모셨다. 후불탱은 각각의 여래상 뒤에 한 폭씩 있어서 모두 3점인데, 1744년(영조 20)에 진기(震基)와 지영(智英) 금어가 조성하였다. 1980년 각각 보물 제670-1·2·3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삼존불도
경북 김천 직지사 대웅전에 봉안된 삼전불도로 비단바탕에 채색되었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로, 일반적으로 이 직지사처럼 대웅전 본존불의 뒷벽에 위치한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흔히 3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 불화도 그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회도를 배치하였다.
중앙에 배치된 불화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장면을 그린 석가후불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불이 있고 좌우에 8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둘레에 많은 범문을 써 놓았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친 석가불은 악귀를 누르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비교적 균형잡힌 체구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세밀하게 그렸다. 이 영산회상도는 크기가 가로 300㎝, 세로 610㎝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다.
왼편에 있는 약사회도 비단바탕에 채색되었고 크기는 가로 240㎝, 세로 610㎝이다. 화면의 중앙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8대보살과 사천왕, 12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본존불의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하여 얼굴은 지극히 작은 눈과 입 등이 매우 단아하고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모습과 등뒤의 물결무늬 원형광배, 옷의 문양표현 등이 18세기 불화의 시대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른편의 아미타회상탱화 역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240㎝, 세로 610㎝이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이 세 폭의 불화는 영조 20년(1744) 세관(世冠),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 10여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을 염불도인(念佛道人) 진기와 지영(智英)스님이 증명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안정감 있는 색감 등으로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에 속한다.
대웅전 영산회상도
1735년(영조 11)중건 당시에 조성된 삼존불상과 보물 제670호인 후불탱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벽에는 불보살도를 비롯하여 기용관음도(騎龍觀音圖), 용왕도(龍王圖), 동자상(童子像)등 아름다운 채색벽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삼존불의 주존으로 석가불은 부풀은 뺨에 둥근 얼굴로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은 법의 안에는 주름장식이 있는 승각기를 입고 있습니다. 자세는 결가부좌하여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습니다. 후불탱은 가로 300cm, 세로 610cm의 크기에 색채는 진하고 탁해보이지만 안정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짜임새있고 밀도있는 구성력과 뛰어난 묘사력 등이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에 속합니다.
대웅전 약사회상도
직지사 대웅전에 봉안된 3폭의 후불탱 중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약사회상도로 670-3호로 지정되었다. 화면 중앙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팔대보살과 사천왕, 십이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본존불의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임에 비하여 얼굴은 지극히 작은 눈과 입 등이 매우 단아하고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크기는 세로 610㎝, 가로 240㎝이다.
대웅전 약사불 좌상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협시하고 있는 약사불좌상과 보물 제670호의 후불탱 약사회상탱화(藥師會上幀畵)입니다. 약사불은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하였는데, 손에 약합이나 보주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상에는 특징이 나타나지 않아, 후불탱화를 통해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불탱의 크기는 세로 610cm, 가로 240cm로 적.녹.황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웅전 수미단
수미단은 부처님을 모시는 단을 말하는데, 흔히 "상단" 혹은 "불단"이라고 합니다. 수미단은 수미산을 상징화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상중하대의 구분이 있습니다. 상대와 하대에는 각기 앙련과 복련을 새기고 중대에는 초화문 등의 화려한 장식과 함께 사슴, 봉황, 거북 등의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의 조각이나 그림을 배치하고 있으나, 그 외에도 물고기, 나비 등과 같은 것도 자주 눈에 띕니다. 무늬로는 격자문, 물결문, 칠보문, 안상문, 구름문, 만자문 등을 반복적으로 단순하고 간결하게 배치하였는데, 기하학적으로 추상화시킨 것으로부터 섬세하게 조각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채롭습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들이 장엄하는 수미단은 다른 그 어느 것보다도 화려합니다.
대웅전 아미타불좌상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서 협시하고 있는 이미타불좌상과 보물 제670호의 후불화인 아미타회상탱화(阿彌陀會上幀畵)가 걸려 있습니다. 후불탱의 크기는 가로 240cm, 세로 610cm입니다. 아미타불은 영원한 수명과 무한한 광명을 보장해주는, 즉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영원한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서방극락을 주재하면서 뭇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분이십니다.
대웅전 앞 석등
석등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법당(法堂) 앞에 건립하여 도량을 밝히는 역할을 하는 돌로 만든 등(燈)이다. 화사석(火舍石)은 사각형으로 사방에 화창(火窓)을 만들고, 간주(干柱)는 팔각형으로 한 면에 다람쥐가 기어오르는 형상을 그려 놓았다. 아직도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상륜부(相輪部)는 보륜이나 옥개를 얹지 않아 간단히 처리하였다.
대웅전앞 삼층석탑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지(道川寺址)에 무너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두 탑 모두 각 부분의 양식이 같아서 단층으로 형성된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짠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층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탑신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얇고 평평한 옥개석의 층급받침으로 1·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상륜부는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이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긴 하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크기는 높이 약 900㎝이다. 1976년 보물 제606호로 지정되었다.
관음전
관음전(觀音殿)은 원통전이라고도 하는데, 1978년에 주지셨던 녹원스님이 중창하였다.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를 하고 있다. 안에는 금동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극락전
극락전은 서전(西殿)이라고도 하며,사적기에는 서전암(西殿庵)이라 하였다. 극락전은 주지 혜창 화상(慧昌和尙)에의하여중창(1984.10.17~1986.5.26) 되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총 59.64평으로 비교적 큰 건물입니다. 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 아미타여래 삼존좌상과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금강문
금강문은 금강저를 들고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모시는 전각입니다. 금강역사는 힘뿐만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갖춘 불교의 수호신으로 현겁 천불의 법을 수호합니다. 사찰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이 서 있습니다. 직지사 금강문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떠돌이 승려가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경남 합천 어느 곳에 도착하였는데, 그 마을은 예로부터 대처승부락으로 촌장은 그를 보는 순간 사람 됨됨이가 예사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사위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비구승이라며 한사코 반대했으나 바랑과 승복을 빼앗기고 강제로 결혼하여 신랑 승려가 도망칠까봐 장삼과 바랑을 감추어 두었다가, 아들을 낳고 삼년이 지난 어느날 아내는 장삼과 바랑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더니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 옆자리엔 남편이 없었다. 그 후 부인은 남편을 찾아 전국 사찰을 모조리 찾아 다녔으나 헛탕이었는데, 어디선가 그와 비슷한 승려가 직지사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와 그가 장계다리 아래 방앗간에 묵고 있음을 알고 그의 집 앞에서 기다렸으나 사흘이 넘도록 오지 않자 남편을 찾아 직지사로 들어가다가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지금의 금강문 자리에 이르러 갑다기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매년 부인의 죽은 날이 되면 직지사의 승려들이 누가 부른 듯이 부인이 죽은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이에 직지사에선 부인의 원귀를 위로하고 그 옆에 사당을 짓고 그녀의 혼을 달래기 위해 매년 제사를 올렸다. 어느해 이름있는 고승이 찾아와 사찰내에 사당이 왠말이냐고 나무라니 승려들은 사당을 세우게 된 사유를 얘기했더니 "그러면 이곳에 금강문을 지어 금강역사로 하여금 여인의 원혼을 막도록 하라" 하여 지금의 직지사 금강문이 세워졌다 한다.
명부전
명부전(冥府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다포계 형식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입니다. 건물의 창호는 정자살무늬로 짜여져 있다. 안에는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고, 그 주위로 시왕과 판관·녹사·사자·인왕 각 2위가 봉안되어 있다.
주존인 지장보살은 보통 깍은 머리에 스님 모습이 특징입니다. 좌우에는 젊은 수도승인 도명존자(道明尊子)와 문인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원래 인도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한 보살입니다. 이 보살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등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꿑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운 분입니다.
- 억겁을 흐르는 지장보살의 위신력 -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대성위신력)
恒河沙劫說難盡
(항하사겁설난진)
見聞瞻禮一念間
(견문첨례일념간)
利益人天無量事
(이익인천무량사)
지장보살님의 위신력이여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렵나니
보고 듣고 예배하는 잠깐 사이에
인천(人天)에 이익된 일 무량하여라
직지사 명부전은 고려태조 14(931)년에 능여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현종9년(1668)에 팔상전(八相殿)으로 중건되었다가 다시 명부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시왕상(十王像)을 봉안했다. 70년대초에 축대를 고쳐 쌓고 단청을 새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전각의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십대왕(十大王)을 봉안했다. 명부전에는 어느 절에서든 공통적으로 지장보살과 10왕을 봉안한다. 그것은 잘 알려진대로 지장보살은 ‘지옥의 모든 중생이 성불한 후에 내가 성불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분이기 때문이다.
또 10대왕은 인간이 이승의 인연을 마치고 난후 그의 생애를 심판하는 소임을 맡은 왕들이다. 때문에 명부전은 인간 사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전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명부전의 명부(冥府)라는 말 자체가 이미 이승이 아닌 저승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아무튼 직지사 명부전도 지장보살님과 10대왕을 모신 곳이며 그 앞기둥의 주련 내용도 지장보살님을 예찬하는 내용이다.
지장보살의 큰 힘은 ‘항하사’로 상징되는 길고 긴 시간을 두고 얘기해도 다하지 못한다는 앞 두 구절의 의미는 실로 불교적인 수치관이 잘 나타나 있다. 불교에서 쓰는 시간의 단위중 가장 큰 것이 이 겁(劫)이란 것인데 항하의 모래알 만큼 많은 겁을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크고 큰 위신력은 인간에게 매우 짧은 시간에 감응을 한다는 것이 뒷구절의 의미다. 즉 지장보살님을 보고 그 이름을 듣고 예배하는 한 생각의 틈새에 이미 한량이 없는 이익이 인간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이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후손의 부귀’‘망자의 극락왕생’‘소원성취’ 등을 두루 포함하는 의미이다.
비로전
고려 태조 때 능여 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 중 하나이다. 일명 천불전(千佛殿)이라 하는 이 건물은 고려 태조의 지원으로 능여조사(能如祖師)와 그의 제자 신홍(信弘). 혜안(慧安) 등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현종 2년(1661) 인계대사(印戒大師)가 중창하였고, 숙종 28년(1702) 정행대사(正幸大師)등의 중수와 함께 다시 1899년의 중수를 거쳐 1975년 주지 녹원화상(綠園和尙)이 중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며, 총 51평이다.
임진왜란떄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중 하나로 근년에 개수하였다.정면 7간,측면 3간의 맞배지붕이며 크기는 53평에 금단청을 하였다. 천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과거,현재,미래의 삼천불 중 현겁 천불을 모신 것으로 1992년 개금 불사가 완료되었다. 안에는 비로자나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석가여래와 노사나여래가 봉안된 삼신불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삼신불 둘레로 경주 옥석으로 조성한 천불상과 석조 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천불상은 고려시대 속리산의 경잠대사(景岑大師)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전한다. 천불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천불 중 현겁 천불을 모신 것으로 1992년 개금불사가 완료되었다. 또한 비로전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측백나무가 있다.
- 동자상(童子像)
천불상 중 독특하게 벌거벗은 동자 의 모습을 한 불상으로 법당에 들어가 첫눈에 이 동자상을 보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많은 임산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 천불상(千佛像)
경주 옥돌로 만들어졌으며 제작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천 개의 불상이 높이 30㎝, 둘레 26㎝ 정도로 큰 차이 없이 거의 같다. 모습은 각각 약간씩 다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겁(三劫)에 각각 천불이 난다고 하는데, 천불이라고 하면 현재의 겁에서 차례로 출현하는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俱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륵불(彌勒佛)을 비롯하여 마지막 천 번째의 누지불(樓至佛)까지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사찰에서 <천불도>를 모셨으며, 직지사와 함께 해남의 대둔사, 공주의 마곡사가 조선시대에 천불을 모셨던 대표적인 사찰로 꼽힌다. 직지사 천불전의 천불상에 관해서는 <천불 조성기>, <천불상 개분중수공덕주축원문千佛像改粉重修功德主祝願文> 현판 등의 사료가 전해 내려온다. 조성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천불이 처음 조성된 것은 조선 효종 7년(1656) 경잠景岑 스님에 의해서였으며, 정조 8~9년(1784~1785)에는 한꺼번에 259위位를 새로 조성하는 큰 불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1785년에는 옛 불상 741위를 도채塗彩 중수하고 2월 24일 점안하여 2월 25일 천불을 봉안하였다. 이때 금어는 당시 화사로 널리 알려진 유성有誠 스님 외 여러 사람이었으며, 화엄학의 종장宗匠으로 명성이 높던 영파 성규影波聖奎 법사가 증명으로 참여하였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뒤인 1896년에는 금분金粉 개채가 있었다. 최근에는 1975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천불에서 모자라는 40위의 불상을 석고로 조성하였으며, 1992년에 호분 위에 금을 올리는 불사를 했다. 이 금박이 트고 갈라져 2003년 11월부터 1년여에 걸쳐 기왕의 금박과 호분을 벗겨내고 옻칠을 한 뒤 4회에 걸쳐 호분을 입히는 불사를 행하였다. 이 때 천불상 중 7위가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모셔져 있다.
박물관에 이관된 천불상을 살펴보면 좌상의 경우 모두 선정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다만 선정인의 세부 표현 방법을 두 손을 옷자락 속에 감추어 두거나, 포개어 감싸는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어 제작 시기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살펴볼 이 상은 두 손을 옷자락 속에 넣고 있는 불좌상이다. 머리의 중앙에는 반원형의 중간계주와 정상에는 원통형의 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방형으로 이목구비는 큰 편이며, 입술을 두텁게 하고 턱을 둥글게 하여 양감이 풍부하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오른쪽에 반달 모양의 옷자락이 걸쳐져 있고 왼쪽 어깨에 세 줄의 세로선으로 옷주름선이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가슴에는 내의內衣가 접혀 사선형 주름이 나타나고 있다. 아랫배 부분에서 자락을 묶어 돌아 나온 끝단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선정인의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할 때 쓰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왼쪽 무릎을 완전히 덮은 나뭇잎 모양의 소맷자락은 17세기 후반 이후 제작된 불상 표현에서 보이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대좌를 덮은 군의裙衣 끝단이 주름을 이루어 오메가형Ω을 보이는 점 역시 특징적인데, 이러한 표현은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상정尙淨이 제작한 양주 회암사 <목조아미타불좌상>에서 보이고 있어 천불상 제작연대에 참고가 된다.
직지사비로자나불 복장물
佛腹藏은 부처, 보살 등 존상尊像 속에 복장 의식에 따라 여러 종류의 내용물을 넣는 과정과 그 내용물을 통칭한다. 불복장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 경남 산청 내원사에 모셔져 있는 석남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영태永泰 2년, 766) 대좌에 납석제 사리호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복장물을 넣었음을 알 수 있다. 복장물은 불상 뿐 아니라 탑과 탱화에서도 발견된다. 탑의 복장물은 사리와 함께 발견되고 있으며, 불상과 탱화에서는 이들을 만든 다음에 복장물을 봉안함으로써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불상佛像은 상 속에 여러 종류의 내용물을 넣는 의식을 통해 일반적인 조상造像에서 예배ㆍ신앙, 상징성을 지니는 존상이 된다. 복장을 봉안하는 그 순간부터 복장물을 시주한 이의 염원과 신앙이 담긴다. 이렇게 복장을 봉안하는 행위는 불교를 더욱 더 대중들과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복장 의식 및 복장 내용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상경造像經』의 정립과 함께 점차 일정한 형식과 절차를 갖추어 정형화된다.
직지사에서는 2006년 3월 3일 비로전毘盧殿 불상의 개채 중수를 계기로 비로자나불, 석가불, 약사불의 복장을 확인한 바 있으며, 이때 승가대학으로 쓰이는 남월료南月寮 큰방에 모셔진 불상 또한 개금改金을 위해 함께 조사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의 경우 밑면의 나무판을 떼어내자, 그 속에 봉안되어 있던 불상 조상기造像記 1점ㆍ『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3책ㆍ다라니경 1책ㆍ다라니 5점 등이 나왔으며, 노란 비단으로 여미고 한지로 싼 후령통喉鈴筒도 있었다. 나머지 불상들 또한 비슷한 복장물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 수습된 복장물은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불상에는 조상기를 비롯한 옛 복장기腹藏記를 그대로 베껴 쓴 글, 이번에 새로 개금하게 된 경위와 과정을 밝힌 삼존불상 개금기, 그리고 새로 마련한 복장물을 넣어 다시 봉안하였다. 당시 수습된 복장물 가운데 비로자나불상에서 나온 조상기와 후령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상기
비로자나불상의 복장 확인 때 후령통과 경전, 다라니 등과 함께 불상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인 조상기造像記가 나왔다. 이 기문은 ‘강희칠년무신오월초사일조상康熙七年戊申五月初四日造像’이라는 글로 시작된다. 그 뒤로 시주자, 화주, 화사 등의 명단이 적혀 있다. 강희 7년은 조선 현종 9년, 곧 서기 1668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처음에 적힌 문장을 통해 이 불상이 1668년에 조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조상기를 실마리로 비로전의 세 불상과 남월료 불상의 복장 확인 과정에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직지사에는 비로전과 관련된 몇 가지 기문과 현판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1707년 쓰여진 <직지사 천불전 중창기直指寺千佛殿重刱記>에는 비로전에 안치된 천불상은 1656년 경잠景岑스님이 처음 만들었으며, 비로전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661년에 창건되었고, 1668년에는 기일 機日스님이 천불상과 별도로 5구軀의 불상을 조성하여 비로전 불단에 모셨으며, 이들 다섯 불상은 1707년 개금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비로전에 모셨던 두 불상, 곧 비로자나불상과 약사여래상, 그리고 남월료 큰방에 모셨던 불상에서 나온 복장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이미 밝혔듯이 비로자나불상에서는 1668년에 조성하였다는 조상기가 나왔으며, 남월료 불상에서도 동일한 필치와 동일한 내용의 조상기가 발견되었고, 약사여래상에는 1707년에 개금하였다는 복장문이 들어 있었다. 이들 세 불상은 재질 또한 같아서 오늘날 흔히 ‘불석佛石’이라고 부르는, 경주 일원에서 산출되는 석재였다. 따라서 이들 세 불상은 1668년 기일스님이 조성한 5구의 불상 가운데 세 분임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그 동안 비로전에 모셔졌던 석가여래상에서는 순치順治 5년(1648)에 작성된 복장기가 발견되었고, 불상의 재질 또한 나무여서 앞의 세 불상과 일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짐작컨대, 1668년에 일괄 조성되어 비로전에 모셨던 다섯 불상은 1707년 이후 어떤 사정에 의해 여러 전각으로 뿔뿔이 흩어진 반면, 언제부턴가 다섯 불상보다 먼저 만들어진 석가여래상이 비로전에 함께 모셔졌던 듯하다. 이런 판단에 근거하여 사중寺中에서는 개금을 마친 뒤 비로전에는 비로자나불상, 약사여래상, 그리고 남월료 큰방에 모셨던 불상을 안치하고, 남월료 큰방에는 그 동안 비로전에 모셨던 석가여래상을 옮겨서 안치했다.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조상기를 통해 또 한 가지 확인한 사실이 있다. 그 동안 남월료 큰방에 모셔졌던 불상은 ‘보살상’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이유는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보발寶髮이 어깨 위로 늘어진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조상기에서는 존명尊名까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상이 ‘여래如來’라고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비로전을 비롯한 몇몇 곳에 보살형의 노사나불이 안치된 예로 보건대 이 불상 또한 노사나불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현재로는 더 이상의 명확한 근거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추정할 따름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불복장의 하나인 조상기는 불상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이를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음은 물론,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나 잘못 알려진 사실 따위를 확인하고 바로잡을 수 있기도 하다. 직지사 비로전 비로자나불상의 조상기를 비롯한 기타 복장문은 이와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 후령통
후령통이란 불상이나 불화 등을 조성할 때 함께 넣는 오곡五穀(다섯 가지 곡식), 오향五香(다섯 가지 향), 오약五藥(다섯 가지 약초), 범서梵書(범자梵字로 기록된 글), 오색사五色絲(다섯 가지 색실), 발원문發願文 등을 넣는 통을 말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후령통의 높이는 대부분 약 10~20cm 정도이다. 불상에는 원통형의 후령통을 넣고, 탱화에는 사각통이나 직물로 만든 탱화 복장낭 형태로 뒷면에 부착하거나 끈으로 양쪽을 매어 중앙에 늘어뜨린 형태도 있다.
후령통은 대부분 철이나 구리 등 금속재료로 만들지만 가끔 대나무, 목재, 종이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뚜껑과 본체를 따로 만드는데, 뚜껑에는 둥근 대롱을 끼워 넣어 오보병(오방색 보자기)을 둘러싼 오색실이 밖으로 빠져 나오는 통로가 되도록 한다. 본체 표면에는 산스크리트 문자를 써넣고, 내부에는 색실로 묶은 오색천을 넣어 빈 공간을 채운다. 복장을 넣을 때는 보자기로 잘 싸거나 복장 주머니에 넣어 통 안에 보관한다.
후령통의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물은 이미 많은 부분 알려져 있는데, 『조상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물목들이 모두 들어간 예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오보병의 모습이나 오보병 안에 대표적으로 들어가는 번幡, 산개傘蓋, 금강저金剛杵, 오곡, 오향 등의 구성 요소는 공통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직지사 비로전 비로자나불 복장 확인 과정에서 수습된 후령통의 주위를 싸고 있는 황초폭자(黃綃幅子: 후령통을 감싸는 황색의 보자기)는 후혈喉穴(뚜껑에 있는 둥근 대롱)에서 연결되어 나온 오색실로 묶여 있다. 이 묶은 부분을 한지에 주사로 ‘근봉謹封’ 이라는 글자를 써 넣어 봉하였다. 황초폭자를 벗긴 후령통 외부에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사방경(四方鏡-동쪽은 방경方鏡, 서쪽은 원경圓鏡, 남쪽은 삼각경三角鏡, 북쪽은 반월경半月鏡)이 오색실로 묶여 있다. 후령통의 뚜껑을 열면 후혈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 있는 오색실이 오보병과 연결되어 있다. 오보병의 위쪽에는 연꽃 모양을 묘사한 금속의 팔엽八葉이 있다. 오보병은 오색실로 감겨 있는데, 실을 풀면 각각 분리된다. 각각의 오보병은 사방을 접어 말아 감싸 오색실로 묶었다. 오보병을 풀어보지 않아서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번ㆍ산개를 본 떠 만든 모양의 천, 오곡, 오약, 오보 등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보병은 비로자나불의 다섯 가지 지혜의 보배를 상징하고 있다. 오경은 다섯 가지 지혜를, 오향은 다섯 가지 부처님의 향기를 표시하고, 오약은 다섯 가지 병을 다스리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등 오방위에 맞게 안치되는 여러 물목들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 오보병 이외에도 진언眞言이 적힌 종이, 흰 수정으로 만든 연봉蓮峰(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는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연화장 세계를 표현하는 장엄물) 등이 수습되었다.
고려시대나 조선 전기 복장의 경우 대부분 복식을 포함한 직물과 지류가 많이 수습되나, 17세기 이후에는 후령통 중심으로 복장이 이루어진다. 후령통 안은 오보병 중심으로 간략화된다. 지류 부분에서도 상당히 축소되어 보협인다라니나 오륜종자진언五輪種字眞言 중심의 소규모로 나타난다. 전적 또한 일반적으로 『묘법연화경』이 복장물로 납입된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다양한 불교문화의 퇴행이 이루어지는데, 불복장 또한 간략화되고 형식화되는 모습들은 이런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직지사 비로전 비로자나불상 역시 17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후령통ㆍ묘법연화경ㆍ보협인다라니 등이 복장 안에 채워졌으며, 개별의 복식이나 직물은 나오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의 복장이 이루어졌던 듯하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985년 일본 청량사淸凉寺에 봉안된 석가모니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중국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인간의 오장육부를 직물로 형상화하여 복장을 하였다. 또한 많은 수량은 아니지만 일본의 경우 발원문을 비롯하여 전적, 직물 등이 발견되고 있어 한국과 일본은 복장물이 대략적으로 같은 형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수량적으로나 질적인 면, 또 형식적인 면을 살펴볼 때, 현존하고 있는 복장 유물들은 독자적인 모습으로 발전해나간 한국 불교문화의 독창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렇게 불상 안에 봉안된 복장물은 단순히 존상의 빈 공간을 채우는 물건이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다. 또한 그 속에는 성스러운 물건들을 넣어 부처님의 생명력과 위신력을 부여하고자 했던 종교적인 염원이 담겨 있다.
비로전 앞 삼층석탑
비로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으로 1976년 보물 제607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대웅전 앞 삼층석탑 2기와 함께 도천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단층으로 형성된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바닥돌은 넓적하게 짜여져 있으며, 그 위로 여러 장의 석재를 조성한 2단의 높직한 괴임을 두어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은 몇 장의 판석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석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다. 옥개석은 얇고 평평한 편으로 밑면의 받침을 5단씩 두었고, 날카롭게 들린 네 귀퉁이로 인해 경쾌함이 느껴진다.
초층 탑신석이 2·3층에 비해 높은 편이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절한 세련된 모습으로, 9세기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 높이는 약 900㎝이다. 상륜부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사명각
사명각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호국대성(護國大聖) 유정(惟政)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여 대사의 유덕(遺德)을 기리는 건물로서 조선 정조 11년(1787)에 창건되었다. 수차례 중수를 거쳐 녹원 화상에 의하여 석조축대를 신축하고 건물은 해체 복원(1975.2.24~75.12.30)하였다. 대사의 속성은 임(任)씨 자(字)는 이환(離幻)이며, 법명은 유정(惟政) 법호는 사명(四溟) 또는 송운(松雲)이다.
사명각(四溟閣)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안에는 직지사에서 출가하여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지휘하여 호국에 앞장섰던 사명 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1544년 10월 17일에 경남 밀양의 무안면 고나리에서 태어나 15세에는 황악산(黃岳山) 아래 유촌(柳村) 황여헌(황여헌)으로부터 유학을 수학하더니 곧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하여 주지 신묵화상(信黙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18세가 되는 명종 16년(1561)에는 선과(禪科)에 합격하고, 30세인 선조 6년(1573)에는 직지사 주지가 되었으며, 49세가 되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적의 진중에 여러차례 드나들며 왜적을 설득하여 백성들의 화를 면하게 하더니 선조 37년(1604)에는 61세의 몸으로 일본에 건너가 억류되었던 포로 3000여명을 대리고 귀국하므로 선조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삼아 어마(御馬)를 하사하는 등 대우가 극진하였다. 광해군 2년(1610) 67세를 일기로 가야산 해인사에서 입적(入寂)하니 시호를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고려 태조 14년(931) 능여 대사가 창건 하였으나,임진왜란에 전소되었던 것을 효종 7년(1656) 관음전으로 중건 하였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개액 하였다. 이 건물은 그 후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중수 되었는데 이때는 기와 번와, 단청 및 석조 축대까지 신축(1970.3.1~1971.11.30)되었다. 사명각 뒤, 비로전 좌측에 있다.
성좌각
대웅전 향 우측에 있다.성좌각은 쉽게 볼 수 없는 편액인데 삼성각과 같은 역활이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익공형식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고 창호는 빗살문살로 짠 문을 달았다.안에는 독성(獨聖)과 산신(山神),칠성(七星)을 모시고 있으며.중앙에는 칠성탱화가 있다. 하늘의 별인 북두칠성은 하늘의 일월성진을 다스리고 천재지변을 통솔하는 주제신으로 승격하게 된다. 신으로 숭배되어온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부처님으로 승격시키고 칠성의 주존을 치성광여래로 모시며 그림으로 도상화 한석이 칠성탱화다, 칠성을 대표하는 주존인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해와 달을 보살화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북두칠성을 보살화한 칠 여래등이 배치되어 있다.
삼장탱
중앙에 법신(法身)인 천장(天藏)보살, 좌우로 보신(普神)인 지지(地持)보살과 화신(化身)인 지장(地藏)보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삼장보살탱화는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보이는 경우로 지장보살탱화에서 발전하여 확대된 신앙으로 보입니다.
석조 나한좌상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 나한좌상으로 1997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45㎝, 무릎 너비 28㎝의 아담한 크기로, 본래 서운선사(瑞雲禪師)가 지니고 다니던 원불(願佛)로 전해진다.
이 나한상은 호랑이를 어르는 모습에서 18나한상 중 열세 번째 인게다 존자임을 알 수 있는데, 기품과 사실적 표현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크기는 전체 높이 45㎝, 머리 높이 16㎝, 머리 너비 11㎝, 어깨 너비 17㎝, 무릎 너비 28㎝, 무릎 높이 11㎝이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문화의 절정기인 인종(재위 1123∼1146), 의종(재위 1147∼1170)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전
약사전은 동방유리광정토를 표출시킨 법당으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신앙이 사후의 신앙을 기본으로 하는 반면에 약사여래신앙은 현실적 이익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약사여래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는 힘을 갖고 있는 부처로 대중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왼손에는 약사여래의 특징적 모습인 약합을 들고 있다. 보물 319호인 석조여래약사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 양식을 반영하는 약사여래상은 마멸이 심하나, 전체적인 윤곽은 광배와 함께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성보박물관에 모셔서 상시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성보박물관 입장료 1,000원(?)을 별도로 받고 있어 보지 못하다. 스님들이 돈을 너무 밝히는 것이 아닌지...
석조 약사여래좌상
보물 제319호. 총높이 161cm, 상높이 126cm. 광배와 불신(佛身)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나 사각형의 대좌가 원래 함께 있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머리와 큼직한 육계(肉髻)는 소발(素髮)로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심하게 마멸되어 세부표현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어깨는 둥근 편이며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갔으나 가슴은 볼륨감 없이 빈약하게 처리되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걸쳤으며 옷주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간략하게 흘러내리면서 결가부좌한 다리의 중심으로 몰려 있어 형식화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으나 다리 위에 놓인 왼손은 약함을 들고 있어 일반적인 항마촉지인과는 약간 다르며 손과 무릎이 밀착되지 않아 마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 어색한 느낌을 준다. 불신(佛身)과 한 돌로 조성된 광배는 폭이 넓은 편이며, 넝쿨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전반적으로 세부표현이 둔감해졌으며 광배의 무늬도 세련미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계승한 약사여래좌상으로 볼 수 있다.
광배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인데 2줄의 선으로 구분된 두광과 신광에는 당초무늬를 조각하고 그 바깥쪽으로는 화염무늬를 장식했으나 선이 굵고 생동감 없이 처리되었다. 이 불상은 불신에 비해 머리와 무릎 부분을 크게 표현하여 전반적으로 균형감을 이루지 못하고 빈약한 체구나 어색한 손의 위치, 간략한 옷주름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과는 차이를 보이므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풍료앞 삼층석탑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6㎞되는 원동(院洞)에서 낙동강가를 따라 1㎞쯤 떨어진 강창(江倉) 부락의 강락사지(江洛寺址)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당시 선산 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년 10월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촬영된 사진을 보면 1917년만 하더라도 완전한 상태였으나, 그 뒤 일제강점기 말에 도굴범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1993년 보물 제1186호로 지정되었다.
구조는 단층기단 위에 3층을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가 얹혀져 있다.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면의 중앙에도 기둥 하나씩을 조각해 두었다. 탑신석은 탑신과 옥신석을 각각 한 돌로 짜고, 탑신석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다. 옥개석은 밑면의 받침수가 각 층 모두 5단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고,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의 상륜부는 이곳으로 옮겨 세울 때 같은 시기의 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옥개석의 반전(反轉)된 모습과 밑면의 받침 수, 그리고 각 부의 세부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탑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900㎝, 3층 옥개석까지의 높이 510㎝이다.
직지사 성보박물관
1996년에 문을 연 직지성보박물관은 직지사를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인 김천, 상주, 구미, 문경, 예천 등지의 여러 절에서 전해오는 불교문화재를 보관, 전시, 연구하는 불교전문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에는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국보 제208호), 김룡사 사인비구주조 동종(보물 제11-2호), 직지사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 319호), 한천사 출토 금동자물쇠와 청동반자(보물 제1141호), 예념미타도량참법(보물 제1241호), 백지금니금강보문발원합부 사경(보물 제1303호), 묘법연화경(보물 제1306호), 석조나한좌상(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16호)등의 지정문화재를 포함한 2000 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가례증해 판목
『가례증해(家禮增解)』 목판은 이의조(李宜朝)가 관혼상제의 예법을 전국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우리나라의 여러 설을 열거하고 증보 해석하며, 자기의 설을 첨가하여 1771년에 완성한 『가례증해』의 초판본 목판이다. 1974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이 판목은 1792년 직지사에서 느티나무를 이용하여 김풍해 등이 3년의 작업에 걸쳐 1794년에 완성하였다. 총 475매의 목판으로 새긴 기술이 우수하고 전국 유일의 것으로 보존이 잘 되어 가례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7
예념미타도량참법<권제6∼10>(禮念彌陀道場懺法)
『예념미타도량참법(豫念彌陀道場懺法)』은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죄를 참회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교 의식의 절차를 수록한 목판본으로, 권제6∼10권이 1996년 보물 제1241호로 지정되었다. 권제1∼권제5는 보물 제949호로 지정되었다.
책 끝에 있는 김수온(金守溫)의 글을 통해 1474년(성종 5) 세조의 비 자성대왕대비가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목판본으로 1503년(연산군 9) 해인사에서 인출(印出)한 것이며, 왕실과 고승 및 당시 일류 기술자들이 총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써 있는 것이 보물 949호와 다르다. 그러나 판의 새김이나 인쇄상태가 처음의 것에 비해 손색이 없다.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그 무렵 책들의 간행연대를 추정하는 근거가 되며, 서지학과 불교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책의 내용은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제악업(諸惡業)을 참회하고 보리심을 내어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법회의 절차를 수록한 것이다.
백지금니금강보문발원합부(白紙金泥金剛普門發願合部
고려 공민왕(恭愍王) 20년(1371)에 비구니(比丘尼) 묘지(妙智), 묘수(妙殊)의 시주(施主)에 의해서 사성(寫成)된 것이다. 권수(卷首)에는 일반적인 경변상(經變相)과는 구도가 다른 협시보살을 거느린 불상과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각각 금니(金尼)로 묘사되어 있고, 이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제25(妙法蓮華經 觀世音菩薩 普門品第二十五), 영가대사 발원문(永嘉大師 發願文)이 필사되어 있다.
권말(卷末)에는 "홍무4년 신해 7월 일지(洪武四年辛亥七月日誌), 시주 비구니묘지(施主比丘尼妙智), 동원 비구니 묘수(同願比丘尼妙殊)"의 지기(識記)가 있어 시주지와 사성연대(寫成年代)를 알 수 있다. 고려본에서만 적용되고 있는 피휘결획(避諱缺劃)은 연호의 "武"자가 혜종 이름이므로 내리긋는 획이 결획되었다. 서체는 고려말에 일반적으로 쓰여진 안진경체(顔眞卿體)로 쓰여졌으며, 당시의 불교신앙의 일단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묘법연화경
이 사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조계종의 대선(大選), 신희(信希) 등이 기로(耆老)들을 위해 보기에 편리하도록 중자(中字)로 간행하기를 원했는데 성달(成達生)·성개(成槪) 형제가 상중(喪中)에 이를 듣고 선군(先君)의 추복(追福)을 위해 필사(筆寫)한 것을 도인(道人) 신문(信文)이 전라도(全羅道) 운제현(雲梯縣) 도솔산(兜率山) 안심사(安心社)에 갖고 가서 조선 태종 5년(1405)에 간행(刊行)한 것이다. 권수(卷首) 앞에는 정씨(鄭氏)라는 사람의 시주로 고려(高麗) 우왕(禑王)의 극락왕생을 위해 변상을 그리고 목판에 새겨 유통시킨다는 글이 담긴 변상도가 있다. 이어 송(宋)의 급남(及南) 화상(和尙)이 쓴 묘법연화경 요해서(妙法蓮華經要解書)가 나오며 본문(本文)에는 묵서(墨書)로 쓴 구결(口訣)과 두주(頭註)가 있다.
권말(卷末)에는 권근(權近)의 발문(跋文)에 이어 토산군(兎山郡) 부인(夫人) 김씨(金氏), 전사헌시사 송결(前司憲侍史 宋潔)의 처(妻) 영인(令人) 원씨(元氏) 등의 시주자(施主者) 명단이 있다. 후쇄본(後刷本)으로 상태가 비교적 양호(良好)하고 서발(序跋)·변상도(變相圖) [지기(識記)]가 완전하여 묘법연화경 간행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정종대왕의 태실(胎室)
직지사 대웅전 뒤로는 조선 2대 정종대왕의 태(胎)가 묻힌 태봉이 자리하고 있다. 산신, 칠성, 독성 세분을 모신 성좌각을 돌아 10여분 남짓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울창한 송림(松林)속에 태실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태를 매장하는 의식은 중국에도 있었으나 이를 왕실에서 제도화하여 일정한 격식과 절차에 따라 태봉을 선정하여 석물을 배치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 왕가의 태 처리를 나라의 국운과 결부시켜 엄격한 규율에 따라 장태법(藏胎法)을 마련해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직지사 태봉의 주인공인 정종대왕(定宗 1357-1419 )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1399년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라 1년간 재위한 조선2대 임금으로 그 다음 해인 1400년에 아우인 태종 에게 양위한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1399년 정종이 즉위한 해에 태봉이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고려 공민왕때 출생한 정종의 태가 조선왕조 개창후인 1399년에야 이곳에 안태된 것으로 볼때 당시 사대부가의 관습상 다른 곳에 임시 안태했던 태를 등극 후 이곳으로 이안한 것으로 보인다.
정종대왕의 태봉은 원래 직지사 북쪽에 위치하여 북봉이라 했는데 계란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 해발 50미터에서 1백미터 미만이어야 하며 전면에 들판이 전개되어 있어야한다는 1등급태봉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갗추고 있다. 특히 왕자의 태실중에서도 왕으로 등극한 경우에만 행해지는 가봉(加封)태실로 웅장하게 세워졌던 이 태실도 1926년 일제에 의해 전국에 산재한 태실의 훼손을 막는다는 구실로 무차별 훼손이 되었는데 태실내의 태항아리만 꺼내어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집단 안치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조선왕실의 정신적 지주인 태실을 훼손하여 우리 역사를 부정하려는 흉계에서 비롯된 만행이리라. 이후 직지사 태실도 가봉 태실비를 비롯한 수많은 석물 들이 도난또는 훼손된 채 일부 석물만이 남아 주변에 어지럽게 산재해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있다.다만 태실의 중심인 중동석이 현재 극락전 잔디밭으로 옮겨져 보존되어있고 울타리석 8개중 두개가 청풍료앞에 또다른 1개가 태봉정상 비탈진 구석에 남아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정종대왕의 태실이 1399년 우리고장에 안치된 것은 역사적으로볼 때 큰 의의가 있는데
첫째, 왕가의 태실이 김천땅으로 들어옴으로 해서 1416년 김산현이 어모현을 폐합하여 김산군으로 승격하게 된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로 조선의 배불 정책으로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박해를 받게 되었음에도 정종대왕의 태실이 사찰 경내에 있다는 사실로 인해 직지사가 태실을 수호하는 수직사찰(守直寺刹)로 지정되어 탄압의 그늘에서 비켜날 수 있었고 일정 부분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아 조선말까지 사세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이같이 김천 역사의 중심이 되었던 큰 사건인 정종대왕의 태실이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왜곡되고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는 일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 김천인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