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을 물리학에 접목시킨
덴마크의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1885~1962)는
양자이론을 접하고서도 놀라 자빠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양자이론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고, 자 도약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한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우리가 양자 역학의 세계를 관찰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물리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질문과
노력의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라 했고,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1918~1988)은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라고 말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정확한 이론으로 평가받도록
양자역학을 정립한 학자들이
마치 거대한 산을 마주한 것처럼
양자역학 앞에서 한계를 느끼는가?
이론이 설명할 수 없을만큼 복잡하기 때문도 아니요,
수학적 계산이 어려워서도 아니다.
전자, 광자, 쿼크, 뉴트리노, 뮤온 등등을
통털어 ‘양자Quantum’라고 하는데,
그것들의 움직임이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빛이 파동의 측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입자의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파동-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이라든지,
전자가 관측되기 전까지 확률적으로
존재 가능한 모든 위치에 동시에 존재하는데,
관측되는 순간 하나의 위치로 결정된다는
양자 중첩(Quantum superposition) 현상이라든지,
쌍으로 생성된 양자가 하나의 성질이 결정되면
떨어져 있는 나머지 하나도 성질이 결정된다는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현상이라든지,
한 궤도에 있던 전자가 사라져서 다른 궤도에
나타날 수 있다는 양자도약(quantum leap)이라든지,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일 수는 없는 세상에서,
그리고 여기 있으면서 저기에 있을 수 없는 인간 세상에서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과학자들은
양자 컴퓨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양자 컴퓨터는 초기 단계이지만,
앞으로 양자 컴퓨터가 제대로 일할 때엔
지금의 컴퓨터가 수백년이 걸려도 풀기 힘든 문제를
수십초에 내에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초미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양자역학을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유용하게 사용하는 인간이,
초거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오직 하나인 여호와’(신 6:4),
‘유일하신 하나님’(사 37:16; 요 5:44)
또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이라고 말한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과
성경에 나타난 세 하나님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를 고민하던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이
삼위일체(Trinity)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세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세 활약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오래전,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에 예수를 포함시킨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들은
예수를 다신 중의 하나가 되는 일을
거절한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두 다른 용기가 교회라는 용광로에서
성경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녹여 만든 용어가
삼위일체라는 용어이다.
인간은 아직 성경 하나님의 세 활약상을 이해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용어를 찾지 못했다.
신화에서는 신들의 역할과 영역이 나뉘어 있다.
신화의 특징은 역할 분담과 영역 분담이다.
브라흐마는 창조를, 비슈누는 유지를,
시바는 파괴를, 이런 식으로 세 신이 역할을 분담하거나,
제우스는 하늘을, 포세이돈은 바다를,
하이데스는 지하를, 이런 식으로 영역을 분담하면 신화다.
이런 형태의 삼신을 트라이무르티(trimurti)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Three Forms이니
우리 말로는 삼태신(三態神)이라 말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는 창조를, 아들은 구속을, 성령님은 교통을,
이런 식으로 역할 분담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모두 창조에 개입하시고, 모두 구속에 개입하시고,
모두 유지에 개입하신다.
그 하나님에 대해
성경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 하고,
인간은 그 모습을 ‘삼위 하나이신 하나님’,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모든 무슬림은
‘라 일라하 일랄라(La ilaha illallah)’를 외우는데
그 뜻은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뜻이다.
십계명의 첫 계명은
‘나 외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이다.
똑같은 유일신에 대하여
왜 회교도들은 삼위일체를 주장하지 않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를 주장할까?
무슬림이 삼위 하나님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 신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반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이룬 업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죽은 신이다.
그러나 성경 학도들은 삼위 하나님을 말한다.
그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역동적으로 활약하시기 때문이다.
그 활약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로 불리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분(요 5:26)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마 6:9)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실 때
여호와의 사자(창 16:7), 하나님의 사자(창 21:17)
또는 임마누엘(마 1:23)로 나타나셨다.
세 하나님 모두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지만
특히 인간의 영적 활동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은
성령님(요 14:16, 26)이다.
이 모습이 세 하나님의 일이냐,
한 하나님의 일이냐 하는 것은
삼차원 이상을 생각지 못하는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다.
삼차원 공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2천 년 전으로 날아가는 데 10분 정도가 걸린다면
자존하시는 분으로서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사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순간적으로 이동하신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고,
성령은 성자보다 지위가 낮다는
종속론(Subordination)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한다는 양태론(Modalism)도 있지만,
그 모두는 잘못된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세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는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 활약상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세분의 활약이 다른데도
삼태신(三態神)이라 말하지 않는 것은
이들 세분과 통하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불러 구하나,
아들을 불러 구하나,
성령님을 불러 구하나,
반응은 언제나 동일하다는 말이다.
자전거를 사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안 된다고 했는데,
어머니에게 말하자 어머니가 사주었다면
아들에겐 부모와 통하는 두 개의 통로가 있는 셈이다.
만일 아버지 하나님에게 구했는데 안 들어줘서
성령님에게 구하니까 성령님도 안 들어주었다.
그런데 예수님께구했더니 예수님이 들어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통하는
세 개의 통로를 가진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통하는
하나의 통로를 가진 백성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 분 하나님과
접속하기 위한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하나라는 말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약상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적 언어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잘된 용어인지 잘못된 용어인지 조차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인간을 위해 역동적으로 활약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삼차원 이상을 생각지 못하는 우리는
아직 그 이상 적합한 용어를 찾아내지 못했다.
무한차원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성경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고 말하면서
‘저희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라고 말하지만,
언젠가 그날이 오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고전 2:9)
못하는 곳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언어를 갖게 될 것이다.
불편하지만,
입자이면서 파동인 양자처럼
아버지도 되시고 아들도 되시는 하나님(사 9:6),
관측되는 순간 하나의 위치로 결정되는 양자중첩 현상처럼
하늘에 계신가 하면 땅에서도 활약하시는 하나님,
한 궤도에 있던 전자가 사라져서
다른 궤도에 나타날 수 있다는 양자도약 현상처럼
내주하시고 교통도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당분간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요 17:3)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용어이다.
영국의 철학자인 카를 포퍼(1902~1994) 교수는
‘진리는 그것이 틀렸다는 증거가 발견될 때까지만
진리’라고 했다.
셋이면서도 유일하신 이 모순된 언어는
하나님 나라에서 밝혀질 때까지
진리로 지켜야 할 신비이다.