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강호 9
한편 백문지는 한시도 유천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문득
그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형은 어디로 가실 예정인가요?"
유천기는 담담히 대답했다.
"숭산(嵩山)에 볼 일이 있소."
그 말에 백문지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숭산이라면... 그 유명한 소림사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그렇다
면 소림사에 가시는 건가요?"
유천기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그가 숭산에 가는 것은 극히 중
요한 일이었다. 비록 백문지에게 호감을 느끼긴 하였으나 그런 중
대한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백문지는 문득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마침 잘되었군요! 저도 숭산에 갈 생각이었거든요."
유천기는 흠칫했다.
"백소제는 왜.......?"
이미 그는 자연스럽게 호칭을 소제로 정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가
조금 많았기도 하려니와 백문지가 굳이 그렇게 부르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선종불문의 본산이라는 소림사에 가보고 싶었습 니
다. 마침 방향도 같으니 형과 함께 가면 정말 좋을 겁니다."
그는 정말 몹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유천기는 기이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일단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가 다 의심스러운 법이다.
아닌게 아니라 백문지에게는 이상한 점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
러나 유천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 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덧 배는 맞은 편에 닿고 있었다. 닻이 내려지고 선원들은 하
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가지 물건을 배에서 내렸다. 그것도 보통 분량이 아니
었다. 적어도 마차 두서너 대 이상이나 되는 물품들을 하역했다.
유천기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백제, 저것은 다 무엇에 쓰는 것이오?"
백문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모두 어머님이 마련한 것이지요. 타지에 나가면 불편할 것이 라
고 하시면서 심지어는 찻주전자까지 싸주셨거든요."
'맙소사!'
유천기는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여행을 하면서 찻주전자까지 가
지고 다닌다는 말은 듣느니 처음이었다.
선원들은 물건을 정리하는 데만 거의 한 시진 이상을 소비했다.
그것은 무려 다섯 대의 마차에 옮겨졌다.
마차가 출발했다. 선원들은 도로 배에 올라 북쪽으로 떠나갔다.
백문지를 수행하는 것은 단 한 명으로 거한 뿐이었다.
거한의 이름은 영아(鈴兒)라고 했다.
그것은 덩치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어서 처음 그 이름
을 듣고 유천기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마차가 다섯 대나 되었으므로 사람을 써야 했다. 백문지는 시진에
서 사람을 구했다.
비가 그치자 날씨가 화창하게 개었다. 여행은 순조로왔으며 백문
지는 유천기와 함께 하는 여행이 무척이나 줄거운 듯 쉴새없이 종
알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여행은 편하다 못해 사치스럽기 그지 없었다. 수시로 마차 안에서
향차를 마실 수 있었으며 반점이 나오지 않으면 요리사가 맛있는
요리를 직접 해서 올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편안한 여행이 유천기에게는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그는 진종일을 마차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답답하고 지루하기만
했다. 만일 쉴새없이 백문지가 수다를 떨지 않았다면 그는 참지
못하고 뛰쳐 나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에게는 이미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끓고 있었다. 지난 날 처럼
책을 끼고 사는 문사가 아니라 그에게는 어느덧 강호인의 습성이
배기 시작한 것이었다.
숭산까지는 아직도 많은 여정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길을 보다
자유롭게 가며 강호정세를 파악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평산진(平山鎭)이란 곳에 이르러 자신의 생각을 백문지
에게 토로했다. 객점에서 식사 하면서 다소 멋적게 말을 꺼낸 것
이었다.
"백아우, 내일부터는 나 혼자 떠나겠네."
그 말에 백문지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소제와 여행하는 것이 싫단 말입니까?"
그는 금세 눈시울이 빨개졌다. 유천기는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 난 백아우와 달리 자유분방한 편이라 이런 사치
스런 여행은 체질에 맞지 않다네."
백문지는 울상을 지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는 형님과 함께 가는 것이 좋은데......."
그날 밤 유천기는 백문지를 달래느라 무진 애를 먹어야 했다. 그
러나 그의 결심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날이 밝기 전에 혼
자 길을 떠나리라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새벽이었다.
유천기는 여장을 챙겼다. 물론 여장이라 할 것도 별로 없었으므로
그는 아무도 몰래 홀가분하게 객점을 빠져 나왔다.
백문지에게는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매달릴지도 몰랐
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아연해지고 말았
다.
"아니... 백아우?"
백문지가 성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활짝
펴며 방긋 웃는 것이 아닌가?
백문지는 손을 벌리며 말했다.
"어때요? 저도 이젠 혼자입니다."
유천기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영아와 그 많은 짐은 어떡하고?"
"헤헤, 몰래 나왔어요. 지금쯤 영아는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져
있을 겁니다."
유천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귀하게 자란 백제가 어찌 이런 고생스러운 여행을 한 단
말인가?"
"상관 없습니다. 견문을 넓히려면 고생도 해야 하니까요. 헤헤,
이렇게 된 이상 절 떼어 놓고 가진 않겠지요?"
유천기는 그런 백문지가 골치 아프다기 보다는 귀여운 느낌이 들
었다. 그러나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따라오는 건 자유지만 여행 도중 음식을 가리거나 잠자리를 탓한
다면 난 또 몰래 백아우의 곁을 떠나버릴 걸세."
백문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혼자 떨어지게 되면 무서워서 자살
을 할지도 모릅니다......."
유천기는 흠칫했다. 정말 그의 옥같이 고운 뺨에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아우, 그만한 일에 사내 대장부가 눈물을 흘릴 건 또 뭔가?"
"미안해요, 형님......."
백문지에게는 이상하리 만큼의 결벽증이 있는 것 같았다. 숭산으
로 가는 길은 실로 먼 길이었다.
연도에 유천기는 그에게 최대한으로 신경을 썼으나 그래도 곳곳에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큰 시진에서는 잠자리와 식사를 그런대로 가릴 수 있었 다.
그러나 산간벽지에서 그런 것을 고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
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는 궁벽한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잠자리도 겨
우 이슬이나 피할 정도인 곳도 있었다.
또한 따로 방을 쓸 때도 있었으나 어떤 곳에서는 한 방에서 잠을
자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백문지는 한사코 한 침상에서 잘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유천기는 침상을 그에게 내주고 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런데도 백문지는 뜬눈으로 벽에 기대앉아 밤을 새우고 있
었다.
그의 결벽증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긴 여행에서 여독을 씻기 위해
목욕을 할 때도 그는 한사코 혼자서 했던 것이다. 결국 유천기는
그가 지나치게 까다로운 것은 자라온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백산(桐柏山).
줄줄이 이어진 연봉(連峯)은 중원의 다른 대산에 비해 고산준령은
아니었으나 관도는 동백산에 이르러 폭이 좁고 가파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칠월(七月)이다.
태양은 대지를 뜨겁게 달구어 관도의 지면에서는 먼지가 풀썩댈
정도로 말라 있었다.
도대체가 더워도 너무 더웠다. 관도 연변에는 행인들이 나무 그늘
에 주저앉거나 아예 드러누워 더위를 식히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덥군......."
유천기는 이마에 밴 땀을 훔치며 백문지를 돌아보다가 흠칫했다.
의당 그도 땀을 흘리려니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고 보송보송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더위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다니.......'
대체로 내공이 초범입성(超凡入成)에 달하면 한서불침(寒暑不侵)
이 된다. 따라서 추위든 더위든 느끼지 않게 된다.
유천기는 일부러 내력을 감추고 있었으므로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
로 땀을 흘렸다. 그런데 백문지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을
보자 그의 뇌리에 한 가닥 의혹이 스쳤다.
백문지는 그가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듯 고개
를 돌리며 물었다.
"제 얼굴에 무엇이 묻었습니까?"
유천기는 빙그레 웃었다.
"아우의 곱던 얼굴에 먼지가 묻어 있으니 마치 개구장이 같다 는
생각을 했네."
"헤헤....... 그런가요?"
백문지는 정말 개구장이처럼 웃었다.
'하긴, 어쩌면 체질적으로 땀을 흘리지 않는지도 모르지.......'
유천기는 의심을 떨어 버리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길은 더욱 좁
아지고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동백산은 천하의 명산이었다.
아름다운 산경(山景)은 두 사람을 감탄시키고 자주 발걸음을 멈추
게 했다. 계곡의 맑은 물은 바닥의 조약돌까지 환하게 비출 정도
였고, 그 물소리를 듣노라면 마치 천상의 선음을 듣는 것 같았다.
유천기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아우! 우리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세."
그 말에 백문지도 얼굴을 활짝 펴며 동의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요."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녹음이 우거진 숲이었다. 바로 발 아래
계곡이 펼쳐지고 있었다. 계곡에는 기암괴석이 온갖 별스러운 모
양으로 난립한 가운데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천기는 편편한 바위 위에 앉아 발을 물에 담구었다. 시원한 느
낌이 등골까지 짜르르 전달되는 기분은 그야말로 상쾌하기만 했
다. 문득 그는 욕심이 생겼다.
'마침 잘 되었군. 이곳에서 먼지나 씻고 가자.'
그는 백문지를 돌아보며 함께 목욕이나 하자고 말하려다 그만 고
개를 흔들었다. 그의 괴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서슴없이 옷을 활활 벗어붙였다.
그때, 계곡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백문지가 그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란 듯 기성을 발했다.
"아니... 뭐하는 겁니까?"
유천기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
"뭐 하다니? 보면 모르나?"
그는 어이가 없었다. 백문지는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황
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나 원 참!'
유천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그
는 허리춤에 짧은 바지 하나만을 걸친 상태였다. 그의 드러난 상
체는 건장했다.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건장해진 몸의 그는 씨익 웃은 다음 보기
만 해도 시원한 계곡의 웅덩이를 향해 뛰어 들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뼈속까지 다 시려운 느낌에 가볍게
전율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는 머리를 풀어 감으며 그 동안
의 묵은 먼지를 말끔히 씻어냈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어 다시 바위로 올라왔을 때 그는 백문지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다소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옷을 입고 시원한 숲그늘에 드러눕자 마치 신선이 된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그늘에 누운 채 백문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백문지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
았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넘어야 했다.
마침내 그는 몸을 일으켜 그를 찾아 나섰다.
계곡 아래쪽을 한참이나 내려가 보았으나 여전히 그를 발견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쿠쿠쿵! 쏴아아아.......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게 자욱한 포말이 시원스럽게 사방으로
퍼져 올라간다. 물줄기는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길이가 십여 장이나 되는 폭포는 중원에서도 그다지 흔한 것이 아
니었다. 폭포수는 마치 한 마리 용이 하늘로 승천을 하는 듯한 형
상이었다.
폭포수 아래에는 검푸른 소(沼)가 파여져 있어 자욱한 물안개에
덮인 채 신비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선녀인가? 아니면 인어(人魚)인가?
검푸른 소 속을 매끄러운 물체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물
에 잠긴 물체는 유난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가끔씩 물보라를
뚫고 비치는 햇살에 반사된 몸체는 눈부시게 빛났다.
여인이었다. 그것도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체가 폭포
한가운데를 마치 인어인 양 헤엄치고 있었다.
해초처럼 기다란 머리칼이 여체의 굴곡을 휘감으며 물결에 흩어지
는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신비하기까지 하였다.
가끔씩 물방울을 퉁겨내며 떠오를 때마다 알맞게 발달된 앞가슴은
머리칼 사이로 봉긋이 모습을 보이곤 했다.
"호호호....... 아아! 시원해!"
폭포의 웅장한 소리 사이로 간간이 여인의 해맑은 웃음이 들 려오
고 있었다. 정말 선녀가 하강한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할 지경이었
다.
여인은 오랫동안 물 속에서 노닐다가 문득 자신이 너무 지체 했다
는 생각이 들었는지 물 밖으로 걸어나오려 했다.
"아악!"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몸은 거의 반사적으로 물 속으로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목만을 물 밖으로 내민 채 경악에 젖은 눈으로 맞은 편 바
위 위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손에 그녀가 벗어놓은 옷을 들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꽤
오래 전부터 그녀가 목욕하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
았다.
사내는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는데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마
침내 폭포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흐흐흐! 낭자, 난 처음에 선녀가 하강한 줄 알았지."
그는 음탕한 눈빛을 번들거리며 물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다... 다가오지 말아요!"
여인은 기겁을 하도록 놀라며 급히 깊은 곳으로 헤엄쳐 물러 났
다. 그러나 사나이는 음탕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헤헤! 도망 가 봐야 소용없소. 이 옷을 가지고 가 버리면 낭자는
벌거벗은 몸으로 어떻게 할 셈이오? 히히....... 설마 알몸으로
산중을 돌아다닐 거요?"
여인은 물 속에 온 몸을 담근 채 머리만 빼꼼히 밖으로 내놓고 있
었다. 그런 상태로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제발... 옷을 놓고 물러가 줘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은자를 드릴
테니......."
사나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헤헤헤, 내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소. 바로 낭자와 딱
한 번만 즐기자는 것이오. 이래뵈도 그 방면의 기술은 알아주는
동백일협(桐柏一俠) 전생(全笙)이란 사람이오."
그 자의 진정한 외호는 동백일협이 아니라 동백일호(桐柏一狐)였
다. 그는 인근에서 엽색질로 유명한 파렴치한이었다. 알량한 무공
을 믿고 여인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덤벼드는 그런 인간이었다.
"헤헤....... 자, 이리 나오라니까......."
전생은 기어이 일을 벌릴 참이었다. 그는 물을 향해 걸어 들어가
며 자신의 옷을 하나씩 벗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에 여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마침내 전생은 자신의
옷과 여인의 옷을 멀리 던지더니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어 익
숙한 솜씨로 여인을 향해 헤엄쳐 갔다.
이때 여인이 소리쳤다.
"제발! 난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아요!"
여인은 물 속으로 몸을 숨기며 황망히 외쳤다. 그러나 이미 욕정
이 오를대로 오른 전생이 그런 말을 염두에 둘 리가 없었다. 그는
여인이 물 속으로 들어가자 잇달아 수중으로 잠수했다.
그는 수중에서 날씬하고 하얀 여체를 볼 수 있었다. 여인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으므로 그의 눈에는 세류요의 허리와
풍만한 둔부가 물결에 흔들리는 것이 더욱 육감적으로 비쳤다.
'흐흐흐흐....... 오늘 봉을 만났구나.'
그는 어른거리는 육체를 향해 헤엄쳐 갔다. 여인은 수중에서는 몸
이 자유롭지 못한 듯 당황하고 있었다.
몸을 돌려 달아나려 하였으나 전생에게는 다만 허우적거리는 것으
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그녀의 행동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그녀가 팔다리를 움직이며 헤엄치자 그야말로 진풍경을 볼 수 있
었다. 기다란 머리칼이 수중에 해초처럼 흔들렸으며 인어같은 나
신이 율동하는 모습은 욕정을 자극시켰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뻗으며 쾌속하게
헤엄쳐 갔다.
'잡았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매끄럽고 탄력 넘치는 여체의 한 부분이 잡혔
다. 그것은 여인의 한쪽 다리였다. 그는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힘
껏 다리를 잡아 당기며 다른 한손으로는 여인의 젖가슴을 움켜 쥐
려고 덤볐다.
그 순간이었다. 그는 여인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뻗어 오는
것을 보았다. 여인의 손가락이 그의 눈을 찌르려고 뻗어 오는 것
이 아닌가?
그러나 전생은 그런 여인의 반항이 더욱 자극적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무공으로 단련된 몸이 아닌가?
한낱 힘 없는 여인의 손 쯤이야 그는 쉽게 무시해 버렸다. 푹! 하
고 무엇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물 속에서 피가 뭉클뭉클 번져 나
갔다. 이어 물보라를 일으키며 전생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
다.
"으아아아악......!"
그는 처절한 비명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단지 두 개의
구멍만이 뻥 뚫려 있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여인의 두 손가락이
그의 눈알을 파내 버린 것이었다.
그는 꿈에도 이런 결과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무엇
이 어찌된 것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 화끈거리는 눈을 가리며 그
는 비명을 내지른 것이었다.
그 순간 여인이 반대쪽에서 떠오르며 하얀 손바닥을 칼날처럼 세
우더니 입술을 깨물며 흔드는 것도 그는 보지 못했다.
퍼억!
하는 섬칫한 음향과 함께 그의 목이 어깨에서 분리되며 날아갔다.
그와 함께 자욱한 피보라가 삽시에 물을 붉게 물들이며 퍼져 나갔
다.
동백일호 전생은 동백일귀(桐柏一鬼)가 된 채 물 위에 둥둥 떠 올
랐다. 머리와 몸이 두 개로 분리된 채, 그는 흐르는 물을 따라 아
래 쪽으로 떠내려가 버렸다.
"흑흑....... 내가... 사람을 죽였어......."
여인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주
섬주섬 옷을 주워입고 있었으나 자꾸만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구주강호 10
한편,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던 유천기는 문득 물빛이 벌개지는 것
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잠시 후 하나의
공같은 물체가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수급이다!'
그는 사람의 머리통이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이어
머리와 애초에 하나였음직한 사내의 몸뚱이가 떠내려 왔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유천기는 아름다운 계곡에서 이런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 앞으로 끊어진 목과 시신이 떠내려 왔다. 그것은 하체만
간신히 가리고 있는 중년인의 시신이었다.
중년인의 얼굴에는 두 개의 눈구멍만 휑하니 뚫려 있었다. 안구가
통째로 뽑혀나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의 잘려진 면도 마치 칼로 자른 듯이 깨끗했다.
'실로 잔인한 솜씨로구나.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내심 의혹에 싸여 뇌까리던 그는 문득 아직도 백문지의 모습이 보
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백아우!"
유천기는 폭포수에서 백문지를 발견했다. 백문지는 멍하니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아우?"
그러나 백문지는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그는 입고 있는 옷이
거의 다 젖어 있었다. 유천기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런 이상
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급히 물었다.
"아우,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러나 백문지는 한참만에야 그를 향해 얼굴을 들며 말했다.
"아니요......."
웬지 그의 음성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안색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상한데, 아래 쪽에 목이 잘린 시체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백문지의 입술이 파랗게 질리는 가
하더니 맥없이 옆으로 픽 쓰러졌기 때문이다.
"아우!"
유천기는 깜짝 놀라 급히 그를 안았다. 백문지는 의식을 잃은 것
이었다. 그는 놀라 백문지를 바위 위에 편안히 눕히고 전신을 살
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상처도 찾아내지 못하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잠시 후 먼저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그는
백문지의 앞가슴 옷자락을 풀어헤쳤다. 추궁과혈(推宮過穴)로 기
(氣)를 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
옷자락을 끄르던 그는 흠칫했다. 앞가슴의 고름을 풀었으나 가슴
에 흰 천이 칭칭 동여매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더운 여름에 가슴을 이렇게 꽉 묶어 두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군.'
그는 피식 웃으며 그 천을 끌러냈다. 그런데 천이 끌러지자 그는
너무도 놀라 멍청해지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백제가 여인이었다니?'
그는 아연실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을 풀어내자 불쑥 튀어나
온 것은 한 쌍의 젖가슴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만지기만 해도 터
질 것처럼 풍만한 수밀도 두 개가 나타났던 것이다.
유천기는 그만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비로소 이제까지의 백문지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처
음 만났을 때부터 여인 같았던 모습하며, 여행하는 동안에도 줄곧
까다로움을 부렸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난 또 그것도 모르고.......'
유천기는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까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게만 느껴진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백문지의 옷을 여며 주었다. 물론 가슴을 동여매고
있던 천도 조심스럽게 다시 감싸 주었다. 다만 부드럽고 뭉클거리
는 젖가슴을 만지지 않기 위해 꽤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