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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구십 구 세 때에 -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온 지 25년째가 되던 해로(12:4) 후손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단절된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나이이다(17,18절). 이처럼 인간에겐 절망적인 그 순간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비로소 역사하시는 시간인데, 이는 연단을 통해 우리의 신앙 인격을 보다 성숙시키고 또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케 하려는 목적이 있다(롬5:4).
전능한 하나님(엘 솨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경우이다. 이 명칭은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따라서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절망중에 있는 당신의 종들에게 이 이름으로 찾아가셨다. 즉 이 이름으로 벧엘의 야곱을 위로하셨고(35:11), 미디안의 모세에게 확신을 주셨으며(출 6:3),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찾아가셨다(욥 40:2). 지금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름을 통하여 비록 아브람이 늙었으나 그로 하여금 열국의 아비(4절;15:5)가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당신께 있음을 재천명하신 것이다.
내 앞에서 행하여 - 직역하면 '내 앞에서 걸어가라'(walk before me). 곧 '목전(目前) 에서 행하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의식하에 매사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신앙과 그분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라는 교훈을 준다(잠 3:1-7).
완전하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 )은 원래 전혀 비난할 것이 없거나 흠이 없는 깨끗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르지 못할 영역이다. 따라서 여기서 요구되는 완전은 무한성을 가지는 하나님의 완전(마 5:48)과는 달리 그러한 완전을 지향하는 노력을 가리킨다 하겠다. 한편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람에게 이같은 명령을 주신 까닭은, 다시는 그가 축첩으로 인한 실수(16:2)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7:2
내 언약 -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이끄시는 언약 또는 사람들과 이미 체결해서 잘 알려진 언약(6:18;9:9)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특별히 아브람에게 거 듭거듭 주셨던 후손과 기업에 대한 약속을 가리킨다(12:1-3;13:14-17;15:1-7).
나와 너 사이에 세워 - 반복된 약속에다 인준까지 마친 하나님의 언약이 마침내 실현될 때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아브람이 이 말씀을 받은 때가 99세이고 이삭을 낳은 때가 100세이니(21:5) 이 말씀을 받은 지 얼마 안 있어 사래가 이삭을 잉태,하나님의 후손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3
엎드린대( , 나팔 파님) - '나팔'(떨어뜨리다)과 '파님'(얼굴)이 복합된 말로 얼굴을 비롯한 온 몸을 땅에 완전히 대고 엎드린 것을 가리킨다. 이는 지극한 경외의 자세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배자세인데(왕상 8:54).이로써 아브람은 자신의 축첩행위로 인하여 발생되었던 그간의 가정 불화 및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회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과 순전한 삶을 갖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렘 2:19).
일러 가라사대 - 순전한 마음가짐과 합당한 자세를 갖춘 아브람에게 새로운 축복(언약의 갱신)을 주시려는 일성(一聲)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어그러진 길로 나갈 때에는 훈계와 책망을 발하시며(1절), 또한 그 음성을 듣고 돌이킬 때에는 또 다른 축복을 주시는데 이러한 꿀임없는 은혜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멸망치 않고 마침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롬 3:23,24).
17:4
열국의 아비 - 1차적으로 이 말은 이스마엘에게서 비롯된 모든 종족과 민족들(25:12-16), 아브람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퍼진 여러족속들(25:1-4), 아브람의 후손이면서, 갈리어 나간 민족인 에돔 족속(36:1-19) 등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나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축복(12:3)을 나눠 가지게 된 아브람의 영적자손을 염두에 둔 말이다(롬 11:7-12).
17:5
아브람...아브라함 - 후일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이름을(32:27,28),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요1:42)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새 언약과 함께 주신 새 이름이다(엡 3:;계 2:17). 히브리인들은 보통 할례를 받을 때 이름이 주어지는데(21:3,4;눅 1:59,60;2:21)아브람 역시 할례를 받기 직전, 이러한 새 이름을 받은 것은(9-14,23-27)(1) 직접적으로는 언약의 갱신을 상징한 외적 표식이나(2) 영적으로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와서 맺을 새 언약(고전 11:25)에의 동참을 상징한다.
17:6
심히 번성케 - '번성케'는 히브리어 '파라'(결실하다)와 '라바'(너무 많다)가 결합된 말로 주체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에 '심히'(exceedingly)라는 말이 첨가되었으니 그 풍성한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것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인데(시 127:3-5) 하나님께선 천지 창조 직후에도 이러한 축복을 주셨고(1:28), 노 아(9:1), 이스마엘(20절), 이삭(26:4,24), 야곱(28:3) 그리고 요셉(48:4)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주셨다.
열왕이...좇아 나리라 - 이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여러 나라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그의 후손 중에서 유명한 통치자, 현군(賢君)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었다. 이 예언은 특히 다윗왕과 솔로몬왕을 통헤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
17:7
세워서(하키모티). '쿰'(공고히 하다, 설립하다)의 과거 완료형으로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언약을 재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재확인된 사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히 미친다는 점이었다(13:15,16).
영원한 언약 -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이 혈통상 그의 직계 자손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녀로 삼으신 모든 인간들에게도 공식적으로 적응될 것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당시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언약의 연속성을 강조하였고(행 2:39) 사도 바울 역시 이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행 4:31).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 구원의 약속을 함축하고 있는 말로서 곧 모든 언약 내용의 핵심이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언약을 맺은 자들에게 은혜로 많은 은사를 주실 뿐 아니라 마침내 자신까지도 내어주신다. 이는 곧 인간 구원을 예기케 해주는데 ,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 자체로서(요 14:6)자신과 교제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이다(요 17:3).
17:8
영원한 기업 - 하나님의 약속대로(12:7;13:15) 가나안 땅은 훗날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속되었다(수 11:16-23). 그러나 후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가나안 땅을 영속적으로 차지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범죄할 때마다 그 땅에서 쫓겨났다. 그 최근의 예가 A.D.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근 2,000여년간의 디아스포라(Diaspora) 사건(마 24:15-28)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는 말이 조건부적인 성격의 언약임을 알 수 있다(Pulpit Commentary). 그 조건이란 곧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간주의 '믿음'과 '순종'인데(9절) 이러한 언약의 조건성(條件性)은 출 19:5,6;신 4:25-31;7:9-13;호 9:17 등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인간측이 그 언약에 대해 합당한 반응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든지 그 효력을 발생한다는 점에서 그 언약은 여전히 '영원한 언약'이다. 같은 맥락에서 천상 가나안도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이다.
17:9
그런즉 너는...지키라 - 언약의 내용이자 조건이다. 특별히 여기서 '너'는 언약의 대상이 되는 아브라함의 역할을 강조하는 말인데 이는 언약의 주체자로서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는 '나' 라는 말과는 대조가 된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조건들을 규정하신다는 점에서 본질상 하나님의 언약이 일방적인 성격을 지니나, 모든 언약이 그러하듯 이 언약에서도 이처럼 언약의 내용과 조건을 준행하여야 할 쌍방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17:10,11
할례를 받으라...양피를 베어라 - 남자 성기(性器)의 표피 윗부분을 제거하는 할례 의식은 당시 이미 중동 지역에 널리 퍼진 성년 의식이었다. 즉 양피를 제거하는 이러한 의식은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들만이 아니라 이스마엘 족속, 에돔 족속, 암몬 족속 그리고 애굽인들도 이를 시행하였는데 아마 암몬 족속같은 경우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으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탐사 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의식이 페니키아인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그리고 남태평양 군도 등의 여러 부족사이에서도 행해졌다는 것이 판명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관련하여 이러한 의식에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셨는데 그것은(1)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육신적인 죄와 부정을 떨쳐 버린다는 정결 의식의 상징적 표현이며(Calvin) (2) 거듭난 새 생명의 정화(淨化)를 상징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번식 기관인 생식기의 성별과 성화가 요청된다는 의미이다.
17:12
대대로 남자는 - 구약 시대, 옛 언약(히 8:7)하의 모든 의식은 인자(仁者)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했기 때문에 재물은 대개 수컷이었고(레 1:3-13) 의식(儀式)에의 참석 역시 남성 위주였다. 그러나 성경에서 여성은 남성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2:21-24;엡 5:22-33) 그 효력의 범위와 영향은 양성(兩性) 모두에게 해당되었다. 따라서 할례 의식 역시 여성을 대표하여 남성이 행하는 상징적 의식임을 알 수 있는뎨(Calvin),이는 할례를 대신할 신약 시대의 세례 의식에 뭇 남성과 여성이 다 함께 참석하고 있는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행 8:12).
집에서 난 자나...무론하고 - 이처럼 아브라의히 후손 뿐 아니라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모든 자를 할례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보편성을 보여 준다. 이는 신약 시대 교회의 보편성(우주성, catholicity))과 맥락을 같이 한다(행 2:39).
난 지 팔 일만에 - 이 때 할례를 실시하는 이유는 먼저 생리적으로 유아가 별로 통증을 느끼지 않으며 동시에 피가 가장 빨리 응고되는 최적기(最適期)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상징적 이유가 있는데(1) 의식상, 새로 태어난 남자 아이는 7일 동안 부정하므로(레 12:2) 그 이전에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림이 합당치 않기 때문이고(2) 구속사적으로, 제 팔일은 안식일이 지난 첫번째 날로서 그리스도의 부활(마 28:1;막 16:2;눅 24:1;요 20:1)과 함께 새롭게 출발하는 '새 생명'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0,11).
17:13
너희 살에 있어 - 일단 할례 의식을 통해 육신의 살에 새겨진 언약의 징표를 보고 하나님의 언약 내용을 마음 속 깊이 새기라는 말이다(롬 2:29). 이것은 마치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의 심비(心碑)에 새겨지지 않는 한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17:14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하에 있는 공동체로부터 제외될 것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언약과 무관한 자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Augustine,Willet,Calvin,Murphy,Inglis). 여기서 물론 할례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의식에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 내용의 준수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 그것을 경홀(輕忽)히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은총에서 배제되는데, 이는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롬 1:17)을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는 것을 예표한다.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 비록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모든 언약은 인간의 죄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따라서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 구속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언약 내용을 충실히 준수하여야 할 책무가 있다(9절). 따라서 만일 인간이 그 책무를 게을리하거나 고의적으로 협정 내용을 위반할 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일이 되어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무효화 되고 마는 것이다.
17:15
사래...사라 -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과 마찬가지로(5절) 사래에게 '사라'라는 새 이름이 주어진 것은 그녀가 아브라함과 더불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혈통을 좇아 날 예수 그리스도(15:4)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될 수 많은 영적 자녀의 어미가 되는 것을 뜻한다. 혹자는 이제 사래가 교회의 어미가 된다는 뜻으로도 보았다(Jerome, Augustine),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바 사래의 개명(改名)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 관계 수립이라는 구속사적 의의를 지닌다.
17:16
이삭을 낳아 주게 하며 - 아브람에게 약속된 후사가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적자(嫡子)임을 분명히 계시해 주는 최초의 경우이다(15:4). 즉 지금까지 거듭되어 왔던 자녀에 대한 약속 성취가 눈앞에 이르른 현시점에서 이제 하나님은 그 최대 관심을 약속의 자녀를 낳을 당사자인 사라에게 쏟고 계시는 것이다.
열국의 어미가 되게 - 직역하면 '그녀가 열국에서 되도록'(She shall become of nations). 그러나 KJV,NIV,RSV등과 같은 대부분의 영역본은 이를 '그녀가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다'(She will be a mother of nations)로 의역(意譯)하고 있다. 공동 번역과 한글 개역 성경도 이러한 번역을 그대로 취하고 있는데 이는 '사라'(여장부, 여주인, 공주)라는 이름에 걸맞는 번역이다.
17:17
엎드리어 읏으며 - 여기서 '엎드리어'( ,이폴 알파나우)는 이미 3절에 나온 것(엎드린대)과 동일한 말로 얼굴이 땅에 닿을 정도로 부복(俯伏)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웃은 것에 대하여서는 불신앙적 태도인지, 아니면 너무 기쁜 나머지 깜짝 놀란 웃음인지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웃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하크'( )는 흥에 겨운 '큰 웃음'과 함께 '경멸의 읏음'도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요8;56에 근거해 아브라함의 이 읏음은 믿음의 눈으로 사라를 통해 이삭 뿐 아니라 장차 메시아가 날 것까지 보고 기뻐하였다는 견해를 취한다(Augustine,Calvin,Delitzsch).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영적인 해 석에 치우친 무리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사라의 회임(懷姙)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였으며 곧 이어 이스마엘이나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기를 하나님께 기원하였기 때문이다(18절). 따라서 아브라함의 이 웃음은 비록 일순간적이긴 하지만 90세 된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온 미소같은 웃음이라 하겠다.
사라는 구십 세니 - 사라의 향년이 일백 이십칠 세였으니(23:1) 이 때는 사라가 폐경기(閉經期)에 들어선 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사라의 수태 가능성에 대하여 회의를 표명한 것은 인간적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만일 아브라함이 한시라도 하나님의 전능성(1절)과 약속의 신실성(삼상 15:29)을 잊지 않고 있었더라면 인간적인 모든 의심은 도리어 기쁨과 감사의 읏음으로 화하였을 것이다.
17:18
이스마엘이나...살기를 -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15:2,3)라고 대답한 것과 똑갈은 식의 반응이다. 즉 위로해주시는 말과 그 뜻은 고맙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나마 언약이 성취되기를 바란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 방식을 드러내 주고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혹자는 각도를 달리하여 본절의 '이스마엘이나'를 '이스마엘 역시'로 보고,아브라함이 언약 외의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축복에서 배제당하지 않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보기도 한다(Lange,Keil,Rosenmuller). 이러한 견해도 문맥에 따라서는 상당히 일리있는 견해이다.
17:19
이삭( , 이츠학) - '차하크'(읏다, 17절)에서 파생된 말로 '그가 웃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대로 아브라함은 훗날 이삭탄생 이후 이삭을 볼 때마다 기쁨의 웃음을 띠었겠지만 반면 한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신앙의 웃음을 읏었던 지난날의 과오를 상기하며 신앙의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영원한 언약 - 오고오는 후손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언약(3:15)은 결코 한 개인이나 한 세대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와 더불어 계속 발전, 확장되어 마침내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됨이 또다시 확실하게 계시되었다.
17:20
네 말을 들었나니 - 직역하면 '내가 너를 이해하였다', '내가 너를 경청하였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형편과 처지를 헤아려 주시고 그 간구하는 바를 들어 주셨다는 뜻이다.
크게 번성케 할지라 - 아브라함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일 뿐 아니라 일찍이 하갈에게 약속하셨던 축복(16:10)의 재확인이다. 한편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죽지 않기만을 간구하였는데(18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보존은 물론 자손 번성까지 약속해 주셨으니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후하심'(시 86:5)을 재삼 깨달을 수 있다.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 이 약속은 25:12-16에서 성취되었는데 그 열 두 방백은 주로 아라비아 중부 및 북부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멀리로는 바벨론 지역에까지 진출하였다.
17:21
명년 이 기한 - 계속된 언약의 반복을 통하여 마침내 구체적인 이삭 탄생 시기가 계시되었다. 이처럼 계시는 하나님의 계획된 뜻에 따라 점진적으로 주어지는데 인간에게는 비록 더딜지라도 언약된 바가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는 데에 그 특성이 있다(합 2:3).
17:22
떠나 올라가셨더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는 1차적으로 '오르다', '올라가다'는 뜻 외에 2차적으로 '회복하다', '복구하다', '거두어 들이다'는 뜻도 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형상을 입으시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계시하신 후 본연의 무형상적 실체로 돌아가셨다는 뜻이기도 하다(35:13).
17:23-27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순종 기사이다. 그는 할례의 이유에 대하여 일언 반구도 없이 말씀하신 대로(23절) 다 순종하였으며 당일에(26절)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
17:24
구십 구 세 - 17절의 '백 세'와는 상치된 말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7절은 '백 세를 목전에 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17:25
십 삼 세이었더라 - 오늘날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 족속들은 생후 8일째에 할례를 시행치 않고 13세 되는 해에 시행하는데(Josephus) 아마도 이것은 자기네들의 시조(始祖)인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던 때를 기리기 위함인 듯하다.
후손에 대한 언약이 성립되지 않자 조급한 나머지 하갈과 동침함으로써 가정의 분란과 갈등을 조성했던 아브람에게 그 일이 있은지 13년 후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새롭게 확인하셨다.특별히 본장에서는 그 언약의 확실성을 입증 하시기위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는 동시에 영원한 언약의 증표로 '할례의식'을 제정하였다.이러한 거듭되는 하나님의 약속은 다음 장(18장)에 이르러 거듭된 이삭 출생 예고를 통하여 더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제시되었다.
본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언약의 재차 확인에 앞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스스로 밝히신 장면(1절)과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심으로 명실 공히 언약 가계의 선조로서 후손과 땅에 대한 미래적 약속을 현실화 하시는 장면(2-8절) 및 영원한 언약 백성의 표시로서 '할례'를 명하시는 장면(9- 14절) 그리고 사래로 인하여 약속의 후손이 태어날 것과 언약 가계의 실질적 조상으로 인치시는 표시로 그녀의 이름을 사라로 개명하시는 장면(15-22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 가족중 모든 남자가 할례를 실시하는 아름다운 순종의 장면(23-27절)이 언급되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언약을 확인하시는 도중 3-8절 사이에 '나'라는 단어를 무려 일곱번씩이나 사용하심으로써,그 언약의 주체자가 바로 당신이라 는 사실과 그렇기에 그 언약을 기필코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셨다. 결국 언약 가계의 형성은 아브라함의 특출함에서 기인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배후에서 인내로, 사랑으로, 약속으로 일관하셨던 하나님에 의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기인한다(엡 2:1-9).
1. 언약의 갱신과 할례(17:1-14)
인간의 흔들리기 쉬운 성품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거듭하여 당신의 계획을 알리셔서 그로 하여금 확신에 찬 생활을 하게 하신다(사 28:10). 이런 관점 에서 인간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동일한 것일지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각도에서 계속 주어질 경우가 있다. 따라서 그 언약이 거듭될수록 언약의 상대인 인간은 더욱 견고한 믿음을 지닐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에 걸쳐 언약을 제시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것이다. 소명시(12:1-3)부터 주어진 언약은 몇 번에 걸쳐 재언급한 것이지만, 그약속의 내용은 언제나 동일하게 '후손'과 기업이 될 '가나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또한 매번 거듭될수록 더욱 명료하게 제시됨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는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구약 계시의 모든 초점이 장차 언약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완성하실 영영한 기업,하나님의 나라에 맞춰져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들이 더욱 뚜렸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이런 계시의 점진적 과정의 일환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 조상의 이름인 '아브라함'을 새로 명명하셨고, 언약 백성으로 새로 태어난 존재라는 한 증표로서 '할례'를 명하셨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여금 본성적으로 죄악될 수밖에 없는 자연인의 신분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시민으로 살게 하시려고 할례를 명하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언약 을 좀더 구체화하신 것이며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당신과의 관계를 더윽 돈독히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완성하실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백성의 전형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선택하시고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건국을 착실히 준비해 가셨던 것이다.
* 아브람의 새 이름 아브라함.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의 생에 매우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으로써 한 개인의 전인격과 종교적 성 향 및 일생을 포함하고 있기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영육간에 지쳐 있을때 나타나셔서 당신의 완전한 능력으로 인간을 풍성케하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 님'이심을 계시하셨다(17:1).그때까지만해도 아브람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제 공할 수 있는것(후손)을 자신의 지혜와 노력으로 얻으려 했다(16장).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접한 후 아브람은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통찰할 수 있었으며, 자신을 위주로 한 이제까지의 삶의 태도를 청산할 수 있었다. 아브람은 이제 자신을 향하여는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을 향하여는 산 자로 그 존재 양태가 확연히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아브람'(고귀한 아버지)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으로 개명(改名)하심으로, 그가 단순히 한 가문의 조상이 아니라 모든 신앙 의 조상이 될 것을 시사 하셨다. 즉 택하신 자를 언제라도 풍성케 하실수 있는 하나님께서 아직 약속의 후손조차 없는 아브람을 많은 무리의 아비라는 공적인 인물로 호칭함으로써, 당신이 지금까지 주신 언약을 재확인 하는 동시에 그를 통해 이뤄가실 만인(萬人) 구원의 대역사를 시작하셨음을 보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공 하시는 생명을 얻어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수많은 무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히 11:8-19). 여기서 볼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 님의 은혜로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란 이름을 가진 우리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라는 아름다운 이름과 신분의 변화를 얻게 된 것도 우리의 생래적(生來的)인 자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된 것이다<창25장 :19-26 강해, 이름짖기>.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새 이름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게는 산 자로 살아감이 마땅하다(갈2:20).
*할례 언약과 세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선민의 조상이 되는데 필수적 요건으로 옛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자아로 태어남을 상징하는 '할례'(割禮,circumcision)를 요구 하셨다.이는 언약의 갱신을 위한 외적 표식이자,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고전11:25)에의 동참을 예표하는 정결 예식이기도 하다(행 7:8;롬 4:11).
이 예식에 대해자세히 고찰해 보면, 방법(11절)-히브리어'물로트'( )는'둥글게 자르다'는 뜻으로 남성 생식기의 끝 부분을 덮고 있는 표피를 인위적으로 잘라내는 수술을 가리킨다. 대상(10, 13절)-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여호와 신앙 안에 거하는 모든 남자. 시기(12절)-생후 8일째 되는 날. 최초 할례시인 아브람 때에는 특례적이었다.
한편 할례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이방인과 구별된다(삼상 17:26). 여호와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케하는 표이다.
순결을 지키며 여호와 경외를 실천케 하는 징표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의미한다. 선민 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응답을 뜻한다. 신약 시대 교회의 세례에 대한 예표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히브리인들 중에는 단지 할례 그 자체를 선민의 특권으로 알 뿐 할례 속에 담긴 진정한 영적 의미를 망각한 자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히브리 사회는 내용이 없는 형식만의 신앙이 팽배해 갔고, 마침내 이것 은 초대 교회에서 진행했던 종교 개혁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다. 예수의 가르침 을 이오받은 사도들은 참된 할례는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이며, 또 한 할례는 종교적 우월성이나 선민의 특권을 나타내는 표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거룩하게 살게 된 것을 확인하는 표식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롬 2:25-29;4:9-13)유대인의 독선적인 종교관에 일침을 가하고 히브리인과 이 방인 간의 오랜 장벽을 무너뜨렸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칭의 사상이 생겨난 신약 시대에 이르러 더이상 육신의 할례는 무가치하게 되었으며 그 기능은 세례가 떠맡게 되었다.따라서 할례를 대신한 세례는 믿음과 구원과 성결의 징표이다. 즉 세례는 자신의 의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옛 자신을 장사지냄을 상징하는 외적 표시로서 손으로 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의 할례이다(골2:1).
그런 의미에서 세례도 할례와 마찬가지로 구원 얻은 자의 외적 표시일 뿐이지, 그 자체가 구원의 능력을 지녔다거나, 구원의 조건이 될수는 없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축복과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자에게 할례가 그 순종의 의미를 표시로 의미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르르 자신의 구원자요 생명의 근원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에게 그들 신앙의 외적 표시로 세례가 의미있을 뿐이다. 더욱이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할례가 언약 공동체의 소속 임을 표시내는 표식 이었듯이, 신약 시대의 세례는 구속받은 무리들의 집합체인 교회의 일원이 됨을 나타내는 외적 증표이다.
2. 사래의 개명과 이삭 출생 예고(17:15-22)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대해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시기 보다 점차적으로 그 계시를 명료케 하심으로 그의 믿음을 성장시켜 가셨다. 일환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래('나의 공주'란 뜻)를 사라('공주','여장부'란 뜻 )로 개명 하셨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정실(正室)부인의 사래가 단순히 한 가정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라 많은 무리의 어미요 여주인으로 그 신분과 지위가 바뀌어 졌으며, 그녀를 통해 민족의 열왕이 날 것을 알리심으로 당신의 언약이 구체화 되어감을 보이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투정하는 자식을 자상하게 대하는 아버지처럼 약한 믿음의 아브라함을 책망치 않으시고, 그가 성장한 분량의 믿음을 지닐 때까지 인내하시며 사랑으로 지도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네가 있기에 비록 세속에 물들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유약한 우리들 이지만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스마일에게 내리는 축복. 애굽 출신 여종 하길에게서 출생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얻은 첫 아들 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컸다. 더욱이 그의 이름의 뜻( 하나밈께서 들으심)이 말해주듯 그는 분명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었다. 또한 그는 태어 나기도전에 이미 이름과 성격이 계시될 만큼(16:11-6)하나님의 괌심 을 받으며 13세 때 선민의 징표인 할례를 받음으로써(25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얻었다. 한편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축복 중 번성의 복(20절;16:10)은 하나님께서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의 티끌'(13:16)과 같은 후손의 축복이 부분 적으로 성취되어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축복을 받았던 이스마엘은 오늘날 터어키인과 아랍인을 구성하는 12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즉 느바욧, 게달, 앗브엘, 밉삼, 이시마,두마,맛사, 하닷, 데마,여둘, 나비스, 게드마 등의 아들들을 얻었고, 그들은 '들나귀 같은'(16:12) 기질을 가지고 사해에서부터 홍해연안,아라비아 사막,심지어는 멀리 바벨론 지 역까지 진출하였으며 한 곳에 머물기 보다 주로 유목 생활을 영위했다. 이와 같이 이스마엘이 많은 후손과 넓은 영토를 지니는 등의 축복을 누릴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아브라함 때문이었다. 즉 이스마엘은 이 땅의 복의 전달자(12:2)인 아버지로 인하여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가 놀라운 푹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엘은 '약속의 후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것으로 결코 인간의 시비와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롬 9:19-21).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과 축복을 받은 자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앙하는 자는 항상 부유해야 한다는 사상이나, 반면 생활이 윤택하다고 해서 자신의 신앙이 올바른 상태에 있다는 생 각은 버려야 한다, 단지 당신의 주권으로 일꾼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노력과 겸손을 지녀야 한다.
3. 준행된 할례 의식(17:23-27)
신앙인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이 순종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이며 그분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쌓은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수종하지 않는 자는 모두가 헛될 뿐이다(삼상 15:22). 그러나 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미한 존재라 하더라도, 순종으로 일관하는 신앙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귀한 인물이다(신 4:30).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인 순종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 되었다. 여기서 그의 순종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철저한 신앙에 기초한 순종 이었다. 사실 할례란 육체적인 고통을 동반하는 것으로 부담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 곧 자신 에게 유익되는 것임을 확인하고 그 일을 감행 했다.
온전하고 세밀한 순종 이었다12,13절에 계시된 명령이 23,26,27절에 그대로 완수된 것을 볼수 있다.어떤 면에서 순종은 자신의 의견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신속한 순종 이었다. '당일에'(26절) 모든 일을 끝낼 만큼 그의 신앙적 의지는 살아 있었다. 시간적인 지연은 사단의 활동을 촉발 시키는 호재 (好材)가 된다.
현재의 환경을 초월한 순종 이었다. 사람이 나이들면 매사가 귀찮아지고 변화하기를 싫어하게 된다. 그러나 99세의 아브라함은 자신과 더불어 자신의 권한이 허용하는 한도내의 사람 모두에게 할례를 하게 했다. 순종은 상황을 바라 보기 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볼때 실천 가능 하다. 아브라함은 모든 결과 를 하나님께맡기고자신이 할수 있는 것들을 실천 했다. 그는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는 하나님의 명령을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 시켰던 것이다.
세일하머
5. 아브라함, 사라, 그리고 이스마엘 (17:1-27)
a. 아브라함의 나이(17:1a)
아브라함의 나이에 대한 언급은 그것을 이스마엘의 출생에 관한 앞의 서술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1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에 86세였다. 17장 첫 부분에서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로 나온다.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나이에 대한 언급은 17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나오는데 여기에서 독자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을 때에 그의 나이가 99세였고(24절) 이스마엘이 13세였음을(22절) 상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나이는 그 이전 문맥과의 연결 뿐만 아니라 17장의 사건들에 대한 뼈대 역할을 한다. 17장 이후에 아브라함의 나이에 대한 언급은 이삭의 출생에 대한 설명에서 나오는데(21:5)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100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둘 사이에서 본문은 연대적인 순서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여러개의 서술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는 서술 속의 사건들에 대한 연대적인 경계를 설정해 줌으로써 그것들 모두가 이삭의 출생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b.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17:1b-2)
17장은 저자가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나타나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몇 몇 서술들중에서 하나이다(12:7, 18:1, 26:2, 24, 35:9). 저자가 하나님의 모습의 실제적인 특징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18장에서의 유사한 언급과는 달리 여기에서 저자의 관심은 하나닙의 모습 자체의 성격보다는 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은 간단한데 이것은 주로 비교적 긴 두번째 말씀에 대한 요약적인 서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요약하자면 첫번째 말씀은 17장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경계를 설정해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17장의 사건들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 체결을 대표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이다. 언약의 본질은 무수한 자손에 대한 약속이다.
저자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을 여호와(17:1b) 곧 시내산에서의 언약의 하나닙과(출 3: 15) 동일시한다. 그러나 서술 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서술의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모든 의심을 제거시킨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하나님인 여호와께 경배했지만 그분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알았다(이것은 또한 출 6:3의 관점이기도 하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소개하신 후에 아브라함의 순종을 강조하는 간단한 언약의 개요를 주신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7:2에서의 단어의 선택은(내가 내 언약을... 세워. RSV 참고) 17장과 그 이전 서술 사이의 일관성에 대한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15: 18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지 않으셨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두번째 언약을 맺으시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결점이 제시되었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 두 언약을 각기 구별되는 언약으로 곧 땅의 약속에 대한 언약과(15:18-21) 무수한 자손에 대한 언약(17:2)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 두 언약 사이에는 또한 하갈의 사건이 놓여 있음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들의 손으로 이루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에 처음 언약이 다시 세워질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쟁이 시내산에서의 언약에 대한 서술 속에서 보여질 수 있다. 언약은 출애굽기 24장에서 처음 세워졌으며 다시 34장에서 세워졌다. 이들 두 설명 사이에는 언약을 지킴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를 담고 있는 금송아지 사건에 대한 서술이 놓여있다(출 19:16, 32:1-35).
C. 아브라함의 반응(17:3a)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에 대한 기사 역시 간단하다. 저자는 단순하게 그가 깊은 경외심의 표시로서 '엎드린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반응에 대한 이러한 간단한 묘사의 중요성은 그것과 하나님의 두번째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에 대한 설명 사이의 유사성 속에서 보여질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엎드렸을' 뿐만 아니라 '웃었다'. 다시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크게 번성 케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경외와 순종으로 응답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어떻게 수행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의 경외심은 약간의 비웃음을 포함하였다. '웃음'과 '이삭'의 출생에 대한 언급의 개념은 분명히 기교적 표현으로서 다음에 있어지는 장들의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아래의 주석을 보라) .
d. 하나님의 두번째 말씀(17:3b-16)
하나님의 두번째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3b-8, 9-14, 15-16 절). 각각은 '하나님이..이르시되'(3b, 9, 15절)라는 구로 시작된다. 각 부분은 언약의 당사자들 중에서 하나를 다루고 있는데(여호와, 아브라함, 그리고 사라) 이들 각각은 그 서두에서 여호와('내가' 4a절)
아브라함('아브라함에게' 9a절), 그리고 사래('네 아내 사래' 15a절)와 같이 그 이름이 지명되거나 확인된다. 언약의 각 부분의 내용은 첫번째 부분에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의 변경 (5절). 두번째 부분에서는 가족의 모든 남자들에 대한 할례(10-14절), 그리고 세번째 부분에서는 사래의 이름의 변경 (15절)과 같이 각각 그 안에 있는 특별한 표시에 의해서 기념되고 있다.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은(3b-8절) 무수한 자손과(4-6절) 영원한 신실하심(7-8절)과 같이 두 개의 약속으로 이루어진다. 서술이 이미 강조한 것처럼 이 언약에 속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 존재를 오직 하나님께 의존할 것이다.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요 1:13)이 될 것이다. 무수한 자손에 대한 약속은 아브람의 이름이 '열국의 아비'(17:4b,5)라는 의미를 지난 아브라함으로 바뀐데서 기념되고 있다. 6절에서의 번성케 하리니(생육케 하리라)라는 단어와 2절에서의 번성케 하리라는 단어의 선정은 1:28에서의 모든 인류에 대한 축복을 상기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것은 9:l에서도 반복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땀에 충만하라."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원래 축복이 모든 인류에게 다시 전달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6b절에서는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지는데 이것은 나중에 역사서(예를 들면,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기록된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계속되는 역사를 바라 볼 뿐만아니라 더 증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한 축복의 일반적인 약속과 유다의 왕의 혈통 안에서의 축복에 대한 저자의 계속되는 강조(창 49:8-12, 민 24:7-9)이다. 축복이 왕을 통하여 주어질 것이라는 개념은 저자의 주장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창 14:18-19 참고). 저자가 여기에서 처음 발전시키는 것은 이 왕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올 것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작용되고 있는 신학적인 구도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의 구조 뒤에 놓여있는 것과 동일하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메시아(헬라어 크리스토스와 같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용어와 성경내의 다른 부분에서의 왕직(예를 들면, 삼상24:7, 11)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때에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 속에서 창세기의 '기독론'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7절과 8절의 초점은 영원한이라는 용어에 놓여있다. 약속된 언약은 '영원한 언약'(7a절)이며 땅의 소유는 '영원한 기업' (8절)이다. 이 구절들 속에 포함된 약속들은 여기에서 처음 주어진 것들이 아니며(13:14-15, 15:18-21 참고) 언약의 영원한 특성-약속의 성취를 확증하는-이 새로운 것이다. 땅의 언약의 영원성은 약속의 '영원함' 속에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지만(13:15) 15장에서 언약이 주어졌을 때에 거기에는 '영원함'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 속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반복해서 언급하셨을 때에 그 초점은 자신의 영원한 신실하심에 놓여진 것이다. "내가...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7-8절).
언약에 있어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부분은 그 언약에 대한 그의 순종이다.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9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이어서 설명되고 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10절). 언약을 지키는 것은 신실하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며 언약을 파기하는 것은(14b절)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이다(14a절).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단순한 할례 의식이 언약의 전부라는 결론을 맺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11절)는 말을 덧붙이 고 있다.
명령 #215 창 17:10 할례: "너희 중 낭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언약에 있어서 사라에게 주어진 부분은 그녀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출생하는 것이다. 그녀는 열국의 어미가 되어야만 하고 '열왕이 그에게서'(16절) 나와야만 한다. 그녀는 노년에 이르러서 그녀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자신의 언약의 약 속을 성취시킬 수 있음을 드러낼 자가 되어야만 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사래의 새 이름은 언약에 있어서 그녀에게 주어진 부분의 표징이 되어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래라 불리지 않고 사라로 불릴 것이다(15절). 저자는 아브라함의 새 이름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5절) 사래의 새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저자는 독자가 16절을 그녀의 이름에 대한 설명으로서 이해하리라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히브리어로 사라는 '여왕'을 의미하기 때문에 독자는 '열왕이 그에게서 나기'(16b절) 때문에 '여왕'으로 불릴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 아브라함의 반응(17:17,18)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독자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17a절) 지금까지의 창세기 속에서의 아브라함에 대한 저자의 묘사로 비추어 볼 때에(예를 들면, 15:6) 그의 웃음이 그의 불신을 지적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본문이 그러한 인상을 남긴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놀라운 반응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17b절 속에 있는 아브라함의 말("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로 하여금 그의 웃음 뒤에 놓여있는 진정한 동기를 드러내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저자는 그의 웃음의 성격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을 모호한 상태로 남겨둔다.
이어지는 장에서 사라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웃음으로 응답하자 저자는 그녀의 웃음이 하나닙의 비난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18:2-13). 17장에서 아브라함의 웃음에 대하여 그러한 비난이 없는 것은 그의 웃음이 불신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해야만 할 일에 대한 그의 믿음이 제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자로 묘사된다. 오히려 그는 아저도 그 믿음이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할 자로 묘사 된다. 아브라함의 웃음 속에서 우리는 그의 믿음에 있어서의 외적인 한계를 볼 수 있도록 허용된다. 만일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려고 한다면 그의 믿음은 자라나야만 한다. 어쨌든 아브라함의 웃음에 대한 묘사를 포함시켜 저자의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은 '그가 웃다'라는 히브리어 표현이 이삭이라는 이름을 예고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응답에는 분명한 아이러니가 있다. 비록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놀랍게도 웃음으로 응답하였지만 그의 웃음은 그 약속이 이삭 안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언어적 표시가 되었다. 이삭의 출생을 둘러싼 나머지 서술 부분을 통하여 각 부분에 있어서의 중요한 단어는 웃음이다. 사라가 웃었고(18:12), 롯의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고(19:14), 사라가 이삭을 낳았음을 들은 모든 자들이 웃었고(21:6),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희롱하였고(21:9), 마지막으로 블레셋 왕이 이삭이 리브가와 웃는 것(개역 성경에는 '껴안은 것'으로 번역됨)을 보았을 때에(26:8)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의 이삭의 실패가 드러났다(26:7). 그러므로 저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가장 애매모호한 행위인 웃음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믿음에 있어서의 한계가 포함되어 있다.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동사의 주어로 사용되고 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매'(17절: 3절 참고: 아브람이 엎드린대). 아브라함이 자신의 새로운 이름이 의도했던 바로 그것에 대하여 웃었다는 사실 속에 저자의 아이러니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4절).
f. 하나님의 세번째 말씀(17:19,22)
하나님의 세번째 말씀의 내용은 언약 안에 사라를 통하여 태어 날 이삭을 포함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제외시킨다. 그러므로 이삭은 언약의 유의을 받을 자로서 익명의 '자손'중의 하나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원래의 언약 안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단계로 이끌려 올려진다.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9절)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의 신분은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되고 있다. 언약의 상속자가 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사라를 통하여 날 자들 곧 이삭의 '자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17:19에서 이삭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이삭과의 언약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말씀(26:3-"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며")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언급 속에서 저자는 비록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부터 제외되었지만 그와 그 자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 아래 살 것임을 보여준다(20절).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 대한 축복에 있어서(20절) l:28에서의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축복과("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17:20) 12:2에서의 아브라함에 대한 축복("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17:20b)을 반복하신다. 이삭의 '자손'이 열 두 지파의 큰 나라를 이루게 될 것과 같이(49:1-27) 이스마엘의 '자손'도 하나님의 축복 아래 열 두 방백들의 큰 나라를 이룰 것이다(17:20b). 이들 열 두 방백들의 목록은 25:12-16에서 제시된다.
g. 아브라함의 마지막 반응(17:23)
아브라함의 마지막 반응은 그가 17:9에서 명령된 것과 같이 언약에 순종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23절) 그의 집의 모든 낭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한 이러한 마지막 언급은 독자로 하여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는 말씀이 삽입된 서술의 첫 부분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든다. 이처럼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여 완전)하였던 노아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창세기에서 이러한 용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에 저자는 독자들이 이들 두 용어가 인접해서 반복되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들 두 위인을 연결시키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완전'이란 용어는 창세기에서 오직 이 두 본문 속에서만 나온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다'는 용어는 더 빈번히 나오지만 매우 조심스럽게 선택된 문맥 속에서 나온다(에녹 5:22, 24, 노아 6:9, 아브라함 17:1, 24:40, 48:15 [이삭과 관련하여]).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노아는 언약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전'했던 자들의 본보기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대로' 순종했기 때문이다(17:23, 6:22, 7:5,9,16 참고).
h. 결론(17:24-27)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나이에 관한 언급은 역시 아브라함의 나이(17:1)와 이스마엘의 나이로 시작되는 서술에 대한 포괄법(처음과 마지막의 표현이 반복되어서 마치 괄호를 형성하는 것과 같은 표현법 :역자주)을 형성한다. 결론 부분에서의 마지막 말은 언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하여 다시 언급한다. 뿐만 아니라 26절과 27절의 교차대구적 구조는 일정한 결론 형식과 함께 17장의 주제를 강조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곧 아브라함이 언약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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