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을 원합니다. (I Want Your Heart) / 권재기
결혼 53주년이 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이날에 무엇을 할까 생각했지만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어제저녁 남편이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는지 내게 물어보았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I want your heart (당신의 마음을 원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남편은 잠깐 멈칫하더니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음을 다 주었는데도 아직도 heart가….” 하면서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결혼 생활 중에 한 번도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 남편이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나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약혼식 때의 생각이 났다. 대학 4학년 때부터 선을 보기 시작하면서 막연하지만 결혼할 대상에 대해 몇 가지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나의 남편은 가정적인 사람, 인생의 목표가 뚜렷한 사람, 똑똑하지만 겸손한 사람이기를 바랐다.
어느 새해 아침에 아버지께서 엄마를 도우면서 가사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됐으니 신부 수업을 받으라는 간접적인 지시였다. 선보기 싫어하는 나를 한 번도 책망하지 않던 아버지의 이 말씀은 충격이었다. 몇 번은 선을 보았지만 아무도 마음에 안 들었다. 돈 자랑만 하는 남자들에게 실망한 나는 선보러 가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마음이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이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교직 생활 2년째 되는 해였다. 여름방학 4주간의 영어 과외수업을 끝낼 무렵 고등학교 친구가 전화했다. 만리포 별장에 함께 놀러 갈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별 계획이 없던 나는 오케이를 하고 동료 선생과 함께 일주일 예정으로 만리포로 향했다. 부모님께는 엽서를 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부모님의 허락 없이 처음 해보는 과감한 결정에 불안하면서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과 함께 해수욕장에 가서 온종일 물속에서 놀다 졸리면 조그마한 텐트 속에서 낮잠도 자며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었다. 온몸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햇볕 속에서 며칠을 태웠더니 얼굴과 몸은 너무 빨갛고 따가웠다. 일주일이 후딱 지나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왔다가 다음날 기차를 타고 대전 집으로 내려갔다. 집안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버지께서 미리 이야기도 안 하고 마음대로 행동한 것을 책망하셨다. ‘엽서를 보냈는데요’라고 변명했지만 온 식구들이 신경과민 현상을 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아버지가 3일 동안 내가 내려오는 줄 알고 매일 역으로 마중을 나가셨다고 한다. 이유는 아버지 동료 변호사가 한 남자를 소개하고, 엄마 친구도 그 사람을 소개했다고 한다. 한 사람을 놓고 두 사람이 동시에 소개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내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 것을 미리 알려 주었더라면 만리포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올리브유를 온몸에 바르고 태우지도 않았을 텐데 이런 상태로는 선을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부모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일주일 후에 대연각 호텔에서 만날 약속이 잡혔다고 한다. 엄마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옷 맞춰주랴 미장원에 데려가 마사지 받게 해주랴 바삐 움직였다. 드디어 선을 보는 날이 되었다. 이번에도 보나 마나 허탕일 텐데 하며 가는 동안 내내 투덜거렸다. 게다가 얼굴은 아직도 빨갛고, 팔은 껍질이 벗겨져 흉한 모습이니 기분이 상했다. 엄마와 커피숍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오늘 만나는 남자가 저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 들어갔다.
거기에는 만나려는 남자는 안 보이고 웬 중년의 여인과 나이 먹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때 마침 계단을 올라오면서 보았던 그 남자가 급히 들어오며 늦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첫 번째 관문은 통과한 셈이다. 그는 아주 달변에 매우 겸손하기까지 했다. 이제까지 선 본 사람들과는 다른 신선함이 있었다. 한 가지 더 좋은 점은 머리에 포마드를 안 발랐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좋은 집안이라서 오케이, 엄마는 사근사근하니 딸한테 잘해 줄 거라는 생각에 합격점을 주었다.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한 결정이었지만 나에게 짝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분은 괜찮았다. 만리포를 다녀온 후 최상의 모습이 아닌 상태에서 그 남자는 나를 택하였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남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에게 이쁘다는 소리를 안 한다. 남편은 솔직한 것 같았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 내가 선 본 사람 중에서 처음으로 내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눈에 무엇이 씌웠는지 양쪽 집이 서둘러, 만난 지 두 주 만에 약혼식을 올렸다.
약혼식을 올리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싹싹하고 말을 잘하던 남자가 한마디도 말을 안 하는 것이었다. 몇 시간을 뜸 들이더니 제일 먼저 내게 한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나에게 부탁할 말이 있다고 했다. ‘첫째, 자신은 외아들이기 때문에 자기 부모에게 잘하기를 바란다. 둘째, 자신은 몸이 약해서 먹는 것과 자는 것을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셋째, 자신이 화가 났을 때는 절대로 말대꾸하지 말라’하고 명령 같은 부탁을 했다. 이 세 가지 요구를 들으면서 나의 마음은 충격으로 ‘어쩌나, 어쩌나’만 중얼거렸다. 그의 제안에는 ‘우리’라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약혼 후부터 결혼 전까지의 시간은 결혼을 약속한 연인들의 가장 행복하고, 낭만적이고, 좋은 추억을 쌓는 시간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시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실망은 절망에 가까웠다. 이처럼 이기적인 사람과 함께하는 앞으로의 삶이 매우 힘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남편이 미국으로 떠난 다음 나는 5개월 후에 들어왔다. 비행기에 홀로 앉아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성급한 결혼 결정, 남편이 했던 세 가지 부탁, 미지에서의 삶에 대한 불안감 등이 나를 엄습하였다. 나도 모르게 간절한 심정으로,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했던 생각이 난다. 남편의 본성은 참 착하고 성실하다. 그리고 여리다. 마중 나온 남편을 보는 순간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대로의 모습에 안심했다. 남편은 내가 양식을 먹는 게 불편할까 봐 손수 밥, 불고기, 시금칫국을 만들어두었다. 아파트에 도착한 우리는 촛불을 켜놓고 저녁을 먹으며 미국의 첫날을 기념했다. 그의 배려심은 지금까지 나의 love tank에 잘 간직되어있다.
내가 미국에 온 지 일주일 후에 우리는 결혼했다. 60여 명의 남편 친구들만 있는 조촐한 유학생 결혼식에서 나는 그래도 행복을 느꼈다. 드디어 나도 임자를 찾았다는 안도감에서였는지 결혼사진마다 웃는 모습이다. 앞으로의 우리의 여정은 서로 시행착오 (trial and error)를 겪으며 성장해 가는 긴 세월이 계속될 텐데 나는 그때 철이 없는 새색시였다.
예상했던 대로 남편은 착하지만, 무척 까다로웠다. 한번은 가난한 유학생 생활에 보탬이 되려고 어떤 부부가 베이비 시터를 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남편의 의견을 물었다. “No”라고 대답하고는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 그의 사고방식은 그가 한국을 떠날 때의 ‘결혼하면 여자들은 집에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머물고 있었다. 내가 정규(full time)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아이가 운전하면서부터였다. 30년을 일하는 동안 남편은 아이들을 떼어놓고 놓고 일하는 엄마로서의 죄의식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대학교수를 남편으로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교수가 되어 부부 교수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녀 같은 꿈을 꾸곤 했다. 가난한 유학생 부부의 생활 속에서도 나는 남편에 대한 기대가 컸다. 나도 공부하고 싶었지만, 함께 공부할 여력이 없어서 집에서 혼자 토플(TOEFL) 시험공부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시부모님이 남편이 더 이상 공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또 본인도 고생에 지쳤는지 공부를 포기해 버렸다. 나의 꿈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남편은 은퇴하기 전까지는 직장 생활을 하며 주말이면 골프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두 아들의 운동 시합을 쫓아다니면서 아이들과 함께 주말 과부의 생활을 했다. 우리는 매우 한국식으로 아버지 권위 위주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후에 시 부모님이 미국에 오셔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남편의 많은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녀독남인 남편은 어머니 최대의 희망이었다. 시아버님은 통행금지 직전에 집에 들어오실 만큼 모범 가장이셨고 가정사의 모든 것을 어머니가 주관하신 모양이었다. 이런 것을 보고 자란 남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이들은 다 커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닦고 닦이며 50년 너머를 살아오면서 우리는 매우 느긋해졌다. 이제는 섭섭한 마음이 들어도 3일이면 다시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남편에게 말대꾸하지 말라는 부탁은 살아오는 동안 거의 지켰다. 처음 말대꾸하고는 겁이 나서 목욕탕에 숨었던 때가 생각난다. 가정환경도 다르고, 쓰는 언어도 다르고, 목표로 하는 것, 생활 습관 등 모두가 달랐던 두 사람이 적응하며 50년을 함께 보낸 많은 시간과 인내는 기적과 같다. 신혼 때 읽은 신문에서 50주년 결혼 기념 파티하는 미국인 부부에게 비결을 묻는 신문 기자의 질문에 부인이 “patience, patience, patience” (인내, 인내, 인내)“라고 재치 있게 대답했던 것이 생각난다. 이 말이 나의 결혼 생활에서 버팀목이 되어 바람이 불 때도 우리를 지켜 주었다.
나이 들어 서로 배려하며 사이좋게 사는 것은 이제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나 가능하다고 누군가 농담한다. 사실 그런 것 같다. 남편은 지금 나의 가장 친하고 귀한 친구이다. 내가 어지러워 누워 있으면 죽을 끓여 먹여 준다. 친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남편에게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함께 갔으면 좋으련만…. 안되면 비슷하게 떠나기를 희망한다.
내가 원한 남편의 마음을 보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조용한 결혼기념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며 지금은 우리 삶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의 우리의 남은 삶은 깨끗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싶다.
일식으로 점심을 먹고 요즈음 상영 중인 ‘건국 전쟁’을 보러 갔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요즈음은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